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 돌아보기(1)
문화재 명칭 : 강화산성(江華山 城)
문화재 종목 : 사적 제132호
문화재 지정일 : 1964.6.10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답사일 :2014.08.27
답사경로 : 산성서문(첨화루)->수문->남장대->산성남문(파안루)
상처받은 뒤 더 단단해진 사람, 성곽, 그리고 자연
고려는 무신정권 수립 이후 부패와 백성에 대한 억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은 세상이 모두 자기들 것인 양 행동했고 정치와 외교 경험이 없다보니 나라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며 살았다.
당시 세계는 몽고제국이 판을 치고 있었고 그들의 전쟁 수행 능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그런 그들이 고려에 ‘감당하기 어려운 조공’을 요구했을 때 무신 정권은 거부 의사를 밝혔고 이에 열 받은 몽골에서 사신을 보냈는데, 그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몽골이 가만 있을리 있었겠나. 당장 군대를 보내 고려를 요절내려 했고 군부정권은 부랴부랴 화해를 요청, 당장의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몽골에게 납작 엎드린 고려 정권이 그 다음에 한 짓이 왕궁을 강화로 옮기는 일이었는데 말이 천도지 그것은 탈출과 다를 바 없었는데 강화는 한강 뱃길을 이용하면 내륙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백성들에게 세금 걷어 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천년 전 악몽
고려 정권이 강화도로 달아나자 열 받은 몽골은 진짜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고려 영토를 도륙을 내버렸으니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몽골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하는 등 백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는 고려 인구의 10분의 1인 20만명(추정)이 끌려가기도 했다.
물론 각 성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심지어 몽골군을 격퇴하거나 적장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 이런 전쟁은 지역 군대와 농부에서 의병으로 신분을 바꾼 백성들에 의해 이뤄진 일들이었다.
강화도로 도망간 지배세력과 그들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전쟁터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몽골의 2차 침략을 대비해서 성을 축조한 곳이 북방이 아닌 자신들이 숨어있던 강화도 초입이었다.
강화산성은 그런, 백성을 위한 성이 아닌, 오직 권력자와 귀족 세력들만을 위한 방어벽이었던 것으로 백성은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데 도망간 권력자들은 성 안에서 여전히 풍악을 울리며 살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고려가 1392년에 망한 것도 너무 늦었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자 군부 정권은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하고 원래 도시인 개경으로 환도한다.
몽골은 환도한 그들에게 강화산성과 강화도에 있는 모든 궁궐을 파괴할 것을 요구했고, 군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1232년부터 1250년 무렵에 건설되었던 강화산성은 1270년 철거된다.
축조 때 동원된 백성들이 철거 때 또 다시 끌려가 노동을 착취를 당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조선이 개국 직후 강화산성의 복구를 시도한 이유가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은 간다.
결국 조선 또한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경복궁과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달아나지 않았던가. 인조가 숨어 있다 결국 제 발로 삼전도까지 가 머리를 박아가며 항복을 선언했던 병자호란의 피난궁궐이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이 된 이유도 청나라 군대가 이미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첩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파괴된 강화산성은 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주도, 고려 시대 내성 규모의 돌성으로 완공했으나 그 뒤에 지속적인 보수 과정을 거쳐 1711년에는 강화유수 민진원에 의해 첨화루가, 1783년 성 개축과 함께 북문 진송루가 복원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1973년에는 남문인 안파루가, 동문인 망한루는 2004년에 복원했다.
퍼온 글 [글 이영근(여행작가) ⓒ 매일경제 &mk.co.kr]
<강화산성이 나온 안내 지도입니다.>
강화에는 몇몇의 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었는데 어느 날 남문을 지나며 강화산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강화성을 한 바퀴 돌아 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강화성을 찾은 건 지난 8월27일 집사람과 함께 강화5일장 구경에 나섰다가 예정에 없었던 강화산성을 올랐습니다.
서문 부근에 주차를 하고 남장대를 넘어 남문까지 답사를 하였는데 복장도 일반차림이고 집사람의 무릎상태도 좋지 않아 1차 답사는 남문에서 마쳤으며 2차 답사는 시간이 많이 지난 11월5일이었으니 1차 답사 후 2차까지는 약70일이 지나서였습니다.
지난 8월27일 서문인 첨화루를 찾았을 때는 산성 서문은 공사중이었고 주차장은 있으나 공사중으로 막아 놓아 주변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산성답사를 시작합니다.
보이는 대로를 지나 주차장이 끝나는 지점에는 수문이 있으며 복원된 성곽을 따라 답사가 시작됩니다.
