예산, 헌종(憲宗) 태실묘(胎室墓)를 찾아서.....
언 제 : 2018년10월19일
누구와 : 나홀로
문화재 :
위 치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헌종 태실묘 찾아가는 길
헌종의 태실묘를 가기위해서는 예산으로 가야합니다.
예산으로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가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며 차창에 비친 풍경, 봄이면 만산이 푸릇하게 초록의 잎이 돋아나는 풍경을, 여름이면 산야에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가을이면 농부삼락 중 하나인 가을 풍성한 곡식을 수확하는 풍경을, 겨울이면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은 여유로운 세상의 풍경을 보노라면 2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다음지도로 보는 헌종 태실묘의 위치 및 산책로입니다.>
예산역이나 삽다리역에 내리면 덕산면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수시로 있는데 덕산면에서 약1.8km 떨어진 거리에 헌종 태실묘가 있습니다.
예산역이나 삽다리역에서 헌종 태실묘로 직접 가는 버스는 539번 버스가 1일2회(09시10분, 14시50분) 운행하며 524-1번 버스 1일2회(13시55분,17시15분)운행하는데 덕산에서 탈 수 있습니다.
덕산에서 헌종 태실묘까지는 1.8km로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시골풍경을 보며 걸어도 좋고, 바쁘다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이용해도 좋습니다. (041-332-7494,예산교통)
◎헌종태실묘의 지리적 풍수
우리선조들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명당을 중시여기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집이나 죽어서 묻히는 곳을 혈자리가 좋은 명당을 잡아 살거나 묻히고는 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왕실에서는 더욱 심했습니다.
왕실에서는 살고 죽어서만이 아닌 태어났을 때 아기집, 그러니까 태(胎)도 명당자리에 묻어 무병장수와 복을 비는 행사를 취했는데 태를 묻은 자리가 바로 태실입니다.
헌종의 태실이 있는 곳은 예산으로 예산에는 헌종태실 이외 궐곡리 숙종 왕자 태실, 대흥 동헌 뒤편에 영조 왕녀 태실, 신양 황계리에 현종태실 등 왕실의 태실이 4곳이 있을 정도로 좋은 땅이라고 합니다.


<훼손된 채 사방에 널려있던 난간석을 예산군에서
복원했으나 아직도 없어진 석물이 많은데 하루빨리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명당」에서 2대 천자지지가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는데 2대천자지지가 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원군의 묘로 흥선대원군이 포천에 있던 남원군의 묘를 2대천자지지라고 하는 이곳에 옮기므로 고종과 순종이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헌종태실묘에서 불과 3.5km거리에 있으며 금세기 최고의 풍수가였던 백운학의 묘도 남연군묘와 인접한 곳에 있는 것만 보아도 헌종 태실묘는 아마도 명당인 것은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헌종태실묘는 모산을 가야산 옥양봉으로 하고 있으며 주산을 서원산으로 두고 있습니다.


