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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江華) 고려궁지(高麗宮址) 돌아보기

범솥말 2024. 9. 10. 11:20

강화 고려궁지 돌아보기

 

강화 고려궁지 [江華 高麗宮址]

문화재 종목 : 사적132

지정일 : 1964.06.10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답사일 : 20141105

강화 고려궁지는 1232(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基壇)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이 세워졌으며, 1976년에는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하였습니다.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으로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고, 이 밖에 이궁(離宮)과 가궐(假闕)도 곳곳에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오랜역사를 더듬으며

강화산성을 답사하고 고려궁지로 들어섰습니다.

강화의 산은 여러 차례 다녔지만 강화산성이나 고려궁지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한번도 답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강화고려궁지 정문인 승평문 앞에는 돌계단이 있으며 좁은 마당 우측으로는 문화해설사 대기소와 매표소가 있습니다.

고려궁지는 강화시설관리공단이 관리하고 있는데 입장료는 900원입니다.

그리고 매표소와 마주보고 있는 강화궁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안내판에 있는 그림을 참조하년 앞서 백과사전에서 본 바와 같이 전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제에는 외규장각, 면위헌, 종각, 강화유수부 이방청 4개의 건물이 있습니다.

900원을 주고 매표를 했으나 규모도 크지 않고 사유재산도 아닌데 왜 돈을 받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정해진 것으로 따질 필요도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불만을 표하고 계단을 따라 들어섭니다.

2단으로 된 계단을 올라서면 중안에 승평문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데 현판의 글씨를 누가, 언제 쓴 기록이 없었습니다.

승편문을 올라서면 전에는 건물이 들어섰을 넓은 터가 휑하게 비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승평문 안쪽의 모습입니다.>

승평문을 들어서 조금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11시방향으로 보이는 건물이 외규장각이고 1시 방향으로 보이는 건물이 동헌 역할을 한 명위헌입니다.

우측 명위헌은 건물 규모도 크고 단청도 오래되어 약간은 바랬지만 그래서인지 안종감이 들었습니다.

<명위헌의 현판이 초서체로 되어 있습니다.>

명위헌 마루에는 강화부사가 가운데 앉아 업무를 보는 모습을 하고있고 좌우로 이방, 예방, 공방 등이 부사의 업무를 보는데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좌측 마루방은 간단한 서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수가 쉬는 휴게실 정도로 보입니다.

<명위헌을 벗어나며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명위헌을 벗어나 중앙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보이는 건물이 외규장각이며 외규장각 뒤로는 넓은 공타가 있습니다.

표제 사진으로 실은 강화부 궁전도와 비교하면 모두가 맞지 않습니다.

표제사진은 고종19년인1881년에 그린 그림으로 이때만 해도 고려의 궁모습은 없었으며 고려의 궁터에 조선 강화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강화군이 한림대 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조사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고려궁지로만 알았던 터는 고려궁지위에 조선의 강화부가 세워졌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고려궁지 발굴에 대해 알고 가 볼까 합니다.

 

고려궁지 및 외규장각 발굴 배경

한국과 프랑스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며 외교현안으로 떠 오른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와 강화 및 전 국민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외규장각지를 포함한 행궁지는 지난 1977년에 처음 조사를 실시하여 고려궁지로 지정되어 담장으로 구획이 되어 있었는데 이번 조사결과에 의하면 고려궁지로도 추정은 가능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유구로 볼 때 조선 행궁지로 밝혀졌으며 그 범위도 현재의 담장보다 더 넓은 광역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외규장각입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우리 땅을 침략하고 이곳에 있던 많은 궁궐의 의퀘를 수탈해갔던 곳입니다.

잘은 모르겠으나 표제 사진에 나와있던 건물들이 병인양요 때 불타고 없어졌을 것입니다.

