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숨 쉬는 곳
산행일시: 2014년 02월 04일
누구와: 나홀로
산행거리: 약 2.15㎞
산행시간: 1시간 04분(15:40~16:43)
산행코스:남문(15:40)-정족산남봉(16:00)-서문(16:06)-정족산정상(16:38,222m)-북문(16:23)-달맞이고개(16:33)-동문(16:38)-남문(16:43)
이번 정족산을 찾은 것은 산행의 목적이 아니라 산행보다는 문화재를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전등사를 찾은 횟수는 10차례가 되지만 전등사만 대충 형식적으로 둘러보고 가기가 일쑤였는데 이번에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되었을지 모르는 정족산성을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산성의 종류
산성이란 산에 위치하는 성곽으로 테뫼식, 포곡식, 테뫼와 포곡의 복합식으로 나눌수 있습니다.테뫼식(山頂式)은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 되게 한 바퀴 둘러쌓은 것을 말하는데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 같다고 하여 테뫼식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단기 전투나 농성에 대비한 성곽이라고 합니다.
포곡식(包谷式)은 성곽 안에 하나 또는 다수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을 말하는데 테뫼식보다 규모가 크며 외부에 대한 노출도 적다는 장점이 있는데 이러한 산성은 성곽 내에 물자원이 풍부하고 활동 공간도 넓어 장기간의 전투에 용이하다고 합니다.
복합식 산성은 성곽 내에 산꼭대기와 계곡을 공유하고 있는 형식으로 일부는 테뫼식이고 일부는 포곡식 산성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형식으로 규모가 큰 산성이나 도성이 이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울에 있는 한양도성이 이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족산성에 대하여
삼랑성(三郞城)은 정족산성이라고 불리는데 위 분류에 의하면 포곡식 산성에 해당하는 이 성은 1964년 6월 10일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사적 재130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으며 국가소유로 강화군이 관리를 맡고 있으며 소재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입니다.
<남문 안쪽에서 본 종해루입니다>
『고려사(高麗史)의 지리지에 의하면 전등산(傳燈山)을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르며 단군(檀君)이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를 시켜서 쌓았다고 전해 온다고 하였다. 산의 이름은 길상산(吉祥山)이라고 하며 성의 이름은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나 항상 이 지역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구전이 이어져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이나 형태를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되며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조 영조 때 보수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정족산성은 정족산의 지형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으로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성의 안쪽 벽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축(夾築)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돌을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석축 이전에는 토축된 것이었다고 여겨지며 해발 222.3m인 산의 정상에서 동향으로 계곡을 감싸는 형태로 동남향한 계곡 아래에 수구과 남문이 있습니다.
<정족상 정상에서 증명사진입니다>
남문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 15년인 1739년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종해루(宗海樓)’라고 하였으며 영조40년인 1764년 다시 성을 보수하였다.』라고 하며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2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으며 성벽이 회절(回折)하는 곳마다 10여개의 곡성을 이루며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벽은 서측의 산정에서 북벽을 이루는 두 개의 봉우리와 동쪽 봉우리 및 서문 남동쪽의 봉우리 등이 있어서 마치 가마솥을 거꾸로 엎어 놓은 형상이라 하는데 옛날 다리가 3개 달린 화로를 연상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남문을 시작으로 한 바퀴 돌아보기
성곽을 돌기로 하고 어느 곳에서 시작을 할까? 생각이 많았습니다.
온수리에서 내려 온수리시장을 지나 북문이나 달맞이고개로 올라가 시작을 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는데 북문이 좋은 이유는 부처님의 뜻과는 달리 돈독이 올라 3.000원이라는 거금을 받아 챙기는 불교계의 행위도 못마땅하지만 접근과 탈출 후 차를 타고 서울로 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상산 산행을 마치고 정족산성으로 접근을 하다 보니 강화지맥을 잇는 능선을 따라 오르면 입장료도 내지 않아 좋기는 하지만 한 바퀴를 돈 후 다시 남문으로 내려가야 하므로 남문으로 출발점을 잡았습니다.
