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석탑을 가다.
문화재 분류 : 국보 제11호
시대 및 시기 : 백제, 7세기(639년)
성격 및 유형 : 불탑 유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방문일 : 2021년10월30일
누구와 : 아들네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논한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한 편의 향가가 실렸는데 이 향가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4구체 향가로 제목은 서동요로 이러합니다.
서동요(薯童謠)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님은
他 密只 嫁良 置古---남몰래 통정하여 두고
薯童房乙---맛둥(서동) 서방을
夜矣 卯乙 抱遣 去如---밤에 몰래 안고 간다.
어린 시절, 중학교 역사선생님에게 서동요의 설화를 들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라서 한번 듣고도 잊혀지지 않는 내용으로 서동요를 알면 미륵사와 미를사지석탑이 생각나니 오늘은 반은 부서지고 반만 남은 미륵사지 석탑으로 발길을 돌려 설화속의 선화공주를 만나봅니다.
먼저 향가 서동요에 등장하는 두 인물부터 보면 선화공주와 맛둥입니다.
선화공주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이며, 맛둥은 서동으로 서동은 훗날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으로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서동요 설화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미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의 용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평상시에 마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고 고운 것이 짝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마을의 여러 아이들에게 먹이니, 여러 아이들이 그를 친하게 따랐다.
곧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가 곧, 서동요다.
동요가 장안에 가득 퍼지고, 궁중에 이르자, 백관이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내치게) 했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에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소에 이를 무렵,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을 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 따라온 사람을 알지 못했으나 뜻하지 않게 (그를) 믿고 좋아했다. 이 때문에 (그를) 따라 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 뒤 서동의 이름을 알고서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왕후가 준 금을 내다 (팔아) 생활을 꾸리고자했고,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땅에 (이것이) 진흙처럼 흩어져 쌓여 있다.”했고 선화공주와 서동은 금을 캐어 신라 진평왕에게 보내기로 한다.
이에 금을 채취해서 산더미처럼 쌓았으나 전달할 방법이 없어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황금과 편지를) 하룻밤에 신라 궁중에 옮겨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변(神變)을 이상하게 여기고, (서동을) 더욱 존경하여,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과 부인이 사자사에 행차했는데,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렀다. (그러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출현하였는데, 수레를 멈추고 치경을 드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 땅에 대가람을 짓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허락하고는, 지명 법사가 있는 곳에 이르러 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그러자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곧 불전을 짓고 미륵삼존불을 모시고, 탑과 낭무(행랑)을 각 세 곳에다 만들고,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진평왕은 여러 공인을 보내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설화와 실화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실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기록이나 말로 전해지는 것이고 설화는 글이나 이야기가 있어날 수 없는 일을 사실인 것처럼 재미있게 묘사한 것입니다.
위 글은 내용으로 보면 설화가 분명한데 많은 학자들은 미륵사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는데,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불교계에서는 설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을 것으로 설화인 것을 알면서도 실화처럼 여기며 오늘날까지 이르렀는데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보수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의 창건 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이 나왔는데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 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배치되는 사실로 삼국유사는 중 일연이 쓴 책으로 무왕의 왕후인 사택적덕을 선화공주로 바꾸어 기록했음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의 작가인 일연스님도 무왕의 부인이었다는 사택적덕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선화공주는 임의로 설화의 인물로 등장시켜 무왕과 설화공주 가운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등장시켜 불교의 우수성을 과시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미륵사지 탐방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주차장을 벗어납니다.
주차장 일대는 어마어마하게 넓게 조성을 하였는데 보기야 좋기는 하지만 토지보상이나 많은 공사비를 생각한다면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이렇게까지 단지를 조성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발가락을 다쳐서 휠체어를 대여받아 며느리가 이용합니다.
조용했던 주차장 일대가 팡파레가 울려 퍼지고..........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성대하게 환영을 해주나 싶습니다.
팡파레가 울려퍼지는 곳으로 발길을 돌리자 무슨 음악회가 있나봅니다.
기깝게 접근했는데 관객은 몇 명없는데 악사들은 제법 많고...... 자세히 보니 위드코로나 희망 콘사트가 오늘 13시부터 열린다는데 공연 전 리허설인 듯 보였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잠시 텅 빈 객석에서 음악감상을 하고 천만송이 국화축제의 장으로 들어서서 갖가지 국화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천만송이 국화 분산 축제장을 빠져나오면 미륵사지 정문이 됩니다.
