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재이야기

수원화성 한 바퀴 돌아보기(1편)

범솥말 2025. 11. 24. 19:29

정조임금의 혼이 서린 수원화성을 가다

 

산행일시: 20251008

누구와: 나 홀로

트레킹거리: 6.22

트레킹시간: 2시간 15(13:45~16:00)

트레킹코스:창용문들머리(13:45)-연무대(동장대,13:55)-동북각루(방화수류정,14:08)-화홍문(북수문,14:15)-장안문(14:25)-화서문(14:45)-팔달산서장대(15:02)-팔달문(15:28)-남수문(15:36)-봉돈(봉화대,15:47)-창용문 날머리(16:00)

주요지점 통과 및 이동거리

13:45 창용문 들머리

13:50 동북노대

13:52 동북공심돈

13:55~14:00 동장대(연무대), 트레킹거리 0.47km, 소요시간 10, 해발72m

14:02 동암문

14:05 동북포루(각건대)

14:08~14 동북각루(방화수류정)와 북암문(용연)

14:15~17 화홍문(북수문), 트레킹거리 1.33km, 소요시간 30, 해발59m

14:20 북동포루

14:22~5 북동적대와 북동치

14:25~36 장안문, 트레킹거리 2.06km, 소요시간 40, 해발57m

14:37 북서적대

14:40 북서포루

14:42 북포루, 트레킹거리 2.54km, 소요시간 57, 해발4m

14:44 서북공심돈

14:45~49 화서문, 트레킹거리 2.72km, 소요시간 1시간00, 해발52m

14:52 서북각루, 트레킹거리 2.97km, 소요시간 1시간07, 해발75m

14:53 1

14:56 서포루, 트레킹거리 3.17km, 소요시간 1시간11, 해발101m

15:00 2

15:02~11 팔달산 서장대와 서노대, 트레킹거리 3.50km, 소요시간 1시간17, 해발144m

15:11 서암문

15:14 서포루, 트래킹거리 3.74km, 소요시간 1시간30, 해발140m

15:17 3

15:18~20 서남암문, 트래킹거리 4.06km, 소요시간 1시간33, 해발133m

15:22 남포루, 트래킹거리 4.19km, 소요시간 1시간37, 해발104m

15:28~33 팔달문, 트래킹거리 4.67km, 소요시간 1시간43, 해발51m

15:36~8 남수문, 트래킹거리 4.91km, 소요시간 1시간51, 해발47m

15:40 동남각루, 트래킹거리 5.02km, 소요시간 1시간55, 해발59m

15:41 3

15:44 2포루

15:47 봉돈(봉화대), 트래킹거리 5.39km, 소요시간 2시간02, 해발66m

15:50 2

15:52 동포루, 트래킹거리 5.70km, 소요시간 2시간07, 해발73m

15:54 1

15:36 1포루

16:00 창용문 날머리, 트래킹거리 6.22km, 소요시간 2시간15, 해발78m

 

화성(華城) 트레킹 전 이야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조선의 역사는 408년이 흐르면서 많은 왕들이 경복궁의 주인이 되기를 반복하며 정조대왕이 조선 22대 왕으로 오르게 됩니다.

정조임금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누구나 한 목소리로 답할 수 있는 사도세자일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누구?

영조의 아들이면서 정조의 아버지입니다.

영조는 아들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세자는 반미치광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죽 먹 듯 했고, 궁궐 밖으로 수시로 나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결국은 노론과 소론의 붕당정치에 의해 사도세자는 죽게 되는데 사도세장의 죽음은 나경언이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거짓 고변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힌 채 창경궁 선인문 앞에서 뒤주에 갇힌 채 굶어 죽어 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영조가 죽으니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조는 즉위 직후 신하들에게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밝히고 이후 조심스럽게 사도세자를 추숭해갔습니다.

평범했던 사도세장의 묘를 원으로 격상시키며 영우원이라 했고, 양주군 배봉산 자락(현재 휘경동 삼육대학교 병원)에 있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며 현륭원(顯隆園)이라고 원이름을 바꿉니다.

원래 사도세장의 융릉자리는 효종의 능터로 천거되었던 자리였는데 능터 예정지 인근에 수원이라는 작은 읍이 있어 효종의 릉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화산으로 천장하며 수원읍은 화성신도시를 만들어 수원에 살던 백성을 이주시켰고 화성신도시 개발로 인해 현재의 수원시가 탄생했습니다.

사실 현재 수원시라는 도시가 없을 때, 그러니까 정조가 화성신도시를 만들기 100년도 훨씬 전에 유형원이라는 사람이 현재 화성 부지에 성을 건설하면 적절할 것이라는 안을 제사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거들 떠 보지도 않고 무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정조 때 와서 이 안건을 검토하여 화성이 만들어졌고 정조임금은 죽은 유형원에게 200여년이 지나서 이조참판이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수원읍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주시키기 위해 현재 수원화성을 건립하게 되는데 10년이 걸릴 공사를 할 수 있는 성을 2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수원화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날림공사를 한 것이 아니고 노역으로 동원된 인부들에게 정당한 돈을 주고 일을 시켰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면 돈을 주지 않고 일을 시켰으니 오래 걸렸다는 것입니다.

