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산행일시: 2011년01월 27일
누구와: 나홀로
산행거리: 도상거리 18.6㎞
산행시간: 5시간 50분(12:30~18:20)
산행코스:현저동들머리(12:30)-인왕산정상(13:05,338m)-창의문(13:32)-북악산정상(13:56.342m)-청운대(14:00.293m)-숙정문(14:15)-말바위안내소(14:20,10분휴식)-와룡공원(14:43)-혜화문(동소문,15:03)-낙산공원(15:21)-동대문(흥인지문.15:35,12분휴식)-광희문(남소문,16:05)-장충체육관(16:15)-국립극장(16:40)-남산팔각정(17:10,262m)-안중근광장(17:28)-남대문(숭례문.17:40)-서소문(17:53)-돈의문터(서대문.18:05)-홍난파가옥(18:15)-현저동날머리(18:20)
태조 이성계의 측근이었던 정도전은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하고 도시계획에 있어 중국의 주례를 기본으로 했으며 경복궁의 전각등의 명칭을 유교 경전에서 따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곽의 축조는 달리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성계가 무장 출신으로 도성의 방어를 중시했으므로 방어형의 성이 아닌 한양의 지리적 특성을 살려 산 능선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최저 지점까지 성곽이 이어지다가 다시 능선을 따라 높은 곳으로 이어져 도성을 축조하는 포곡식 산성으로 축조했다고 한다.
인왕산-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18.6km의 서울 성곽길에는 문화유산과 첨단 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 태조 때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성곽을 비롯해 보물1호인 동대문과 평화시장 일대의 상권과 남산서울타워와 국보1호로 불타서 새로 짓고 있는 남대문과 인근 남대문시장 그리고 시청앞 일대의 고층 건축물 등을 만날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조선의 도읍지 터를 살피고 수십 년간 막혀 있었던 백악산 코스를 걸으며 다른곳에서 느끼지 못하는 설레임과 성곽을 따라 걸으며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이다.
언제부턴가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서울 성곽을 한바퀴 도는 산행이 유행을 하고 있어 나도 기회가 된다면 서울 성곽을 돌아야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해 3월 집사람과 인왕산 산행을 하며 만난 60대초반의 아저씨의 서울성곽의 마지막 산이 인왕산이라며 아침 9시부터 걷기 시작해 마지막 인왕산만을 남기고 있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내가 성곽 도는 날은 언제가 될까 생각했는데 그날이 오늘인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다고 특별히 날짜를 잡은 것은 아니며 아무 때라도 결심하고 나서면 되는데 그러기까지가 어려운데 오늘은 집사람도 모임에 간다하여 혼자 집에 있기 무모하여 갑자기 서울성곽을 생각하고 급하게 배낭을 챙기고 사직터널위에 도착해 한국사회도서관앞에 도착한 시간이 12시30분이고 보면 성곽 일주하기는 늦은 시간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인터넷 검색에서 어느 산님은 22km에 8시간35분을 걸었다고 하여 걱정은 되기도 했지만 6시간을 목표로 출발을 한다.
<현저동 성곽---뒤로 북한산 보현봉이 보인다>
곳곳에 눈이 녹지 않은 구간이 있어 신경을 쓰며 무악동에서 출발한다.
성곽 뒤로 맑게 갠 하늘과 멀리 북한산과 북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인왕스카이웨이와 맞닿는 도로위로 이어지는 산행로는 아직도 성곽 공사중인지 출입이 제한되고 있어 옥인동쪽의 기슭으로 나있는 길을 가기위해 우회를 해야만 한다.
우회가 아닌 원 산행로로 올라갈 경우 중요 민속자료 제28호인 국사당과 유명한 서울시유형문화재 23호인 선바위를 볼 수 있으나 통행이 제한되고 있으니 아주 원거리에서 바라다 볼 뿐 인접하여 볼 수가 없으므로 일삼아 무악재 쪽을 통해 국사당을 가야만 할 것 같다.
우회도로로 가는 도중 인왕산의 유래에 대한 안내문에서는 풍수적으로 주산인 북악산을 중심으로 조산인 북한산과 좌청룡에 속하는 낙산, 그리고 우백호에 속하는 인왕산이 자리 잡고 있어 예로부터 호랑이의 출현이 잦았다고 하며 기록에 의하면 태종5년 경복궁에 광해군 때는 종묘에 호랑이가 출현해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미끄러운 눈길로 뒤덮인 계곡을 따라 올라 호랑이 바위와 인왕약수터를 지나 능선에 다다르니 작년 3월에는 없던 성곽이 좌측 군부대를 비롯하여 인왕산 오르막길의 성곽을 재건하여 깨끗하게 성곽을 만들어 놓고 있어 성곽 복원사업을 위한 서울시의 계획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하나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잠시도 쉴 틈 없이 경사진 등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니 정상에 있는 평상에서는 60대초반의 남녀8명이 점심이 한창이고 날씨가 좋아 사방의 조망이 아주 좋은 편이다.
