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재이야기

수원화성 한 바퀴 돌아보기.(2편)

범솥말 2025. 11. 20. 12:05

정조임금의 혼이 서린 수원화성을 가다

 

산행일시: 20251008

누구와: 나 홀로

트레킹거리: 6.22

트레킹시간: 2시간 15(13:45~16:00)

트레킹코스:창용문들머리(13:45)-연무대(동장대,13:55)-동북각루(방화수류정,14:08)-화홍문(북수문,14:15)-장안문(14:25)-화서문(14:45)-팔달산서장대(15:02)-팔달문(15:28)-남수문(15:36)-봉돈(봉화대,15:47)-창용문 날머리(16:00)

 

수원신도시(화성) 프로젝트

수원고을이 본래 있던 곳은 지금의 융건릉 앞으로, 융건릉이 있는 화산을 주산으로 오래전부터 수원이라는 작은 고을이 있었는데 당시 인구가 약1500명 정도였던 고을입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휘경동 삼육병원 자리에서 화산으로 옮기며 수원고을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니 이것이 수원신도시인 지금의 화성입니다.

사도세자의 묫자리는 이전에 효종의 장지로 낙점되었던 곳인데 수원고을이 가까이에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동구릉으로 모셨다가 나중에 여주로 천장하였습니다.

수원 조성지를 팔달산 아래 벌판으로 정하고 이주를 하였고 이후 4년이 지나서 성을 쌓고 수원이 아닌 화성으로 바꾸었습니다.

새로운 고을인 화성은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곳으로 국가에서 많은 지원을 하여 상인들을 정착시켰고 1500명 이었던 작은 고을이 8,000명이 거주하는 큰 고을로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화성이 다시 수원이라는 옛 도시이름을 찾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며 수원은 경기도청을 지닌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팔달산 서장대에서 팔달문 구간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군사지휘소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수원화성에는 창룡문 인근의 연무대로 불리는 동장대와 이곳 서장대 2곳을 두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의 제일 높은 곳이며 이곳 서장대 아래 행궁이 위치하므로 행궁을 경계하고 사수하는 역할과 병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사방이 통달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숲도 없거니와 숲이 우거졌다고 해도 경계를 위해 대부분 베어 냈을 것으로 사방을 훤하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원화성 의궤에서 서장대에서 사방 조망을 이렇게 글로 표현했습니다.

서장대는 팔달산 산마루에 있는데 위에 올라가서 보면 팔방으로 모두 통한다, 석성산의 봉화와 황교의 물이 한눈에 들어오고, 한 성의 완급과 사벽의 허실은 마치 손바닥 위를 가르키는 듯하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층각을 세웠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지금도 서장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으로 동북쪽으로 수원의 진산인 광교산이 우뚝하고 광교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가면 군부대가 있는 백운산이 있고, 백운산에서 좌측으로 모락산의 쌍봉이 보이고 모락산 뒤로 서울의 관악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서장대 정면으로는 아래 행궁이 있고 수원시가지 너머로 멀리 용인자연농원이 있는 향수산과 우측으로 석성산이 높게 보입니다.

예전에는 장대로서 사방을 관찰하며 군사를 지휘했던 팔달산은 현재 수원시민들의 전망 명소가 되고 휴식처로서 이용하고 있으며 매년 11일이 되면 이곳에 올라 해돋이를 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장대를 오른 것이 이번이 2번째로 처음 이곳을 올랐을 때는 새벽으로 아침공기를 마시며 올랐다가 향수산과 석성산 사이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벅찬 기쁨을 누렸습니다.

서장대는 장대석으로 4단을 쌓은 곳에 그 위에 다시 2단의 장대석을 쌓고 건물을 세웠는데 건물은 2층으로 날렵한 팔작지붕에 곡선미가 뛰어난 처마를 두었으며 정조임금의 어필인 華城將臺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1층 중앙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는데 2층은 통제구역으로 창문이 있고, 1층은 창이 없는 피로티 형태의 개방형 정자형태입니다.

1층 곳곳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자유분방하게 쉬고 있으며 1층 천장부위에는 정조임금 어필 시판이 달려 있습니다.

