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南延君) 묘(墓) 답사기
언 제 : 2013년1월29일
누구와 : 나홀로
문화재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위 치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를 찾은 건 오래전입니다.
당시 가야산과 덕숭산을 연계산행하기 위해 스터디를 하면서 남연군 묘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행기를 쓰면서 간략하게 남연군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번 서원산~가야산 옥양봉~가야산 수정봉을 산행하며 산릉에서 남연군 묘를 바라 보았습니다.
남연군묘에 대한 글은 오래전에 섰는데 2018년 영화 명당이 나온 이후 리메이크한 것입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명당」에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천자2지지(二代天子之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부분 역사왜곡으로 역사를 모르고 영화만 본 사람들의 오신을 바로잡는 축면에서 글을 써봅니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노선은 고속버스도 있으나 기차로 접근하는 게 제일 용이합니다.
서울 용산역에서 05:35↔07:26, 06:21↔08:11, 07:27↔09:17, 08:36↔10:14에 출발하는 장항선 기차를 탑승한 후, 예산역에 내립니다.
예산역 버스정류장에서 남연군 묘를 가는 버스는 539번입니다.
예산터미널에서 1일5회(09:50, 14:25, 15:35, 17:20, 19:10) 운행하는데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15분 후 예산역을 경유하므로 역에서 버스시간에 맞추어 기다려야 합니다.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05:35(삽교역 도착 07:34), 06:21(삽교역 도착 08:18) 기차는 삽교역까지 가므로 삽교역에서 내려서 군내버스로 덕산으로 이동해도 좋습니다.
덕산면에서 남연군묘까지는 약5.2km로 걸어서 이동하기는 먼 편으로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좋으며 덕산면에는 택시가 아주 많습니다.

<이 사진은 예산역으로 2012년1월에 찍은 것입니다.>

<삽교역이며 흰색 차량 뒷쪽이 버스정류장입니다.>
◎영화 「명당」의 주요 역사왜곡
개봉한 지 한달된 영화로 주인공은, 지관 박재상을 조승우가 맡았고, 조선 세도정치의 주인공인 김조순역은 백윤식이 맡았으며, 흥선대원군역은 지성이,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 역은 박성균이, 그리고 지관 정만인역에 박충선이 맡았습니다.
늘 역사 영화가 나오면 걱정되는 게 있으니 역사왜곡입니다.
KBS2TV에서 방영했던 무사 백동수에서는 영조에게 뒤지 안에서 죽음을 맞게 된 사도세자를 중국 무사와 나라를 지키려 싸우다 죽자 뒤지에 넣은 것으로 각색하였는데 아무리 재미있게 만들려 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왜곡입니다.

<덕산정류장입니다.>

<덕산정류장에서 남연군 묘를 다음지도로 옮겼습니다.>
명당에서는 김좌근의 아들 이병기가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는 점,
김좌근은 한명회와 더불어 조선시대 권력을 가졌던 사람으로 영의정을 3번씩이나 하며 장수하였는데 아들 김병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아들 김병기도 아버지에 의해 권세가 대단했으며 흥선군과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고종이 왕위에 등극한 후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흥선 대원군이 다시 불러 국사를 맡긴 것으로 보아도 가까웠던 사이로 보여 집니다.
흥선 대원군이 낮에는 양반네 잔치에 개처럼 다니지만 밤이면 회평군과 궁궐에 들어가 헌종과 국사를 상의 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도 왜곡입니다.