앞에 보이는 남산이 녹음이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산성 밖으로 가며 찍은 사진입니다.
산성을 유심히 보면 쌓은 돌이 서로 다름을 알 수가 있는데 기단을 형성하고 있는 불규칙적인 돌은 고려 또는 조선시대의 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사각의 벽돌처럼 자른 돌은 최근 재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너무나 규칙적이다 보니 거부감이 듭니다.
이 사진은 산성 안 쪽의 사진입니다.
바깥쪽보다 흙으로 돋구어 방어하기 수월하게 만들었습니다.
초입에는 성곽을 복원했는데 시내에서 벗어나며 성곽 터를 관리하고 있으나 복원은 아직 안 되어 있습니다.
산책로를 겸했는지 통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고도를 높이며 출발한 서문에서 이곳까지 한눈에 보이며 건너편 산성이 지났을 북쪽의 산이 보이고 강화시내가 대부분 가시권에 들어옵니다.
조금 더 올라 좌측으로는 국화리 저수지가 보이고 저수지 뒤편으로는 고려산이 보입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려산은 진달래로 이름이 나있는 산으로 봄철이되면 많은 산객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는 산입니다.
강화시내가 점점 멀게 보이고 시내 너머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다 뒷편으로 개성의 송악산의 연봉들이 봉입니다.
이 사진은 산성을 오르며 귀한 금개구리를 만났습니다.
어린시절 먹거리가 흔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친구들과 들판으로 나낙 금개구리를 잡아 주변의 나무로 불을 지펴 구워 먹기도했는데 이제는 이 금개구리가 멸종위기 종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금방 오를 것 같았던 산성은 한동안을 오르는데 한때 토성인지 석성인지 구분이 안되는 곳을 지나 왔는데 높은 곳으로 오르며 성의 보존 상태가 좋아서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여장은 전혀 첮아볼 수가 없습니다.
초입에 산성 안내문에는 성곽의 둘레가 약1.2km라고 했는데 이해가 안됩니다.
서문에서 이곳까지 올라 온 거리도 약 1km는 되는 것 같은데 아직 남장대는 커녕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앞에 성곽이 복원한 모습이 보이므로 남장대도 얼마 남지 않았나 봅니다.
복원한 성곽 조금 못 미친 지점에 암문이 있습니다.
암문은 일종의 비밀통로인데 이 문을 통해 어떠한 일이 이루어 졌으며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한동안을 올라서 뒤 돌아 본 풍경입니다.
남장대가 가까워 졌습니다.
시내서 볼 때는 남장대 건물을 판독할 수 없었는데 눈앞에서 보니 2층 망루로 되어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남장대로 뒷편 성벽 밖을 볼 수 있습니다.
역시 하단 기단석은 거의 원형에 가깝고 윗쪽은 보수의 흔적이 보이며 여장은 새로 복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장대가 있는 성안입니다.
주변에서 금개구리 한마리를 또 만났는데 산이 오염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남장대는 2층으로 지어졌는데 남장대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2층은 잠겨있어 외부인이 망루로 오르는 것을 차단했으며 1층은 마루로 누구든지 쉬어 갈 수 있도록 쉼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남장대 앞에는 안내판이 있는데 이 안내판에 의하면 "고려 고종 때인 1232년에 만들어졌으며 조선 숙종 때 현재의 규모로 개축되었으며 성곽의 길이는 7.1km이며 4대문과 암문, 수문, 북장대와 남장대를 두고 있다. 2008년 발굴조사에 이어 2010년 남장대를 복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장대에서 본 강화시내의 모습입니다.
남장대에서 본 강화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과 건너편은 문수산으로 문수산성이 보입니다.
남장대에서 본 고려산입니다.
남장대 동쪽 산불감시초소이며 우측에 있는 느티나무에는 남장대가 있는 남산의 정상표식이 달려있는데 서래야박건석님이 달아 놓은 것으로 "남산 222.5m"로 되어 있습니다.
남장대에서 본 강화시내와 가운데 V라인은 북문이며 좌측으로 산아래 있는 건물은 강화여.중고등학교이고 우측 교회 뒤로 보이는 공터는 고려궁지입니다. 북문 뒤로는 바다가 보이고 바다 건너는 북한이며 북한땅 맨 뒷산은 개성의 송악산입니다.
남장대에서 15분정도 휴식을 취하고 하산을 시작합니다.
오후 4시50분에 서문을 출발해 40분만에 남장대에 도착했고 5시45분에 하산을 하는 것인데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아도 늦은 오후임을 알 수 있는데 요즘 같으면 이시간이면 어두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한동안을 내려오다 위쪽과 아래쪽으로 찍었습니다.
