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100산산행기

덕숭산 산행기

범솥말 2025. 4. 17. 11:30

산림청 선정 명산100산과 200산연계산행하기

 

산행일시: 20130129

누구와: 나 혼자

산행거리: 14.5

산행시간: 7시간00(10:50~17:50)

산행코스:상가리들머리(10:50)-옥양봉(11:45,621m)-석문봉(12:30,653m)-가야선정상(가야봉,678m,13:20,식사30)-헬기장(14:05)-원효봉(14:30.608m)-시량리원효봉날머리(15:25,)-둔리고개(15:45)-덕숭산정상(16:40,495.2m)-수덕사대웅전(17:35)-수덕사주차장(17:50)

 

가야산 들머리 상가리 찾아가는 길

덕산도립공원에는 산림청 선정 명산100산에 들어 있는 덕숭산과 200산이 들어 있는 가야산이 지척에 있어 한 번에 두 산을 연계 산행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산행 전 면밀히 검토를 마치고 먼저 가야산으로 오른 뒤 덕숭산으로 마무리 한다는 일정으로 실행에 나선다.

가야산을 가기 위해서는 덕산면 상가리를 들머리로 잡아야 하므로 용산에서 출발하는 장항선에 0623분에 탑승을 한다.

가야산 들머리인 덕산면 상가리는 하루에 버스가 4번밖에 들어가지 않는 곳으로 교통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산행기를 아무리 뒤적여 봐도 속 시원한 정보가 없었고 일단 덕산으로 가기로 하고 예산, 삽교, 홍성 3개역 중 어디서 내려서 가는 것이 좋은가를 생각하다 예산에서 내린 시간은 오전 0812분이었다.

<예산역>

역을 나와 길가에서 주민에게 터미널을 물어보니 약7~800m 떨어진 곳에 있다하여 부지런히 걸어 터미널에 도착하니 시간은 830분을 조금 넘었는데 상가리로 직접 가는 버스가 0905분에 있다하여 30여분을 기다려 예산 군내버스 539번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이 버스는 예산 읍내를 금오산자락 밑으로 한 바퀴를 돌더니 예산역(예산역에서 나오면서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승차장이 있다)0921분에 도착을 했는데 이러한 정보를 알았더라면 예산역에서 1시간 휴식이나 취했더라면 좋았을 걸...........

예산을 떠난 버스는 국도를 타고 오가를 지나 덕산 농협 앞에 일찌감치 도착해 잘 됐다 싶었는데 이 버스가 갑자기 덕산을 벗어나 홍성으로 달리자 다급해져서 기사에게 물어보니 도청을 갔다 오도록 노선이 변경되었다는데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이 이곳 홍성으로 이전되어 올해 시무식을 새로운 청사에서 가졌으며 직원들은 아직 이사를 채 오지도 못하고 있다는 얘기로 홍성과 예산이 도청 유치 싸움이 붙어 결국은 홍성과 예산 경계에 세우며 도청은 홍성 땅에 도의회는 예산 땅에 세우게 되었다고 하는데 쓰레기나 원전 같은 시설물 설치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럴 때는 자기 지역으로 끌어 들이여고 목숨을 걸었다 생각하니 지방자치제의 한계와 이러한 체제에서 비롯되는 님비현상을 볼 때 남들에게 욕을 먹을지언정 난 옛날 반 독재주의, 다시 말해 한국적 민주주의가 마음에 든다.

수암산 아랫자락 황량한 들판에 새로 들어선 충남도청을 지나고 한동안을 더 가서 용봉산 아래에서 회차하여 잠시 정차했다가 다시 덕산으로 오다 보니 길가에 버린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덕산 농형에 다시 도착해 골목길을 따라 돌고 돌아 헌종의 태실이 있는 소나무 숲으로 둘러친 덕산저수지를 따라 가야산 아래 마을인 상가리에 도착한 시간은 1040분이었다.

<예산군배버스 539---상가리에 도착한 모습>

나는 오늘 상가리를 오면서 길바닥에 버린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에 누군가 이글을 읽고 상가리를 찾아 가는 사람이 있다면 홍성이나 예산에서 덕산가는 버스는 비교적 많으므로 버스로 덕산을 가서 택시로 이동을 하는 방법을 강추하는데 그럴 경우 시간을 30분 이상 절약할 수 있으나 비용은 택시비 약4.000~5.000원 정도 더 드는데 그래도 이러한 방법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가리에 내리니 대형버스에서 산행팀이 줄을 지어 내리기에 심심하지 않은 산행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연군묘로 향한다.

 

남연군은 누구인가?

남연군은 고종의 할아버지가 된다.

<남연군의묘---좌측에 가야봉 중계탑이 보인다>

남원군 이구는 이하응의 아버지로 원 뿌리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세손인 이병원의 둘째아들이다.

가문을 중요시 여기던 이조시대에는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두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가문을 중시 여긴 때라 가문을 잇기 의함 이었는데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신군이 숙종의 여섯째 아들 연령군의 손자로 입양되었고 은신군이 죽자 이구가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이 된 것이다.