<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진 비석은 없어지고 외롭게 귀부만이 있습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뻗은 대간에서 속리산 천황봉에서 우측으로 한줄기 능선이 분기하니 한남금북정맥으로 이 산줄기는 안성 칠장산에 도달합니다.
한남금북정맥은 칠장산에서 김포로 이어지는 한남정맥과 칠장산에서 태안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으로 각각 분기합니다.
금북정맥은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을 지나 가야산 석문봉을 지나 옆으로 비껴 서산으로 지나는데 석문봉에서 0.9km떨어진 곳에 옥양봉이 솟아 있습니다.
옥양봉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능선은 저점을 찍고 서운산을 일으킨 후 부드럽게 남동으로 능선이 흐르다 마지막 낮은 봉우리를 일으킨 후 계곡에 와서 맥을 다합니다.
마지막 작은 봉우리가 헌종태실묘가 있는 명월봉이며 태실묘 아래 옥계저수지가 있는데 예전에는 없던 것인데 계곡을 막으며 계곡이 저수지가 되었습니다.
◎헌종은 누구이며 헌종은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헌종(憲宗)
헌종 이환은 1827년 음력7월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습니다.
헌종은 조선 제24대 왕으로 아버지는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 할아버지는 순조, 증조할아버지는 정조, 고조할아버지는 사도세자가 됩니다.
조선의 왕들을 보면 순탄하게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도 많아 보이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순탄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라가 망하는 건 뒷전이고 우선 자기에게 이익이 있는지 손해가 가는지, 아니면 자신의 몸보신을 위한 당리당략이 문제로 요즘 세금먹는 여의도 하마들을 보면 옛날의 정치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헌종의 할아버지 순조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힘을 전혀 쓰지 못한 채 이름만 왕이었습니다.
힘이 약한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대리청정을 맡기게 되는데 할아버지 정조의 왕권정치를 모방하며 안동김씨와 맞서 싸우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4년이 되던 해 갑자기 약물중독으로 죽게 되는데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안동김씨에 의해 독살 당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헌종의 어진입니다.>
세자가 죽자 순조는 세손을 정하는데 효명세자의 아들 환을 세손으로 책봉되게 되는데 그때 나이 4살입니다.
세손으로 책봉된 후 4년이 지나 순조가 죽으니 8살 어린나이의 환이 왕위를 이어 받게 되니 제24대왕 헌종으로 헌종은 조선왕 가운데 역대 최연소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조의 비는 순원왕후로 안동김씨의 김조순의 딸로 김조순은 순원왕후를 등에 업고(순조 때 안동김씨의 세상이 되었다,) 8살 헌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순원왕후가 대리청정을 하며 어명을 빙자하여 김조순과 함께 전권을 장악하고 탄탄대로를 달렸으니 누구도 감히 안동김씨 세력에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헌종의 부인은 안동김씨 김조근의 딸로 효현왕후이며, 어머니는 효명세자의 부인이 되는 신정왕후(조대비)로 조만영의 딸이었습니다.
순원왕후의 7년 수렴청정을 거친 후 헌종이 친정에 들어갔지만 나라가 어수선하고 안동김씨 세력이 강해 국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으며 치적은 별로 없으며 1849년 창덕궁 중희당에서 후사 없이 죽었습니다.
중희당은 지금은 헐리고 없는데 중희당이 있었던 자리는 창덕궁 후원을 들어가는 곳, 매표소가 있는 넓은 공터가 중희당 자리입니다.
◎헌종의 러브스토리
헌종이 죽은 중희당에서 가까운 곳에 낙선재가 있는데 낙선재는 헌종이 궁궐에 지은 왕의 사가로 낙선재에는 헌종의 재미있는 러브스토리가 있는 곳입니다.

<궁월의 왕의 사가인 낙선재로 낙선재의 주인은 헌종입니다.>

<낙선재를 후원에서 본 풍경입니다.>
헌종의 첫째부인 효헌왕후가 후사 없이 죽자 다시 중전을 맞게 됩니다.
옛날 궁중에서 왕비간택은 내명부에서 관장했으므로 왕이라도 선을 보고 왕비를 고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명가의 규수를 후보로 올리고 삼간택을 하여 비를 정하는데 재간택에 오른 후보를 최종 간택하는 자리에 헌종이 함께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내명부에서 법도에 어긋난다고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낙선재 장락문 현판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필 현판입니다.>
그러자 헌종은 중전을 맞지 않겠다고 생떼를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명부와 함께 선을 보게 되었는데 왕비로 간택된 여자는 홍재룡의 딸인 명헌왕후였습니다.
그러나 헌종이 삼간택 때 점찍어 놓은 여자가 있었는데 왕비에서 탈락하자 헌종은 새로 맞은 중전이 맘에 안 든다며 헌종이 미리 점찍은 여자를 중전으로 맞겠다고 다시 생떼를 씁니다.
난감해진 내명부가 중전은 정해진 대로 하고 점찍은 여자를 후궁으로 들인다는 조건을 붙여 일단락을 집니다.