미륵사는?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17세기경에 폐사(廢寺)된 뒤 서탑(西塔) 및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일부 석물만 남았으며, 미륵사 터는 농경지와 시골 촌락으 오늘날까지 내려왔습니다.
1910년대 일본 학자가 조사한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의하면,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品’자 모양으로 3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사찰로 알려져 왔는데 197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가 동탑지를 조사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미흡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정부에서 미륵사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사찰의 정확한 규모와 아울러 가람배치의 성격과 구조를 밝혀내고, 발굴 결과 얻어진 자료를 통하여 유적을 정비·보존할 목적으로 1980년부터 1995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조사 결과 가람배치를 보면 동탑(東塔)과 서탑(西塔)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木塔)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回廊)이 있어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이라는 개념의 삼원식(三院式) 가람형태임을 확인하므로 1910년 일본학자에 의해 알려졌던 ‘品’자 모양의 가람배치설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은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 및 보수정비에 착수하였고,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란?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백제역사유적지구 미륵사지 세계유산 입석이 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에 분포하는 8곳의 백제유적과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75년부터 660년까지 백제 후기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유적들로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중국의 도시계획 원칙,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수용하여 세련된 백제의 문화를 이룩하고, 이를 신라와 가야, 일본에 전해 고대 동아시아 문화 번영에 크게 기여한 사실과 기인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공주지구의 유적은 웅진기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지구의 유적은 사비기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나성,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 익산지구의 유적은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이 있습니다.
미륵사지는 예전에 정문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미륵사지를 관광단지로 조성하며 넓은 광장 우측으로 정식 정문을 만들었는데 발국조사 때 이곳이 오래전 미륵사의 정문이었는지는 알수 없으며 정문으로 들어서면 광활한 미륵사지가 펼쳐집니다.
정문으로 들어서서 넓은 관람로를 따라 50~60여m 들어가면 좌우로 큰 못이 있는데 이 2개의 못도 발굴조사 과정에서 오래전에 있었던 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못에서 무왕과 왕후가 지날 때 미륵삼존이 나타다는 것인지..........
못을 지나 다시50여m 지나면 계단식으로 이룬 지형에 토성을 쌓은 것처럼 턱이 져있는데 이곳에 계단이 있으며 계단 아래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는데 안내문에는 이곳이 남회랑터임을 밝히고 있는데 남회랑은 폭4.8m, 남회랑 길이190.4m, 동쪽에서 서쪽 회랑의 길이는 69.9m로 오목凹자 형태로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금당(현재로 치면 대웅전)에서 좌우로 회랑(복도같은 건축물)으로 동탑, 서탑, 중앙탑을 둘러쌓은 형태가 됩니다.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같이 앞 쪽에 문이 3곳이 있었으니 이곳이 동문이 될 것이고, 가운데는 중문 왼편으로는 서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회랑터로 올라서면 계단식 넓은 대지가 펼쳐지는데 좌측 미륵사지 서탑 앞쪽, 우측 미륵사지 동탑 앞쪽으로 석조물이 덩그러니 있는데 가까이 가보니 당간지주였습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미륵사지에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같은 형태의 당간지주가 동탑앞, 서탑앞 각각 2군데 있는데 당간지주의 거리는 동서로 약90m, 높이는 3.95m로 통일신라 중기에 만들어 진것으로 추정되는데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 2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당간이란 사찰에서 행사니 의식을 치를 때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깃발인 당을 달아두는 깃대인데 깃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받혀주는 것이 당간지주입니다.
좌우 당간지주의 보관상태는 모두 깨지거나 훼손된 것을 조각조각 맞추어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고 있으며 돌의 퇴색된 색깔로 보아 일부는 원석이 아닌 대체석으로 조립된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당간지주를 보고 토성 같은 대를 올라서면 드넓게 펼쳐진 미륵사지터에 좌우로 석탑이 있습니다.
서탑은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보아왔던 탑이고 동탑은 오래전에는 없던 것으로 최근컴퓨터의 발달로 서탑을 근거하여 3D로 입체화해서 가상탑을 만들어 공사를 하여 실물을 만들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먼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탑부터 찾아봅니다.