남연군은 183648세로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연천땅 남송정에 묻혔었는데 남연군의 넷째아들인 이하응이 당대 최고의 지관인 합천출신의 정만인이라는 사람에게 명당을 부탁했는데 이에 정만인은 2곳을 알려주었는데 한곳은 덕산땅 상왕산 동쪽에 2대에 거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와 광천땅 오서산에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하자 이하응은 안동김씨 세력에 밀려 절치부심하며 지냈던 옛일을 떠 올리며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덕산땅 2대에 거쳐 왕이 날 자리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2대에 거쳐 천자가 나는 자리라는 명당 터는 당시 무척이나 큰 가야사 절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을 탐낸 대원군은 아버지를 이장하기위해 주지스님과 은밀하게 결탁하여 절에 불을 질러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고 탑이 서있던 자리에 그의 아버지를 이장하곤 관위에 석회석으로 돌보다 더 단단하게 덮은 후에 봉분을 만들었다 한다.

7년 후 아들을 낳았고 그가 12살 되던 해 철종이 후사 없이 죽으므로 이하응은 효명세자(추존왕 익종)의 비인 조대비에게 접근해 안동김씨를 타도하는데 합의를 보고 지기의 아들 명복이 효명세자의 대통을 잇게 하였으니 가 왕위에 오르니 고종이고 그 다음이 조선왕조 최후의 왕인 순종이 된다.

내가 남연군묘를 찾았을 때는 남연군묘에 얽힌 가야사 유적발굴을 위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날씨가 추워 일시 발굴 작업을 중지한 상태 같았다.

<가야사터 유적발굴 현장 >

 

남연군묘소와 흥선군의 가야사 방화사건

1845년 풍수지리의 신봉자인 흥선군이 충청도 덕산땅 가야골에 2대의 왕기가 서린 명당자리가 있다는 풍수가 정만인의 말을 듣고 가야골을 방문했다. 정만인이 가르키는 자리는 천사백년 고찰인 흥선군은 충청관찰사에게 뇌물을 주고 가야사를 폐절 시킨 후 마곡사 승을 불러 불을 지르라 강요하여 가야사를 소각시켰다.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가야사를 방화한 승려가 사동리고개를 채 넘지 못하고 불길이 충천하는 가야사를 쳐다보다가 돌연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불이야! 불이야!』소리를 지르다가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사망했다 전하는데 1950년 당시 90여세 노인들의 증언이라 한다.

가야사의 대웅전 철불이 불에 녹아 볼쌍스럽자 민망하였던지 흥선군이 인부들로 하여금 대문동 길옆 미륵불 아래 묻었는데, 수년 후 봉산면 봉명리에서 판자부리(무쇠를 녹여 가마솥을 만드는 일)를 하는 인부들이 캐내어 가마솥을 만들었으나 하루가 지나자 그 가마솥은 가루가 되어 버렸다 한다. 탑을 부술 때 뇌성병력과 함께 소나기가 무섭게 퍼부으자 인부들이 무서워하며 슬금슬금 물러서기에 흥선군이 직접 도끼를 들고 『이 나라 이 땅은 모두 이씨의 땅이고 이씨의 나라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이씨의 것 이어늘 탑신 너 어찌 방해를 하는가 썩 물러서라』하며 도끼로 탑을 내리치자 이로부터 탑이 부서지기 시작하였다 한다.

황매천의 야록에 의하면 탑이 부서지자 그 속에서 백자그릇 두개와 단차 두 덩어리 또 사리죠 3개가 나왔는데 그 구슬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하였고 맑은 물에 담겨 있었으며 푸른 기운이 영롱하였다 한다. 흥선군은 탑을 부숴버린 후 경기도 연천에 있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뒤편으로 절의 금탑이 서 있는 자리로 옮겨 이장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남연군의 유해는 연천에서 이곳까지 상여로 운구하였는데 남연군의 상여가 지나는 지방의 동리사람들은 왕손이 자기네 동네를 지나니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기네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서로 다퉈 상여를 메어 운구를 해주었다는데 남연군의 상여는 이렇게 동리마다 사람들이 릴레이식으로 운구하여 덕산까지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으며 최종 마지막으로 남연군의 유해를 운구한 사람들은 현재의 덕산면 광천리 사람들로 선소리 구성지게 때로는 애처롭게 요령소리에 발 맞춰가며 행여라도 고인께서 편치 않으실 세라 조심조심 정성을 다 하여서 운구를 마쳤다.

이에 흡족했던 흥선군은 이 상여를 마지막 주자인 광천리사람들에게 포상으로 기증했는데 그 뒤 광천리 사람들은 죽으면 왕손이 처음으로 탔던 영광스러운 그 상여를 타고 마지막 이승 길을 떠났다.

광천리 사람들이 백 여 년 이상을 사용한 그 상여는 현재 역사적 가치가 있다 하여 지방정부에서 지방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하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덕산면 광천리 도로변에 보기 좋게 상여막을 지어 잘 보관하고 있다.