가야할 북악산과 멀리 낙산 그리고 남산과 성곽안의 도심의 빌딩숲과 고궁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식사를 하는 분들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할 수 없는 입장으로 정상에 있는 삿갓바위 위를 한번 올랐다 내려와 한바퀴를 돌고는 다음의 목적지인 북악산을 가기위해 정상을 내려서 단경왕후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치마바위를 지나 기차바위 방향으로 내려선다.
<인왕산 정상의 삿갓바위>
치마바위의 이야기
연산군의 폭정으로 1506년 박원종이 주동이 되어 반정을 일으키니 이것이 중종반정인데 연산의 뒤를 잇는 중종의 장인이자 중종의 첫째부인인 댠경왕후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공신파에게 사약을 받고 후에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단경왕후를 폐서인하여 사가로 돌려보내게 된다.
그 후 중종은 10여년 금술 좋게 살았던 단경왕후를 못잊어 경복궁 경회루에 들러 인왕산을 바라보며 폐서인이 된 왕후를 그리게 되고 이 소문이 퍼져 궁밖으로 나가자 폐비 신씨는 날마다 아침이면 인왕산에 올라 경회루가 잘 보이는 곳에 치마를 걸어두었다가 저녁이면 걷는 행동을 일상화하며 중종이 다시 궁으로 불러주기를 학수고대 하였으나 끝까지 단경왕후는 입궐하지 못했는데 단경왕후가 매일 치마를 걸었다 해서 치마바위라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치마바위를 내려서 기차바위로 들어서지 않고 곧바로 아래쪽으로 내려서며 트림을 하며 큰산을 누르고 있는 용같은 성곽을 따르니 15분이 지나서야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도착하고 잘 다듬어진 바위에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인 서시를 감상하고는 창의문으로 향한다.
성곽의 바로 이어지나 성곽길은 차도를 통해 횡단보도를 지나야 하므로 고갯마루로 내려서 길을 건너서 청계천 발원지를 지나 창의문으로 올라선다.
마음 같아서야 창의문 아래로 가서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싶었으나 북악산의 출입 및 통제시간을 사전에 알지 못했기에 그 사이 통제라도 할까 빠른 걸음으로 올라서 절차를 밟는다.
68년 북한의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오랫동안 통제되어왔던 북악산은 노무현전 대통령 집권당시 신분을 확인시키는 절차를 밟은 뒤 일정한 인원에 대해 출입을 시키다가 최근에는 출입이 가능한 시간에는 절차이행 후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창의문(彰義門)은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있는 4개의 소문 중 하나로 서북쪽 문으로 이곳은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4소문 중 가장 원 모습을 잘 유지한 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창의문은 처음에는 초루가 없는 수구문으로 유지되다가 영조 때 훈련대장 구성임이 건의하여 초루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태종 때 풍수가인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을 이유로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 시켜야 한다고 상소를 올려 이후로 창의문은 계속 닫았다.
이렇게 닫혀 있던 창의문은 인조 때부터 열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반정군들이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와 반정을 성공시키고 인조를 등극시켰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창의문을 개선문으로 여기고 문을 활짝 열었다.
<창의문(彰義門)--- 4대문 사이에 있는 4소문 중 서북쪽 문>
무악동 들머리에서 창의문까지 예상 시간을 1시간으로 잡았는데 정확히 맞춰 왔으니 1시간30분 예정으로 혜화문까지 가야하는데 북악산 정상까지는 계속 계단으로 이어져 무릎에 무리가 상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고 있으며 그 사람들 사이로 추월 그리고 또 추월을 하며 북악산 정상에 도착하여 흐르는 땀을 식힌다.
<백악산 정상>
북악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백악산은 북악산은 경복궁의 진산으로 인왕산, 남산, 낙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조선조에 쌓은 성곽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어 등산을 하면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뒤따라 올라온 산님에게 사진 한장을 부탁하고는 지체한 시간을 벌기위해 청운대를 향해 줄달음질치니 불과 수분만에 청운대에 도착해 간단히 청운대 정상석을 촬영하고는 다시 숙정문으로 향한다.