서장대를 완성한 후 약6개월 정도가 지난 1795년 윤212일 정조임금은 아버지인 사도세장의 묘(융릉)를 참배하고 이곳 서장대에서 군사들을 직접 지휘하고 시를 지어 문 위에 걸게 하였는데 시판은 본래 2층에 걸려있던 것을 현재 1층으로 옮겨 걸었다고 하는데 정조임금의 시판과 내용은 이라합니다.

서장대는 이밖에도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6.25 한국전쟁에 휘말려 파괴된 것을 1963년 복원하게 되는데, 10년 뒤인 1973년에 벼락을 맞아 파괴된 크게 훼손되어 다시 복원하는데 또다시 1996년 화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복원된 서장대는 또다시 화재로 완전히 유실되는데 20065월 화성 서장대에서 20대 청년이 술을 마시고 서장대 안에서 자다가 술김에 추워서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불을 질러 서장대를 태웠다고 하는데 이때 정조어필인 서장대 현판까지 전부 다 불타버려 지금의 서장대는 새로 지은 것이고 정조 어필 현판도 새로 써서 달은 것일 것입니다.

서장대 뒤에는 서노대가 있습니다.

청룡문에서 트레킹을 시작하며 첫 번째 만났던 시설물이 동북노대였는데 2번째 만나는 노대는 서노대인데 수원화성에는 노대는 2곳뿐입니다.

동북노대는 성벽에 붙여서 지은 반면 서노대는 성곽 안에 별도로 지었으며 마치 봉화대를 연상시킵니다.

노대는 봉화대가 아니고 기계식 활을 쏘던 곳으로 일정한 거리와 방향을 계산해 한 번에 여러 발을 쏘던 당시 신무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곳 서장대가 있는 팔달산 얘기입니다.

남포루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중간에 팔달문안내소에는 팔달산의 유래를 적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팔달산의 본래 산명은 탑산이었다고 합니다.

고려말 이고(李皐)라는 사람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이곳 산자락에 살았는데 공양왕이 사람을 보내 근황을 묻자 “집 뒤에 있는 탑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산정에 오르면 사통팔달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 즐겁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이고에게 벼슬을 권하자 거절하였고 이에 이성계가 화공을 시켜 탑산을 그려오게 하였고 그림을 본 이성계는 “과연 사통팔달한 산이다.”라고 이야기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서장대를 뒤로하고 성곽을 따릅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서암문을 만납니다.

서암문(西暗門)

암문은 은밀한 곳에 있는 문으로 대부분 군수품을 들여오던 용도로 썼던 문입니다.

수원화성에는 동서남북과 서남쪽, 5곳의 암문을 두고 있는데 팔달문 인근에 있는 남암문은 사유지로 복원하지 못했으며 현재4개의 암문이 복원되었습니다.

서암문을 지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거창한 종각이 나오는데 이름하여 효원의 종각입니다.

이 종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최근에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만든 종으로 보면 답이 될 것 같습니다.

효원의 종에서 1분도 지나지 않아 서포루와 조우합니다.

서포루(西舖樓)

포루는 화포가 있고 병사들이 순찰이나 감시를 하며 쉬는 공간인 포루가 있습니다.

서장대 오름길에서 보았던 서포루는화포를 설치해 적을 방어하는 진지 역할을 하는 곳이고 이곳 서포루는 치성의역할을 하는 포루로 적의 동향을 살피거나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병사들의 근무와 휴식을 하는 공간입니다. 

수원화성에는 서포루가 2곳이 있지만 성격이나 임무는 전혀 다른 포루입니다.

수원화성에는 많은 치성이 있는데 중요한 치성에는 누각을 짓고 포루(舖樓)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서포루에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내려서는 길에 성밖으로 나가는 넓은 길이 있는데 이곳은 정식으로 예전부터 있던 성의 시설물이 아니고 서장대 안내소로 통하는 길입니다.

서장대 깅를 조금지나면 치성이 나오는데 3치로 누각이 없는 치성입니다.

3(西三雉)

1치와 서2치에 이어서 서3치와 만납니다.

이미 기록한 바와 같이 수원화성에 치성(雉城)8곳을 두었는데 팔달산에는 서1, 2치에 이어 마지막, 3치가 됩니다.