<헌종이 경빈김씨에세 지어준 석복헌입니다.
헌종은 수시로 낙선재로 들어 옆 방 경빈 김씨와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석복헌을 후원에서 본 풍경입니다.>
헌종이 점찍었다는 여자는 경빈 김씨로 허구한 날 사랑을 나누려니 눈치가 보였는지 궁궐 한적한 곳에 왕의 사가를 짓고 옆에 작은 방 하나를 만들어 경빈 김씨를 기거하도록 합니다.
헌종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경빈 김씨와 허구한날 사랑을 나누었으니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마감했는데 궁중의 사가가 바로 낙선재이고, 경빈김씨가 거처하던 곳이 석복헌입니다.
◎헌종의 탄생이야기
헌종의 탄생이야기는 헌종의 어머니이자 익종(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의 언교와 권돈인의 행장에서 나타난다고 하는데 헌종은 1827년7월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습니다.
궁중에서는 호산청이라고 출산과 출산 후 물품을 조달하는 기구를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호산청일기에 의하면
「정해년 칠월 원손아기씨 삼일부터 삼칠일까지 필요한 물품목록」이라는 제목으로 산후 물품조달한 명부가 있습니다.
이 원손아기씨는 헌종으로 아래 사진에서와 같이 삼일에는 '사굴래, 면포겹저고리. 면포누비두롱이' 3종이 지급되었고 일칠일에는 11종이, 삼칠일에는 8종이, 백일에는 16종이 지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탄생전이라고도 부르는 창경궁 경춘전입니다. >
경춘전에서는 조선 제21대 정조와 제24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인 소혜왕후와 숙종비인 인현왕후 그리고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홍씨 현경왕후 등이 이곳에서 승하한 곳입니다.
탄생전 신정왕후의 꿈에 효명세자가 옥을 새긴 나무를 갑에 담아 주었으며 탄생일에는 한 무리의 학이 전각위로 날아올라 오래 돌다가 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하며 태어났을 때는 용의 눈동자에 서각처럼 고왔으며 목소리가 우렁찼다고 합니다.
정조의 탄생이야기와 같이 백일이 되기 전 일어섰다고 하는데 조숙했음을 뜻하는 듯합니다.
◎헌종태실의 가봉과 태봉도
헌종은 1827년7월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5개월이 되는 달인 11월11일 덕산 명일봉에 태실을 봉안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이 되면 원년에 태실을 정비하고, 귀부를 세우고, 비석을 세우는 등 왕의 권위에 맞게 태실을 개축하는데 이를 가봉이라고 합니다.


<헌종의 태실봉안과 가봉을 그림 사진으로 나타냈습니다.>
헌종은 태실은 헌종 원년인 1835년 논의가 있었지만 12년이 지난 1847년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정국이 혼란해서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실권이 없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헌종 태실묘 입구에는 태봉도가 그려진 안내판이 있는데 이 안내판에는 석물을 단장한 뒤 주변산세를 그려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과 안태사 이지연이 명월봉 태봉소에 가서 태를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헌종태실 가봉과 관련한 기록인 「헌종태실석난간조배의궤」에는 그림을 그림 화원으로 덕산출신 박기묵이 유일하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헌종 태봉도를 박기묵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합니다.

<태실묘 입구에 있는 안내판의 사진입니다.>

<액자 속의 태봉도 원본을 봅니다.>
태봉도 우측 상단에는 충청도덕산현명월봉자좌(忠靑道德山縣伽倻山明月峯子坐), 성상태실석물가봉도(聖上胎室石物加封圖)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헌종의 태실의 태항아리와 지석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서삼릉으로 옮겨졌고 이후 태실의 석물은 훼손되거나 사라진 채 방치되었습니다.
◎예산군의 헌종태실 복원
2018년1월15일 예산군청의 기사를 인용합니다.
「예산군 덕산면 옥계저수지 인근 가야산 자락에는 조선 제24대 왕 헌종의 태실이 있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방치되고 유실됐던 헌종의 태실 사방석(四方石)을 작년 7월에 수중탐사를 통해 찾아낸 것이다. 이는 지난 2015년에 헌종대왕 태실비 일부를 발견한지 2년 만이다. 발굴 인양된 사방석은 상석 위에 올라가는 석물로 중동석(中童石)을 받치기 위한 팔각형태의 석물이다. 크기는 110cm, 두께는 20cm이며, 측면에는 구름문양이 표현돼 있다. 지금의 예산은 조선시대에 덕산현이었는데 이 덕산현이 헌종 13년(1847년)에 덕산군으로 승격된 것도 태실 고장에 대한 예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태함(백자항아리)은 대부분 일제 때 도굴됐지만 남아 있는 태실 터를 통해 조선시대 풍수지리와 당시 미술 양식을 알 수 있는 문화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위 사진은 덕산저수지에서 사방석을 인양하는 사진입니다.>
하지만 헌종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왕실문화를 철저히 파괴시켰던 일제가 1927년 태 항아리를 경기도로 이장하면서부터 크게 훼손되고 망가졌다.일제는 이왕직(李王職,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왕족을 관리하던 직제)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1923년 전국에 봉안된 조선 왕가의 태실 54기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다.
서삼릉(西三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희릉 효릉 예릉의 삼능(三陵)을 말하는데 이렇게 이동하는 동안 태실 석물이 훼손 방치되거나 유실되었다. 심지어 어떤 것은 옥계리 인근 민가 앞마당에 버려져 있었고 비석은 저수지에 수몰되기에 이른다.
귀부석 위에 올려 졌던 헌종대왕태실비석은 1970년대에 사라졌다. 누군가 비석을 훔쳐가려다 무거워서 산아래 옥계저수지에 버리고 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다행히도 2015년 9월에 수중탐사를 통해 저수지 물속에 수몰되었던 비석 일부를 인양하였다.



