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산행과 섬 트레킹이야기

강화5산, 마니산~초피산 연계산행이야기

범솥말 2024. 9. 5. 17:12

강화 초피산~마니산 연계산행기

 

산행일시: 20091221

누구와: 나홀로

산행거리: 10

산행시간: 6시간05(11:40~17:45)

산행코스:덕포리입구(12:10)-마니산사고지(12:40)-초피산(13:25)-469.5(14:15)-정상(14:45.469m)-참성단(14:50)-단군로갈림길(15:00)-하늘재(16:00)-화도면(16:25)

마니산 사고지를 찾아...........

오늘은 마니산으로 산행지를 정하고 신촌에서 강화행 직행버스를 타고 초지대교를 지나 마니산 관광단지 전 정거장인 덕포리에 하차하여 마을회관 입구로 들어선다.

내가 이곳에 내린 이유는 명산 100산에 대한 재조명과 이조 왕조에 대한 생각이 전과 다르게 느껴지므로 조선왕조신록을 보관했던 사고지를 찾아보기 위함과 단군왕검의 전설이 서려있는 참성단 다시 알기 등의 목적이 있어서이다.

<덕포리 입구>

막상 덕포리에 내렸지만 어떻게 사고지를 찾아가나 걱정이 앞섰고 일단 마을회관으로 찾아가 덕포리 어르신들에게 사고지 터에 대한 궁굼증을 물어보기로 하고 마을로 들어선다.

하늘에는 제트기가 높이 날아가며 제트기류로 인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전쟁 후라서 훈련을 하는 제트기가 많아 하늘에는 수시로 제트기가 날았고 제트기는 하늘을 도화지 삼아 직선과 곡선을 긋고 가면 우리들은 서로 한 대씩 맡아 누가 맡은 제트기의 그림이 오래가나 내기를 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과거 동심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하니 아마도 힘들긴 하지만 오늘 덕포리에 온 목적이 이루어 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덕포리에서 보는 초피산과 마니산 풍경>

마을회관을 찾아 갔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어 난감하였고 잠시 망설이다 마을회관 근처에서 콩 타작하는 여자들이 있어 사고지에 대해 물으니 젊고 교양이 있어 보이는 분께서 마니산 사고지에 대해 물으니 사고지는 모르지만 강화문화만 연구한다는 분이 있다며 휴대폰을 연결해주어 크게 참고가 되었다.

알려준 전화로 통화하니 덕포리에서 마니산 국민관광단지로 넘는 고개마루 좌편 부근으로만 알고 있다고 하는데 넓은 산, 깊은 계곡 어디인지 어떻게 찾을지 캄캄하기만 하였다.

고맙다는 인사로 대신하고 마을을 가로질러 폐쇄된 마니초등학교로 가니 정문에 강화문화연구소의 작은 간판이 붙어 있어 사고지를 물어보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연구소 안으로 들어섰는데 불행히도 연구소에는 아무도 없고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학교에서 다시나와 마을주민 누구에게라도 물어볼 요량으로 마을을 쏘다니지만 좀처럼 주민을 만날 수 없다.

다행히 어느 집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보이자 무조건 집으로 들어가 실례를 무릅쓰고 사고지를 물으니 나와 사고지와 운이 닿을려 그러는지 그분은 위치를 대충 알고 있는데 관리하던 노인이 돌아가셔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설명해준다.

그분이 알려준 대로 계곡으로 들어서니 허름한 양옥이 한 채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아보였는데 한사상연수소라는 작은 간판이 달려있고 현관의 시계는 635분에 멈추어 있고 유리창사이로 보이는 거실탁자에는 색바랜 신문과 잡지가 보인다.

<마니산 사고지로 추정되는 곳>

건물 뒤로 억새가 번성한 공터가 나오는데 얼마전 요물님이 산하 게시판에 사고지라고 찍어 올린 사진과 일치하고 억새가 무성한 사고지 터에는 간간히 부는 바람에 으악새의 울음에 겨울의 썰렁함을 대변해 준다.