성벽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는 담당하는 치성은 지형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고 하는데 성곽 외관을 아직 답사하지 않아 치성들을 비교하여 기록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서삼치에서 1분 정도 지나 성곽이 꺾이는 곳에 각루가 있는 석문을 만나는데 이곳이 서남암문입니다.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암문은 수원화성 서남쪽 서장대와 팔달문 사이 산중에 있는 암문으로 이미 기록한 바와 같이 수원화성의 5개 암문 가운데 복원된 4곳의 암문 중 한 곳입니다.

복원된 암문은 낮은 곳, 은밀한 곳에 있어 적군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드나드는 문이었는데 이곳 서남암문은 성곽 아래가 아닌 성곽위에 있고 거기다가 문루까지 세웠습니다.

서남암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봅니다.

암문 천장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어 유심히 보았는데 구름속에서 용이 희롱하는 그림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수원화성은 4대문과 이곳 서남암문의 천장에는 모두 용을 그렸는데 창룡문과 화서문 그리고 이곳 서남암문에는 한 마리씩 용을 그렸고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청룡과 황룡을 각각 그렸으니 4대문과 암문에는 총 7마리의 용을 그린 것입니다.

서남암문의 문은 아치형의 홍예문으로 만들었는데 성안에서 보다는 성밖에서 보는 문의 모습이 더 멋있게 느껴졌으며 서남암문 밖으로 나가면 양옆으로 여장이 길게 늘어선 통로가 나오는데 이 길을 용도라고 부르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용도는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 쌓인 통로라고 합니다.

아쉬운 건 이 용도를 따라가면 끝에 서남각루가 있다고 하는데 용도 끝자락에 서남각루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서남각루를 보지 못했습니다.

용도 양옆 성벽 가깝게는 한층 멋을 낸 노송들을 보며 잠시 용도를 서성이다 성안으로 들어와 성곽을 따라 내려섭니다.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성곽이 이어졌고 성곽 옆으로 가파른 계단을 따라 3분 정도 내려서면 남포루가 있습니다.

남포루(南砲樓)

남포루는 화성 남쪽 팔달산 중턱에 위치하는데 포루(砲樓)는 화포가 있는 방어시설로 성곽에서는 3층 누각만 볼 수 있는데 밖에서 보면 1층과 2층이 있으며 1~2층에는 활이나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이곳 남포루는 산지에 있으므로 평지에 있는 북서포루나 북동포루에 비해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남포루에서 계속 가파른 계단을 따라 3~4분을 내려서면 경사도 완만하게 바뀌고 차량과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로 내려서게 되는데 이곳에 팔달문 안내소가 있습니다.

안내소가 있는 좌측 골목길로 나가면 가까운 곳에 수원 행궁이 있으며 성곽은 직진으로 내려서야 합니다.

화성행궁도 봐야하고 화성한바퀴돌기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화성행궁은 관람하는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여기서 행궁을 생략하고 바로 팔달문으로 가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의미도 있지만 지난번 수원화성을 찾았을 때 행궁 안은 관람하지 않았지만 행궁 앞, 광장에서 새벽과 야간의 신풍루를 본 적이 있으므로 사진을 대신합니다.

신풍루는 행궁 정문으로 행궁의 위치는 여인의 젖가슴같이 포근한 곳으로 처음에는 문() 이름을 진남루라고 했다가 5년이 지나 지금의 신풍루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정조임금이 행궁 정문 이름을 신풍루라고 지은 것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사실인지 여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조임금은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유방의 고향이 풍읍이라고 하는데 정조는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이곳 화성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고향이라는 뜻에서 신풍이라는 문구를 떠 올렸다고 합니다.

신풍루를 지나면 2번째 문으로 좌익문을 지나며 3번째문은 중양문으로 중양문의 이름에 대해서도 한나나 유방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유방이 태어난 곳이 중양리라는 곳이라는 것으로 여기서 중양(中陽)을 차용해 중양문(中陽門)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중양문을 지나면 봉수당(奉壽堂)이 나오는데 봉수당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일설에 의하면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어머니와 이곳에서 산다는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효자로 소문났던 정조임금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성대하게 베풀고, 다음날인 윤214일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를 열고 행궁광장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였다고 합니다.