정조 18(1794)부터 성역에 착수하여 동쪽으로 창룡문(蒼龍門), 서쪽으로 화서문(華西門), 남쪽으로 팔달문(八達門), 북쪽으로 장안문(長安門) 4대문을 비롯하여 각종 방어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정조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는데 병으로 일찍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은 정조는 병을 죽었다고 믿지 않으며 왕권강화에 무리수를 두다가 안동김씨 세도에 독살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짓고 성안 행궁에 수원관아를 두었으나 일제가 강제로 한일합방을 한 이후 1912년 수원관아를 화성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이후 수원화성 안에는 수원시청을 포함해 수원시 관련 행정관청이 단 하나도 없다가 2014 4, 팔달구청이 수원화성 내부 종로사거리에 입주하면서 102년 만에 수원화성 내부에 수원시 행정관청이 복귀했다고 합니다.

수원화성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을 진산으로 삼아 화성행궁이 동쪽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었는데 성의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산성의 형태를 띠고, 동쪽은 평지성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성 내부로는 수원천이 흘러 화홍문과 남수문의 2개 수문이 만들었습니다.

 

창룡문에서 장안문 구간

한양도성은 4대문과 4소문이 있습니다.

동대문으로 불리는 흥인지문, 남대문으로 불리는 숭례문, 서대문으로 불리는 돈의문, 북대문으로 불리는 숙정문이 4대문이며 동소문으로 불리는 혜화문, 서소문으로 불리는 소의문, 남소문으로 불리는 광희문, 북소문으로 불리는 창의문이 4소문입니다.

그러나 수원화성에는 4대문은 있지만 4소문은 없으며 동쪽의 창룡문, 서쪽에 화서문, 남쪽에 팔달문, 북쪽에 장안문이 수원화성의 4대문입니다.

서울도성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 숭례문인데 수원화성도 남쪽에 있는 팔달문이 정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팔달문이 수원화성의 정문은 아니었습니다.

수원화성을 트레킹하려면 팔달문을 들머리로 정하고 한 바퀴 돌아 다시 팔달문으로 날머리를 정해 원점회귀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오늘 수원화성 트레킹은 동문인 창룡문에서 시작해 창룡문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로 잡았습니다.

창룡문 앞에는 창룡문에 대한 안내문과 수원화성 전체에 대한 산상동성이라는 안내판에는 1960년대 사진이 2장 있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훼손된 창룡문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문루는 완전히 사라져 형체도 보이지 않습니다.

창룡문으로 올라섭니다.

창룡문 문루로 들어서면 2층 내부를 볼 수 있는데 2층 바닥 중앙에는 마루를 깔아 놓았습니다.

성밖은 옹성이 있어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성안으로는 남쪽 성곽이 길게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팔달산이 보이고 화서문과 장안문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성곽 너머로 높은 아파트 건물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면으로는 중앙에 차도를 따라 버스와 승용차들이 느림보가 되어 행령을 이루고 뒤로 동장대의 연무대 건물이 보이며 성곽을 따라 우측 높은 곳에 시선이 멈춘 곳이 동북공심돈입니다.

창룡문을 지나 성곽을 따라갑니다.

성곽을 따라 관광객과 관람객들이 곳곳에 팀을 이뤄 자나며 단체가 지나가고 나면 성곽길은 한산한 편입니다.

창룡문에서 1~2분을 지나면 오늘 첫 번째이자 산상동성 동북시설물 중 첫 번째 시설물인 동북노대가 있습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안내문에 의하면 노대는 기계식 활을 쏘기 위한 시설이라고 하는데 쉽게 설면하면 최신 무기중의 하나인 뷰비츄랩이라는 것의 원조인 것 같습니다.

활을 장착한 뒤, 위치를 파악해서 알려주면 한 번의 발사로 여러 발이 목적지 과녁으로 날아가는 것 같은데 우리의 과학은 참으로 놀랄만한 것 같습니다.

설명이 맞는다면 우리 조선시대 기술은 어떤 첩자가 선진국에 팔아먹었는지 뷰비츄랩은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무기가 아니니 말입니다.

노대는 이곳 이외에 서장대가 있는 팔달산 정상에도 있습니다.

동북노대에서 다시 성곽을 따라 갑니다.

성안의 풍경이 너무도 평화스럽습니다.

지나온 창룡문을 기준으로 양 옆으로 길게 뻗은 성곽을 따라 관광객이 줄을 잇고, 창룡문 앞 잔디광장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보이고 창룡문과 연무대 중앙을 가르는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도로를 메웠습니다.

평화스러운 성안 풍경을 보며 불과 몇 걸음을 옮기면 산상동성 2번째 시설물이 나오는데, 이번 시설물은 동북노대와는 달랐는데 벽돌로 지은 3층 망루로 이름이 동북공심돈입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시설물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후대에 부르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지어야지 동북공심돈은 뭐랍니까?

공심돈의 돈()이란 주위 지면보다 높게 쌓은 대()로 돈대를 의미하므로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동북쪽에 있는 속이 빈 돈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수원화성에는 공심돈을 3곳에 설치했습니다.

이곳 동북공심돈과 화서문 옆 서북공심돈, 그리고 팔달문 옆에 남공심돈입니다.

전란을 치르며 상부는 모드 헐어진 공심돈을 본래대로 복원했지만 팔달문 옆에 있는 남공심돈은 민가가 밀집되어 있어 복원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현재는 3곳 중 2곳 만 원상으로 복원된 상태입니다.

