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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 돌아보기(2)

범솥말 2024. 9. 10. 11:12

강화산성 돌아보기(2)

 

문화재 명칭 : 강화산성(江華山 城)

문화재 종목 : 사적 제132

문화재 지정일 : 1964.6.10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답사일 :2014.11.05

답사경로 : 산성남문(파안루)->견자산->산성동문(망한루)->북장대터->산성북문(진송루)->산성서문(첨화루)

다시 찾은 강화산성

지난 825일 집사람과 서문을 시작으로 남장대를 거쳐 남문으로 내려서며 강화산성의 반을 답사하여 남은 반을 답사하기 위해 집사람과 개인택시를 하는 처남과 다시 강화를 찾았습니다.

동문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집사람과 처남은 바로 북대로 올라가라고 한 후 필자는 혼자 다시 남문으로 가서 남문을 카메라에 담으로 남은 산성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산성남문인 파안루 좌측 성곽을 따라 안과 밖으로 있는 나뭇잎들이 지난번 찾았을 때는 녹음이 짙은 푸른색이었는데 2개월이 조금 지나는 사이 붉은 단풍으로 변했습니다.

문루 우측으로 2차선 도로를 지나 성곽이 이어집니다.

파안루 좌측으로 여장을 세운 것과 달리 여장이 없는데 아직은 미완으로 여장을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성곽이 끝나는 지점은 강화의 중신도로인 48번국도로 이곳부터는 성곽의 복원이 안 되었습니다.

성곽은 길 건너편 나무숲으로 이어지는데 오르는 길도 정비되지 않아 주택 사이로 들어서 산으로 올라야합니다.

위 밭을 지나 무성한 나무가 있는 곳에서 능선을 타고 좌측으로 이어지다가 고도를 낮추며 토성의 형태로 남은 성곽을 만납니다.

성곽 밖으로 산책도로 같은 길이 나 있으며 성곽을 따라 경사진 곳을 오르면 잠시 정상부에 닿습니다.

정상부에서는 길이 Y로 갈라지는데 좌측으로 들어서서 조금을 가다가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서게 됩니다.

정상부에는 넓은 초지와 가시덤불이 있으며 독활이라는 야생화를 만났습니다.

이 식물의 뿌리는 한약재로 쓰이는데 뿌리를 캐어 겉껍질을 그늘에서 말려 편두통 치료에 쓰인다고 하는데 봄철 새잎은 나물로 먹기도 합니다.

독활을 만난 곳은 휴대폰GPS에 의한 높이가 해발 54m로 산이름은 견자산이라 부릅니다.

견자산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러한 전설이 있습니다.

원나라 군대의 침략에 맞서 고려의 고종 임금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지만 전쟁은 예상 외로 길어졌고 육지에 있는 고려 백성들은 몽골군의 만행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강화도의 고종 임금은 더 이상 육지 백성들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어 몽골 군대와 합의를 하기로 했다.

몽골 군대가 고려 정부에 요구한 것은

첫째,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빨리 개경으로 나올 것.

둘째, 고려의 왕이 원나라에 들어와 원의 황제에게 인사드릴 것이었다.

쉽게 말해 빨리 육지로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종 임금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 대신 왕자가 원나라의 황제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로 약속했으나 볼모로 왕자를 보내기가 안타까워 처음에는 임금의 먼 친척 중에서 사람을 골라 원나라로 보냈으나 나중에는 왕의 친아들 안경공 창을 보내야 했던 고종은 살아온다는 보장도 없이 아들을 머나먼 적국으로 보내고는 밤이면 밤마다 잠을 설치는 날이 잦아졌다고 합니다.

“아! 가슴이 답답하구나. 여봐라, 인근 정자산으로 바람을 쐬러 갈 터이니 준비를 하거라.”

늘 가슴이 답답했던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궁궐 동쪽에 정자가 있다 해서 정자산으로 불리고 있는 산으로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적국으로 떠난 아들을 생각하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옆의 신하에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구나. 궁궐에서는 아무리 왕자를 생각해도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이 산에만 오르면 왕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나는구나.”

그 후부터 임금은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정자산으로 올라 북쪽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으니 백성들은 임금의 정자산 행차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구경을 하곤 했습니다.

이리하여 정자가 있어 정자산이라 불리던 이 산의 이름이 아들을 본다는 뜻으로‘볼 見(견)’, ‘아들 子(자)’자를 써서 견자산(見子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견자산 정상 서쪽으로 흰 탑이 보였는데 이 탑은 강화현충탑으로 한국전쟁 때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직한 군경 1033인을 위로하기 위해 195310월에 세웠는데 1993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견자산에서 북쪽 방향으로 내려서며 축성했던 성곽이 일부 나타납니다.

이어서 통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통나무 계단을 내려서면 복원된 성곽이 보이고 차도 건너편에 동문이 보입니다.