신풍루 안쪽 행궁에 정조가 앉아있고 신풍루 밖으로는 어려웠던 시절 백성들은 왕이 내려주는 구호미를 받기위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줄을 섰을 것입니다.

팔달문 안내소에서 팔달문까지는 1분 거리인데 성곽은 없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사유지 주택가나 상가지역으로 건물주들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곽복원이 안된 것 같은데 이곳 주택가에는 수원화성의 시설 중 남은구와 남서적대가 있던 자리인데 개인소유자들과 합의를 이루지 못해 복원이 되지 못한 곳입니다.

음식점이 밀집된 골목을 빠져나가면 차들이 다니는 대로가 나오는데 대로는 정조대왕을 기리기 위해 붙인 정조로입니다.

수원화성 안에는 팔달문->장안문을 잇는 정조로가 중심축을 이루고 팔달문과 장안문 중간 행궁앞에서 우측으로 창룡대로가 갈라져 동북공심돈과 창룡문 중간을 가로질러 성밖으로 빠져 나갑니다.

팔달문은 정조로의 대형 로터리를 이루고 있으므로 팔달문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도로를 따라 한바퀴 돌며 팔달문을 감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룡문에서 장안문과 화서문 경유 팔달문까지 트래킹거리4.67km, 소요시간1시간43, 해발51m, 현재시간 1528분입니다.

 

팔달문에서 창룡문 구간

팔달문(八達門)

팔달문은 수원화성의 남문으로 수원화성의 4대문 가운데 이곳 팔달문과 화서문이 건립 당초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조선시대 목조건축과 성곽 건축의 귀중한 문화재로의 가치를 인정 받아 대한민국 보물 제402로 지정되었습니다.

수원화성 4대문 가운데 팔달문은 장안문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하였는데 장안문보다 10일 뒤에 모든 공사를 한 것을 보면 장안문의 공법을 보아가며 잘못된 점을 보안하며 건립한 것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정조의 홍재전서 일득문에 각 성문의 명칭과 유래에 대해 적었는데 남쪽에 있는 팔달문의 명칭과 유래는 이러합니다.

八達門 (팔달문)은

山名八達 門亦號八達(산명팔달 문역호팔달)---산 이름이 팔달이니 문 이름 또한 팔달이라

四通八達 舟車之會也(사통팔달 주차지회야)---사통하고 팔달하여 배와 수레가 모이리라. 이라했으니 행궁 뒤산의 산이름을 따서 남문을 팔달문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팔달문은 여러 면에서 숭례문과 유사한 격식과 형태, 특징을 갖고 있으며 숭례문에는 없는 옹성과 오성지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팔달산에 대한 유래를 정상부에서 기록한 바 있습니다.

원래 탑산이었던 이 산은 이고(李皐)가 살면서 이성계에게 사방이 팔달하다고 한데서 탑산이 팔달산으로 산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팔달산 이름을 차용해 이곳 화성 남문을 팔달문으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정조실록 (정조1387)이운행을 등용토록 명하다.라는 글이 나옵니다.

이고의 후손인 이운행의 집이 팔달산 아래 있었는데 수원신도시 프로젝트인 수원화성을 진행하면서 화성을 건설하며 향교를 화성 옆에 짓기로 했는데 이곳에 이운행의 선친 묘5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이운행을 가엽게 여기고 물품을 넉넉히 지급하고 경기감사에 임명했다고 했다는 것으로 실록 내용을 보면 현재 향교 자리와 팔달문 일대가 이운행(이고)의 선산이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팔달문의 기본적인 형태는 석축을 높게 쌓고 가운데 큰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2층 누각을 올렸으며 밖으로 벽돌로 등근 원 모양의 옹성이 팔달문을 감싸고 있습니다.

팔달문의 문루는 숭례문 마찬가지로 중층 건물로 전면과 측면의 크기나 규모, 건물의 형태나 지붕의 형태가 숭례문과 같고 대들보의 형태나 문루 주변의 시설물의 배치가 숭례문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미루어 예측하면 수원화성의 팔달문을 설계하며 숭례문의 설계를 따라 했다는 것으로 보며 팔달문의 문루가 숭례문 문루보다 약1.5m 높다고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서울 성곽의 높이보다 수원화성의 성곽을 높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팔달문 외부 쪽으로는 반원형의 옹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옹성중앙에는 작은 홍예를 만들었는데 문은 안쪽으로 달았습니다.