 

남연군묘는 밑에서 보니 흡사 왕릉과 다를 바 없이 묘역을 조성하였고 분봉이 있는 곳으로 올라서 묘를 보니 천하의 명당이라는 말이 나옴직한 곳으로 모산은 어느 산이 되는지 알 수가 없으나 주산은 가야산 석문봉으로 삼았다는데 묘지 뒤는 옥양봉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좌측과 우측의 능선이 청룡과 백호의 흐름이 명당에 손색이 없었으며 묘지 양쪽에 세운 망주석에는 왼쪽(남쪽) 망주석에는 올라가는 세호가 오른쪽(북쪽) 망주석에는 내려오는 세호가 새겨져 있으며 그 가운데 석등인 장명등이 있고 그 뒤 옆 양쪽으로 석양이 있으며 묘지 가운데는 대형 혼유석이 놓였으며 묘지 분봉을 둘러친 병풍석은 12지의 문양이 없는 일반 돌에 불과했으며 묘지 뒤로 담장은 두르지 않았는데 특이한 점은 당상관 묘에도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없었는데 당시의 실세였던 이하응이 자기 부친의 묘를 이렇게 가꾸었다는 것은 의외로 예상보다 검소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망주석은 영혼이 지기의 유택을 찾아오게하는 안내역할과 자손발복의 생식기 신앙을 상징한다.>

<장명등은 묘지앞에 있는 석등을 말하는데 불을 밝혀 사악한 잡귀의 접근을 막는 수호기능을 상징한다.>

<묘지앞에 사가의 큰 돌을 혼유석이라 부르는데 혼유석은 묘의 주인인 혼이 밝으로 나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석양은 묘 주인의 명복을 빌고 귀신이나 잡귀들을 물리치는 벽사역할을 한다.>

눈여겨 볼 것은 망주석과 장명등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갖가지 돌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군자인 매화, , 국화, 대나무로 이루어진 사군자인데 살아서 사군자를 좋아했던 이하응의 내면을 아버지 묘역에까지 남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연군묘를 구경하는 사이 대형버스에서 내린 산행팀이 들머리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남연군묘를 내려서 그들 뒤를 따라 들머리 앞에 선다.

직진방향은 옥양봉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옥양폭포를 지나 석문봉으로 오르는 길이 되는데 나는 옥양봉으로 가야하므로 직진으로 길을 잡았는데 산행팀은 들머리에서 시산제를 지내는 듯 보였는데 그냥 지나쳐 산행을 시작한다.

 

육관도사 손석우의 묘도 이곳으로

과연 상가리가 명당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당인가보다.

왕비가 날 자리라하여 망우리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 할아버지의 묘를 용인 금박산 정상에 이장하라고 이장을 하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선 전 손석우가 이른대로 하이도에 있던 부모의 묘를 용인 묘봉리로 옮겨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손석우가 자신이 묻힐 최고의 명당을 남원군묘에서 약1km로 떨어진 곳, 석문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곳, 옥양폭포 근처로 잡았다는 점이다.

손석우는 이 자리를 잡고 그의 아들에게 묻힐 이유를 설명했다고 하는데 "묘지 앞에는 못이 있는 이곳은 북두칠성의 기운을 한 몸에 받는 곳으로 북두칠성에서 천사가 내려와 이 못에서 목욕재계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이 못에는 용들이 살고 위로는 병풍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남성의 힘찬 심벌과 같이 생겼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가야산 산 이름에 대한 이야기

<옥양봉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능선>

1973년 가야산은 덕숭산과 함께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가야산은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충남 서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주봉인 가야봉(678m)을 중심으로 원효봉(608m), 옥양봉(621.4m) 등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는데 가야산의 유래에 대해서는 천지가 개벽했을 때 가야산에 개 한 마리 들어갈 구멍밖에 없어서 개산이라고 불렀고 이 마을 이름이 갯골이라고 하였는데 개산이 나중에 가야산이 되었다는 것이 상가리 마을 전설이며 서산 쪽은 전설이 다르다는데 가야산 석문봉에는 돌문이 열려있어서 개문산(開門山)이라 했고 나중에 개산으로 불리다가 어느 때부터 가야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가야는 순 우리말로 산자락과 들판에 형성된 마을을 뜻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산자락과 들판에 형성된 마을의 큰 산을 의미하는 뜻으로 가야산으로 불리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다른 이야기로 불교계에서는 가야의 뜻을 살펴보면 절을 가람(伽藍)이라고도 하는데 한자로 는 절을 뜻하는데의 어원은 고대 인도어 산스크리트어 가야[Gaya]에서 나온 말로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우침을 얻은 지명(地名)이라고 하니 절과 관련한 명산을 뜻하는데 지금은 송신탑이 세워진 가야봉을 옛날에는 가섭봉(迦葉峰)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가섭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한다.

가야산은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으로 상가리에서 볼 때 맨 우측은 옥양봉이며 두 번째는 석문봉으로 이곳은 금북정맥이 지나는 곳으로 가야봉으로 올라선 정맥 길은 석문봉을 지나 일락상으로 지나가므로 가야산 2개봉이 정맥에 속해 있기도 하다.