미륵사지 동탑
배용준은 2009년 일본에서 여행에세이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고 하는데 그는 일본 팬들에게 한국의 미륵사지 석탑 앞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한 마음이 앞섰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배용준은 이 책의 미륵사지 편에서 ‘달밤에 비친 미륵사지 석탑’이란 제목 아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받지 못하던 이 탑에 수많은 사람들의 온기가 전해진다면, 또 다시 천 년 후에 가장 사랑받는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하여 미륵사지 동탑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배용준 마저 안쓰럽게 느낀 미륵사지 동탑은 1993년 높이 9층(27.67m)으로 1500년을 거슬러 옛모습을 복원하였는데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함도 서러운데 졸속복원이라는 불미스러운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던 유홍준 당시 청장은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을 20세기 한국 문화재 복원 최악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며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며 졸속복원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합니다.
배용준의 글에서처럼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받지 못한 미륵사지 동탑도 다시 천년의 세월지난 후에는 우리가 미륵사지 서탑을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랑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미륵사지 서탑은 국보이므로 접근을 불허하고 있는 반면 동탑은 문화재등록이 안되어 있는 건축물로 접근이 가능합니다.
탑 4방향으로 문이 있는데 문으로 들어서면 가운데 아주 굵고 큰 증심기둥이 있는데 옆 방향으로 이동을 할수있지만 공간이 좁아 손쉽게 이동하기에는 필자와 같은 뚱뚱이들은 장애가 되는 편인데 오래전 부터 사람들은 이 좁은 통로를 십자로라고 불렀으며 사람들은 동탑이 없던 시절 국보인 서탑 십자로를 수없이 돌았다고 하는데 십자로를 따라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으로 들어선다고 해도 위로 올라가는 층계도 없고, 아무런 볼거리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라면 눈을 까뒤집고 환장을 하는 일본놈들도 미륵사지에 와서 문화재를 찾으려 무척 노력했을 것인데 가운데 큰 사각기둥안에서 미륵사의 창건 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이 들어있었다니 일본놈들이 탑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각기둥을 가운데 두고 이리 저리 빠져 이동해보고 나옵니다.
미륵사지 동탑에서 서탑으로 이동합니다.
중간쯤 이동하면 안내문이 있는데 이곳이 중원 목탑터라고 안내하고 있으며 목탑터 뒷편으로는 금당이 있던 넓은 터가 펼쳐지는데 일부는 공사중인것을 보면 땅을 파헤지고 무언가를 찾는 것인지 설치하는 것인지..............
금당터가 보이는 중원 목탑터 안내문을 요약하면 미륵사는 삼원으로 되어 있으며 중원에는 목탑을 두고 동원과 서원에는 석탑을 각각 두었다. 터의 기초는 3.5m정도 흙을 파 낸 뒤 머리 크기의 돌로 1.5m 채우고 그 위에 마사토와 점질토를 층층히 다져 올렸다. 기초 아래는 개흙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유사에서 연못을 메우고 탑을 세웠다는 점을 뒷받침하며 발굴조사 때 불탄 기와들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목탑은 통일신라 후기에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는 것입니다.
잠시 중원 목탑터에서 머물다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미륵사지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곳, 바로 미륵사지 서탑입니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대의 석탑으로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4~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으며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67m)으로 복원된 상태로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졸속복원을 비난하며 동탑만 보면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고 싶은 생각이든다고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미륵사 절터의 서쪽, 서원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은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목탑양식을 석재로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이 석탑은 삼국유사에서의 기록 등으로 백제 말기인 무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했었는데 해체, 복원과정에서 봉정기가 발굴되므로 확실한 건축연대와 무왕이 왕후의 청에 의해 미륵사를 세웠음을 추정이 아닌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서탑도 동탑의 형태와 같은 형식으로 동탑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지만 서탑은 출입을 할 수 없어 먼발치에서 볼 수 밖에 없는데 동탑과 마찬가지로 1층 4면 중앙에 각각 문을 만들었는데 내부 중안에 탑을 지탱하는 거대한 돌기둥이 설치되어 있고 돌기둥 사이 좁은 공간을 통해 지날 수 있는데 이곳을 십자로라고 부릅니다.