옹성 홍예문 위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오성지(五星池)를 제도를 적용해 수조를 만들어 물을 담아두었다가 화공이 있을 때 구멍으로 물을 붓는 구조로 만들었으나 옹성에 문루를 세우며 수조시설이 사라지고 구멍만 남아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궁궐 큰 건물 앞에는 드므라는 것이 있는데 드므는 청동으로 만든 큰 통에 물을 담아두면 불을 놓는 귀신이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나므로 불이 나지 않는다는 주술적 의미가 담긴 소방도구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드므가 아닌 오성지라는 소방기구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하는데 빨리 원형으로 복원하면 좋겠습니다.

팔달문은 1975년 복원을 했는데 당시 책임을 맡은 대목장 신응수의 말로는, 기둥의 굵기가 가늘어 문화재청 측에 계속해서 굵기를 굵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복원 중에 화성성역의궤가 발견되고 기둥의 치수를 확인하니 대목장의 말이 옳았다고 합니다.

결국 2009년 문화재청 정밀 진단조사 결과, 들보 등에 심한 균열과 뒤틀림이 생겨, 2011년부터 완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해서 원래대로 복원 공사를 해, 2013년 초에 다시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출입이 안 되지만 팔달문으로 들어서서 홍예문으로 다가서면 홍예문 천장(개판)을 볼 수 있는데 천장에는 황용과 청룡이 구름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팔달문 남동쪽은 시장이 있는 번잡한 거리로 사람들의 왕래도 아주 많은 곳으로 팔달문 좌우로 사유지로 인해 성곽이나 시설물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팔달문 남서쪽으로는 성곽 95m를 복원하지 못했는데 이곳에는 남서적대와 남은구가 있던 곳이고, 팔달문 남동쪽 남수문 사이에는 사유지가 160m를 복원하지 못했는데 이곳에는 남동적대, 남암문, 남공심돈이 있던 자리입니다.

팔달문 남쪽으로 따라 바깥쪽 풍경과 남문시장을 구경하며 팔달문로를 지나자 지동교가 나오는데 지동교에서 성곽의 위치를 확인하니 남수문은 위쪽에 있습니다.

수원천변을 따라 남수문으로 이동합니다.

남수문(南水門)

남수문은 수원화성 성곽이 수원천을 가로지르는 남쪽 수문입니다.

북수문을 지날 때는 성안에서 북수문을 봤는데 이곳 남수문에서는 성밖에서나 성안에서 자유로이 남수문을 볼 수 있습니다.

성밖에서 보는 풍경이 아주 좋습니다.

1~2m를 낙하하며 힘차게 쏟아내는 물줄기와 금방이라도 일곱 무지개를 피울 것 같은 홍예수문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북수문에서는 일곱 홍예문이 이곳에서는 아홉 홍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물이 흐르는 홍예수문은 일곱인데 양 옆으로 있는 홍예문은 수문이 아니고 사람들이 지나는 문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남수문은 1922년 대홍수 때 파괴된 후 2012년에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남수문의 복원 공사는 수원천 복개구간 철거 공사와 맞물려 이루어진 공사였다고 합니다.

남수문 상부의 여장은 화성성역의궤에 근거하여 복원되었으나, 하부의 수문은 9개의 수문은 홍수 대비를 위해 상당히 다르게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원래의 수문은 오각형 기둥이 이중으로 배열되고, 앞 기둥과 뒤 기둥 사이가 비어있었으나, 복원된 남수문은 일자형 기둥으로 이는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지만, 향후 학계에서 논란의 소지는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옛 모습이 복원되지 않은 또 다른 시설물은 성안의 연못으로 수원화성에는 본래 상남지, 하남지, 상동지, 하동지, 북지 등 5곳의 못을 두고 있었는데 아직 한 곳도 복원되지 않은 상황이며 현재 남지와 북지는 복원 예정이라고 합니다.

