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출신 한국최초 서양의사, 박서양
<아래 만화는 문화재청에서
발행하는 월간문화재사랑 2015.12월호에
실린 만화로 모든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최초의 서양의사에 대해 관심도 없었는데 이글을 쓰면서 KBS 파노라마 백정 아버지와 서양 의사라는 다큐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직업에 귀천이 없음이 오래전 백정출신 박성춘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박성춘, 박서양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합니다.>


종로구 관철동 이면도로는 예전에 관자골이라고 하여 이곳에는 천한 백정들이 모여 사는 백정마을이었다.
1887년, 관자골에서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이름 없던 백정 박가가 아들을 출산하니 아명은 봉출이었다.
계급사회가 형성되었던 조선에서는 아버지가 천민이면 아들도 천민으로 그 굴레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던 시기로 이름 없던 백정 박가가 박성춘으로, 백정의 아들 봉출이가 박서양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다시 태어난 박성춘은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고 결국에는 노예해방과 같은 큰 기적을 만들어 냈으니 박해받던 천민이 일반 양반들과 동등한 지위의 백성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백정 아들 봉출이는 박서양으로 거듭니며 한국 최초로 서양의사가 되는 기적 같은 일을 만드는데, 박서양이 의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포맨 무어와 캐나다 출신의료 선교사 올리버 R. 에이비슨의 헌신이 있었던 덕분이다.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에 보관된 제중원 연례보고서에 박씨 부자에 대한 기록을 보면 박서양이 백정의 아들로 제중원 의과대학생이었으며 백정의 아들 박서양은 제1회 제중원 졸업생 7명 중 한 명이라고 되어 있다.
현재 을지로 1가 일대는 곤당골, 또는 고운담골이라고 불렸는데 고운 담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1883년 서양에서 온 선교사 사무엘 포맨 무어가 이곳 곤당골에 학당을 세우고 무료로 어린이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났는데 이곳에서는 고아나 천민,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천민 중 천민이었던 백정 박가는 아들은 이곳에 보내 글을 배우도록 입학을 시켰다.
이때가 조선의 주도권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하였던 전쟁말기로 전국적으로 콜레라의 창궐로 1일 300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치료법도 없어 무당들이 굿을 하고, 고양이 부적을 대문에 붙여 귀신을 오지 못하게 하거나 쫓아내고는 했다.
그 무렵 백정 박가도 콜레라에 걸려 죽게 될 지경이었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백정의 아들 봉출이는 자기를 거두어 공부를 가르치는 사무엘에게 찾아가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한다.
사무엘 포맨 무어는 봉출이의 간절한 애원에 고종의 주치의로 있었던 캐나다 출신의 서양의사 올리버 알 에비슨에게 부탁해 죽을 운명에 처한 백정 박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 제중원 원장인 에비슨이 헌신적으로 백정마을인 관자골을 여러 차례 오가며 백정 박가를 살려낸다.



올리버 알 에비슨은 한극에서 42년 의료선교를 하며 연세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당시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미국 장로교 역사자료관에 에비슨과 무어 선교사가 편지형식으로 보낸 자료에는 백정 박가가 교인으로 등록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895년 봄, 백정 박가는 세례를 받고 봄을 맞아 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박성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봉출이는 상서로운 태양이 되라는 뜻의 박서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1895년 6월, 조선에서 콜레라가 만연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올리버 R. 에이비슨을 방역 책임자로 임명했고, 에이비슨의 노력 끝에 콜레라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에비슨은 조선에 서양식 병원을 허가해주니 곧 제중원(濟衆院)으로 제중원은 사람을 구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한 무어목사가 이끌어가던 교회는 종로2가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중간 승동교회였다.
박성춘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를 다니자 이곳 교회를 다니던 양반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교회를 나오지 않는 시련을 겪게 된다.