석문봉에서 좌측으로 중계탑이 있는 봉은 가야산의 주봉으로 가야봉 또는 가사봉이라고 하며 맨 좌측 봉은 원효봉이라고 하는데 별개의 산과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으나 덕산도립공원이라는 큰 개념으로 볼 때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옥양봉으로 오르는 길

<옥양봉의 모습>

대중교통은 상가리에서 끝나고 더 이상 가야산이 막혀 갈 수가 없는데 이 마을의 오랜 숙원인 서산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개설하기로 결정이 되었다고 기뻐하던 버스안에서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그러나 상가리 종점에서 편도 1차선의 길이 포장과 비포장길로 이어지는데 이 길은 보덕사와 옥양봉아래 있는 관음전으로 가는 길이 되는데 옥양봉으로 가기위해서는 관음전으로 가는 길로 가야하는데 숲속으로 나있는 길은 비교적 넓고 완만한 편안한 길인데 얼마 전 눈이 올 때 중부지방에 많이 내렸다고 하더니 아직도 눈이 있고 녹다가 다시 얼어붙은 빙판 길이라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미끄럽지만 조심을 하며 한동안을 오르다보면 넓은 광장을 마지막으로 길은 좁고 가파르며 계단이 수없이 나타나는데 넓은 광장에는 모노레일 궤도가 있는 것으로 위쪽에 있는 관음암에 필요한 생필품을 이곳까지 자동차로 실어와 이곳에서 모노레일 통해 관음암으로 나르는 것 같았다.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는 곳 옆 평상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나이가 좀 든 남녀가 벌써 소주판을 벌리고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일행 중 일부는 산을 오르고 있는 것 같이 보였는데 산행을 마친 후 기분을 풀어야지 산행하기 전부터 술판이라..... 산행문화도 이제는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옥양봉을 오르는 철제계단>

처음에 완만했으므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 옥양봉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며 자연석으로 설치한 계단과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새로 설치한 데크계단을 번갈아 오르며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좌우로 기암들이 즐비하여 보기에 좋았으나 잡목을 정비하지 않아 카메라에 담을 수도 없었고 경치 좋은 자리에 포토라인도 설치되지 않아 아쉬움을 느끼며 어렵게 올라서 옥양봉 정상에 도착했다.

옥양봉의 정상은 전면으로 바위로 이루어진 절경이나 뒤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은 민둥 능선이며 이정목이 세워져 있으며 우측으로는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많은 표식리본이 매달려 있다.

눈이 있어 미끄러운 가운데 절벽위 바위에 올라서 사방을 조망하며 정맥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어림잡아 가늠해 보기도 하고 멀리 상가리 마을부터 올라온 길을 더듬어 보며 멀리 수암산과 용봉산은 날씨가 좋지 않아 기암으로 이루어진 멋있는 풍경은 볼 수 없으며 가야할 석문봉과 반은 구름에 쌓여 있는 정상을 바라보고는 이동할 채비를 한다.

 

석문봉으로........

<옥양봉을 내려서며 본 가야할 능선>

옥양봉 정상에서 석문봉 방향으로 조금 이동을 하면 정상부부터 한동안 아래까지 긴 데크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은 얼었던 눈이 녹느라 미끄럽고 위험하여 지남 산행 때 한쪽을 분실해 한쪽밖에 없는 아이젠을 착용하고 조심스럽게 내려섰는데 이곳에 계단을 설치하기 전에는 상당히 위험했을 것으로 그 비경도 아름다웠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긴 데크계단을 내려서면 크게 위험한 곳은 없으며 간간이 좌측으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3거리가 나오고 그런 곳에는 안내판과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으며 좌측으로 오르는 길과 만나며 옥양봉을 생략하고 석문봉을 오르는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산행을 이어간다.

미끄러운 눈과 빙판길은 계속 이어지고 그나마 한쪽이라도 아이젠을 착용하니 마음으로 안심이 되었고 빙판이 있는 곳에서는 힘주어 땅을 밟아 미끄러짐을 방지하며 그렇게 가다보니 석문봉에 도착한다.

<석문봉 정상석---사실상 주봉이다>

석문봉에는 가야산에서는 유일하게 정상석이 있으며 안흥진에서부터 시작한 금북정맥이 수덕산을 지나 안성 칠장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가야산 석문봉을 거쳐야 하는 주요 관문인 셈으로 정상석 옆에는 태극기가 설치되어 있는데 불어대는 바람에 계속 펄럭이며 바람의 세기를 알려 주는 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다.

가야산은 제일 높은 봉이 가야봉인데 가야봉에는 중계소가 있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주봉역할을 하는 봉이 석문봉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가야봉보다는 석문봉에대해 많이 알고 관심도 가지고 있다.

<석문봉 태극기 아래서>

석문봉에 도착하니 안양과 서울에서 왔다는 여자2명이 있었는데 서로 바꿔가며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산행을 하며 중요한 곳에서 사람이 없을 때면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설치하는데 그럴 때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누군가 있기를 기대했는데 다행히 바람이 이루어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석문봉 정상 서쪽에는 큰 돌탑을 세워놓은 것이 있는데 이 탑은 해미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완주 기념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이 많은 돌들은 어디서 무슨 방법으로 가져와 얼마나 많은 날들을 하나하나 정성을 담아 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미산악회에서 세운 백두대간 완주 기념탑>

이 큰 돌탑 아랫쪽으로 금북정맥이 이어지는 곳으로 독립군 중 대구의 권재형, 임상택, 서울의 성봉현, 시인마뇽 선배님, 그리고 새로이 합세한 북한산님까지 힘들이며 일락산을 지나 이 석문봉을 올라 가야산으로 지나갔을 것으로 과거의 발자국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본다.