<성곾 밖에서 본 산성의 모습입니다>
<성곾 밖에서 본 산성의 모습으로 거친 할석으로 쌓은 석축과 총안의 모습입니다>
남문가까이 가서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곽 밖으로 붙었는데 다닌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길이 나 있지는 않았는데 성곽 밑으로 성곽을 따라 돌만했는데 성곽 아래는 바닥이 고르지 못하고 경사가 심해 성곽 외곽으로 돈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남문에서 남봉 오르는 중간까지는 산성 성곽 중 보수가 제일 잘 되어 있는 구간으로 밖에서 보면 높이가 3~6m를 넘나드는데 석축은 오늘날처럼 잘 다듬어진 돌이 아닌 제멋대로 생긴 할석으로 당시 민초들의 정성어린 마음을 담아 쌓은 것으로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위쪽으로는 보수한 성곽이 표시가 나며 여장은 은 석축을 쌓은 돌과 서로 다른 돌 같았습니다.
아카시아 나무 사이를 지나며 성곽 외부를 돌아보고 보수한 곳과 보수하지 않은 곳 사이는 길이 나있는데 그곳을 통해 성안으로 잠입을 하였다.
<성 안쪽에서 본 여장과 총안입니다>
그렇게 입장료를 내지 않고 성안으로 진입을 했는데 전등사를 품고 있는 정족산성을 들어서려면 동문이나 남문을 통해 90%이상 입장을 하며 입장료를 내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서문이나 북문을 통해 입장하면 입장료를 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문은 대문이 있으며 북문은 아예 대문을 만들지 않아 출입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남봉에 올라
성내로 들어서면 성곽을 따라 안으로는 길이 잘 나있습니다.
정족산성은 여장(女墻)과 총안(銃眼,)·사혈(射穴)이 남은 곳도 있다고 하는데 사혈은 어디에 흔적이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남문으로 올라와 치성으로 오르는 구간의 성 안쪽 모습입니다>
여장이란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체성 위에 낮게 쌓은 담장으로 여장이 설치된 부분을 타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1타에 3개의 총안을 설치하는데 얼뜻보면 경사면으로 인해 1타에 1총안을 둔 것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족산성도 1타에 3개의 총안이 설치돼 있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총안이란 여장에 구멍을 내어 쉽게 총을 쏠 수 있도록 낸 구멍으로 이 총안으로 성 밖을 내다보며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는데 조선 중이 총이 생겨나며 총안을 넓게 설치하였고 이전이나 고려 때는 구멍을 더 작게 만들었는데 이를 사혈이라고 불렀는데 사혈이란 활을 쏘기 위해 낸 구멍을 말 합니다.
보수를 마친 남문방향으로는 석축 위 여장이나 총안도 잘 갖추었고 성곽 주변 나무들도 제거하여 시원스러웠으며 남쪽으로 회절하는 곳에는 길게 곡성을 두었습니다.
<남문으로 올라서 남봉을 가는길 치성의 모습입니다>
<치성을 지나 남봉으로 가는 도중 보수한 성곽인데 여장이 없습니다>
치성에서 50여m 올라가면 보수한 부분이 끝이 나며 일정한 거리를 보수하지 않은 상태로 관리하고 있는 것이 의아했는데 미보수 지역을 지나면 남봉 위까지는 석축을 쌓은 성체는 보수를 하였고 여장은 30여cm에 총안을 두지 않았는데 초기부터 여장과 총안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여장과 총안을 쌓는 보수 진행 중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경사진 길을 따라 남봉 위로 올라섰는데 남봉은 넓고 시원스러웠습니다.
석축도 보수를 마치고 여장과 총안은 아직 쌓지 않았는데 아마도 처음부터 여장과 총안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아작 보수가 미완인지는 알 수가 없었는데 6m를 웃도는 높은 성곽으로 위 여장이 없어 위험하였는데 안전을 위해 로프를 친 상태였는데 옛날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적의 침투가 있는지 보초를 서기가 용이했을 것 같았습니다.
<남봉정상으로 시원스럽고 넓었는데 여장이 없어 낙상 사고의 위험이 따릅니다>
남봉에서 전등사가 있는 동북 방향으로는 바위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며 이곳에서 전등사가 있는 계곡을 내려다보면 각각의 건축물들의 지붕이 오손도손 마주보고 있는 것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남봉에서 중명사진을 남겼습니다>
<남봉정상에서 전등사를 담았습니다>
남봉 정상은 넓고 조망이 좋습니다.
