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재이야기 57

백제의 숨결, 미륵사지 석탑을 가다.

미륵사지 석탑을 가다. 문화재 분류 : 국보 제11호 시대 및 시기 : 백제, 7세기(639년) 성격 및 유형 : 불탑 유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방문일 : 2021년10월30일 누구와 : 아들네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논한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한 편의 향가가 실렸는데 이 향가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4구체 향가로 제목은 서동요로 이러합니다. 서동요(薯童謠)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님은 他 密只 嫁良 置古---남몰래 통정하여 두고 薯童房乙---맛둥(서동) 서방을 夜矣 卯乙 抱遣 去如---밤에 몰래 안고 간다. 어린 시절, 중학교 역사선생님에게 서동요의 설화를 들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라서 한번 듣고도 잊혀지지 않는..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권역

집옥재(集玉齋) 건청궁 서편에 있는 건물로 1881(고종 18)년에 창덕궁 함녕전(咸寧殿)의 북별당(北別堂)으로 지었으며 1891(고종 28)년에 경복궁 보현당(普賢堂) 뒤쪽으로 이건(移建)하였는데 좌측의 팔우정과 우측의 협길당을 복도로 연결하여 내부에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어진 집입니다. 2층 건물에 중국풍의 양식이 풍기는 집옥재는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보관하는 장소와 고종의 서재로 사용하는가 하면 각국의 공사를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하가도 하였으며 도서관으로도 쓰였다고 하며 집옥재의 장서 목록인 『집옥재서적목록(集玉齋書籍目錄)』이 현재 규장각에 남아 있어 집옥재에 소장되었던 도서의 종류와 분량 등을 파악할 수 있는데『집옥재서적목록』은 1908년 규장각 분과규정이 제정됨에 따라 도서과에서 왕실의 여러 ..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권역

향원정(香遠亭) 건천궁 앞 향원지 한가운데 있는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인공으로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로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습니다. 현판은 고종임금의 어필입니다. 취향교(醉香橋)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향원지 한가운데에 있는 향원정으로 가기위해 나무로 만든 다리인데 이 다리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며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취향교를 건너 향원정으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졌었는데 1953년 다리를 남쪽으로 다시 지어 향원정과 연결하였으며 향원지의 근원은..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권역

건청궁(乾淸宮) 경복궁의 북측 후원으로 가는 도중 향원지 뒤에 있는 궁궐속의 궁으로 경복궁 중건 시기보다 6년 늦은 1873년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고종과 명성황후 거처로 사용되는가 하면 고종은 이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하였고 각국의 공사를 만나는 접견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 그 결과 전기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앞서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건청궁은 1895년10월8일 을미사변으로 인해 명성황후가 일본 애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인 1896년 2월 왕세자와 함께 궁내용 교자를 타..

경복궁, 동궁(東宮) 권역

동궁(東宮) 권역의 자선당과 비현각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와을 이을 왕세자의 거쳐로 정사를 돌보는 근정전, 사정전의 동쪽에 위치한다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되었습니다. 조선의 역사만큼이나 한 만은 역사를 지닌 동궁전은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고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소주방은 현재 복원 중에 있습니다. 1930년대 사진입니다. 현재의 동궁전..

경복국, 경회루(慶會樓) 권역

경회루(慶會樓)---국보 제224호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임금과 신하가 연회를 하던 곳으로 태조 때 경복궁 서북쪽에 작은 누각을 지었으나 태종 12년인 1412년 4월 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누각을 짓고 같은 해 5월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고 하며 공조판서였던 박자청이 총감독을 맡았는데 박자청은 노비출신으로 세상에 태어나 건축기술이 웨낙 뛰어나 높은 관직을 한 인물이기도 한데 경회(慶會)의 뜻은 하륜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올린 기(記)에『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慶會)'라고 할 수 있다』고 밝히며 이는 곧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 연못에는 큼직하..

경복궁, 함원전(含元殿) 권역

함원전(含元殿) 『원기를 간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함원전은 교태전 서쪽에 있는 건물로 건축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세종실록에 세종 때 지은 건물의 명부에 있으므로 세종 때 지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경복궁 중건 때 다른 건물들과 중건되었으나 1917년 창덕궁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침전인 대조전과 희정당, 경훈각 등이 소실되었는데 화재 후 건물을 복원하기위해 당시 비어 있던 궁궐인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함원전 일대의 건물들을 헐어 강녕전과 교태전 함원전에서 나온 목재로 지금의 창덕궁 희정당, 교태전, 경훈각, 함원전 등을 지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이곳의 목재로 지은 창덕궁 함원전은 대조전 뒤편에 있으며 현판은 달지 않았습니다. 함원전의 현판..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권역

교태전(交泰殿) 교태전(交泰殿)은 강녕전 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태전의 정문격인 양의문을 들어서면 훤하게 펼쳐지는 전각으로 이곳은 경복궁의 안주인인 왕비의 침전이자 내명부를 다스리던 왕비의 정치적 공간이자 일상생활을 하던 침전입니다. 교태전은 태조 초년 경복궁이 처음 세워질 때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없었던 것 같으며 건축 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세종실록에 의하면 경복궁이 들어선 후 약55년 후 세종22년인 1440년에 지어졌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4년인 1867년 경복궁 중건 때인 다시 지었는데 10년 후 다시 불타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에 다시 지었습니다. 그 후 1917년 창덕궁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일본 애들이 고의로 화재를 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심증은 가나 ..

경복궁, 강령전(康寧殿) 권역

강녕전(康寧殿)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입니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지만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는 곳이기도 하고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종 때에 임금이 오래 머물 곳이라 하여 규모를 크게 하여 고친 후 온돌을 수리하는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등 세 차례의 화재를 당했는데 역시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세워졌으나 1917년 창덕궁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일본 애들이 고의로 화재를 낸 것으로 추정하..

경복궁, 수정전(修政殿) 권역

수정전(修政殿) 경회루 연못 건너편에서 본 수정전입니다. 『정사를 잘 수행 한다』는 의미를 담은 수정전은 근정전 서쪽에 있는 건물로 장대석으로 4단 월대를 쌓고 장대석을 한단을 더 올린 5단위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세종 때 지은 이 수정전은 집현전으로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최근 SBS에서 종영한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에서 세종대왕으로 분한 한석규가 한글을 만들기까지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세종의 아들 세자의 목숨을 져버리면서까지 한글을 만들고 반포하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세종이 세자를 잃으면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역사의 왜곡으로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서 흥미위주로 각본을 각색한 것입니다. 아무튼 세종은 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