서두에도 기록했듯이 석문봉에는 돌문이 열려있어서 개문산(開門山)이라 했다고 하는데 어디가? 어떻게? 돌문이 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석문봉 일대에는 큰 바위들이 많이 있어 그 위용도 대단하였다.

찬바람이 거세어 중계탑이 있는 가야봉으로 이동하려하자 사진을 찍어 주던 여자들이 가야봉으로 가느냐?며 함께 하산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나 덕숭산까지 계획을 세웠으므로 그들과 이별을 하고 석문봉을 떠나 가야봉으로 향한다.

 

! 가야봉, 밟을 수 없어 보는 것만으로......

가야산의 4개봉인 옥양봉과 석문봉, 가야봉 그리고 원효봉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대략 약1.5km 정도 거리에서 서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데 능선은 대부분 완만하고 안전하며 간간이 암릉이 있고 주변의 경관도 뛰어난 곳도 여러 곳이 있다.

석문봉 주변과 가야봉 오름길 주변의 경관은 가야산에서 제일 으뜸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며 오늘은 처음부터 반은 구름에 쌓여 전나의 모습을 보여주길 싫어하는 가야산의 정상인 가야봉은 수줍은 처녀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석문봉에서 가야봉으로 가는 도중 앞으로는 중계탑이 점점 가까워지며 정상으로서의 위용을 나타내고 가끔씩 뒤 돌아보면 석문봉에는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습과 한 두 명씩 올라선 모습이 그런대로 멋을 더해준다.

편안한 능선을 가다가 가야봉이 가까워지며 다시 오름이 시작되지만 처음 옥양봉에 오를 때에 비하면 오르막이라 할 정도도 안 된다.

<데크계단의 맨 위가 정상을 대신한다.>

정상이 가까워지며 좌우로 눈에 덮인 바위들이 멋을 다하는 가운데 데크계단 옆으로는 지나온 능선과 상가리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바위가 있으나 바위들마다 눈이 덮여 한가라게 앉아 휴식을 취하며 조망할 여건이 못되므로 데크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 계단의 맨 위에 섰는데 가야봉은 중계탑이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정상에 설 수는 없어 아쉬움이 컸는데 제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이곳은 석문봉 방향인 북측 철조망 옆으로 높은 데크계단이 양쪽으로 나있는데 계단의 맨 위가 가야봉의 정상을 대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한데 가야봉의 마지막 데크계단을 오르며 전주의 모악산을 연상하며 최고봉에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기대는 기대일 뿐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작은 철재문이 있으나 굳게 잠겨있다>

명산 100산에 올라있는 전주의 모악산 정상에는 가야봉과 같은 중계탑이 있는데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여 최고 높은 곳에 정상석을 대신한 정상을 알리는 정상판이 있으며 정상판 위로 전망대를 만들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모악산을 생각하며 기대했던 중계소 안의 출입은 그렇게 좌절되고 계단 위에서 한동안 바라보고 뒤돌아 석문봉과 멀리 떨어진 옥양봉을 주시할 뿐이다.

늘 구름에 가려있던 중계탑에는 바람이 살고 있나보다, 바람이 구름을 불러들여 구름으로 가리고 바람이 외부로 드나드는 소리가 계속 윙윙 소리를 내며 한시도 조용할 때가 없다.

한동안 계단 정상에 있으니 스산한 바람이 등을 밀며 내려가기를 부추기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계단을 넘어 헬기장 방향으로 내려선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니 신기할 정도로 바람기가 전혀 없어 다른 세상을 온 것 같은 기분으로 아늑함을 느끼니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을 더 내려서니 평상이 2개가 설치되어 있어 이곳에서 편하게 식사를 하였는데 식사를 하는 사이 아래에서 2명이 올라왔는데 원효봉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잘 모른다한다.

 

원효봉으로 가는 길

식사를 끝내고 따끈한 커피로 몸도 식히고 소화도 시키는데 위에서 한 친구가 내려서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바삐 아래로 내려선다.

함께 갈 생각으로 급히 채비를 마치고 따라 내려섰는데 눈이 쌓인 내리막길은 대단히 경사가 심해 아이젠을 착용했어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할 정도였는데 급경사를 내려서고 보니 앞서간 친구가 보이지 않았고 이정표가 있는데 하산은 아래쪽으로 안내를 하고 있고 헬기장은 능선을 가로 지르는 직진 형태로 그곳은 고드름이 달려있고 길은 얼음이 얼어있는 좁은 곳으로 계곡을 몇 차례 돌고 돌았는데 다행히 앞서간 친구의 발자국이 남아있어 발자국을 따라갔다.

어느 정도 왔을까? 부대입구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것같이 느껴져 능선을 타고 위쪽으로 오르다가 혼자서 산행하며 무리하지 말자고 스스로 자책하고 위로를 받으며 다시 원점으로 복귀해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 한 계곡을 돌고나니 원효봉을 오르는 길이 보인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다시 한 모퉁이를 돌고나니 헬기장이 보이고 헬기장에는 차량이 한 대있고 2~3명이 밖을 배회하고 있었고 앞서간 친구의 모습은 헬기장에서 막 원효봉으로 오르기 시작을 하였는데 시간으로 5분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그 친구를 보며 5~10년 전에 아무 겁도 없이 산을 누비던 나를 다시 보는듯한 느낌을 받으며 헬기장으로 내려선다.