1894년 박성춘은 천민과 양반의 차별을 혁파하고 백정이나 광대들의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당시 내무대신 유길준에게 제출한다.
“우리는 언제나 충성스럽게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잘 순종하고 모든 일에 아무 보수 없이 성심껏 일 해왔습니다.
우리는 천대받는 일곱 천민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사람으로 천대받아 왔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이런 고통이 있겠으며 우리가 당하는 천대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다른 곳으로 도망쳐 남들과 같이 고개를 들고 살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박씨는 자신의 경험담에서 나온 일들을 탄원서에 기재했다.
그러자 조정에서 박성춘이 올린 민원에 대해 회답이 왔다.


「각도(各道)에 훈령하기를 갑오경장 이후로 백성을 면천하였으니 어찌 평민과 차별이 있겠으며 하물며 장사하는 업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모두 똑 같다.」
1896년9월 백정들에게도 갓과 망건을 쓰고 도포를 입는 것이 허용되며 호적에 올릴 수 있게 되므로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즈음 박성천은 무어 목사와 함께 전국 백정마을 찾아다니며 평등사상을 전하는 일에 몰두했고 박성철의 노력으로 뜻을 같이하는 백정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한다.


1898년 종로 보신각 인근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만민공동회에는 무려 1만명이 모였는데 당시의 한성의 인구가 25만명이라고 하니 만민공동회에 모인 인원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원이었다.
박성춘은 권세있고 내놓으라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만민공동회에서 개막연설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계급사회에 대한 불신을 씻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발언한 내용이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는데 당시 박성춘의 권위가 대단했던 것 같다.
박성춘은 박서양을 결혼시킨다.
그리고 박성춘은 에비슨을 찾아가 어려운 부탁을 하니 박서양을 제중원에 데려가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에비슨이 어렵게 결정하고 박서양을 제중원에 받아들인다.


그러나 에비슨은 박서양의 인간 됨됨이를 알기위해 병원 허드렛일을 시켰는데 불평이 없고 성실했으므로 의사가 되는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의학서적을 잃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에이비슨은 백정도 의사가 될 수 있도록 고종에게 청원하였고 고종이 승낙하였고 1900년 박서양에 제중원에 들어온 지 2년 여 만에 제중원 의학과에 정식으로 입학한다.


서울 재동 현재 헌법재판소 인근에 있던 제중원은 남대문 근처로 이주한다.
1904년9월 제중원은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의 기부를 받아 헌법재판소 인근에 있던 제중원을 남대문 근처로 옮기며 세브란스 병원으로 재탄생 했고 의학생들은 새로운 병원에서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실습을 경험한다.


1908년6월3일, 제1회 제중원 졸업식이 열렸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봉출이가 우리나라 최초 서양의사가 된 것이다.
의학교 시절의 동기로서는 음악가 홍난파의 형인 홍석후, 김필순, 신창희, 주현칙, 김희영, 홍종은 등이 있다.
이후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현재로 치면 연세대학교 간호학과인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에서 교수로도 활동했다.




세브란스병원 교수로 일하며 학생들에게 화학과 해부학을 가르쳤다.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은 후에 의사가 된 아들을 위해 형평운동에 나서는 등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으며 1911년12월에는 세례를 받은 지 21년이 지나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 장로가 된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제국주의는 교사들은 제복을 입고 수업을 해야했고, 일본어를 국어로 배워야 했다.
우리말 교과서나 의학서적은 모두 불태워 버렸고, 한국의사는 일본 의사의 보조가 되었다.
백성들은 삶이 어렵고 힘들어지기 민초들은 하나 둘 나라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 박서양도 만주 용정으로 이주를 했는데 당시 연변에는 조선인 15만명, 일본인 1400명이 거주했는데 박서양은 연변 중심가 국자거리에 병원을 개업하는데 세상을 구한다는 뜻으로 구세병원이라 했다.


연간 10.000여명을 치료했는데 대부분 가난했던 사람들이므로 약1/3 정도 무료로 진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박서양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하며 한편으로 독립운동을 한다.
1930년에는 숭신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벌이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자 일본경찰은 만세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1932년6월 숭신학교를 강제 폐교 조치한다.



박서양은 독립운동에 군의관으로 적극 가담한다.
위대한 아버지가 있었기에 한국 최초로 서양의사가 된 박서양이 있었다.
박서양은 당시 은평면 수색에서 52세로 죽었으며 사후에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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