사고지에 제대로 도착했지만 즐거움이나 기쁨은 없고 괜시리 드는 허전한 마음은 나도 알 수 없었고 주위를 서성이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 본다.

마니산 사고는

사고(史庫)의 역사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4부를 만들어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의 4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의 실록을 빼고는 모두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5부의 실록을 갖추어, 1부는 서울 춘추관에 그대로 두고 다른 4부는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춘추관의 실록은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불탄 이후로는 다시 만들지 않아, 그 뒤로는 4부만을 보관하였습니다.

묘향산사고의 실록은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습니다.

마니산사고의 실록은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1660년(현종 1)에 불까지 나자 보수하여 1678년 같은 강화도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습니다.

그 뒤 철종까지의 실록이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되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온전히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1910년 일본이 국권을 강탈한 뒤로는,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옮겨졌다가 정족산사고본은 경성제국대(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되었으며 태백산사고본 848책은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와 문화재관리국 및 서울대학교의 합의 하에 1985년 3월 22일 보관 전환하여, 지금은 부산기록정보센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구황궁(舊皇宮) 장서각에 이관되었다가 6·25사변 당시 북한측에서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가 1923년 9월 1일의 일본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없어지고, 화를 면한 74책 가운데 27책(중종실록 20책, 선조실록 7책)은 1932년 5월 28일 이후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해 왔으며 나머지 47책(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은 2006년 7월 7일 동경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74책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정족산본 1,181책 ==>서울대 도서관

태백산본 848책 ==>부산기록정보센터

오대산본 74책 ==>국립고궁박물관

적상산본 823책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

기타 산엽본 21책 ==>서울대 도서관

이중에서 적상산 본을 제외한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초피산으로 가는 길.......

지도상에는 숙피산으로 표기되는 초피산은 내겐 미지의 산으로 한국의 마테호른이라 불리는 용문산의 백운봉같이 우뚝 솟아 마니산을 오고 갈 때마다 항상 관심을 갖던 산이다.

초피산을 오른 사람들은 많으나 특별한 산행기록은 없고 마니산을 오를 때 하나의 산 개념으로 오르기 때문인 것 같으며 그것도 열이면 아홉은 함허동천이 있는 사기리 방향으로 오르고 덕포리 방향에서 오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덕포리에서 본 초피산의 모습>

무거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다시 덕포리 마을로 들어서 집 앞을 서성이는 아주머니에게 초피산 등산로를 물으니 좌측으로 가라하여 아주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가니 처음에는 뚜렷한 길이 보이더니 산으로 접어들며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길이 없어진다.

다시 내려 올 수도 없어 사람이 지난 흔적이 없는 너덜지대를 네발로 기어가며 급경사를 오르며 사전에 산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 온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초피산 정상의 모습>

<초피산에서 본 덕포리 풍경>

<초피산에서 본 마니산 풍경>

우여곡절 끝에 능선 상에 오르니 올라선 곳은 초피산 정상에서 1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며 초피산 정상 부근은 잔 나무들이 사방을 가려 생각보다 조망이 안 좋으며 정상에는 작은 돌무더기 표식과 갈참나무가지에 초피산이라고 쓴 철판이 정상을 알릴뿐이다.

잠시 머무르며 흐른 땀을 식히고 급경사 길을 내려와 함허동천으로 내려서는 3거리에 도착하니 469봉에서 내려오는 한쌍의 산님을 만나니 오늘 처음으로 산에서 만나는 분들로 반가이 인사를 하고 지나쳐 버린다.

함허동천(涵虛洞天)?

조선의 승려 기화가 마니산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기화가 썼다는 함허동천 네 글자가 남아 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함허동천은 마니산 서쪽 기슭에 펼쳐져 있으며, 빼어난 산세를 끼고 곳곳에 거대한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 바위들을 넘나들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특히 계곡 한쪽에 200m에 달하는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마니산의 절경으로 꼽힌다.

<정수사 능선에서 본 초피산 풍경>

<이정표>

함허동천3거리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며 뒤 돌아보는 덕포리 일대는 오르는 높이와 비례하여 점점 조망이 좋아진다.