<위 사진은 덕산저수지에서 인양한 사방석과 훼손된 태실비입니다.>
저수지 물속에서 50여년 만에 인양된 태실비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진 비석의 아랫부분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날에 이르던 중 지난 2009년 예산군에서는 귀중한 선조들의 역사적 유물을 더 이상 방치하거나 유실 상태로 둘 수가 없어 헌종태실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유실문화재를 찾아내기 위한 수중발굴로 결국 저수지 안에서 석물 일부를 찾아낸 것이다.
또한 중요한 태주석도 작년에 저수지에서 건져냈다. 그리고 헌종대왕 태실과 관련해서는 놀랍게도 태봉도가 존재한다. 태봉도는 국왕의 태를 묻은 태실의 모습과 그 주변의 형세를 그린 것으로 태실의 조성과 관련이 밀접한 그림인데 헌종 태봉도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존되어 있다.」
◎좋은 땅에 태실을 만들다
조선왕실에서는 태어난 아기씨의 태를 길지에 안장하고 태실을 만들었습니다.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태의 주인이 장수하고 지혜로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인데 태자나 원손의 태실은 길지 중에서도 1등지 태실을 만들었고 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면 가봉이라는 절차를 통해 석물을 추가로 설치하였습니다.
조선왕실 관상감에서는 명당의 태실터를 물색하기기 위해 전국 각지에 태실중고사를 보내 명당자리를 찾아 3등지로 목록을 만들었는데 원자와 원손은 1등, 대군과 공주는 2등, 왕자와 옹주는 3등으로 구분하였습니다.

