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재이야기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권역

범솥말 2023. 10. 20. 23:47

집옥재(集玉齋) 

건청궁 서편에 있는 건물로 1881(고종 18)년에 창덕궁 함녕전(咸寧殿)의 북별당(北別堂)으로 지었으며 1891(고종 28)년에 경복궁 보현당(普賢堂) 뒤쪽으로 이건(移建)하였는데 좌측의 팔우정과 우측의 협길당을 복도로 연결하여 내부에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어진 집입니다.

2층 건물에 중국풍의 양식이 풍기는 집옥재는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보관하는 장소와 고종의 서재로 사용하는가 하면 각국의 공사를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하가도 하였으며 도서관으로도 쓰였다고 하며 집옥재의 장서 목록인 집옥재서적목록(集玉齋書籍目錄)이 현재 규장각에 남아 있어 집옥재에 소장되었던 도서의 종류와 분량 등을 파악할 수 있는데집옥재서적목록1908년 규장각 분과규정이 제정됨에 따라 도서과에서 왕실의 여러 도서들을 모아 황실 도서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집옥재의 장서를 규장각에서 인수할 때에 작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집옥재(集玉齋)의 현판은 

집옥재는 수많은 도서를 모아 놓은 서재의 기능을 하였으므로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라는 뜻을 지닌 집옥재의 현판은 좌측에 미원장(米元章)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북송의 서예가인 미불이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집옥재의 답도와 계단

높은 월대위에 지은 집옥재는 오르는 계단이 높습니다.

장대석을 10단으로 만든 계단의 3도는 가운데 계단으로는 임금이 이용을 하였고 옆의 계단은 신하들이 이용을 하였으며 3도로 되어있는 계단의 7~9간의 장대석의 가운데 작게 설치한 답도에는 쌍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조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3도종 가운데 계단 좌우로는 3~4단에 용두를 놓고 나머지는 장대석으로 이었으며 좌측과 우측에는 3~4단에 해치를 설치하고 5~9단에는 천록을 설치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집옥재의 용두

일반적으로 용두는 추녀마루 잡상이 끝나는 점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맞배지붕인 집옥재에는 잡상은 설치하지 않았고 용마루 끝부분에 다른 건물들은 취두 (독수리머리)를 설치하는 곳에 용모양의 치미를 설치했는데 전문가가 아니라 용어를 모르겠고 우리나라 건축 양식이라기보다 외국의 건축양식을 들여온 것 같습니다.

 

협길당(協吉堂)

집옥재의 동쪽에 집옥재와 붙어 있는 협길당은 지어진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며 1881(고종 18)년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집옥재를 지을 때 같이 지었을 가능성과 1891(고종 28)년에 보현당 뒤쪽으로 집옥재를 이건할 때 지었을 가능성 대두되는데 전자보다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협길당의 현판

함께 복을 누린다는 뜻을 의미하는 협길당의 현판은 명나라 말기의 서예가 동기창의 글씨로 ()’자의 윗부분이 표준 서체는 ()’이지만 여기서는 ()’의 형태를 취했고 ()’에서 ()’ 위에 점을 더했는데 서법에서 흔히 나타나는 속체라고 합니다.

 

협길당의 잡상

배열은 제대로 되었는데 잡상이 둔하고 무거운 느낌을 줍니다. 

 

팔우정(八隅亭)

집옥재 좌측에 붙어 있는 팔우정은 고종이 경복궁으로 오면서 창덕궁에 있던 집옥재를 경복궁으로 이건할 당시 지어진 것으로 추측이 되며 우리 고유의 전통양식의 건물이 아닌 정자로 중국의 건축양식을 모방한 것 같으며 이곳에서 고종이 독서를 하거나 접견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팔우정 왼쪽에는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 있고 신무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청와대 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