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100산산행기

남양주, 축령산 산행기

범솥말 2025. 2. 3. 23:41

남양주, 축령산 산행기

산행일시: 20091208()

누구와: 집사람과 둘이서

산행거리: 9.8

산행시간: 6시간05(11:40~17:45)

산행코스:축령산휴양림정문(11:40)-수리바위능선3거리(12:30)-수리바위(12:45)-식사30-남이바위(14:05)-정상(14:30.879.5m)-절고개(15:10)-서리산정상(15:55,832m)-절고개(16:45)-휴양림입구(17:45)

최근 들어 집사람과 산행하는 횟수가 많아지니 집사람이 힘들어 하긴 하지만 산행 후 느끼는 성취감도 큽니다.

나이가 들면서 온 몸의 신진대사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지 이곳저곳이 아파 느림보 산행을 하면서 컨디션 조절도 겸합니다.

오늘도 어느 산을 다녀올까 망설이다가 명산 100산에 들어 있는 축령산을 택하였습니다.

축령산은 이번이 5차례이고 부부가 함께 하기는 2번째이나 처음 왔을때 정상을 가지 못하고 절고개에서 하산했으니 이번에는 정상을 오른다는 마음으로 애마를 이끌고 집을 나섭니다.

축령산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북한산과 불암산 수락산등에 눈이 제법 내렸는데 아마도 그저께 비가 내리더니 기온이 낮은 산에는 눈이 내린 모양입니다.

축령산은 서울 근교에 있으면서 명산 100산에도 들어있고 잣나무 숲이 좋아 휴양림으로도 유명하여 전부터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최근 경춘선이 전철로 바뀌면서 교통이 편해지니 축령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대중교통으로 축령산을 가는 경우 상봉에서 경춘선 전철을 타고, 마석에서 내려 38-2번 시내버스를 타면 약30분에면 축령산 입구에 도착하는데 버스시간은 오전 축령산 행은 7시40분, 9시50분, 10시35분이며, 오후 축령산 발 버스는 15시, 16시40분, 20시30입니다.

축령산(祝靈山)은 경기도 남양주시와 가평군 경계에 있는 높이는 879m이며 일명 비룡산이라고도 합니다.

이 산은 산악인들이 매년 연초에 시산제(始山祭)를 지내는 명소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산의 이름에서도 풍기는 느낌이 있는 것처럼 제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말 명장으로 손꼽히던 이성계가 이곳으로 사냥을 왔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몰이꾼이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산신제를 지내야 한다."고 하여 산 정상에 올라 제()를 지낸 후 멧돼지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 지는데 이때부터 고사(告祀)를 올린 산이라 하여 축령산으로 불렸다. 고 전해 집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세조 때 명장이었던 남이장군에 얽힌 이야기로 세조가 살아 있을 때 크게 신임을 받았던 남이장군은 세조가 죽자 유자광이 남이장군이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 고변에 의해 억울하게 스물여덟에 생을 마친 남이장군이 어린 시절 무예를 닦던 곳인 이 산을 축령산으로 이름 지으며 영혼을 달랬다고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방리에 도착하여 입장료를 내고 축령산으로 들어서서 들머리를 어느 곳으로 정할까 망설이다 전에는 계곡 길인 전지라골로 올랐으므로 이번에는 우측능선으로 오르기로 합니다.