내부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없으며 좁은 공간을 돌아 사방 어느 방향이던지 나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조선총독부가 1/3은 헐려져 나갔고 2/3만 남은 6층의 탑을 더 이상 붕괴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북면 방향을 흉한 모습으로 시멘트로 보수했었는데 이후 1999년 4월 국가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 정비를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전라북도는 해체 보수 정비를 위해 가서덧집 공정을 완료했고, 2001년 10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보수정비를 시작했는데 2004년 12월 동탑의 복원 과정에서 미륵사지 석탑이 본래 9층이었음을 밝혀주는 부자재가 발견되므로 동탑을 9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복원은 본래 2007년 완료될 계획이었는데 여러가지 중요성을 감안하여 해체 과정을 신중하게 진행하느라 작업 일정이 지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2009년1월14일 탑신 1층 중앙 기둥을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하는 쾌거를 올렸다고하는데 이 기록판의 기록으로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계속된 해체 및 복원공사는 2019년 3월 5일 보수작업이 완료되었는데 수리과정에서 기존 석재와 없어진 필요 석재 등 1천627개를 조립하였는데 층수에 대해서는 완성형인 9층과 현존 상태인6층의 의견이 대립되었으나 최종 6층으로 준공되었다는 것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중학교 2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국사선생님께서 미륵사와 미륵사지 석탑을 설명하며 함께 서동요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무척 재미있게 들었으므로 잊혀지지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뒤 찾아보겠다는 것이 기억속에 있으마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몇 년 전, 원주 미륵산을 다녀온 뒤 익산 미륵산을 스터디했었는데 용화산~미륵산~미륵사지를 당일치기로 돌아보기에는 교통편이 원활치 않아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서야 미륵사지 석탑을 보게됩니다.
오래전 매스컴을 통해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아쉬움이 컸었는데 왜냐하면 새로 해체, 보수한 석탑이 너무도 이상해 보였기 때문인데 현장을 와서 직접 석탑도 보고 1910년 일제강점기 때 미륵사지석탑의 서측면과 동측면 사진, 그리고 2000년 때 미륵사지 석탑의 남측면과 동측면을 보고서야 보수를 할 수밖에 없었디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국사교과서에서 보았던 사진은 동측면만 보았으므로 돌무더기로 쌓여 있던 서측면과, 일본넘들이 시멘트로 보수한 서측면을 보지 못하고 멋이 함축된 부서진 동측면만 생각하고 보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직장 동료가 이곳에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소풍하면 이곳을 찾았다고 하며 어린맘에 무척 지겹게 생각했었다고 회상을 하는 동료는 옛날에는 국보인 미륵사지 석탑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 것은 흔했다고 하기에 사진을 부탁했는데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과 함께 찍은 55년된 사진 한장을 보내주었는데 자세히 보면 동료의 사진 뒤로 보이는 국보11호인 미륵사지석탑 위에 2명이 올라간 것이 동료사진에 찍혔습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55년 전에는 소설이 아닌 실화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도도 50여년이 지나며 크게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륵사 서원 석탑 사리봉영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1월 14일, 이탑의 탑신 1층 중앙기둥을 해체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는데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하였고, 그 뒤 백제 왕비가된 선화 공주가 무왕에게 부탁해서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륵사지를 재발굴하면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를 주로 하여 총 6,500여 점으로 백제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기와가 수습되었으며, 특히 서까래[椽木] 끝에 붙이는 녹유연화문연목와(綠釉蓮花文椽木瓦)는 백제기와로서 다수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기와에는 彌勒寺(미륵사), 國五年庚辰(국5년경진), 姚奉院(요봉원), 至元四年(지원4년), 天曆三年(천력3년) 등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미륵사지 석탑을 돌고, 또 돌고 몇 바퀴를 돌며 마음에 담습니다.
일행은 이미 미륵사지 석탑을 떠난지 오래되었지만 이제 가면 쉽게 올 수가 없을 것만 같아 아쉬움이 진하여 탑돌이 하는 것도 아닌데 돌고, 돌며 마음에 또 담고 담아봅니다.
멀어져 가는 미륵사의 광활한 터에 우뚝 솟은 백제의 숨결을 보며 일본 놈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우리 대한민국에 모습을 나타내준 진귀한 보물들이 내 맘을 즐겁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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