<청운대 정상석>
가는 길목 군데군데에는 전경들이 감시하고 있어 불법 군사시설을 촬영한다던지 문화재를 손상시키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하며 관리하고 있다.
한참을 내려가 좌측으로 보이는 북악스카이웨이와 그 위에 세워진 팔각정을 보며 걷다보니 숙정문에 닿는다.
숙정문(肅靖門)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으로 본래 숙청문이었다.
사람들의 출입을 위한 것 보다는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처음에는 문루가 없었으며 1976년 문루를 조성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편액을 걸었으며 평소에는 닫아두었다고 하며 기록에 의하면 ‘여염집의 부녀자들이 정월 대보름 전에 숙정문에 가서 세 번 놀고 오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는 풍속이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는가하면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북쪽의 음기가 성내로 침범함으로써 장안 부녀자들의 음기가 탱천하여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이유로 닫아두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북대문인 숙정문으로 편액은 박정희대통령의 친필이며 이로부터 좌행서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기록도 있겠으나 숙정문이 닫힌 또 다른 이유는 태종 때 풍수가인 최양선이 숙정문과 창의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 시켜서는 안 된다고 상소를 올려 이후 문을 막고 통행을 금했다는 것이다.
이후 숙정문은 계속 닫혀있었으며 기우제를 지낼 때는 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음양오행에 따르면 북쪽은 음(陰)과 수(水)에 해당하며 남쪽은 양(陽)과 화(火)에 해당하므로 가뭄에 기우제를 지낼 때는 북문인 숙정문을 열고 남문인 숭례문은 닫고 장마에 기청제를 드릴 때는 북문인 숙정문을 열고 남문인 숭례문은 닫았다고 한다.
이렇게 닫혀 있던 문은 창의문은 인조반정이후 열렸으며 숙정문은 닫힌 채로 조선시대를 마감했다.
숙정문을 벗어나 말바위안내소에서 패용증을 반납하고 구조물 계단을 통해 성밖으로 나가 성곽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향하고 10여분이지나 와룡공원을 지나 혜화문으로 향한다.
와룡공원에서 혜화동으로 향하는 구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성북동으로 넘는 고개까지는 성곽길이 잘 나있으므로 문제가 없으나 이후 골목길을 들어서며 경신고등학교가 나타나면 학교 담장을 따라 정문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정문을 지나 갈림길에서 비교적 길이 좋은 좌측으로 가면서 성곽길을 이탈했다는 생각이 들어 우측으로 가다보니 성곽이 보이더니 혜화문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혜화문(惠化門)--- 4대문 사이에 있는 4소문 중 동소문>
서울성곽의 동소문으로 불리는 혜화문은 처음에는 문루가 없는 문이었는데 영조 때 임금이 직접 어영청에 명해 문루를 만들고 혜화문이라는 편액을 처음 걸게 하였다. 그러나 훼손되어 없던 문을 1994년 복원하며 원래 위치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세우고 문루를 조성하였는데 편액은 역시 좌행서로 글씨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원종씨의 글씨라고 합니다.
차량이 질주하는 대로를 가로질러 성곽길을 따라 낙산으로 향한다.
낙산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은 때로는 신축 보완한곳도 있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으나 이곳은 얼마 전까지 성벽에 기댄 채 달동네의 허술한 집들이 가득했었다 한다.
그 많던 민가들이 모두 내몰리고 깨끗한 산책길로 조성된 이 길을 걷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재건축과 재개발의 현장에서 다 년간 일했던 나로서는 개발현장의 당사자들 중 대부분이 선한 사람들이나 개중에 몇몇이 끝까지 버티며 다수를 어렵게 하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큰 손실을 안겨주는 자들이 있으니 이곳도 예외는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서울시에서 작년 11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장충체육관에서 신라호텔을 지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를 지나는 서울성곽인 장충동 남산탐방로 1천90m 구간과 낙산 북쪽 끝의 서울성곽길 100여m 미개통 구간도 뚫어 서울성곽길 낙산 구간 2천160m를 모두 이었다고 보도한 내용을 보면 낙산 성곽 100여m는 한동안 문제가 되었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니 이해는 가지만 혼자만을 위해 다수에게 불이익을 주는 몇몇의 행동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성곽에 보수한 부분이 나타나는 낙산 성곽>
시원스럽게 뻗은 성곽을 따라 거친 숨을 토해내며 오르는데 걸려온 전화는 인천에 살고 있는 형님이다.