태실도감은 세종대에서 처음 설치되었는데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아기씨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풍수에 뛰어난 대신을 태실중고사로 임명합니다.
태실중고사는 왕이 쉽게 볼 수 있도록 길지의 지형과 산세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태실산도를 그려 왕의 승낙을 받아 최종적으로 태실장소를 정하였는데 조선후기에는 관상감에서 태실도감을 대신하여 태실조성을 총괄하였습니다.
안태일이 정해지면 태항아리는 궤에 넣고 자물쇠로 잠근 뒤 안태일에 맞추어 안태사 행렬이 태실지로 가는 동안 의장과 취타대가 앞에서 이끌었습니다.
태실지를 닦을 때는 태실을 조성하는 것을 알리는 고사유제와 토지신에게 사실을 고하는 고토후제를 올립니다.
안태사 일행이 도착하면 태가 든 항아리와 태지석을 땅속에 묻은 석함에 넣고 뚜껑을 닫았습니다.
토지신에게 사토후제를 올리고 석함위에 사토를 한 후 표석을 세웠으며 태실조성이 끝나면 금표비를 세워 태실 주위에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을 금지시켰습니다.
◎세태의식의 절차
아기씨의 태는 소중히 다루었는데 아기씨가 태어나면 태와 태반을 백자항아리에 넣어 산실 내 길한 방향에 안치했다가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 태를 씻는 세태의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나 호산청일기에 의하면 왕의 명이나 승낙을 받아 3일이 아닌 7일에 세태를 한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세태의식은
1.태를 꺼내 미리 준비했던 물로 100번을 씻습니다.
씻은 물은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고 모았다가 월덕(月德) 방향에 버린다고 하는데 여기서 월덕이란, 해당월에 길한 방향을 말합니다.
2.향온주라는 술로 정성껏 씻습니다.
3.백자 내항아리에 넣은데 이때 동전을 정중앙 한가운데 글자가 바닥으로 가게 놓고 그 위에 태를 올려놓습니다.
4.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을 덮고 홍영자라고 불리는 홍색 끈으로 네 귀퉁이를 묵습니다.
5.내항아리를 산실 밖으로 보내면 산실의관 등이 내항아리를 받습니다.
6.산실의관 등이 준비했던 외항아리 밑에 솜을 깔고 그 위에 내항아리를 넣습니다.
7.내항아리와 외항아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항아리 사이와 입국가지 솜으로 메웁니다.
8.솜을 채운 태항아리는 뚜껑을 닫고 엿으로 항아리를 밀폐합니다.
9.밀폐된 항아리를 붉은 끈으로 위와 아래를 묶고 홍패를 답니다.
10.홍패 한 면에는 「0년0월0일 중궁전 탄생 원자아기씨」라고 쓰고 다른 한 면에는 항아리 밀봉에 참여한 제조와 의관이 서명합니다.
11.짐승의 털로 짠 담요인 모전으로 태항아리를 싼 다음 다른 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닫습니다.
12.홍색 끈으로 십자로 묶은 뒤 근봉(謹封)이라고 쓰는데 근봉은 ‘삼가 봉한다, 라는 뜻입니다.
13.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녀는 근봉한 항아리를 받아 태봉이 정해질 때까지 길한 방향에 안치합니다.
태항아리의 봉안은 태항아리를 묻는 것을 말합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기사에는 태항아리의 봉안은 왕녀는 3개월, 왕자는 5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왕녀는 3개월째 되는 달, 왕자는 5개월째 되는 달 길일을 잡아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봉안을 할 때는 안태사 이하 종사관을 포함하여 6명의 감독관을 두었으며 100여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고 하며 태실에 봉안한 후에는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태주인의 복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서삼릉에 옮겨진 54기 태실의 사연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에는 54위가 태실이 있습니다.
54위 중 왕의 태실이 22위, 공주나 왕자의 태실이 32위로 전국 각지 명당에 있는 태실이 이곳으로 옮겨졌는데 경상도북도16곳, 충청남도12곳, 충청북도, 경기도, 강원도 각각5곳. 전라북도2곳, 경상남도2곳, 황해도1곳, 창덕궁 후원4곳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창덕궁 후원입니다.
창덕궁 후원에 명당이 그렇게 많아서일까요?
이유는 이러합니다.
지방에 태실을 봉하면 그 지방에서 태실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 소요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고 관리를 위해 지역 주민이 동원되었으므로 민폐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영조가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궐내 깨끗한 곳에 장태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궐내에 간소하게 태실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삼릉에 있는 태실은 옮긴 날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대부분 인위적으로 지워 알 수가 없는데 후궁의 비석은 미처 지우지 못한 것이 있는데 소화, 명치 등 일본의 연호가 있어 일제강점기에 옮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9년3월 동아일보 기사에는「조선왕실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겼다.」라는 짤막한 기사와 이왕직의 주관하에 39위의 태실을 종로구 내수동 임시보관소에 두었다가 추위가 물러가면 서삼릉으로 이전한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이왕직이란 일제가 조선왕실을 관리하던 부서로 「이왕직 전사 출장복명서」에는 1930년4월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에 걸쳐 서삼릉 경내에 49위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화려했던 태실은 난간석은 없고 간편한 모습으로 서삼릉 비공개지역에 있습니다.>
이왕직
앞서 논한 것과 같이 일본의 허수아비로 조선왕실을 다스리던 기관이었는데 이왕직을 다스렸던 한 사람이 이완용의 둘째아들 이항구란 사실입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부를 챙긴 이완용과 이항구, 이항구의 아들 이병희.....
대를 이어서 현재까지도 거부실록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이 잘사는 세상이 진정한 법의 세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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