이곳에서는 길상산과 마니산, 초피산, 진강산, 덕정산,퇴모산, 혈구산 그리고 산 아래로 펼쳐지는 마을과 들녘의 풍경을 볼 수 있어 마음껏 자연을 음미하며 맞은편으로 정족산의 정상이 가까이 보였데 누군가 한사람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삼각대를 설치하고 증명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서문으로 향합니다.
남봉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고 경사가 심하므로 조심스러웠습니다.
남봉에서 경사진길로 50여m는 여장이 없는 상태인데 이곳을 지나면 여장과 총안을 서문까지 설치하였습니다.
<지대가 낮아지는 서문으로 내려오면서 여장과 총안을 설치했습니다>
서문으로 가까이 가며 서 있는 노송 한그루가 긴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은 생각으로 서문으로 접어들었는데 정상에서 서성이던 사람이 서문으로 내려서 만났는데 이분은 관람객이 아니라 문화재를 관리하는 관리인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서문으로 가니 서문이 열려있어 서문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피고 석축도 둘러보았는데 서문에서 남문방향으로는 보수가 잘 되었고 정상방향으로는 가까운 곳은 보수가 되어 있는데 조금 벗어난 곳부터는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서문 밖의 모습입니다>
서문은 문루가 없는 암문형태이며 문 안과 밖 윗쪽으로는 벽돌을 3단으 쌓아 아치형으로 만들었으며 문은 철문이 아닌 나무판자로 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정족산성은 남문을 제외하고 문루를 두지않았는데 이해를 할 수 있더고 하더라도 서문에서 보듯이 여장을 쌓으며 내려오다 서문에서는 문루와 여장이 없는데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문루가 없다면 여장이 있어야 할 것 같은 데 동문과 서문은 여장이 없어 너무 이상했습니다.
서문에서 직진방향으로는 정족산 정상을 지나 북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이며 우측으로는 전등사로 가는 길인데 전등사를 가기 전 우측으로는 고려 고종이 이곳에 가궐을 지었던 곳입니다.
<서문에서 고려궁지, 전등사로 가는 길입니다>
<이 사진은 2011년9월 가궐터를 찾아 찍은 사진입니다>
40년 가까이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가‘강도(江都)’라는 이름의 임시수도로 정해지면서 1259년 5월(고려,고종)에 중랑장 백승현의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假闕)을 짓고 대장도감을 설치해 선원사 경내에서 8만대장경을 16년여에 걸쳐 판각해냈고 금속활자를 조판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없어 성곽 길을 따라 올라섰는데 서문에서 정족산 정상까지는 석축이 무너진 곳이 아주 여러 곳이 있는데 보수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하고 있어 마음이 아팠는데 하루속히 보수를 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등사에서는 그 많은 돈을 받으며 일부분 이러한 곳에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처님은 돈밖에 모르시나???
<서문을 지나 치성으로 석축이 무너져 내린 곳이 많았는데 보수가 시급했습니다>
<치성을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도중 무너진 석축입니다>
필자가 입장수입으로 성곽 보수비용으로 쓰였으면 바라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전등사는 원래 왕실의 종찰이었으므로 국가의 자산입니다.
현재는 불교계가 힘으로 자기 것임을 주장하고 나서므로 국가가 불교계에게 빼앗긴 것인데 이러한 사찰은 전등사 이외에도 강남의 선정릉의 종찰이었던 삼성동의 봉은사, 광릉내의 광릉의 종찰이었던 봉선사, 수원 융건릉의 종찰인 용주사 그밖에도 많이 있을 법합니다.
정족산 정상에 올라
무너져 내린 성곽을 보며 정족산정상에 올라 한동안 서해와 길상면의 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정상이라서인지 사방 막힘이 없이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정족산 정상의 모습>
<서문에서 남봉을 잇는 성곽>
해발 222.3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원판을 무사히 잘 지켜낸 사고가 있는 산으로 마니산에 버금가는 명산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오랜 역사를 지닌 명찰 전등사가 있는 곳으로 전등사의 동서남북 4곳의 기둥위에는 여인의 나목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전등사를 지을 때 목수와 목수가 사랑을 했던 어느 여인의 서글프고 애처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남문으로 올라서면 보호수로 지정받은 오래된 은행나무는 관아의 무리한 조공의 요구로 어려움을 겪던 스님들이 은행이 열리지 말도록 기도를 올린 후 오늘날까지 은행을 열지 않는 사연을 가지고 있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정족산은 이렇듯 많은 볼거리 많은 이야기 많은 역사를 품고 있는 명산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성곽은 아직 보수를 하지 않은 상태이어서 여장이 없는 성체만 유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해가 점점 기울면서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듭니다.