능선에 거의 와서 잘 정비한 나무계단과 정수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반겨주고 이정표를 뒤로 하고 잠시 오르니 분오리 돈대부터 시작되는 주능선인 460봉을 만난다.

능선아래부터 시작되어 정상까지 이어지는 암릉은 바위를 마치 누룩을 포개놓은 듯한 누룩덤으로, 이어지는 괴암의 파노라마는 기대보다 장관으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온다.

<마니산 주능선의 암릉풍경>

마니산을 여러 차례 왔었지만 마니산의 최고봉인 469봉을 가운데 두고 길게 늘어선 능선으로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이제껏 국민관광단지가 있는 화도쪽으로 다녔기 때문에 최고봉 능선의 참맛을 느끼지 못하고 다닌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니산 참성단이 최고봉으로 알고 있으나 마니산의 최고봉은 참성단에서 북동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으며 참성단 보다 조금 높다.

정수사 갈림길이 있는 능선에서부터 참성단을 가는 긴 능선은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기암괴석의 암릉의 자연 전시장으로 너럭바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열하고 있는가 하면 석문을 이루고 있는 바위와 고인돌을 닮은 바위와 하늘을 오르는 계단 같은 바위들이 어쩌면 이렇게 깨끗하며 보기 좋게 누룩을 포개놓은 것처럼 멋지게 빚은 조물주의 위대함에 넋을 잃는가 하면 마니산의 백미인 서해조망 또한 일품이다.

<참성단 중수 암각문>

수석 전시장같은 능선을 지나 앞만 보며 오르다보니 정상 헬리포트 아래쪽에는 참성단 중수비 안내판이 앞을 막는데 역사적 의미가 깊은 이곳 역시도 정상 능선으로 올랐기 때문에 얻은 또 다른 수확임은 물론이고 위 정상인 헬리포트까지는 여러 차례 와봤지만 바로 아래쪽에 중수관련 암각문이 있는 줄 몰랐으니 산을 헛되이 다닌 것이 아닌가 싶다.

암각문의 내용은?

조선 숙종 265월에 고쳐 쌓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여 이르기를 동녘 땅 수천리를 둘러보면 강도가 바로 이 땅을 보호하여 위해가 없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땅이며, 강도 수백 리를 둘러보면 마니가 바로 섶을 태우며 멀리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명산이다.

산의 서쪽 가장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단을 이루니 곧 참성단이라 일컫는 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께서 그것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 한다.

되돌아보건대, 연대는 아득하여 바람에 닳고 비에 씻겨 서쪽과 북쪽의 두 면은 태반이 헐어 무너지고 동쪽 가편의 뜰 층계도 또한 많이 기울어졌다.

고을의 어른들이 서로 슬퍼하고 탄식한지 오래였다.

재주도 없는 내가 이 지방의 유수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이 해 봄에 순찰하며 살피던 중 한 번 올라가 보고는 개연히 거듭 수리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선두포별장 김덕하와 전등사 총섭승 신묵이 그 일을 주관하여 개축하니 20일만에 공사를 마쳤다.

오호라!

무너진 것을 일으키고 결손된 것을 보충하여 옛 모습이 폐기되지 않게 함은 관리되는 자로서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다.

하물며 단군께서는 요임금과 같은 세대에 나셨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 민족의 조상이며, 제단이 설치된 곳 또한 둥글게 에워 쌓인 언덕의 정결히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수천 년을 지내오며 지금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러러 공경을 받아 오는 곳이니 수리하여 보완하는 일을 어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일의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자고 신묵이 요청하니 이렇게 글을 써서 알리노라” [유수 최석항 지음]

암각문을 읽어보고 위로 올라서니 마니산 참성단 옆 헬리포터다.