우측 임도를 따라 들어서니 임도길에는 눈이 제법 많이 쌓여 등산화 발자국이 깊게 찍히고 산 아래 소나무와 잣나무에 내린 눈으로 긴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설경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임도에는 올라간 발자국은 없고 내려온 발자국만 4~5명 흔적이 있어 처음에는 일찍이 산을 찾은 사람이 없어서인가 생각을 하며 오르지만 점점 임도를 따라 약 2km가다 보니 잘못 가고 있음을 깨닫고는 임도 능선마루에서 주능선 방향으로 치고 오르는 수난을 겪어야 했는데 고생도 고생이지만 집사람에게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아무도 간 사람이 없는 희미한 등로를 따라 러셀을 해가며 한동안 땀을 흘린 덕택에 주능선 3거리에 닿고 합류 지점에서 얼마 오르지 않아 휴양림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하게 되는데 휴양림쪽에서 올라오면 1km정도의 거리인데 길을 잘못 들어선 대가로 약1km 이상을 더 걷는 보너스를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한동안을 쉬고 있으니 휴양림쪽에서 부부로 보이는 팀들이 연속해서 4팀이 오르니 자리를 양보하고 다시 능선을 따라 수리바위를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능선3거리에서 300m 떨어진 수리바위는 불과 10여분을 올라 도착을 하였는데 수리바위는 바위의 형상이 수리의 머리를 닮아 수리바위라고 부른다는데 좌우 측면과 위아래서 자세히 봤지만 각도를 못 맞추어서 그런지 수리의 모양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안내판에 의하면 얼마전에는 실제로 수리가 절벽에 등지를 틀고 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수리바위 위에 오르니 사방의 조망이 탁 트이고 위쪽의 남이바위와 건너편에는 천마산과 철마산 그리고 주금산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능선이 하얀 눈으로 화장을 하고 나를 반기니 길을 잘못 들어 받았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 보냅니다.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수리바위 증명사진을 남기고 뒤이어 온 다른 팀에게 자리를 내주고 수리바위를 떠나 남이바위로 이동하다가 바람을 잡아주기에 그만인 양지바른 곳에서 집에서 준비해온 점심을 집사람과 맛나게 먹고 후식으로 은은한 향이 풍기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 봅니다.

올라올 때 등짝에 흐른 땀이 차갑게 느껴질 즈음 이제는 다시 남이바위로 가야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기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 바람이 불어대는 능선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생각보다 위험한 칼날 능선을 오르며 절벽 밑으로 펼쳐지는 눈꽃의 향연을 감상하며 남이바위에 도착을 합니다.

좌측으로 은두산과 오독산이 보입니다.

홀로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돼지 않았던 10여년전 무턱대고 대성리에서 은두산을 거쳐 오독산(당시에는 산 이름도 몰랐던 산이었음)을 지나 이곳 축령산으로 오르며 눈속을 헤집다가 어둠이 몰려오고서야 내방리로 내려 설 수 있었던 추억이 배어 있는 산이기도 합니다.

남이바위에서 올라온 능선과 수리바위를 바라보니 멀게 느껴지는 수리바위는 그런대로 멋을 풍기고 능선에 이따금씩 솟아있는 암릉들은 축령산의 진가를 더해주는 듯 했습니다.

다른 산들의 바위와는 좀 다른 느낌을 주는 남이바위는 남이가 젊었을 때 이곳에서 무예를 닦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태어난 곳은 장호원에 있는 백족산의 지네의 정기를 받아 장호원 건너편 감곡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여주에서 태어났다는 설 그리고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습니다.

남이는 수양대군인 세조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이니 태종의 외손자이자 남이장군에게는 태종이 외할아버지가 되는 셈으로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세조가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양위 받아 권좌에 앉으니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고 벼슬을 높게 주니 이들이 훈구파로 권세가 대단했었는데 세조가 죽자 예종이 왕위에 오르니 유림파들이 훈구파를 몰아세우는 방편으로 남이를 이용하여 훈구파의 세상을 유림파로 바꿉니다.

남이장군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북벌을 할 당시 북정가라는 시를 남겼는데 이러합니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의 돌을 칼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 물 말 먹여 없애리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이 얼마나 패기가 넘치는 시람 말인가?

그러나 이 시를 읊을 때 이 시로 말미암아 목숨을 다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사림의 좌장 역할을 하고 있던 유자광은 훈구파를 몰아내기위한 기회를 엿보던 중 예종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지니지 않았을 때 하늘에 혜성을 보고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표는 조짐이라고 말했는데 유자광이 역모로 몰아붙이고 그 증거로 위 북정가를 제시했는데 3번째 뒷부분의未平國未得國으로 고쳐 무고하여 이로 인해 남이장군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와 예종편에 남이장군의 활약상을 읽었던 터라 남이의 애석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북정가를 뇌까리며 다시 능선으로 향합니다.