회평군은 철종의 이복형으로 흥선 대원군과의 관계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건 헌종10년 민진용이 회령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회령군과 이에 가담한 모든 사람이 처형되었습니다.
김좌근이 헌종에게 반말을 지껄이며 머리를 쪼아리게 했다고 하는 점은 아무리 왕권이 땅위에 떨어졌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흥선 대원군이 정만인을 협박해 2대 천자지지를 알았다는 점 등 열거한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고 역사를 왜곡한 허구입니다.
흥선군이 정만인을 협박한 것이 아니라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이하응이 친히 명당자리를 부탁한 것입니다.
김좌근과 이하응의 관계는 양부처럼 김좌근에게 용돈도 받아쓰며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며 귀찮았지만 왕손이라 해서 절박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하며 아들 이병기와의 관계는 멀쩡한 이하응이 거짓행세를 하는 것을 의심했다고 하며 관계가 나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종이 왕이 된 후 이병기가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정승으로 부임한 것을 보면 좋았던 관계로 보입니다.
다시 논하지만 김좌근은 아들 이병기에게 죽은 것이 아니며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영의정으로 있다가 고종이 왕이 된 후 물러났으니 건강하게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좌근의 조상 묘를 왕릉 위에 매장했다는 말도 안 되는 코메디 같은 일로 역사를 심하게 왜곡하고 있으며 헌종에게도 반말을 지껄이며 혼내줬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로 큰 역사왜곡입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역사 선생님이 가르치는 우리의 역사는 공부도 안하고 알지도 못하지만 영화에서 나오는 스토리는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며 줄거리를 너도나도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실정이면서 역사왜곡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입니다.
어린나이에 왕이 된 순조는 안동김씨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했고 정치가 신물이 나자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게 됩니다.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의 왕권정치를 모티브로 안동김씨의 세력을 무력화 시키고 왕권정치를 복원하기위해 힘쓰던 중, 원인 모를 죽임을 맞게 되는데 훗날 사람들은 안동김씨에 의해 독살 당했다고 말합니다.
흥선 대원군과 정만인은 알고 지내던 사이로 명당을 봐달라고 청하자 정만인이 몇 달을 돌아다니다 명당자리 2곳을 봐왔는데 그중 한곳이 2대 천자지지로 현재 상가리 가야산 아래 가야사가 있던 절의 탑자리였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건 역사가 아니라 전하는 이야기로 이하응은 연천에 있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아들 고종과 손자 순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2대 천자가나면 쇄하며 망국이 된다는 건 역사에는 없는 지어낸 말장난입니다.
◎남연군은 누구인가?
남연군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부친 이구(李球)로 원래 이름은 이채중(李采重)으로 인조의 삼남 인평대군의 6대손입니다.
순조 15년(1815년), 28살이던 해에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며 남연군에 봉해졌고 이름을 구(球)로 고쳤다고 합니다.

양자 입적으로 추사 김정희와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족보상 이종사촌이 된 이구는 인현왕후 후손 되는 민경혁의 딸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둡니다.
이중 장남과 차남은 일찍 죽고 3남은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이고 막내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인데 남연군은 이하응의 재능이 알아차리고 김정희 문하로 보내서 글과 그림을 배우도록 했다고 합니다.
남연군은 정치적으로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조용하고 무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은신군의 양자가 된 뒤에도 자신의 본가 근처에서 수원관에 근무하던 시절 능참봉의 인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적은 있습니다.

1828년(순조 28년) 회강을 평정한 청나라에 축하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런 일에는 원래 정승급 인물을 단장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남연군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남연군이 왕손이라고 해서 정승급 얼굴마담 자격으로 조정에서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한 직업을 기지지 않고 조영히 살던 남연군 이구는 47세의 나이로 1836년 한양에서 죽어 경기도 연천군에 장사했다가 뒷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의 현 위치로 이장했습니다.
◎2대 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의 이야기
남연군은 1836년 48세로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연천땅 남송정에 묻혔습니다.
10년이 지나 남연군의 넷째아들인 이하응이 당대 최고의 지관인 합천출신의 정만인이라는 사람에게 명당자리를 부탁했는데 이에 정만인은 여러 날을 전국으로 돌며 알아보고 이하응과 마주합니다.

“2곳의 명당이 있는데
한 곳은
덕산 땅 상왕산 동쪽에 2대에 거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또 다른 한 곳은
광천땅 오서산에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전합니다.
이에 이하응은 안동김씨 세력에 밀려 절치부심하며 지냈던 옛일을 떠 올리며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덕산 땅 2대에 거쳐 왕이 날 자리를 원합니다.
후일 이하응은 아버지를 덕산 땅으로 이장하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관위에 석회석으로 돌보다 더 단단하게 덮은 후에 봉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나 아들을 낳았고, 그가 12살 되던 해 철종이 후사 없이 죽으므로 이하응은 효명세자(추존왕 익종) 비인 조대비에게 접근해 안동김씨를 타도하는데 합의를 보고 자기의 아들 명복이를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킵니다.
이리하여 정조의 증손, 순조의 손자가 된 명복이 대통을 잇게 하였는데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에서도 별볼일 없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이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하응 정도면 주무르기 식은 죽 마시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명복이가 왕위에 오르니 고종으로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황제입니다.
◎남연군묘소와 이하응의 가야사 방화사건
1845년 풍수지리의 신봉자인 이하응이 충청도 덕산땅 가야골에 2대의 왕기가 서린 명당자리가 있다는 풍수가 정만인의 말을 듣고 정만인과 가야골을 방문합니다.
정만인이 명당으로 점 찍은 자리는 천년 고찰인 가야사였는데 가야사 대웅전 앞 석탑이 있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흥선군은 충청관찰사에게 뇌물을 주고 가야사를 폐절 시킨 후 마곡사 승을 불러 불을 지르라 강요하여 가야사를 소각시켰다고 합니다.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가야사를 방화한 승려가 사동리고개를 채 넘지 못하고 불길이 충천하는 가야사를 쳐다보다가 돌연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불이야! 불이야!”소리를 지르다가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사망했다 전하는데 1950년 당시 90여세 노인들의 증언이라 합니다.
가야사의 대웅전 철불이 불에 녹자 민망하였던지 이하응이 인부들로 하여금 대문동 길옆 미륵불 아래 묻었는데, 수년 후 봉산면 봉명리에서 무쇠를 녹여 가마솥을 만드는 일을 하는 판자부리 인부들이 캐내어 가마솥을 만들었으나 하루가 지나자 그 가마솥은 가루가 되어 버렸다합니다.
탑을 부술 때 뇌성병력과 함께 소나기가 무섭게 퍼붓자 인부들이 무서워하며 슬금슬금 물러서기에 흥선군이 직접 도끼를 들고 “이 나라 이 땅은 모두 이씨의 땅이고 이씨의 나라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이씨의 것이거늘 탑신 너 어찌 방해를 하는가? 썩 물러서라.”하며 도끼로 탑을 내리치자 이로부터 탑이 부서지기 시작하였다 합니다.