동북공심돈이 있는 이곳은 산산동성 중 가장 높은 곳으로, 높은 곳에서 주변의 동태를 살피는 업무를 보던 곳으로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적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도 확보하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을 축조할 초기에는 벽돌 굽는 기술이 부족했다가 나중에 기술이 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축성 초기보다는 성이 완성단계에 이를 때 축조한 것일 것이라는 추정을 해봅니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나며 높은 곳에 있는 동북공심돈을 보면서 수원화성을 대표하는 상징물로만 여기기도 했던 곳인데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동북공심돈을 올라가는 출입문은 작은 판문으로 되어 있는데 태극문양의 판문은 잠겨있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동북공심돈은 성벽과 일치하게 한 면을 대지었고 나머지 3면은 성곽밖으로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적의공격에 대비하는 설계와 경계를 철저하게 하기 위한 설계로 보여집니다.

동북공심돈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섭니다.

날씨가 화창하여 성곽을 걷기가 좋은 날이며 성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파란색 깃발이 바람에 날리는데 깃발에는 巡視(순시)라는 글자를 넣었습니다.

성벽 밖을 보니 자연스럽게 곡선을 따라 있는 성벽이 아름다웠고 성안에서는 높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성밖에서는 무척 높게 보였으며 성벽 주변은 잔디를 조성해 최고의 공원으로 보입니다.

동북공심돈에서 2~3분을 지나 산상동성 3번째 시설믈에 도착하니 동장대입니다.

동장대(東將臺)

수원화성에는 장대가 2곳이 있는데 한 곳은 이곳 동장대이고 두 번째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입니다.

동장대는 장수가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활쏘기 훈련을 하고는 했는데 이런 훈련을 지휘하던 곳인데 지금도 중앙매점 옆에는 활쏘기 체험을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예전에 병사들이 활쏘기 훈련을 하던 곳인 것 같습니다.

동장대는 팔작지붕에 벽이 없이 기둥이 받치고 있는 개방 건물이지만 초기에는 전면은 개방되었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둔 형태였습니다.

바닥은 마루이며 경사진 곳에 지었으므로 장대석으로 5단의 단을 쌓아 수평을 이루었는데 먼저 온 관광객들이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동장대에는 현판이 달려있는데 동장대라고 쓴 것이 아니고 현판은 鍊武臺라고 달려있는데 연무대는 우리말로 쉽게 풀면 병법을 연마하는 곳이라는 뜻이 될 것 같습니다.

연무대는 역경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보존이 잘 되었는지. 대형입간판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사진에도 채색은 변색됐지만 건물은 보존이 잘 된 것 같습니다.

연무대를 오르는 중앙계단 하마석과 계단에 총탄 자국이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아마도 1950년 한국전쟁 때 총탄에 맞은 자국인 듯합니다.

연무대 뒤쪽으로 가면 성을 지키던 작은 화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무대 전면 우측에는 작은 별채가 있는데 이곳은 이곳을 관리하는 수문장청인 것 같습니다.

동장대를 나와 성곽을 따라 내려섭니다.

좌측으로는 연무초등학교 건물이 보이고 성곽은 경사진 내리막을 따라 내려섰다가 다시 오름을 하고, 성 밖으로는 정리가 잘 된 공원에 억새가 피어 가을 풍경을 한층 드높입니다.

연무초등학교 맞은편에는 가림막을 둘러치고 공사를 하는 곳이 있는데 동암문입니다.

동암문(東暗門)

동암문은 동쪽에 있는 암문으로 적들이 관찰하기 어려운 곳에 은밀하게 출입할 수 있는 일종의 비상문인데 옛모습을 복원하는 것인지 훼손이 있어 수리하는 것인지 암튼 공사 중 입니다.

동암문을 지나나면 높은 곳에 사각건물이 보이고 사각건물 뒤편으로는 수원 시가지로 고층건물이 보이는데 수원도 이제는 곳곳에 초고층 건물들이 많습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사각건물은 동북포루라고 하여 동장대와 방화수류정 사이 군사들이 순시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는데 포루의 건물 모양이 선비들이 머리에 쓰던 각건을 닮았다고 해서 별칭으로 각건대(角巾臺)로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 동북포루는 훼손이 되었거나 없어졌는지, 2019년에 복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좁은 틈으로 들어가면 후면으로도 갈 수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밀려있어 후면은 포기했는데 각건대 건물 동쪽과 서쪽 측면과 북쪽에는 사슴뿔을 달고 있는 도깨비 형상의 그림이 있는데 그림은 눈과 입에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성곽 밖으로 경계를 하고 있다가 입이나 코와 눈에 있는 구멍으로 총을 쏘거나 밖을 관측하는 것 같습니다.

동북포루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섭니다.

동북포루는 높은 곳에 있으므로 내려서면서 성곽의 유연한 곡선을 따라 가야할 방향으로 북암문, 방화수류정, 북수문, 장안문이 보이며 성곽 너머로는 아름답다고 소문난 용연과 주변 버드나무와 주변 억새가 핀 공원의 풍경이 유혹을 합니다.

동북포루에서 2분 정도 내려서면 북암문에 도착합니다.

북암문을 통해 용연으로 나갈 수 있는데 용연으로 나가려면 성곽 아래로 내려서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므로 눈앞에 보이는 방화수류정을 먼저 보고 나중에 북암문을 가는 것이 편리하며 그것이 관람 순서입니다.

북암문 머리위 다리를 건너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도착한 곳이 동북각루입니다.

동북각루(東北角樓)

수원화성에는 각루를 4곳을 설치했는데 이곳 동북각루 이외 화서문을 지나 오름길 옆에 서북각루가 있고, 남수문 동쪽으로 동남각루가 있으며 서남암문 밖 용도를 따라가면 서남각루가 있습니다.