헬리포트를 지나고 우측으로 오독산을 지나 수레너머고개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하는 3거리를 지나 깃발이 펄럭이는 축령산 정상에 도착을 합니다.

아무도 없는 정상은 한 무더기의 돌탑과 오석으로 세워진 886.2m의 축령산 이라는 이름표를 단 정상석, 그리고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외로운 깃발이 우리의 정상등정을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정상석에서 돌탑에서 그리고 국기봉에서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속으로 추억을 저장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북으로 연인산에서 동으로 길게 뻗은 능선을 타고 약수봉과 대금산을 만들고 다시 흘러내린 능선은 청우산을 만들었고 동으로는 깃대봉과 은두산 오독산이 남으로는 천마와 철마, 그리고 주금의 능선이 흰 두건을 두룬 채 혹한의 날씨에 동면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인기척을 느끼니 헬기장에서 머물던 팀들이 어에 있었는지 이제야 정상으로 오니 다시 자리를 내주고 절고개로 내려섭니다.

절고개로 내려서는 길에는 눈이 많이 쌓였고 전날 왔던 사람들이 정상을 오르내리면서 밟아 놓아 빙판으로 변했으니 자칫 잘못하면 낙상하기 쉬우므로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절고개한 시간이 15시를 조금 넘긴 시간으로 하산하기에 적당하였으나 서리산을 지척에 두고 그대로 하산하는 것이 산을 다니는 제게는 허용되질 않아 힘들어 하는 집사람을 부추겨 서리산으로 향하며 나중에 후회가 따르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건 모든 상황을 제 기준에 맞춘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절고개에서 서리산 정상까지는 2.2km로 길은 비교적 좋으며 방화선이 구축되어 있어 걷기는 편하지만 축령산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고개에서 서리산으로 가지않고 휴양림으로 내려섭니다.

넓은 방화선에 나 있는 몇 안 되는 발자국을 따라 한동안을 가며 2~3차례 급경사 오르막을 지나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헬리포트를 지나면 조그만 돌탑이 있는 해발 825 미터의 서리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증명사진을 찍고 좌측으로 400m에 철쭉동산이 있는 곳으로 하산을 하고 싶었으나 눈이 많고 경사가 심한 좁은 길로 내려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거부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 절고개로 향합니다.

서리산 등산로는 방화선으로 길이 넓어 편하기는 하지만 미끄러운 곳이 많아 조심스럽게 원점으로 돌아오니 약 1시간30분정도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절고개에서 서둘러 잔디광장으로 내려서 잣나무 숲속으로 들어섭니다.

축령산의 잣나무 숲은 가평8경 중 제7경에 속하는 축령백림은 6070년생 잣나무로 조성된 휴양지로서 축령산 기슭에 위치한 경기도소유 채종림으로 조성되어 백림의 웅장함을 더해주며 여름철에 백림 속에 들어서면 잣나무가 뿜어내는 송진 내음에 심신이 취할 지경이라는데 한 겨울 백림은 한기만을 더 해주고 누군가는 이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도시에서 쌓인 상념은 이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지며 잣 냄새 송진 냄새가 일품아리 했는데 어둠이 몰려오는 백림에서는 그러한 명상이나 추억을 만드는 풍류는 생각 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백림과 지나 잔디광장을 지나 한동안을 내려와서야 시멘트 포장길에 들어서니 이제껏 잘 내려오던 집사람이 무척이나 힘들었나봅니다.

아픈 다리를 끌고 나오다 보니 팬션이 보이고 밝게 비치는 전등에 휴양림 관리사무소가 보이니 안도의 한숨과 고생스러웠던 하루, 그리고 고생한 만큼 보람을 느낀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