후두암으로 길병원에 입원해 며칠 전 문병을 다녀온 자형께서 3일 정도 살 수 있다고 하나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
초등학교 1학년인 7살 때 누님께서 자형과 결혼하여 이제까지 만50년을 살았고 계몽사의 핵심간부로 일하며 우리 형제와 4촌 외사촌 등을 이끌어주기도 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낙산공원을 둘러보며 낙산을 지난다.
서울도성은 4개 산으로 능선으로 연결하며 지은 포곡식 산성인데 4산은 이미 지나온 인왕산, 백악산 그리고 가야할 남산(목멱산)과 낙타등처럼 생긴데서 유래한 지금 올라있는 낙산(타락산)을 의미하는데 초기부터 4산은 등장하면서 앞선 3개산의 명칭은 나오지만 낙산은 개국 100년이 지난 연산군 때 낙산이라는 이름이 거론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의문은 풀길이 없는데 낙산을 고려 때는 대봉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조선초기부터 연산 때까지 대봉으로 불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낙산정상을 지나며 좌측으로 보면 한 지맥이 뻗어가서 숭인동과 보문동 사이에 봉우리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 봉우리를 동망봉이라 하는데 동망봉의 유래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을 갔을 때 단종비 송씨가 부근 청룡사에 살면서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가 단종이 있는 영월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 봉우리도 뚜렷치 않고 동망봉 정상에는 공원이 생기고 영조가 명해 새겼다는 동망봉이란 글씨는 찾을 수가 없고 동망봉의 존재도 창신동 주변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게 현실이다 .
풍수지리에는 비보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한양도성의 좌청룡인 낙산이 지세가 약하여 3가지 비보책을 썼다는데
첫째는 낙산의 지세를 연장하기 위해 청계천에서 준설한 흙으로 가산을 쌓았는데 그 가산이 동대문 옆 전 이대부속병원자리라고 한다.
두 번째로는 한양도성의 문 이름이 모두 3글자인데 흥인문은 산맥을 연상케 하는 갈지(之)자를 한자 더 넣었으며
세 번째로는 도성 다른 문에서 볼 수 없는 옹성을 더 쌓았다는 것이다.
전망하기 좋은 곳에 설치된 팔각정에 잠시 앉아 묵상에 잠기다가 다시 동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지금은 없어진 이대병원 자리를 보며 종로통으로 내려 서 동대문에 도착한다.
<우리나라 보물1호인 동대문>
보물1호인 동대문.....
남대문이 3년전 어느 노인에 의해 불타고 난 이후
동대문의 위상이 더 높게 느껴지는 보물1호의 동대문...........
서고동저의 지형으로 유일하게 평지성문인 동대문(흥인지문)은 지반의 연약함과 평지 성곽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비보책으로 옹성을 가졌다는 것과 이름에 갈지(之)자를 넣은 것은 내사산 중 가장 기운이 허한 낙산을 보호하는 의미라는 것은 선조들의 유산 어느 것 하나 예사로움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깊이 느끼게 한다.
그런데 왜?
남대문은 국보 1호인데, 동대문은 보물 1호인가?
이 모든 게 일제의 식민지 잔재로서 일제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지정하면서 국보는 한 개도 허락하지 않았고 모조리 보물로만 지정하였는데 당시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보물 목록을 보면 보물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3호원각사지10층석탑, 4호 보신각....
해방이후 이런한 보물체계를 유지하다가 1962년 문화재 위원회가 발족한 이후 국보1호 남대문 보물1호 동대문 국보2호 원각사지10층석탑 보물2호 보신각..... 으로 마구잡이 식으로 홀수는 국보, 짝수는 보물로 번호가 매겨진 것으로 사실 역사적이나 문화적 등의 가치측면에서는 국보나 보물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동대문을 막 지나 우리은행으로 들어서 카메라 밧데리 충전을 부탁하며 언 몸을 녹이는데 10여분을 보내고 다시 광희문으로 향하는데 평화시장을 시작으로 사방 모든 건물들이 패션빌딩과 거리는 패션거리로 우리나라의 기성복 시장의 원조인 동대문가를 지나는 길은 화려하고 길가 노점상들의 먹음직스러운 먹거리는 내 코를 자극하고도 남지만 길가에서 보낼 시간이 없어 눈 딱 감고 앞만 보고 걸어 광희문에 도착한다.
광희문
언제 지었는지 모르는 이 문은 1927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몹시 낡고 허물어질 염려가 있고 노숙자들의 숙박처가 된디며 고적보존회가 회의를 열어 헐전지 아니면 돈을 들여 보수를 하여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는데 예산이 없어 문을 헐게되었다고 한다.