남수문 안쪽으로 들어서서 수원천을 보며 남수문을 지납니다.

남수문을 지나면 성곽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을 오르면 단층 건축물이 나오는데 건축물 앞마당에는 굴뚝이 보이는데 이곳이 동남각루입니다.

북동에서 시작한 트레킹이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을 지나 남수문을 건너며 동남쪽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남각루(東南角樓)

수원화성 동남쪽에 있는 각루입니다.

미니2층 형태를 갖춘 동남각루는 북쪽으로 사다리를 동해 각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서쪽과 동쪽 창문은 태극문양을 한 들어열개문으로 만들었으며 남쪽은 사슴뿔이 달린 도깨비문양으로 달았으며 코와 입에 구멍을 내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낮게 만든 1층에는 서남쪽으로 2층면적의 1/4을 온돌을 놓아 병사들이 겨울에 대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직접 볼기회가 없었던 밖에서 보는 성벽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서 다른 사진을 보니 성벽은 특별한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눈에 보이는 것이 각루 전체인 것 같습니다.

동남각루에서 성곽을 따라 1분을 지나면 치()가 나오는데 동3치입니다.

3치라는 것은 동쪽의 3번째 치라는 의미로 동쪽으로 2곳의 치를 더 만날 것입니다.

3(東三雉)

동쪽이 있는 3개 중 3치입니다.

여기서 치()는 꿩이 아니고 담장을 의미하는데 이건 제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수원화성의 10개 치 가운데 폭이 가장 넓은 반면 길이가 짧다고 합니다.

이는 성벽에서 급격한 경사가 생기므로 길이를 짧게 만든 대신 넓은 권역의 경계를 위해 넓이를 넓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총구나 화포의 구멍인 현안이 다른 치성은 한 줄인 반면 동3치는 2줄의 현안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3치에서 동2포루로 가는 중간 성곽너머로 보면 큰 교회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수원제일교회입니다.

수원제일교회는 1953년 출범한 교회로 구시가지 가운데 높은 교회건물이 있어 이 일대의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는데 우리가 참고해야할 것은 교회 옥상을 노을전망대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척 구미 당기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노을이 물든 하늘을 교회 사람들만 볼 수 있는 풍경인가? 그건 아니고, 1층 경비실에서 방명록을 작성하면 누구든지 옥상에 올라갈 수 있으므로 노을이 물든 서쪽하늘과 노을 아래 있는 수원 시가지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다음기회에 수원화성 외곽을 돌며 수원제일교회 옥상을 올라가 볼 것이라고 다짐하며 성곽을 따라 이동합니다.

동쪽 성곽길은 아주 잘 나있어 걷기에 좋으며 성곽을 따라 파란색 깃발이 걸려 있는데 팔달문을 지나며 흰색 깃발에서 파란 깃발로 바뀌었습니다.

3치에서 잘 나있는 성곽길을 따라 3분 정도 이동하면 건축물이 나오는데 이곳이 동2포루입니다.

동이포루(東二舖樓)

안내문에 의하면 봉돈 남쪽에 있는 포루로 누각에는 2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동이포루는 치성에 누각을 게운 것인데 치성의 길이가 짧아 누각도 2칸으로 설치했다고 하며 수원화성 의궤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나중에 지은 포루로 여겨지며 안내문 사진에서도 동포루 정리의궤라고 확인이 됩니다.

동이포루에서 1~2분 이동하면 봉돈이 있습니다.

봉돈(烽墩)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돈대라는 의미로 알기 쉬운 표현은 봉화대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봉돈 앞마당은 아주 넓은 공지이며 봉돈은 그 넓이가 아주 넓었으며 성곽에서 안쪽으로 1칸이 들어와 있고 2칸이 밖으로 돌출된 형태입니다.

벽돌로 지은 봉돈 중앙에는 작은 홍예문이 있는데 봉화를 올리기 위해서는 이 문으로 출입해야 하는데 문은 잠겨있습니다.

불을 지피는 봉화대는 5구가 설치되었으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내부는 알 수 없습니다.

봉돈에서 2~3분 이동하면 또 다른 시설물이 나타나니 동2치입니다.