프랑스에 있던 많은 궁중도서가 우리나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소유자는 대한민국이 아닌 프랑스입니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 받은 도서는 반환이 아니고 영구임대라고 되어 있으므로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이장희 스케치에서 옮겨온 삽화입니다.>

외규장각 안은 생각보다 좁았으며 각 벽면에는 진귀한 궁중도서를 알리는 사진들이 붙어 있었으며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영조임금의 행차도로 벽면의 그림속을 작은 인형으로 그대로 모방해 전시하고 있었으며 종묘의퀘도 한권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의궤(儀軌)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으로 왕실과 국가 의식·행사의 준비와 실행,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조선 건국 때부터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이후 것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의궤에는 왕이 보도록 한 부만 제작하는 어람용(御覽用)과 여러 권을 만들어 관련 부서 및 지방 각 사고에 나눠 보관하는 분상용(分上用)이 있다고 하는데 강화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 유일본이 많아 더욱 중요성이 크다고 합니다.

 

고려궁지 발굴조사 경위

강화도 조선궁전의 외규장각은 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고문서와 물품들은 약탈당하고 건물은 완전히 소실되어 외규장각에 대해서는 고지도나 문헌을 통해 당시의 대략적인 모습을 짐작할 뿐 정확한 건물의 규모나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91년 외규장각 약탈 고문헌 반환을 촉구하는 운동에 프랑스에서 긍정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강화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외규장각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규장각 건물 복원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리고 강화군에서는 외규장각 복원을 위한 단계조처로 한림대학교 박물관에 발굴요청을 하였으며 이에 조사단을 구성하고 19951차 발굴을 시작으로 20014차 발굴까지 조사를 마침으로 조선궁전의 건물지의 위치 및 규모를 조사하였다.

 

발굴조사의 내역

1차 조사(19951204)

1차 조사는 토지 보상이 완료된 고려궁지 북 담장의 뒷부분과 조사 전에 철거된 복음학원이 있던 곳으로 구역을 설정했다.

조사는 조선궁지의 범위 및 유규잔존여부 등을 탐색하는 조사에 집중하였는데 조사결과 복음학원이 있던 곳에서는 조선궁지의 북쪽 경계 및 당시 지형을 확인할 수 있었고 북서단부는 후대에 인위적으로 잘려나간 후 매토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궁지 북담장 북측의 평탄지 동편은 현 지표면 1~2m지하에서 유구가 나오기 시작했고 서단부에서는 현 지표면 4m 지점에서 축대가 나오므로 이곳은 후대에 인위적으로 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차 조사(19961111)

2차 조사는 제1차 조사결과를 토대로 주로 고려궁지 북담장 뒤편의 평탄지를 전면 발굴하였다.

조사결과 이 지역은 조선궁전지의 서북단임을 알 수 있었으며 서반부에서는 건물의 뒤편에 해당하는 유구가 나왔고 궁지의 서측 축대와 건물지 등이 나왔으며 동반부에서는 궁전지의 부속건물지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강화도서관 북측 공터의 서남부에서는 축대 및 건물지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3차 조사(19980506)

3차 조사는 2차 조사결과 궁지 북담장 뒤편에서 나온 유구가 고려궁지 의견으로 나오고 있어 우선 고려궁지의 유구 잔존상황을 확인하여 상호 관계를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조사했다.

조사는 고려궁지 내 명위헌 서편 대지를 전면 발굴하여 동편에서는 시기 불명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서편에서는 고려궁지의 담장 뒤편의 평탄지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잡석군으로 이루어진 유구층을 확인하였다.

고려궁전과 조선궁전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아무 건물도 없이 텅 비어 있습니다.

생각보다 궁전의 규모가 적다는 생각을 했는데 발굴단의 글을 보면 궁지 주변의 사유지가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이나 각각의 지자체 장들은 국가 돈을 헛되이 쓸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재의 복원을 위해 주변 사유지를 매입해 하루 빨리 복원하는 데 쓸 수 있도록, 헛돈좀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4차 조사(20010720)

4차 조사는 이전의 발굴 조사결과로 추정할 때 조선 궁전의 중심건물 및 부속건물 유구의 상당 부분이 현재 고려궁지 북측의 담장 및 담장하부 기단에 의해 훼손 되었거나 그 속에 포함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고려궁지의 북담장을 철거한 후 조사를 했다.

발굴 조사결과 각종 문헌 자료집을 검토한 결과 판상석렬 등이 나온 서지구에 행궁이 위치하였고 동지구에 외규장각이 위치했던 것으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발굴지 위에서 명위헌 방향을 본 모습입니다.