<정족산 정상에서>
삼각대를 설치하고 증명사진을 찍고 정상을 내려섰습니다.
북벽으로는 성곽의 높이가 높은 곳인데 많이 무너지고 메워지고 성곽 가까이 나무들이 자라고 심지어는 석축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나무나 잡풀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러한 나무를 제거해 주는 것이 성곽을 보호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정상에서 북문으로 내려서며 만난 성곽>
<미보수 지역을 내려서면 북문까지 깨끗하게 보수가 되었는데 여장은 없습니다.>
북문 가까이 내려서면 여장은 없지만 석축은 일부 보수를 하였고 주변도 정리가 잘되어 있었습니다.
북문에 도착했습니다.
<정족산성 북문으로 동문과 서문과 달리 북문에는 여장이 있습니다>
북문은 정족산성의 성문 중 규모가 제일 작고 문루도 없고 아치도 아닌 단순한 암문으로 되어 있으나 동문이나 서문에는 두지 않은 여장이 있습니다.
북문은 몇 차례 왔던 곳으로 북문을 통해 온수리로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고 반대로 북문에서 안으로 진입하면 정족산 사고지가 있는데 사고지는 역대 조선왕들의 정치를 집대성한 신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매우 중요한 곳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등사만 관람하고 사고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라 안타깝습니다.
(정족산 사고에 대해서는 후미에 별도 기재)
북문을 지나면 동쪽 끝 지점인 달맞이고개까지는 비교적 석축이 잘 보존되고 있는 편입니다.
북문에서 달맞이고개로 가는 도중 치를 만날 수 있는데 치(雉)는 방어시설의 하나로 성벽을 쌓을 때 방어에 용이하게 한쪽을 약간 돌출되게 쎃은 것을 말합니다.
<북문에서 달맞이고개로 가는 중간이 있는 치>
달맞이고개에 도착하면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이정표가 세워진 옆으로 쇠사슬이 매어있는데 외부에서 성안으로 들어오는 길로 쇠사슬을 잡고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는데 안전과 성곽의 보호를 위해 없애던지 아니면 계단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쪽 끝 성곽이 회절하는 곳에서는 동쪽과 남쪽으로 조망이 뛰어나 길상면은 물론 문수산에서 동쪽 방향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동쪽 곡성에서의 전망으로 앞의 산이 문수산입니다>
<달맞이고개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곽>
방향을 서남쪽으로 바꿔 달맞이고개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200m의 구간은 남문 주변과 같이 보수가 잘되어 있는데 여장이나 총안이 남문이나 서문 주변과 달른데 총안의 위치가 낮고 여장의 위는 갓모양 돌을 씌우지 않아서인지 마무리가 덜 된 느낌입니다.
경사진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는데 30분전 서문에서 만났던 관리인을 다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석축이 무너져 보수가 시급한 부분이 많다고 하자 현제는 보수를 상당히 많이 한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동문으로 내려서며 국회의원들은 하는 일도 없이 매번 싸우면서 그 많은 세비를 받아가는 것이 생각나 국회의원 세비를 활동하는 사람에게만 주고 활동하지 않은 사람은 세비를 주지 말고 그 돈으로 보수가 시급한 문화재를 보수했으면 하는 생각을 떠 올리며 동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동문의 모습입니다>
작은 동문은 서문이나 북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의 형태도 서문과 같이 문루는 없고 아치형의 문으로 되어 있는데 서문은 판자로 대문을 달은 반면 동문은 대문을 달지 않았습니다.
굳이 다른 것은 따지자면 동문 밖에 넓은 주차시설을 갖추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문으로 알고 동문으로 들어서니 정문의 역할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출입을 한다는 점과 정문인 남문으로 차량이 출입해야하는데 승용차는 이곳 동문을 통해서 출입을 하고 있다는 점인데 지향해야할 점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병인양요 당시 양현수 승전 비각>
동문 옆에는 초라한 비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 비각은 고종(高宗)3년인 1866년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오던 160명의 프랑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양헌수(梁憲洙)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는 곳인데 우리의 세계적 보물인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양현수의 비각에 대해 좀 더 세심한 관심속에 보존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현수 비각은 이곳을 찾을 때마다 보아 왔던 것으로 것입니다.