<헬기장 바로 전 내포문화 발원탑>

북쪽으로 가야봉과 남쪽으로 원효봉을 두고 동으로는 남원군묘와 서쪽으로는 대치리로 군용도로가 있는 헬기장은 가야봉과 원효봉 사이에 V자 형태로 원효봉의 고도가 455m로 표고 150~230m 차이를 보이고 있다.

헬기장에 있는 차량과 3명은 코란도 차량으로 사복을 한 군인 같았으며 전선을 설치하는 것 같았으며 헬기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에는 남원군묘와 가야봉만 표기되어 있고 원효봉은 표시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이러한 이정표를 두고 산을 찾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통제구간이라면 몰라도 통제구역이 아니라면 안내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도 하다.

<헬기장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길>

휴식을 취할 겸 서둘지 않고 헬기장을 서성이다 원효봉 오름길로 들어선다.

헬기장에서 원효봉을 오르는 길은 유난히 경사가 심하고 가야봉에서 한동안을 내려선 곳으로 옥양봉에서 석문봉이나 석문봉에서 가야봉으로 이동하는 길과는 다른 모습으로 어찌 보면 가야산과 완전히 다른 산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원효봉을 오르며 바라본 헬기장과 가야봉>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눈이 녹다 얼어붙은 바위가 여기저기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는데 그래도 위험한 곳에는 로프가 있어 원효봉을 오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원효봉 오름길에 계곡 건너 가야봉은 보면 오전부터 그랬듯이 희미한 구름이 서리고 있었고 헬기장을 내려설 때 위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선 지점은 중계소로 오르는 포장도로와 가까이 인접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길로 왔다면 신관은 편하게 헬기장까지 내려왔겠지만 시간은 더 많이 소요되었을 것 같았다.

헬기장에서 원효봉 정상까지는 1km정도로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 오를 때에 체력의 소모가 많으며 두 번째는 첫 번째에 비해 위험하기는 하나 구간이 짧아 큰 체력 소모 없이 오를 수 있었는데 서둘지 않고안전을 생각하며 원효봉 정상에 도착한다.

<원효봉 정상---뒤로 가야봉과 석문봉 옥양봉이 보인다>

<원효봉 정상>

<원효봉 정상---뒤로 덕숭산이 보인다>

원효봉 정상!

가야산 가야봉(伽葉峰)에서 남쪽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로 원효봉 꼭대기에서 남쪽을 굽어보면 가운데 45번 국도를 두고 광천리, 대치리, 시량리가 평화롭게 자리 잡고 그 뒤로 덕숭산(三僧山)이 건너다보이고 동남쪽 가까이로는 수암산과 용봉산이 보이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형태만 보일뿐이다.

정상은 넓으나 평지는 아니지만 평지나 별반 차이는 없고 정상 바위에는 삼각점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으며 사방을 조망하는데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가야봉이나 석문봉과 달리 바람도 불지 않아 한동안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으로 지나온 가야봉은 구름이 서려있고 덕숭산 방향 산 아래 45번국도 위로는 차량들이 질주를 하고 있고 길 맞은편에는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산이 내가 마지막으로 오를 덕숭산인데 원효봉을 내려가 다시 덕숭산을 오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삼각대를 설치하고 증명사진을 몇 장 찍다보니 시간이 한동안 지나자 덕숭산에 대한 압박에 급하게 카메라를 철수하고 길을 찾아 내려선다.

원효봉을 오를 때 앞서갔던 친구의 발자국이 없어 한동안 길을 찾았는데 아마도 그 친구는 원효봉에서 좌측 싸이판 온천이 있는 사동리 방향으로 내려간 것 같았는데 사동리 방향 하산 길에는 리본이 많이 매달려 길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시량리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은 희미한 흔적만 있을 뿐 사람들이 거의 다니질 않은 것 같았다.

<원효암터 옆 묘지>

원효봉 정상에서 10여분을 내려서 양지바른 넓은 묘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원효암터가 50m의 거리에 있다고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못내 아쉬운 건 원효암터를 가지 않고 내려섰다는 것인데 원효암터에는 유명한 원효대사의 전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효가 깨달음 얻은 원효굴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처진 곳에 작은 암자터가 아래 위로 두 개 있는데 아래에 있는 큰 암자터 위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원효약수터가 있다. 원효약수터 옛 이름은 은술샘이라고 하며 위 암자터 절벽중턱에는 두 사람이 들어가 누울 수 있는 굴이 있는데 이 굴 이름은 효굴이다.

<원효암터와 원효굴 그리고 은술샘>

먼 옛날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뜻한 바 있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당나라로 가장 빨리 가는 길로 서해바다를 건너 내륙의 포구라는 내포로 향했을 것이다. 어느 날 두 스님은 한 동굴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갈증이 난 원효와 의상 두 스님은 동굴에서 바가지에 담긴 감로수를 맛있게 들이켰는데 그러나 자고 일어나니 그 물은 달콤한 감로수가 아닌 해골바가지에 담긴 벌레 썩은 물이었음을 알았다.