2(東二雉)

조금전 동3치를 지나고 이번에는 동이치로 동쪽에 설치한 2번째 치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지나온 동3치는 넓이는 넓고 길이가 짧아 밖에서 보면 현안을 2줄로 설치했다고 하는데 동이치는 그러한 설명이 없고 사진에는 현안이 한 줄로 설치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동2치는 1979년 화성을 복원하면서 이때 함께 복원했다고 설명하며 최근 복원한 시설물로 석축도 새돌이라고 설명합니다.

동이치에서 성곽을 따라 2분을 이동해 동포루에 당도합니다.

동포루(東砲樓)

동포루는 수원화성의 5곳 포루 중 한 곳으로 평지에 있는 포루입니다.

산지에 있는 포루는 층과 층사리가 높은 반면 평지에 있는 동포루는 1층과2층은 높이가 낮다고 하며 3층은 높게 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을 지나면서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동포루에서 성곽을 따라 2분을 이동하면 동일치가 나옵니다.

1(東一雉)

동쪽에 있는 치성 3곳 중 한곳입니다.

치성은 주변 환경에 따라 크기나 규모를 달리하는데 동일치는 평탄한 곳에 있으므로 주변을 조망하기위해 크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길이가 제법 긴 듯한 치성 안쪽으로 남녀가 다정하고 은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안내문에 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수원화성에는 10곳의 치성을 두고 있는데 에 대한 설명은 이곳 동일치에서만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는 꿩을 말하는데, 꿩이 몸을 잘 숨기고 엿보기를 잘하는 특성이 있어 ()라는 이름을 붙였다.라고 기록 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정리의궤에서 설명하고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는 일반적으로 꿩을 의미하지만 옥편을 보면 꿩 이외에도 담장을 의미하므로 저의 생각은 꿩이 아닌 담장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치를 설명할 때 담장으로 설명했습니다.

1치에서 성곽을 따라 2분을 이동하면 수원화성의 마지막 시설물인 동일포루에 당도합니다.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일포루는 창룡문 남쪽 평탄한 곳에 위치한 치성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세운 포루입니다.

동일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도록 성 바깥으로 돌출이 길게 만들고 창문이 없는 개방형으로 만들었습니다.

동일포루는 창룡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포루위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2~3분 거리에 있는 창룡문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창룡문 앞 잔디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가족단위 나들이 행각도 있고 외국인들도 많이 보이고 연 날리는 사람들도 보이는데 무척 자유스럽고 평화스럽게 보입니다.

창룡문에서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트레킹을 시작해 수원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에 디시 도착합니다.

창룡문에서 장안문과 화서문, 팔달문을 경유 창룡문 원점회귀까지 트래킹거리6.22km, 소요시간2시간15, 해발78m, 현재시간 1600분입니다.

 

창룡문에서 트레킹을 마치고.....

창룡문(蒼龍門)

창룡문은 수원화성의 동문으로 정조의 홍재전서 일득문에 각 성문의 명칭과 유래에 대해 적었습니다.

동쪽에 있는 동문에 대해서는 蒼龍門 取其象也(창룡문 취기상야)라 하여 “창룡문은 그 팔괘의 상을 취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팔괘에 따라 성문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주역을 전문한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갈 것 같습니다.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으로 서울도성으로 치면 동대문으로 불리는 흥인지문이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으로 치면 건춘문이 됩니다.

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문 안쪽부터 동장대에 이르기까지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같은 수원화성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추어 위엄 있게 지은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로 장안문과 팔달문은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은 팔작지붕입니다.

수원화성은 4대문에 모두 옹성을 두고 있는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옹성에 설치된 작은 홍예문을 지나서 본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반면 이곳 창룡문과 화서문의 옹성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한쪽을 열어둔 형태를 취했습니다.

창룡문 문루아래 홍예문으로 들어서서 천장(개판)을 보면 청룡 한 마리가 구름 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홍예문을 빠져나가면 문루위에 창룡문(蒼龍門) 현판이 달려있습니다.

아래 석축은 대부분 예전 건립당시 석축이지만 곳곳에 새로 만든 석축이 섞여 있는데 누렇게 변색된 석축이 아름답습니다.