각루에는 각각의 건축물이 있어 주변을 경계하고 감시하는 시설로 다른 시설과 달리 2층으로 만들어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동북각루에는 다른 곳에 비해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자형 각루를 지니고 있는데 정자형 건축물은 대한민국 보물 제1709호인 방화수류정으로 화성의궤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본 용연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기슭이 남으로 뻗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다시 몇 리를 내려가 용두에서 그치고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위에 불쑥 솟은 바위다. 성은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을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서 앞으로 마주 응하여 한 면을 제압하고 있다. 마침내 절벽을 따라서 성을 쌓고 바위에 루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수원화성에서 빼어난 외관과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는 건축물은 단연 방화수류정입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용머리바위 위에 세웠다는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동북각루(東北角樓)라고도 부르고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고도 부르는데 어떤 이름이 정답일까?

화성성역의궤에는 방화수류정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동북각루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방화수류정이 동북쪽 높은 위치에 있으므로 전투를 지휘하고 성밖 적들의 침입을 관측할 수 있는 각루라는 것입니다.

동북각루나 방화수류정은 공식적인 정자의 이름이지만 당시 백성들은 용두각, 용연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용두각(龍頭閣)이라는 이름은 용두암 위에 지은 건물로 정조가 이곳에서 활쏘기를 하고 과거시험을 치렀다는 소문에 백성들은 용두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연정(龍淵亭)은 용연에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방화수류정 밖의 아름다운 못인 용연이 있는데 수원백성들은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면 용연에 나와 달구경을 하고는 했다고 하는데 용연에 있어 불렸던 이름이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방화수류정은 군사적인 이름으로 동북각루, 민초들에게는 용두각, 또는 용연정으로 불렸다는 것입니다.

방화수류정의 뜻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서울 휘경동 삼육대학병원에 있던 묘를 지금의 융릉으로 옮기며 현릉원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방화수류정의 뜻이 현릉원에 있는 읍치를 옮긴 땅 유친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중국 송나라 학자 정호의 시 춘우일성이라는 시에 나오는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정조임금은 화성공사 완공 후 화성전역을 돌아보면서 방화수류정을 찾아 풍류를 즐기며 활쏘기를 하였는데 3발을 명중시키고 시를 한 수 지었으며 신하들에게도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는데 이때 정조가 지은 시는 이러합니다.

봄날 성을 두루 돌아도 해는 아직 지지 않고

방화수류정에 구름 낀 경치 더욱 맑고 아름답구나

수레를 세워놓고 세 번 쏘기가 묘하니

만 그루 버드나무 그림자 속에 화살은 꽃과 같네

방화수류정은 2층으로 1층은 창문이 없는 온돌방으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며 2층은 임금을 위해 온돌방에 창문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현재 창문은 없습니다.

누각에는 초소체로 쓴 訪花隨柳亭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원곡 김기승이 썼습니다.

그러나 이 현판은 김기승씨가 1956년에 쓴 것인데 본래 현판은 조윤형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까지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현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김기승씨가 1956년에 썼는데 올해 7월 그러니까 불과3~4개월전 광평대군 후손의 집안인 필경재에서 18세기 조윤형이 쓴 원본 현판의 탁본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 탁본을 근거로 원판과 같은 현판이 하루 빨리 만들어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방화수류정에서 시간을 보내고 북암문으로 이동합니다.

북암문(北暗門)

수원화성에는 암문이 5곳을 두었는데 동서남북에 각각 4곳에 암문이 있고 서남각루로 이어지는 곳에 서남암문이 있는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암문은 4곳이며 남암문은 팔달문 옆에 있었는데 현재 사유지 주택이 있어 화성 정비가 되지 못한 곳입니다.

북암문은 성안과 성밖을 드나드는 은밀한 문으로 북암문을 나가면 수원화성에서 최고의 비경이 나타나는데 용연과 용연 옆에 우뚝 솟은 방화수류정의 경치입니다.

수원화성을 만들기 이전부터 유천가에는 용두라는 바위가 있었고 용연이라는 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조임금이 방화수류정에서 지은 시를 보아도 버드나무가 나오고 동북각루 현판에도 버드나무를 뜻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용연에는 버드나무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대부분 궁궐이나 오래전 못은 천원지방으로 사각형의 못 가운데 원형의 섬을 만드는데 이곳 용연은 원형 못에 원형 섬으로 천원지방의 형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북암문으로 나가면 좌측으로 용연이 있고 우측으로는 동북각루에서 이어지는 성곽 주변으로 억새가 깊은 가을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곳에서 시간을 아끼느라 용연으로 내려서지 않고 멀리서 용연과 주병 경치를 감상합니다.

용연에는 이무기와 소녀의 애달픈 전설이 전해지는데 용연의 전설은 이러합니다.

용연에는 천년동안 수양을 하며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있었는데 용연으로 매일 놀러오던 소녀가 실수로 연못으로 빠지자 이무기가 소녀 모르게 소녀를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이무기와 소녀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드디어 천년이 되던 날, 이무기는 용연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다가 소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땅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때 이무기의 몸은 용연 옆으로 떨어져 언덕이 되었고 머리는 바위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사람들은 방화수류정 밑의 바위를 용두암이라 부르고 못은 용연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용연을 보고 다시 북암문으로 들어와서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서니 북수문인 화홍문 앞에 도착합니다.

화홍문(華虹門)

화홍문은 북수문입니다.