동문에서 남문사이는 짧습니다.
<동문에서 남문방향치성이 있는 곳으로 보수가 필요한 곳 중 하나입니다>
동문에서 남쪽으로 노송이 어우러진 곳으로 운치가 있는데 사람들은 후미진 곳이라는 생각이 이곳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필자도 이곳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성곽을 따라 오르면 회절하는 곳에 치성을 두고 있는데 동문에서 이곳까지는 보수가 시급한 곳으로 여장과 총안은 형태를 유지한 채 그 자리에 주저 않은 상태로 있는데 안타까웠습니다.
<동쪽 광장과 목책---좌측으로는 미보수지역으로 여장과 총안이 무너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 치성이 있는 곳은 여장이 없고 목책을 쳤는데 원래부터 그런지 보수 중이어서인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목책이 있는 곳부터 남문까지는 성곽의 보수를 마친 곳이며 이곳에는 여장과 총안을 원래대로 복원시켰습니다.
좁을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바로 앞에 남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문에서 본 동문방향입니다>
남문에 도착해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남문은 영조 15년인 1739년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남문은 1976년 다시 복원하고 문루를 세우고 예전대로『宗海樓』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합니다.
<영조 때 세운 문루---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은 1976년 복원했습니다>
『종회루(宗海樓)』
영조 때 문루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판의 글자배열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썼는데 한문은 일반적으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고 있지 않는가?
동문을 잠정폐쇄하고 정문인 남문을 활용하는 방안은 어떨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삼랑성을 벗어납니다.
정족산사고
<정족산사고로 2011년9월에 찍었으며 위로부터 정문, 선원보각, 장서각, 사고지의 뒷편입니다>
시간이 없어 오늘 찾지 못한 정족산사고는 전에 찾았을 때 찍은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 는
사고지를 설치 할 때 처음에는 강화에는 없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인 1606년(선조(宣祖)39)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를(마니산 자락 덕포리 마을 우측으로 마니산관광단지 방향 고개 좌측 골짜기) 설치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해 오다가 조선 현종 원년(1660년)에 절 안에 정족산사고를 짓고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 본을 봉안했던 곳입니다.
사고(史庫)의 역사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4부를 만들어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의 4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의 실록을 빼고는 모두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5부의 실록을 갖추어, 1부는 서울 춘추관에 그대로 두고 다른 4부는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춘추관의 실록은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불탄 이후로는 다시 만들지 않아, 그 뒤로는 4부만을 보관하였습니다.
묘향산사고의 실록은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습니다.
마니산사고의 실록은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1660년(현종 1)에 불까지 나자 보수하여 1678년 같은 강화도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습니다.
그 뒤 철종까지의 실록이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되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온전히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1910년 일본이 국권을 강탈한 뒤로는,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옮겨졌다가
정족산사고본은 경성제국대(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되었으며
태백산사고본 848책은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와 문화재관리국 및 서울대학교의 합의 하에 1985년 3월 22일 보관 전환하여, 지금은 부산기록정보센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구황궁(舊皇宮) 장서각에 이관되었다가 6·25사변 당시 북한측에서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가 1923년 9월 1일의 일본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없어지고, 화를 면한 74책 가운데 27책(중종실록 20책, 선조실록 7책)은 1932년 5월 28일 이후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해 왔으며 나머지 47책(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은 2006년 7월 7일 동경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74책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정족산본 1,181책 ==>서울대 도서관
태백산본 848책 ==>부산기록정보센터
오대산본 74책 ==>국립고궁박물관
적상산본 823책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
기타 산엽본 21책 ==>서울대 도서관
이중에서 적상산본을 제외한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새로 설치한 윤장대 입니다.
한바퀴를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것 같다고 합니다.
윤장대 뒤로 보이는 보호수가 은행나무인데 이러한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행이 열리지 않는 은행나무의 전설
불교가 핍박을 받던 시기 이 은행나무가 열매를 잘 열어 풍작일 때 열가마를 수확하곤 했는데 어느 해 관아에서 은행 20가마를 공물로 바치라고 명이 떨어지자 고민을 하던 승려들이 합동기도를 올렸는데 주지스님이 천년만년 은행이 달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자 청천벼락이 치더니 나무에 달렸던 은행이 모조리 떨어졌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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