황매천의 야록에 의하면 탑이 부서지자 그 속에서 백자그릇 두개와 단차 두 덩어리 또 사리 3개가 나왔는데 그 구슬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하였고 맑은 물에 담겨 있었으며 푸른 기운이 영롱하였다고 하며 흥선군은 탑을 부숴버린 후 경기도 연천에 있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금탑이 서 있는 자리로 옮겨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남연군의 유해는 연천에서 이곳까지 상여로 운구하였는데 남연군의 상여가 지나는 지방의 동리사람들은 왕손이 자기네 동네를 지나니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기네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서로 다퉈 상여를 메어 운구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남연군의 상여는 이렇게 동리마다 사람들이 릴레이식으로 운구하여 덕산까지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종 마지막으로 남연군의 유해를 운구한 사람들은 현재의 덕산면 광천리 사람들로 선소리 구성지게 때로는 애처롭게 요령소리에 발 맞춰가며 행여라도 고인께서 편치 않으실 세라 조심조심 정성을 다 하여서 운구를 마쳤다고 합니다.

이에 흡족했던 흥선군은 이 상여를 마지막 주자인 광천리 사람들에게 포상으로 기증했는데 그 뒤 광천리 사람들은 죽으면 왕손이 처음으로 탔던 영광스러운 그 상여를 타고 마지막 이승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광천리 사람들이 백 여 년 이상을 사용한 그 상여는 현재 역사적 가치가 있다 하여 지방정부에서 지방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하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덕산면 광천리 도로변에 보기 좋게 상여막을 지어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연군 묘에 서다.


<남연군묘를 찾았을 때는
남연군묘에 얽힌 가야사 유적발굴을 위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날씨가 추워 일시 발굴 작업을 중지한 상태 같았습니다.>

남연군묘는 밑에서 보니 흡사 왕릉같아 보이나 막상 묘역으로 올라서서 보면 검소하게 가꾼 묘입니다.
왕릉의 능침은 계체석을 3단으로 배열하고 곡장을 두르는 반면 남연군 묘는 2단으로 만들고 곡장은 두르지 않았습니다.
왕릉은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하고 병풍석이나 난간석에 갖가지 문양을 새겨 넣는 반면 남연군 묘는 난간석은 두르지 않았으며 병풍석은 문양을 새기지 않은 일반 대리석으로 둘렀다는 점입니다.
왕릉은 능침 주위에 상서롭지 못한 기운을 막는다는 의미로 석양과 석호를 2쌍씩 배치하는 반면 남연군 묘에는 석로는 두지 않고 석양을 좌우로 각각 두었습니다.
봉분 앞에는 상석으로 불리는 혼유석을 두었으며 혼유석 양쪽으로 망주석을 세웠는데 혼유석과 망주석은 일반적인 묘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석물입니다.
어릴 때 시양을 올릴 때를 소환해보면 상석(혼유석)에 음식물을 차리고 제를 올리므로 제상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며, 혼유석은 묘지에 있는 혼백이 나와서 노는 돌입니다.