수원화성에는 수문이 2곳이 있는데 북수문인 이곳 화홍문과 남수문이 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북수문은 수원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으로 일곱칸의 홍예문 위에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지은 누각으로 화홍문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곳입니다.

화홍문의 본래 목적은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물이지만 평소에는 주변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곳 화홍문과 화홍문 아래로 7개의 홍예로 급류가 떨어지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풍경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하는데 화홍관창이 수원팔경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화홍팔경을 구경하며 이 풍경에 매료된다고 합니다.

수원화성을 축조한 후 정조임금은 화성 춘8경과 화성 추8경을 각각 정했다고 하는데 화홍문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를 홍저소련(虹渚素練)을 추8경의 하나로 정했다고 합니다.

봄과 가을 각각의 8경이 있었는데 이원규라는 사람에 의해 수원팔경으로 바뀌며 홍저소련(虹渚素練)이 화홍관창(華虹觀漲)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화홍문 안내판 아래는 일제강점기 때 문루가 유실되고 홍예만 남아 있는 사진을 실었는데 현재는 예전의 모습을 복구하여 최고의 비경을 갖추었습니다.

장마때 물보라는 아니지만 수량은 제법 많은 편으로 힘찬 소리를 내며 하염없이 물을 쏟아내고 있는 화홍문은 우측으로 조금전 내려선 방화수류정과 하나가 되어 비경을 연출합니다.

아래쪽에서 한동안 화홍관창에 눈을 떼지 못하다가 화홍문 누각으로 올라갑니다.

2층으로 된 누각은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마루바닥으로 번거로움이 있어 올라가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올라가서 성밖과 성안의 경치를 볼 것 후회스럽습니다.

누각 양옆으로는 해태석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에 해태석상이 있는 것은 의외였는데 서울특별시의 상징인 해태는 불귀신과 잡신을 물리친다고 하니 이곳 화홍문에 화마가 접근하지 목하도록 해태석상을 설치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화홍문을 구경하고 다시 성곽을 따라 이동합니다.

화홍문에서3분을 이동해 시설물에 도착하니 이곳은 북동포루입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하단은 돌로 쌓고 상단을 벽돌로 쌓았으며, 망루 간의 간격이 화포의 사거리 이내로 서로 엄호가 가능하며, 이전 조선의 성들과는 다르게 망루가 성 내부에 있다고 합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외부에 독립된 형식으로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에서 독립된 망루를 점령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쏘았다고 합니다.

화성에서 보는 시설 중 하나인 포루(砲樓)는 정약용이 설계를 했지만 정약용 이전에 포루를 기획한 사람은 류성룡으로 징비록에 의하면 1592년 수원화성에 설치한 포루와 비슷한 포루의 구조를 적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당대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원화성에는 포루(砲樓) 5곳이 있습니다.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와 북쪽에는 이곳 북동포루와 북서포루가 있는데 이곳에서 말하는 포루(砲樓)는 포나 총을 갖춘 감시초소를 말하며 지나온 동북포루(東北舖樓) 같이 병사들이 쉬는 공간인 포루(舖樓)가 아닙니다.

성안에서 보면 보통의 건물이나 정자같이 보이지만 성밖에서 보면 3층으로 성벽에서 튀어나오게 짓는 건축물로 1~2층은 총이나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이고 3층은 병사들이 감시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북동포루는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서 구경을 할 수 없으므로 빠르게 지나칩니다.

북동포루에서 2분 정도 이동하면 장안문과 붙어있는 북동치와 북동적대가 있습니다.

북동치(北東雉)

북동치는 북동쪽에 있는 치성을 뜻함입니다.

치성은 본성이나 성벽에 별도로 붙여지는 작은 성으로 이곳 치성은 장안문이나 장안문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는 꿩의 뜻이지만, 담장의 뜻도 있는데 여기서는 담장의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수원화성에는 8곳의 치가 있는데 이곳 이외, 동쪽 평지에 3, 서쪽 산악에 3곳이 있고, 서남암문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경사진 곳에 남치가 있습니다.

안내문을 참고하면 이곳 북동치는 장안문을 방어하기위해 다른 곳과 달리 치성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성안에서 볼 때는 동북치의 위상을 느낄 수 없는데 밖에서 볼 때는 치성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동북치는 장안문을 지키는 종요한 시설물로 총안을 설치해 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였는데 총안은 성곽에 총을 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구멍을 말합니다.

동북치는 동북적대와 붙어 있습니다.

북동적대(北東敵臺)

수원화성에 적대는 장안문 좌우로 2, 팔달문 좌우로 2곳으로 총 4곳을 두었는데 팔달문 좌우에 있었던 남동적대와 남서적대는 현재 사유지로 복원하지 못한 상황으로 현재는 장안문 좌우로 이곳 북동적대와 서쪽으로 북서적대가 있습니다.

동북적대로 올라서면 성곽에서 밖으로 돌출되게 쌓은 치성에 좌측으로 巡視(순시)라는 깃발과 우측으로는 ()의 깃발이 있는데 철저한 경계를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중안에는 화포가 1문 놓여 있는데 화포 안내문에는 홍이포라고 하는데 홍이포는 중국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포로서 성곽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다, 라고 합니다.

북동적대룰 뒤로하고 성곽으로 된 다리를 지납니다.

아래는 정조로로 수원의 중심도로가 지나는데 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이 지나는 성곽 다리를 건너면 수원화성 장안문으로 성곽과 연결된 곳은 누각2층입니다.