옹성과 창룡문 사이는 박석으로 깔려있는데 약간 조잡한 느낌이 들었으며 옹성밖으로 나가면 박석이 깔린 넓은 공터가 이어집니다.

창용문을 감싸고 있는 옹성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옹성 위쪽은 여장을 두르고 곳곳에 현안 구멍을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벽을 따라 멀리 동일포루가 보이는데 가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동일포루를 보면 다음 시설물을 봐야하고 결국 팔달문까지 성밖으로 트레킹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안으로 수원화성 한 바퀴돌기를 했으니 언제 시간을 내여 수원화성 성밖으로 한 바퀴를 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수원역으로 가기위해 창룡문안으로 들어서서 성안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며 다음을 기약해 봅니다.

 

화성 춘추팔경도와 수원팔경에 대한 상식

화성춘추팔경도(華城春秋八景圖)

화성춘추팔경도는 화성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작품으로 봄과 가을 각각 8점의 그림을 그려 8폭 병풍 2점을 만든 것으로 작가는 미상인데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추팔경 중 제5경 서성우렵도와 제7경 한정품국도는 그림의 수법으로 보아 김홍도의 그림으로 보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화성춘팔경

화산서애(花山瑞靄)---화산에 상서로운 아지랑이 풍경

유천청연(柳川晴烟)---비온 후 맑게 갠 물안개 낀 수원천의 풍경

오교심화(午橋尋花)---꽃 놀이가 한창인 매향교 풍경

길야관상(吉野觀桑)---길야 들판에서 뽕나무를 감상하는 풍경

신풍사주(新豊社酒)---향음 주례가 행해지는 신풍루 풍경

대유농가(大有農歌)---농사를 지으며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리는 대유평의 들녘

화우산구(華郵散駒)---망아지들이 뛰어 노는 영화역의 풍경

하정범익(荷汀泛收)---연꽃 사이로 물새가 떠다니는 연못의 정경입니다.

 

화성추팔경은

홍저소련(紅渚素練)---화홍문 물가에 걸린 무지개 풍경

석거황운(石渠黃雲)---만석거 주변에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의 구름 풍경

용연제월(龍淵霽月)---비 갠 맑은 하늘의 달 밝은 용연의 풍경

귀암반조(龜巖返照)---거북바위에 비치는 저녁노을 풍경

서성우렵(西城羽獵)---화서문 밖에서 사냥하는 풍경

동대화곡(東臺畵鵠)---동장대에서 새를 맞히는 활쏘기 경치

한정품국(閒亭品菊)---미로한정에서 국화꽃을 감상하는 풍경

양루상설(陽樓賞雪)---늦가을 눈 내리는 화양루 풍경입니다.

 

서성우렵도는 서장대 들에서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그림으로 한 가운데 서장대를 배치하고 그아래 화서문과 장안문으로 연결되는 성곽이 있습니다.

한정품국도는 화성행궁 내에 있던 미로한정에서 국화를 품평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그림 외쪽에 있는 큰 건물은 낙남헌이며 오른쪽 위에 서장대를 배치하였고 산중턱에 있는 것이 미로한정이고 맨 아래 연무에 쌓여 있는 곳이 화서문입니다.

 

수원팔경

1912년 매일신보에 소개된 이원규의 수원8경가(水原八景歌)’를 최종적으로 수원8경으로 선정했다고 201364일 밝혔습니다.

이원규가 채록한 수원8경은

① 화산두견(花山杜鵑)---화산 숲속에 슬피우는 두견새 소리

② 나각망월(螺角望月)---방화수류정에서 본 동북각루의 달

③ 화홍관창(華虹觀漲)---화홍문 7간 수문에 쏟아지는 물보라

④ 남제장류(南堤長柳)---수원천 긴 제방에 늘어진 수양버들

⑤ 북지상련(北池賞蓮)---만석거에 핀 아름다운 연꽃

⑥ 광교적설(光敎積雪)---광교산 정상에서 산록까지 쌓여있는 흰 눈

⑦ 서호낙조(西湖落照)---서호와 여기산에 비치는 저녁노을

⑧ 팔달제경(八達霽境)---팔달산 솔숲사이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