산성동문입니다.

문루를 갖추고 있는 동문은 4대문 중 제일 늦은 2004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성안쪽으로는 주택이 밀집되어 있고 작은 무료 주차장이 있습니다.

동문의 현판은 망한루라고 되어 있으며 정규은의 글씨로 되어 있습니다.

망한루 아래 아치형 문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강화산성 돌아보기(1)에서 언급했듯이 임금이 거하는 궁궐의 문에는 각각의 바위를 상징하는 동-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리는데 사신으로 불리는 이들은 계절을 관장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경복궁 건춘문과 같이 이곳 동문에도 청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성 빠깥쪽 현판은 강도동문이라고 되어 있고 망한루를 쓴 정규은의 글씨입니다.

문루를 갖춘 동문의 바깥쪽 모습입니다.

동문에서 성곽은 끊어졌습니다.

주변은 사유지로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한참 떨어진 지점에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강화읍의 보호수인데 성곽은 이 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주택과 밭을 지나야 하므로 제대로 답사하기 힘듭니다.

위에 보이는 2층 주택을 지나 숲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나 길이 없어 우측 포장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골목을 빠져 나가면 좌측으로 성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성곽을 찾았습니다.

주변에는 문화재의 보호가치를 모르는 현지인들이 무너진 성곽 주변에 밭을 일구어 작물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허가로 지은 개 사육장이 있는데 많은 개들이 덩달아 짖어대고 있는데다가 악취가 말리까지 풍기고 있어 단속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무너져 내린 성곽이 있는가하면 그래도 정감이 가는 불규칙스러운 옛 성벽을 만나기도 합니다.

1차로 보였던 고지에 오르니 한동안 내려선 곳에 정자가 보이고 다시 성곽은 북쪽으로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세운 흔적이 나타납니다.

정자로 내려서니 작은 4거리 안부로 우측으로는 동문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가다가 좌측을 통해 이곳으로 오르는 길이 있으며 좌측으로는 북장대가 있는 방향으로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이며 온 방향 좌측으로는 고려궁지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차피 성곽을 따라 답사하는 것으로 직진으로 올라갑니다.

성곽 옆으로는 산책로가 잘 나있으며 곳곳에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운동이나 산책을 하는 코스로 이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4거리 안부를 지나 고지에 오르면 방향은 좌측으로 틀며 이어집니다.

성벽의 원형이 사라지고 토성처럼 보입니다.

잘 나 있는 성곽을 따라 고지로 이동을 합니다.

고지를 올라서 다시 방향을 바꾸면 시원스럽게 앞이 터집니다.

때로는 무너진 성곽이 때로는 일부 원형을 유지한 석축이 눈앞에 펼쳐지고 멀리보이는 고지는 북장대터로 보였고 그곳에는 동문에서 헤어졌던 집사람과 처남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북장대 터 뒤로는 V라인을 그리며 우측으로는 고려산이 좌측으로는 혈구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강화 나들길 제1코스가 지나는 이곳에는 석축이 그런대로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검게 변한 돌과 검은 이끼가 덮은 석축이 오래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잘 보존된 석축이 있는 곳에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100m를 더 가야 북장대로 알았는대 이정표에는 이미 지난 곳이 북장대로 표기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지나온 뒤나 가야할 앞이나 북장대터라는 팻말이 없었습니다.

도면상으로 보면 가야할 고지가 북장대 터라고 생각했고 봉우리 높이로 보면 지나온 곳은 휴대폰 GPS에 의한 계측이 123m였고 가야할 곳은 112m였습니다.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서쪽 방향으로 3분을 가면 북장대라는 시판이 세워져 있는데 화남 고재형이란 사람이 1906년 심도기행을 하며 지은 시입니다.

112m고지에 올랐고 뒤로는 고려산의 미군기지가 보입니다.

고려 고종이 강화로 천도를 하며 송악과 같이 산 이름도 지었다고 하는데 북쪽의 고지는 산이름을 짓지 않았는지 북대라고 불립니다.

집사람과 처남이 기다림에 지쳐 먼저 북문으로 내려서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북문은 보이지 않지만 무너진 성곽에서 복원된 새 성곽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성곽 아래 북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장대를 내려서며 우측으로 펼쳐진 대산리 앞 들녁과 바다 건너 북녁땅입니다.

성곽을 내려서며 북문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날렸습니다.

북문에 도착했습니다.

문루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있었고 침입자를 단속하는 카메라는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북문을 나가서 바깥쪽에서 북문을 본 모습입니다.

출입문의 위 부분이 완전한 아치가 이님이 이상했는데 복원당시 아치를 잘 못 맞춘건 아닌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형태였는지 의아했습니다.