이곳 마니산은 다른 산과 달리 469봉이 최고봉이나 최고봉에는 정상석이 없어 사람들이 최고봉인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2봉이 마니산의 주봉인 참성단이나 유서깊은 문화재이며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4봉인 헬리포터가 있는 이곳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일반적인 정상석과는 달리 원상태의 굵고 큰 나무에 정상을 알리는 정상목이 있다.

 

마니산 정상이다 ....

정상에 서서

재작년 1231일 일몰을 보기위해 집사람과 둘이서 늦은 시간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솟아나고 아쉽게도 일몰이 순탄치 못해 20081231일 한해를 마무리 하는 해가 바다로 잠기는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던 아쉬움도 떠오른다.

정상에서 사방을 조망하는데 아침에 신촌에서 강화로 오던 버스에서 만났던 노부부를 정상에서 다시 만나 서로 사진을 한방씩 찍어주고 정상에서 한 눈에 모두 들어오는 강화5산인 마니산, 진강산, 별립산, 혈구산, 고려산을 설명해 주며 산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서해 풍경>

강화5산 중 마니산은 여러 차례 올랐고 별립산과 고려산은 2차례 혈구산은 한차례 올랐으나 아직 진강산은 오르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진강산을 올라야 하는데......................

강화5산을 보며 강화의 참맛을 느끼고 또 하나의 빼 놓을 수 없는 무궁한 자원의 보고인 강화 갯벌과 망망대해에 떠있는 서해 다도의 관광자원을 보고 그리며 참성단으로 향한다.

 

참성단에 도착하다.

참성단은 단군왕검 때인 2283년 운사(雲師)배달신이 단군왕검의 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인데 여러 차례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나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하며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이는 천원지방의 원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옛날 사람들은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졌다고 여겼다고 한다.

보수중인 참성단

일제시대 이후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으며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신화가 깃들인 참성단은 외인의 출입을 막고 옛모습을 보존하기위해 철책으로 에워 쌓는 공사중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먼발치서 눈으로 보는 것으로 족하게 생각하며 전에 여러 차례 올랐던 기억을 되살리며 단군로로 들어선다.

참성단을 뒤로하고 단군로로 들어서니 급경사 내리막길의 등산로가 많이 정비되어 목재계단으로 바뀌었으며 918계단은 단군로의 백미이자 죽음의 계단길로 918계단은 오르기가 힘들어 참성단을 본 후 내려오는 길로 택하는 게 좋다.

<능선에서 보는 참성단>

<가야할 선수로 가는 능선>

옛날에는 희미한 길이었던 기도원갈림길3거리에도 말끔한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지 등산로와 이정표가 말끔히 단장되어 있고 이어지는 단군로 역시 단장이 잘 되었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단군로 능선에서 서해를 바라보는 기분은 늘 상쾌하다.

다시 능선을 따라 단군로 갈림길 3거리를 지나 선수로 향하다 알맞은 자리를 택해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흔들바위처럼 생긴 바위에서 새해를 바라보며 묵상에 잠기고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의 중간에서 내 자신은 무엇이며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가?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수없는 날을 고뇌에 빠져 헤매도 결론은 나지 않는 인생사가 아니던가......

 

하산길로 접어들어.......

힘없이 내리막길을 따라 선수로 향한다.

능선길은 한참을 내려서더니 현대문명에 의한 인간이 편의생활을 의해 만든 포장도로가 능선을 갈라놓았으니 이름하여 하늘재라고 한다.

한적한 하늘재의 모습

백두대간 능선 중 월악산 국립공원의 구역에도 하늘재가 있으니 하늘과 가까이에 있다고 붙여지는 이름이 해발100m의 낮은 지역의 고개이름을 하늘재라 붙인것이 하늘재란 이름이 박해를 당하고 있는 건지 이고개가 하늘재란 최고의 고개이름의 예우를 받는 건지....

선수까지는 아직도 4km가 남았다.

낮은 산이라 한 시간 남짓이면 갈수 있을 것인데 서울로 돌아가는 차 시간과 친구와의 식사약속이 불안정스럽다.

오늘은 왠지 여기서 멈추고 싶다.

무리한 산행을 하지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3~4km의 화도면으로 발길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