남장대를 내려서며 옛 성곽은 보존이 잘되어 있었는데 어느 부분에서는 사방에 흩어져 훼손이 되어 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래쪽 성곽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인데 불규칙정인 돌로 쌓은 성곽이 정감이 갑니다.
옛날 고려시대에 강제로 백성을 동원하여 많은 돌을 나르며 이 성을 쌓았을 것으로 당시 백성의 고초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성곽 둑에는 여기저기 꼬들빼기라고 부르는 씀바귀가 많이 났습니다.
요즘에는 씀바귀가 먹을 수 없는 철이지만 수시로 성곽을 관리하며 성곽 주변의 풀을 깎으므로 고들빼기가 새순이 나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성곽을 내려오며 전리품으로 고들빼기를 수거합니다.
내려오는 길에 이정표를 만나는데 남문의 거리는 표기되지 않았고 알지도 못하는 약수터만 표기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성곽길이 없어지고 사유지로 보이는 밭 한 가운데를 지나자 다시 성곽길이 나타나는데 복원공사중이었습니다.
밭에는 풍성한 들깨가 무성했는데 싱싱한 깻잎이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밭을 가로질러 성곽에 붙습니다.
뒤돌아 지나온 길을 본 풍경입니다.
복원 공사 중으로 공사현장 사무소도 콘테이너에 임시로 차리고 있었는데 공사는 하지 않았고 인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금 내려서면 성곽길 옆으로 긴의자 2개를 설치해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를 했습니다.
그리고 긴의자가 있는 곳부터는 여장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남문이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간간이 자동차의 소리가 들립니다.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의 복원된 성곽입니다.
바깥쪽의 성곽으로 아쉽게 아래 기단석부터 모두 새로 깎아 만든 새돌입니다.
남문을 다 내려서 뒤돌아 본 모습으로 성과과 주변의 정리가 제대로 되었습니다.
남문에 도착했습니다.
남문 남쪽에서 본 모습으로 바깥쪽 성곽과 주변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남문에 내려서서 안쪽에서 본 모습입니다.
때마침 성문을 지나는 어느 여학생이 모델이 되었습니다.
<남문 안쪽 현판>
남문 안쪽의 현판으로 "안파루"라고 되어 있고 을묘2월 국무총리 김종필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친필인 것으로 보입니다.
을묘년이라 했는데 우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남문이 1973년 복원을 했다고 하니 그해가 을묘년인가 봅니다.
남문 홍예문 천장에 있는 주작입니다.
<남문 밖 현판>
경복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경복궁 남문에도 이와같은 주작이 그려져 있습니다.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그려져 있는데 가각의 방향에 맞는 수호신들입니다.
남문 바깥쪽의 현판으로 "강도남문"라고 되어 있고 역시 을묘2월 국무총리 김종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문을 바깥쪽에서 본 모습입니다.
서문을 출발해 1시간45분이 소요됐습니다.
오늘은 집사람과 속도전이 아닌 산책이었고 내려오는길에 고들빼기를 캐며 시간을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제대로 걷는다면 1시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보너스로 보는 강화 문화재
산성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는 유물로는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이 즉위하기 전 열 네 살의 나이로 강화도에 유배되어 거처했었던 ‘용흥궁’이 있습니다.
죄인에서 왕이 된 철종은 즉위 4년(1853)에 초가집이던 자신의 과거 거처를 현재와 같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용흥궁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출입구입니다.
출입구를 들어서 작은 대문을 하나더 지나면 작은마당에 소박하게 꾸민 안채가 나옵니다.
안내 문화해설사가 있을 법도한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안채에서 본 출입문과 두번째 쪽문을 들어서야 합니다.
안채와 마주보고 있는 행랑채입니다.
안채 뒷편위에 있는 사랑채인데 방문을 했을 때는 공사중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는 대문옆에 있어 손님을 맞는 집으로 알고 있었는데 철종의 사랑채는 본채 뒤 숨겨진 가옥같은 곳에 있습니다.
천주교 강화성당
용흥궁 뒷담을 돌아가다 보면 높은 언덕위에 마치 절간의 건물로 착각을 할 것 같은 건물이 우뚝하게 솟아 있는데 이 건물이 천주교 강화성당입니다.
강화성당의 입구입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종탑과 종탑안에 특이한 성당의 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종탑을 지나면 2층으로된 천주성전을 만납니다.
천주성전을 한 바퀴돌아 들어선 반대편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서면 주차장으로 이어집니다.
주차장에서 본 성당으로 1960년에 건축된 이곳은 종탑과 본당이 분리된 독특한 형태를 지닌 성당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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