북문 밖에서 문루에서 이오진 성곽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북문의 현판은 진송루라고 달려 있으며 필자는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북문에는 누각이 없었으나 정조 7(1783)에 강화 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북문 아래 아치형 천장에는 아무런 그림이 없었는데 사신 중 북쪽을 담당한다는 현무(거북의 일종)가 없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북문 안쪽 옆에는 북장대를 썼던 화남 고재형이 북문이라는 시를 쓴 시판이 있습니다.

북문 앞 잔디에서 간식을 하며 30분의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곳 북문까지는 차량이 올라올 수 있는데 걸어서는 강화여고 있는 곳에서 올 수 있으나 자동차는 고려궁지 좌측으로 난 길을 이용해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습니다.

긴 휴식을 취하고 북문에서 서문을 향해 발길을 돌립니다.

북문 문루를 조금 지나면 길은 없어지고 사방이 아카시아 나무와 가시덤불이 희미한 길 주변으로 나있어 조심을 해야하는 구간으로 집사람이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불평하기는 처남도 마찬가지로 바지가 고가의 옷인데 가시덤불이 옷을 망친다고 하는 불평이지만 답사를 끝낼 욕심에 못 들은 척 지납니다.

한참을 헤매며 가면 송신탑이 있고 군부대 철망이 가로막습니다.

우측으로 가시덤불속을 헤치며 우회를 합니다.

우회하여 가시덤불을 지납니다.

가시덤불을 지나는 통행세는 바지에 큰 훼손을 당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이제 가시덤불을 끝내고 다시 성곽으로 복귀를 합니다.

집사람이 성곽을 따라 걷고 있고 앞에는 남산의 남장대가 보입니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대부분 이러합니다.

길을 내려서다 칼라로 된 이정표를 만납니다.

북문이 1.05km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운수물 방향이 강화여,중고등학교입니다.

내려온 방향이고 가운데 3거리가 이정표가 있는 곳입니다.


강화여중
,고에서 한고개를 넘어 내려오는 길가에는 괴목이 있습니다.

사진으로 이미지 포인트를 제대로 잡지 못했는데 재미있는 괴목이었습니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포장도로가 나오며 포장도로는 정수장으로 가는 길인데 정수장 정문 앞에서 우측 철조망으로 오르고 철조망을 따라 원을 그리며 지납니다.

정수장을 내려서면 시가지에 근접하게 되는데 맨 뒤 문수산이 보이고 우측 앞쪽으로 견자산과 현충탑이 보입니다.

교회 뒷쪽으로 강화초등학교가 보이고 사진으로 불확실한데 초등학교 뒤로 고려궁지가 있습니다.

V라인 중앙이 북문의 위치가 되며 우측은 북장대가 있는 북대이고 좌측은 강화여중,고등학교입니다.

이곳을 내려서면 좁은 길을 만나고 우측으로 넓은 길로 이어지는데 산성의 성곽은 초라한 집과 잡사이를 지나야 하는데 초라한 집이 성곽위에 위치한 것입니다.

집을 돌아 방향을 바꾸면 서문의 성곽이 나타납니다.

새로 복원된 성곽에는 여장은 설치하지 못했습니다.

성곽을 딸 아랫쪽으로 서문이 보입니다.

그리고 서문 건너편으로 남장대가 있는 남산이 보입니다.

서문에 도착을 합니다.

지난 8월에 왔을 때는 서문이 공사중이었는데 이제 공사가 완료되어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서문 좌측으로 복원된 성곽의 석축이며 문루 가까이에는 여장도 설치했습니다.

서문 첨화루의 풍경입니다.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강화산성 4대문 중 남문, 동문, 북문은 성안쪽으로 파안루, 망한루, 진송루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는데 서문은 첨화루라는 현판이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 달려있습니다.

? 그런지 궁금합니다.

강화군청으로 전화해서 그 이유를 나중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문에서 본 성곽입니다.

좌측 주차장으로 쓰이는 곳은 연무당터이고 우측 사람이 있는 곳은 동락천이 있는 곳으로 자세히 보면 수문을 볼 수 있습니다.

연무당 옛터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최종 조인된 역사적 장소다. 이곳에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후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석수문은 강화읍을 통해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 조선 숙종 37(1711)에 지금의 성 형태로 재축하면서 축조한 수문이라고 합니다.

산성서문의 현판은 첨화루입니다.

첨화란 직역을 하면 화려함을 본다는 뜻인데 그 속에 어떠한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첨화루 호예문 천장에는 이러한 호랑이 그림이 있습니다.

이미 거론한 바 있는 것처럼 사신 중 서쪽을 관장하는 신은 백호입니다.

그러니 이곳에는 백호대신 한국형 호랑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산성서문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문루를 쌓아 올린 석축이 옛것과 최근것이 섞여 하나가되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안쪽에는 현판이 없고 좌측의 느티나무는 서문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잘 복원된 우리 문화재를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손색없이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