구토하던 원효는 깨닫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일체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임을 각성하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한 원효대사의 득도에 대해서는 어릴 적 교과서에서도 배운 것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인데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에 나오는 동굴이 최근 충남 예산과 서산의 가야산 자락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설이 제기되었다는 것인데 원효봉 아래 있는 원효암터에 원효대사가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하며 위 절벽 중턱에 있는 원효굴이 전설에 나오는 동굴이라는 것이다.

원효암입구에서 조금 아래 가까운 곳에 또 하나의 절터가 있는데 바로 의상암터이다.

<의상암터>

지금은 그리 넓지 않은 터에 앞 뒤로 잡목이 무성한 이곳은 원효와 함께 신라시대 불교의 중흥에 크게 기여한 의상대사가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암자터 북쪽에 거대한 바위가 있다는데 이 바위는 의상바위라고 부르며 이 바위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이굴을 의상굴이라고 한다.

금술샘이야기

<금술샘>

의상굴은 원효굴처럼 아늑하지는 못하지만 큰 사람 서넛 정도는 들어갈 수 있고 서쪽 바위절벽 위에는 의상암에 딸려 있던 암자로 보이는 꽃쟁이 절터가 있는데 꽃쟁이 절터란 그림을 잘 그리는 스님이 살았었다고 해서 꽃쟁이(환쟁이, 화가) 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꽃쟁이 절터 바위절벽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바위 천연동굴 안에 우물이 있는데 금술샘이라고 하는 석산수가 있는데 먹을 수는 없다고 하는데 옛날 이 샘물에 햇빛이 들면 샘물은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금빛을 냈다고 하며 큰 구렁이 두 마리가 금술샘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구렁이를 죽이고 나서 물은 그 빛을 잃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금술샘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어 고라니, 뱀, 너구리, 토끼, 박새 등 산짐승들이 즐겨 찾는 옹달샘이 되었고 한다.

의상암터에서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은 경사도 심한데다 눈이 상당히 많이 쌓여 무척 고생하며 내려섰으며 경사진 길을 내려서 원효골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또 다른 절터가 눈에 띄었는데 이곳은 백운암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계속되는 이정표에는 원효암 입구라고 표기가 되어 있어 중간 원효암을 지나면서도 원효암인 줄 모르고 지나쳐 원효암 조금 아래 지점에 와서 산길을 벗어나 포장도로로 올라서 500m를 내려와 동림장이 있는 원효사 입구인 가야산 날머리에 도착을 한다.

<원효암 입구---뒤로 원효봉이 보인다>

이곳에는 큰 입석을 세웠는데 입석에는 상왕산 원효암 입구라고 되어 있는데 상왕산이란 옛날 가야산을 상왕산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원효봉이나 원효암은 아직도 상왕봉이라는 산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가야산 석문봉에서 능선을 따라가면 개심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상왕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길을 건너 개천이 나오는데 아주 오래된 두리교를 건너며 난간에 기대 준비해 온 캔맥주를 마시며 덕숭산에 오를 힘을 충전을 하고 있는데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내용이야 가족에 대한 이야기지만 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반갑고 자랑스러운 반면 키우면서 너무 내 위주로 엄격하게 키우다 보니 자기의 꿈을 제대로 펴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늘 들곤 한다.

 

덕숭산으로 가는 길.

가야산 산행은 끝난 것이고 이제는 덕숭산을 올라야 하므로 개념도를 꺼내들고 길을 찾아 보지만 개념도상의 길은 내가 있는 위치와 많이 다르므로 둔리고개로 올라 능선을 타고 오르면 만난다는 생각으로 둔리고개로 오른다.

<둔리고개의 인삼밭>

둔리고개 위에는 인삼밭이 있어 밭둑을 통해 가로질러 흔적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며 능선으로 들어섰는데 길이 있으나 너무나 희미했고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잡목사이를 피해 올라야 했는데 한동안을 오르니 우측에서 오르는 길과 합쳐지며 좀 나았고 그런 상태에서 한참을 오르니 좌측 능선에서 오르는 길과 합쳐지며 완전한 길을 찾았다.

아래쪽에 없던 눈이 위로 오르면서 점점 많아 힘 빠진 발은 자꾸만 미끄러지는 횟수가 늘어나니 길가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잠시 쉬어가며 정상을 위해 한 걸음씩 재촉을 한다.

시량리에서 덕숭산을 오르는 길은 원효봉과 같이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구간은 길어 중간까지 이어지므로 제일 힘든 구간이며 2번째 구간이나 마지막 구간은 첫 번째에 비하면 그리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는데 정상을 오르면서 대치리 마을이나 원효봉과 가야봉 중계탑은 늘 조망이 가능하므로 가다 힘들면 원효봉과의 차이를 계산해 보는데 덕숭산은 495.2m로 원효봉에 비해 110m가 낮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날씨가 좋지 않아 오늘은 한 번도 햇볕이 나지 않았는데 산행을 하면서도 행여나 비가 오면 어떡하나? 염려를 많이 했는데 다행히 현재까지 비는 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오르다 보니 정상에 도착했는데 수덕사는 3번을 온 적이 있으나 그리 높지 않은 덕숭산의 정상은 이번이 처음으로 아마도 산림청이 명산 100산에 덕숭산을 넣지 않았더라면 평생 오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덕숭산 정상에서>

 

덕숭산 정상!