3층 팔작지붕으로 지은 장안문 2층은 중앙에 넓게 마루가 놓였으며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출입을 금하고 있는데 마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성곽을 따라 화서문 방향으로 직접 가도되는데 아무리 급해도 장안문의 실체를 아래서도 보아야 하므로 1층으로 내려서는데 1층으로 내려서는 계단이 높고 가팔라 위험하므로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장안문으로 내려서서 성안에서 성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가서 장안문을 보며 정조가 마음속으로 그렸던 수원화성을 생각합니다.

창룡문에서 장안문까지 트래킹거리2.06km, 소요시간40, 해발57m, 현재시간 1425분입니다.

 

장안문에서 화서문 구간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으로 수원화성의 4대문 가운데 이곳 장안문은 팔달문과 함께 수원성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반원형의 옹성을 거느리고 있으며 수원화성의 정문이 되는 곳입니다.

수원화성 4대문 중 장안문은 팔달문보다 10일 먼저 늘 공정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정조가 현륭원 행차할 때 반드시 지나는 문으로 중요시되기 때문에 제일 먼저 공사가 이루어 진 것 같습니다.

정조의 홍재전서 일득문에 각 성문의 명칭과 유래에 대해 적었는데 북쪽에 있는 북문에 대해서는 이러합니다.

長安門, (장안문은)

北望京關 (북으로 서울 대궐을 바라보고)

南聸園寢 長報萬年之安也 (남으로 원침을 우러러보니 장보가 만년 평안하리라) 했으니 장안문이라는 문 이름은 수원화성의 정문으로 만년을 두고 평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도성에도 4대문이 있는 것처럼 수원화성에도 4대문이 있습니다.

서울도성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 숭례문으로 흔히 남대문으로 불리는데 그러면 수원화성도 정문이 남문이 팔달문이 맞는 것일까요?

저는 당연하게 팔달문이 정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원화성 정문은 이곳 장안문입니다.

어찌 남문이 아닌 북문이 정문이 되었을까?

임금이 거하는 서울은 수원의 북쪽에 위치하므로 정조임금이 수원성으로 올 때면 남문으로 출입하는 것이 아니고 북문으로 출입하게 되므로 임금이 후문으로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북문을 정문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팔달문보다 장안문이 더 크다고 합니다.

수원화성을 건립하면서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며 중요한 요충지로 여긴 이곳 장안문과 팔달문을 먼저 짓고 다음해에 창룡문과 화서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장안문은 문루를 2층으로 만들고 우진각 지붕으로 처마에는 잡상을 5개 설치했습니다.

성안에서 장안문의 장엄한 모습을 보고 홍예문으로 들어서서 천장(개판)을 보니 창룡문에는 한 마리의 청룡을 그린 것과 달리 이곳 장안문에는 청룡과 황룡이 구름속에서 유영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석축 곳곳에는 조금씩 패인 흔적이 나있는데 아마도 한국전쟁 때의 총탄자국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품격있는 개판을 보며 홍예문을 빠져나가면 반원을 그린 큼지막한 옹성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옹성은 본 성의 성문을 보호하고 경계하는 역할을 하는데 수원화성에는 4대문에 옹성을 두고 있는데 이곳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가 크고 반원형입니다.

옹성의 반원형의 석축을 따라 장안문의 파괴와 복원에 대한 안내와, 장안문의 변천사, 한국전쟁 때 훼손된 사진, 장안문 건립 당시 감독과 석수 등 관련자들을 새긴 돌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옹성의 작은 홍예문 천장에는 한 마리 청룡이 그려져 있고, 옹성 홍예문에서 보는 장안문의 위세는 당당해 보였습니다.

옹성 밖으로 나가면 서쪽으로 성벽을 등지고 넓은 잔디광장이 펼쳐지며 잔디광장에서 보는 장안문은 옹성과 어우러져 웅장하면서 아름다움을 갖추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삭축 곳곳에 총탄자국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전쟁 때 장안문의 훼손은 반파된 문루는 무너지고 홍예의 형태까지 더 심하게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수원화성의 4대 문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게 장안문이라는 것입니다.

심각하게 훼손이 되었던 장안문은 의궤에 나오는 대로 1975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안문 밖에서 옹성을 통해 장안문 안으로 들어서서 계단을 올라 장안문 문루로 올라섭니다.

장안문에서는 옹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놓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옹성으로 나갑니다.

옹성 홍예문 위에 북옹성 안내문이 있는데 안내문에 오성지에 대한설명이 있습니다.

옹성은 반원형으로 만들고 중앙에는 옹성문을 만들었는데 의궤에 의하면 옹성에는 문루를 두지 않았는데 현재는 문루가 있는 것을 보면 후대에 문루를 만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초 옹성문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제도를 적용해 수조를 만들어 물을 담아두었다가 화공이 있을 때 구멍으로 물을 붓는 구조로 만들었으나 옹성에 문루를 세우며 수조시설이 사라지고 구멍만 남아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오성지는 화재에 대비한 소방시설로 당시에는 획기적이었을 것인데 홍예문 위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오성지라고 하여 물을 담는 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는데 복원을 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궁궐 큰 건물 앞에는 드므라는 것이 있는데 드므는 청동으로 만든 큰 통에 물을 담아두면 불을 놓는 귀신이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나므로 불이 나지 않는다는 주술적 의미가 담긴 소방도구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드므가 아닌 오성지라는 소방기구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하는데 오성지는 5개의 구멍이 뚫려있는 통이라고 하는데 돌로 만들었는지, 청동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며 빨리 원형으로 복원하면 좋겠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문 본체도 아닌 옹성에 소방시설을 갖춘 성은 세계적으로 이곳 수원화성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장안문 옹성을 보고 나와 성곽을 따라 1분 정도 이동하면 시설물이 나오는데 북서적대입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는 장안문을 가운데 두고 북동적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북서적대 안에는 복동적대와 같이 화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북서적대를 뒤로하고 성곽을 따라 2~3분 이동하면 성곽 옆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여름철 더위를 피해 쉬어가기 좋은 곳이 나오며 느티나무 맞은편에는 수원화성 시설물이 있는데 북서포루가 있습니다.