 

발굴성과

조선궁전지는 병인양요 때 소실되고 파괴되고 이후 일반인들의 거주에 의한 변형이 되었지만 기본적 건축 구조에 관한 건물의 기초가 되는 하부구조는 지하에 남아 있으므로 궁전지의 경계, 건물의 규모와 특징 등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발굴성과를 기준으로 향후 장령전과 만령전으로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토지를 매입하여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고 추후 정밀한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궁전지의 전모를 밝혀야 할 것이다.

발굴지 위에서 외규장각 방향을 본 모습입니다.

넓은 공터에 옛 모습의 궁전건물이 들어섰으면 좋겠습니다.

외규장각 좌측에 있는 회화나무입니다.

회화나무와 궁궐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창덕궁에도 오래된 회화나무가 여러그루가 있는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데 이곳의 회화나무는 400년된 나무로 2001년 강화군 보호수로 지정하여 강화군에서 보호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회화나무는 400여년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를 습격하고 많은 서적을 탈취하고 넓은 궁궐에 불을 지렀던 온갖 만행을 지켜보며 그자리를 지켰고 뜨거운 불기운 속에서도 그날의 참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오늘도 푸른 잎을 돋구고 싱싱하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맞고 있습니다.

강화동종입니다.

원래 강화동종은 보물 제11호인데 강화역사박물관에 이관 전시하고 있으며 이곳의 동종은 복제품입니다.

우측 동종안내판에는 동종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강화동종

강화유수 윤지한이 주조한 것을 그 후 숙종임금 때인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이다. 높이198cm, 입지름138cm로 조선후기 동종으로는 큰 규모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줄이 둘러있고 그 아래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성문을 열고 닫는데 사용했다.

종각은 당시 강화산성 남문 주변인 김상용 순절비 부근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때 고려궁지로 이전되었다.

1999년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할 수 없어 강화동종을 복제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강화유수 이방청으로 강화부 행정을 맡아 보던 것으로 안내판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화유수 이방청

유형문화제 제26호로 지정된 이곳은 강화유수의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효종5년인 1654년에 강화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정조7년에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하였다. 일본강점기인 1915년에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1977년 강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고려궁지를 떠너며 바라 본 명위헌입니다.

 

강화의 새 여행지

강화에는 여러곳의 여행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 단장한 2곳이 있는데 하나는 평화전망대이고 또 다른 곳은 교동대교입니다.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제적봉 일원에 조성된 강화평화전망대는 200895일 개관해 강화군시설관리 공단에서 운영해 오고 있는데 북한까지의 거리는 1.8에 불과해 북한주민들의 일상 생활모습을 관찰 할 수가 있습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을 앞에 두고 마음이라도 달래려고 실향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하는데 강건너 평야지대와 그뒤로 이름모를 산이 펼쳐지고 맨 뒤로는 개성의 송악산이 아름다운 자태로 하늘로 솟고 그 아래 북한마을과 선전용 위장마을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3층에는 이북의 온 산하가 한눈에 가까이 볼 수 있는 고성능 망원경등 전망시설과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 등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4층 옥상에서 사방을 조망 할 수 있습니다.

강화평화전망대 출입은 연중무휴이며 관람시간은 하계 오전 9시부터 오후5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입장료는 무지 비싼 2500원입니다.

전망대에서북한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뒤로 높은 산이 개성의 송악산과 미륵봉 능선입니다.

 

교동대교

강화의 중심도로인 48번 국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바다위를 지날 수 있도록 다리가 생겼습니다.

20146월말 개통되었다는 교동대교는 약3.44km라고 하는데 무척 길게 느껴졌는데 이다리는 아쉽게 2차선으로 만들었는데 강화 구경길에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교동도를 구경할 수가 있습니다.

교동도에서 나오며 찍은 교동대교와 우측으로 강화5산의 마지막 다섯번째 산인 별립산입니다.

별립산의 높이는 약400m인데 최고봉인 동봉은 군부대가 있어 오를 수 없으며 동봉보다 조금 낮은 서봉은 오를 수 있습니다.

교동도 지도입니다.

교동도에 가면 둘레길이 있으며 주말 장터도 있다고 합니다.

화개산이라고 조금 낮은 산이 있는데 산행을 하는 것도 좋을 듯 싶고요 폭정을 휘두르다 왕좌에서 밀려난 연산왕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곳으로 유배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