덕숭산은 다른 여타 산들과 다를 바가 없다.

지리산처럼 산이 커서 엄마의 품과 같은 듬직하고 포근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산이 작다 해도 설악산이나 바로 인접한 용봉산처럼 아기자기한 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내세울 것이라면 명찰인 수덕사가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산림청에서는 덕숭산을 명산 100산에 넣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기시지 않았는데 아마도 산림청이 지정한 명산 100산중에 잘못 선정한 산중 등위를 매긴다면 등수에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가야산과 덕숭산을 하나로 묶어 선정하였더라면...........

<덕숭산 정상>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정상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오석 정상석이 마사토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고 이렇다 할 특징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정상 공간은 넓으나 평지는 아니고 뒤로는 잡목이 불규칙하게 자랐고 봄이면 잡목 속에 있는 진달래가 분홍 꽃잎을 활짝 드러낼 것이고 앞으로는 잘 생긴 소나무가 멋을 듬뿍 지닌 채 서있는 그런 풍경으로 노송 사이로 산 아래 수덕사 입구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수덕사는 전체 모습이 잡히지 않고 일부만 잡힌다.

서울서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주며 무리하지 말고 일찍 하산하라던 집사람이 걱정이 되는지 전화를 하여 하산했는지 물어 보기에 안심을 시킨 후 정상석을 휴대폰으로 전송을 하고 삼각대를 설치하여 덕숭산 정상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어둑해지는 정상을 박차고 일어선다.

능선으로 내려오다 좌측으로 틀은 길을 따라 7~8분을 내려서면 보기에 멋진 전망바위가 있는데 전망바위에 오라서면 어두워져가는 수덕사와 수덕사를 품고 있는 골짜기와 덕숭산 정상을 조망할 수 있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어두워져 가는 덕숭산의 모습을 조망하며 잠시 사색에 젖어본다.

<정혜사 옆의 석문에서>

전망바위를 내려서 10분정도 내려서면 정혜사가 있는데 이곳은 문이 굳게 잠겨있었으며 인상적인 석문이 있어 석문을 통해 사람들이 오가는데 자연적인지 아니면 인공으로 석문을 설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정혜사를 지나 수덕사에 도착하니 경내가 조용하다.

수덕사는 고려 충렬왕 때 세워져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중창과 정비를 하였지만 경허스님과 만공스님 대에 사세확장으로 참선도량으로 성장하여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 5대총림으로 우뚝 서 있다.

늦은 시간이라 관람객들은 모두 퇴장한 것 같이 조용한 수덕사에는 수덕사와 덕숭산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니 이러하다.

수덕사의 창건설화

홍주마을에 훌륭한 가문의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 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 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사찰의 이름은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하였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조용하기만 했고 대웅전은 문이 닫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 대웅전 왼푠으로 돌아가면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다는데 바위 이름이 수덕사 관음바위 또는 수덕각시바위라고 부른다고 하며 이 바위에 버선꽃이 핀다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 사전공부가 부족해 수덕각시바위를 보지 못하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대웅전과 3층석탑---새로 놓은 양쪽 다리가 흉물이다>

수덕사의 대웅전은 다른 사찰의 대웅전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은 이 건물은 국보 제49호로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찰의 지붕이 팔작지붕인 반면 수덕사 대웅전은 간결하고 단순한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는데 어떤 이는 이러한 맞배지붕을 보면 고요의 미를 느끼게 되고 자연스러운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대웅전은 일제강점기이던 1937년 해체·복원작업 때 발견된 묵서 기록으로 고려 1308(충렬왕)에 건축된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록만으로도 현존 국내 최고의 목조건물이라니 국보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실감한다.

대웅전을 벗어나 옛날 같았으면 건성으로 둘러봤을 텐데 또 하나 나를 이끄는 것이 있으니 불전사물이다.

불전사물은 범종, 목어, 법고, 운판으로 각각 의미하는 뜻이 다른데 불전사물은 범종각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덕사도 범종각에 불전사물을 안치했다.

10km 밖까지 종소리가 들린다는 6500근의 범종,

범종각의 목어(木魚),

남녀 음양의 조화에 맞춰서 큰 황소와 암소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법고각의 법고(法鼓),

그리고 전체가 구름 형상으로 색상이 화려한 운판(雲版)이 불전사물로 수덕사의 4대 보물이라고 한다.

하나하나 관찰을 하며 카메라에 모습을 담았는데 범종의 타종채가 이색적이다.

또한 수덕사에는 아주 귀한 거문고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늦은 시간이라 박물관을 닫아 보지 못하고 나왔는데 많은 사연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거문고는 다음에 보기로 하고 거문고에 얽힌 이야기를 실어 본다.

이곳 수덕사 일주문을 나서면 좌측으로 우리나라 불교 5대총림을 알리는 간판을 설치하였는데 그곳에는 덕숭총림 수덕사라고 표기하고 있다.

<수덕사 일주문>

<수덕사를 떠나며>

수덕사 일주문을 나서며 뒤돌아 덕숭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오늘도 무사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었음 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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