북서포루(北西砲樓)

포루에 대해서는 동북포루를 지나며 설명한 것과 같이 수원화성에는 5곳의 포루가 있으며 이미 북동포루를 지나왔고 이곳이 2번째 포루로 앞으로 3곳의 포루가 남아 있습니다.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화포를 설치한 시설로 평탄한 지역에 있으므로 다른 곳 보다 높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곳 성안에서는 포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문틈으로 보았을 때 적대에 안치한 화포는 없는 공실로 이곳에서 조금 지난 위치에서 담장 너머로 외관을 볼 수 있는데 1층과 2층에서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북서포루에서 성곽을 따라 2~3분 이동하면 또 다른 시설물이 나오는데 북포루입니다.

북포루(北舖樓)

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습니다.

지나온 북서포루는 화포를 쏠 수 있는 포루인 반면 이곳 북포루는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로 정자형태로 설계되었고 성벽 방향을 제외한 3면이 사슴뿔이 달린 도깨비형상의 그림이 있습니다.

콧부리와 콧구멍은 화살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안에서 적을 볼 수는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도록 설계를 하여 경계나 전투에서 유리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도깨비형상의 도안은 지나온 동북포루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사진으로 보면 동북포루의 벽면은 고정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곳 북포루의 도깨비형상이 그려진 면은 창문으로 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자료에는 들어열개문으로 밖으로 들어서 걸치게 설계된 것 같은데 같은 성에 포루인데 서로 다르게 설계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가는 점입니다.

복원을 하면서 들어열개문으로 복원을 해야 하는데 고정벽면으로 복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과 2곳 모두 고정벽인데 사진으로 보므로 서로 다르게 본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북포루 역시 성안에서는 3층만 볼 수 있지만 성밖에서 보면 창문이 없이 벽면에 구멍만 있는 1층과 2층을 볼 수 있습니다.

북포루에서 성곽을 따라 2분 정도 지나면 화서문이 나오고 화서문 우측으로 높은 건축물이 나오는데 이곳이 서북공심돈입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은 수원화성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던 시기에 완성된 건축물로 3곳의 공심돈 중 가장 먼저 만든 공심돈으로 대한민국 보물 제171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4면 벽체를 구성하면서 3층 내부를 사다리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고 성곽을 접하는 부분은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4면은 돌출되어 완전히 노출되었습니다.


수원화성 성역의궤에 의하면 백돌로 
3면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두었으며 많은 구멍을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고 안에서 활이나 포를 쏘아도 적들은 화살이나 총탄이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모르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심돈 상층의 정자형태의 건물의 창문에는 사슴뿔이 달린 도깨비형상(수면문양)은 고정된 판자가나 벽면이 아니고 들어열개문으로 문은 안에서 밖으로 열게 만들었으며 화살구멍인 전안은 열쇠형태로 만들었으며 하층 중층 상층으로 남면을 제외한 3면은 성밖으로 돌출되게 만들어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도깨비형상(수면문양)이나 홍예문의 태극문양은 현재 서북공심돈에 그려져 있지만 의궤에는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볼 때 처음에는 서북공심돈에는 태극문양과 수면문양이 없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북공심돈에 대한 설명은 길게 했지만 실제 현장에서 보면 크게 설명할 부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가서 만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외관도 성밖에서 볼 때 보다 멋스러운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서문에는 무슨 공연을 하려는 것인지, 촬영을 하려는 것인지, 야간조명을 위한 설치공사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잡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화서문 2층을 올라갔다가 내려왔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뭐가 그리 바쁜지 바로 1층으로 내려섭니다.

창룡문에서 화서문까지 트래킹거리2.72km, 소요시간60, 해발52m, 현재시간 1445분입니다.

 

화서문에서 서장대 구간

화서문(華西門)

화서문은 수원화성의 서문으로 수원화성의 4대문 가운데 이곳 화서문과 팔달문이 건립 당초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조선시대 목조건축과 성곽 건축의 귀중한 문화재로의 가치를 인정 받아 대한민국 보물 제403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조의 홍재전서 일득문에 각 성문의 명칭과 유래에 대해 적었는데 서쪽에 있는 서문에 대해서는 華西門 辯其方也(화서문 변기방야)라 하여 화서문은 그 방위를 알리도록 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다른 문과 달리 서쪽이라는 방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조임금은 수원화성에 대한 집착이 강해 10년을 예상했던 화성 공사를 29개월만에 모든 시설을 준공하고 다음 달에 낙성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수원의 4대문 중 팔달문과 장안문을 만들고 다음해에 창룡문을 만든 뒤 마지막으로 이곳 화서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의궤에 의하면 화서문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창룡문과 같다.’라고 기록하였고, 행궁과는 460보 떨어져 있으며 행궁 좌측에 있으며 성의 서문이라고 했습니다.