또한 망주석은 망자의 혼백이 외출했다가 자기 묘역을 찾아오는 표식으로 문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인데 망주석을 자세히 보면 세호(細虎)라는 동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세호란 가느다란 호랑이라는 뜻으로 마치 다람쥐 같은데 왼쪽 망주석에는 세호가 위로 올라가는 형상을, 오른쪽 망주석에는 세호가 아래로 내려가는 형상을 새겼습니다.
일설에는 혼령이 세호를 타고 세상구경을 나가는데 위로 오르는 것은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를,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묘소로 귀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럴듯한 얘기이기는 하나 근거는 없는 말입니다.
국조상례보존 도설치장 조에 이르기를 망주석에는 주신 안쪽 상단에 세호를 새겼는데 왕릉 왼쪽 망주석에는 머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의 세호를 새기고 오른쪽 망주석에는 땅으로 향하여 내려오는 모양으로 세호를 새긴다고 정해져 있습니다.

필자는 이곳에서 장명등과 망주석을 눈여겨보았는데 장명등에 새긴 난초와 국화문양이 특별했으며 또한 장명들과 망주석에 핀 바위 꽃이 오랜 세월 굿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병풍석은 문양을 새기지 않은 일반 대리석이었고, 석양은 있으니 석호는 두지 않았으며, 권세가 있는 사람들 묘역에서 볼 수 있는 문인석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분봉이 있는 곳으로 올라서 묘를 보니 천하의 명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원스러웠으며 좌우로 포근하게 능선이 감싸고 있으니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주산으로 삼았다는 가야산 석문봉이 든든하게 지켜주는 듯합니다.

<봉분 뒤가 석문봉이고 망주석 뒤가 가야산 정상입니다.>


<봉분을 두른 병풍석에는 문양이 없는 일반 대리석을 사용했습니다.>
묘지 뒤는 옥양봉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좌측과 우측의 능선이 청룡과 백호의 흐름이 명당에 손색이 없었으며 묘지 양쪽에 세운 망주석에는 왼쪽(남쪽) 망주석에는 올라가는 세호가 오른쪽(북쪽) 망주석에는 내려오는 세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장명등에서는 난초와 국화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묘 가운데 석등인 장명등이 있고 그 뒤 옆 양쪽으로 석양이 있으며 묘지 가운데는 대형 혼유석이 놓였습니다.
묘지 분봉을 둘러친 병풍석은 12지의 문양이 없는 일반 돌에 불과했으며 묘지 뒤로 담장은 두르지 않았는데 특이한 점은 당상관 묘에도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없었는데 당시의 실세였던 이하응이 자기 부친의 묘를 이렇게 가꾸었다는 것은 의외로 예상보다 검소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분 앞에는 바위가 있을 보면 가야사 대웅전 앞자리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눈여겨 볼 것은 망주석과 장명등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갖가지 돌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군자인 매화, 난, 국화, 대나무로 이루어진 사군자인데 살아서 사군자를 좋아했던 이하응의 내면을 아버지 묘역에까지 남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연군 묘지에서 내려다 본 가야사지 발굴현장의 모습입니다.>
이곳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의 선견지명이 담겨 있는 곳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연천에 있던 아버지 묘를 이곳 예산으로 이장하며 석회를 두껍게 입혀 차후 도굴에 대비했는데 이건 흥선대원군의 신의 한수였습니다.
독일인 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고 남연군 묘를 도굴하다가 너무나 단단하게 만들어 포기한 사건인데 야만적인 이 놈들은 남연군 묘를 파헤쳐 부장품과 남연군 시체를 가지고 흥선 대원군을 협박해 통상와교를 할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실패했고 이 사건으로 미국인 젠킨스는 고발당했고, 프랑스 신부 페롱은 소환당했다고 합니다.
◎육관도사 손석우의 묘도 이곳으로
과연 상가리가 명당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당인가 봅니다.
손석우는 왕비가 날 자리라하여 망우리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 할아버지의 묘를 용인 금박산 정상에 이장하라고 하여 이장을 하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선 전 손석우가 시키는 대로 하이도에 있던 부모의 묘를 용인 묘봉리로 옮겨 대통령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러한 손석우가 자신이 묻힐 최고의 명당을 가야산 석문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옥양폭포 근처로 남연군묘에서 약1km로 떨어진 곳입니다.

<육관도사 손석우의 묘로 아주 가까이에 있으며 묘를 일반 묘와 같습니다.>
손석우는 이 자리를 잡고 그의 아들에게 묻힐 이유를 설명했다고 합니다.
"묘지 앞에는 못이 있는 이곳은 북두칠성의 기운을 한 몸에 받는 곳으로 북두칠성에서 천사가 내려와 이 못에서 목욕재계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이 못에는 용들이 살고 위로는 병풍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남성의 힘찬 심벌과 같이 생겼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어서 명당에 가면 무엇입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죽어 명당보다 거지로 살아도 이승이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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