화서문 옹성에 대해서도 창룡문과 같으며 안과 바깥 모두 높낮음이 없는 평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총을 쏘는 구멍인 방안총혈이 19,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인 사혈을 6개 뚫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화서문은 1975년 수원화성 복원정화사업 이후에는 성곽 주변 민가가 정비되면서 관광객이 늘어났으며 수원화성 200주년이 되는 1996년 수원성 일주도로 수립하였습니다.


화서문 안에서 육측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갑니다
.

홍예문을 지나는 바닥은 박석이 깔려 있는데 박석의 색깔이 판이하게 다르고 박석과 박석사이가 너무 떨어져 있고, 사이 공간이 시멘트로 메운 것이 형식만 갖추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천장에는 청룡이 한 마리 그려져 있는데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보면 청룡은 동문에 있고, 서문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는데 이곳 수원화성은 4대문을 모두 청룡으로 그렸습니다.

육측으로 나가면 옹성이 화서문을 감싸고 있으며 문루에는 華西門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는데 원래 현판은 수원화성을 지휘한 채재공이 쓴 것이라고 하는데 전란을 겪으며 유실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밖에서 보는 홍예문과 화서문 문루를 받치고 있는 화서문 석물은 누렇게 변색이 된 것이 역사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좋습니다.

여기서 화서문의 과거를 사진으로 보겠습니다.

위 사진은 국가유산청의 간행물에서 발취한 사진입니다.

옹성 가까이에 아름다운 여성이 혼자 있다가 저를 보고 자청해서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니 너무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옹성을 빠져나와 화서문 전체를 보니 이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습니다.

화서문과 화서문을 감싸고 있는 옹성, 그리고 좌측으로 서북공심돈이 너무도 멋있게 보입니다.

옹성은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문 외부로 둘러친 성벽으로 본 성의 크기에 따라 규모도 다르다고 합니다.

옹성(甕城)의 한자는 독(항아리)을 의미하는 , 성을 의미하는 입니다.

옹성은 그 생김이 마치 독을 쪼갠 형태와 같아 옹성으로 부르는데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의 중요성이나 취약점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옹성을 만드는데 수원 화성은 4대문에 모두 옹성을 만들었습니다.

박제가는 옹성은 아름다움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견고함에 있으며 적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중문(重門)에 옹성이 없으면 성이 없는 것과 같으므로 옹성을 쌓을 수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

수원화성을 대표하는 사진은 이곳 옹성이 딸린 화서문과 옆에 높게 세운 서북공심돈과 조화를 이룬 사진이 될 것입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한동안 화서문에서 시간을 보내고 길을 건너 성곽을 따라 나섭니다.

화서문에서 밋밋하게 지속되는 오르막으로 3분 정도 이동하면 쉬어가기 딱 좋은 정자가 같은 건축물이 나오는데 이곳이 서북각루입니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이미 기록한 바와 같이 수원화성에는 4곳에 각루를 두고 있는데 이곳 서북각루 이외에 지나온 동북각루와 서남각루, 동남각루가 있는데, 각루란 주용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이곳 서북각루는 화서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중요한 곳에 위치합니다.

이곳 서북각루 입석 옆에 굴뚝을 보고 의아한 생각을 했는데 안내판을 보고서여 굴뚝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었는데 서북각루는 2층으로 아래층은 온돌로 만들었으며 우리가 보는 2층은 마루를 깔았습니다.

안내판에 있는 옛사진을 보면 2층 누각에 들어열개문을 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문이 없는 개방형 정자형태로 바뀌었습니다.

2층 누각에는 여러 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2층으로 올라가려면 신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그냥 지나칩니다.

서북각루를 지나 성곽을 따라갑니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곽을 따라 순시(巡視), ()을 쓴 흰 깃발이 펄럭입니다.

성곽 트레킹을 시작할 때는 하늘색 깃발에서 장안문으로 오면서 검정색 깃발로, 그리고 화서문을 지나며 지금은 흰색 깃발인데 깃발의 색이 바뀐다는 것은 병사들의 경계구역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서북각루에서 1분을 지나 서일치가 있습니다.

서일치(西一雉)

이곳에서 치() 꿩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담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건 제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수원화성에 치성(雉城) 8곳을 두었는데 팔달산을 오르며 서1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2치가 있고, 서장대를 지나 서3치가 나옵니다.

치는 치성을 말하는 것으로 치는 성벽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는 담당하는 시설로 지형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다르며 팔달산에 치성이 3곳이라는 점은 경계의 중요성이 있는 곳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서일치에서 2분을 지나면 서포루가 있습니다.

서포루(西砲樓)

수원화성에는 화포를 배치하는 포루를 5곳 두고 있는데 서포루는 화성 남쪽 팔달산 중턱에 위치합니다.

포루는 화포가 있는 방어시설로 성곽에서는 3층 누각만 볼 수 있는데 밖에서 보면 1층과 2층이 있으며 1~2층에는 활이나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이곳 서포루는 산지에 있으므로 평지에 있는 북서포루나 북동포루에 비해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서포루에서 3분을 이동하면 서2(西二雉)가 나오고 서2치에서 2분을 올라 서노대와 서장대가 있는 팔달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창룡문에서 장안문과 화서문 경유 팔달산 서장대까지 트래킹거리3.50km, 소요시간1시간17, 해발144m, 현재시간 1502분입니다.

 

서장대~팔달문~창룡문 구간은 2편으로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