<광희문(光熙門)--- 4대문 사이에 있는 4소문 중 남소문>
광희문은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있는 남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남소문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태종이 도성을 완공할 당시 지금의 장충단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국립극장 앞이 아닐까 생각)에 남소문을 따로 세웠는데 효용성이 없어 폐쇄하였다고 한다.
건국초기에는 이로 인해 남소문과 구별하여 한강으로 이어지는 문이라 해서 수구문이라 불렸고 도성의 장례행렬이 서쪽으로 서소문 남쪽으로 광희문으로 나갔으므로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희문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은 이괄의 난 때 인조는 광희문을 통해 공산성으로 도망갔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다.
광희문은 보존이 잘 되어오다가 6.25동란 때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위치에서 우측으로 약15m에 있었던 것을 도로확장으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광희문앞에 도착하니 경찰들이 20여명이 모여서 있어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었는데 큰 문제는 없는 듯 보여 광희문을 둘러보고 최대한 성곽과 같이하고자 주택가로 접어든다.
신당동과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주택가의 능선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주택의 담장이 아니면 주택의 담장 기단석이 성곽으로 옛날부터 쓰여졌던 기단석임을 단번에 알 수가 있다.
주택가의 길은 성곽을 따라 이어진 것이 아니라서 구불구불 돌아가는 도로는 성곽을 따라 돌기에 너무나 고 난이도인 것이다.
장충동에 들어서 주택의 형태와 규모가 점점커지면서 체육관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고 도로도 말끔히 단장되었는가하면 도로 폭이 넓어진다 했더니 큰길이보이고 장충체육관이 눈앞에 들어선다.
장충체육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돔식 실내체육관으로서 1963년 2월 1일에 개장을 하였는데준공식 때는 당시의 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여 테이프를 끊을 정도로 대단한 시설물 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체육관을 설계할 기술이 없어 그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 선진국이었던 필리핀 설계회사와 건축회사가 필리핀의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서 장충 체육관을 지었다 하니 아이러니 하다 할 수 있다.
수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지금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짓기는 잘 지은 모양이다.
약수동길의 횡당보도를 통해 건너서 잘 보수 정리된 성곽을 따라 올라서니 성곽길은 한동안을 일반도로와 함께 같이 간다.
낙산소개 때 설명한 것처럼 장충체육관에서 신라호텔을 지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를 지나는 서울성곽인 장충동 남산탐방로 1천90m 구간을 정비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므로 성곽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잘 나있는데 신라호텔을 지나면 성곽문이 있는데 성곽 안쪽으로 가나 성곽 안쪽으로 가나 위쪽 타워호텔 못 미친 곳에서 만나는데 나는 성곽 밖으로 진행했는데 안쪽으로는 공원을 조성하였으므로 더 의미있는 순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멀리 신라호텔이 보이는 장충동 성곽>
성곽길을 따라 올라선 정상부에서 더 이상 성곽을 없고 안내하는 이정표도 없다.
성곽이 있어야 할 자리는 현재 기단 공사중으로 1년 후에는 남산과 한번에 이어질 수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타워호텔 옆의 골프장 경계를 통하여 타워호텔로 들어서 타워호텔 정문으로 나와 길건 국립극장의 해오름 극장앞으로 나간다.
언젠지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오래전 집사람과 공연을 본 이후 와보지 않았던 국립극장을 오늘은 성곽순례꾼이 되어 앞으로 지난다.
국립극장을 지나 남산으로 접어들면서 순환도로를 따라가야 하는건지 아니면 성곽이 복원되었는지 복원되었다면 순례길은 나 있는지 모든게 궁금하기만 했는데 순환도로를 따라 100여m를 가다보니 우측으로 성곽이 있고 성곽으로 오르는 길이 조성되어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다.
가파른 길을 성곽을 따라 한동안 올라서니 9부능선에 와서 성곽위로 넘을 수 있게 계단을 만들어 놓아 성곽을 넘는다.
성곽을 넘어 남산 안쪽으로 접어드니 이곳은 남산 산책로로 길이 넓고 깨끗하게 단장이 되었으며 이따금씩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 있었다.
남산 안쪽으로 들어서 10여분을 걸어 남산타워가 있는 팔각정에 도착한다.
<남산타워와 팔각정>
남산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팔각정 서측으로 국사당 터를 표시하는 표시석을 세워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북악산의 수호신사와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에 수호신사를 두었던 사당으로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며 일제가 1925년에 국사당을 헐고 편액과 일부를 무악동으로 옮기니 지금 무악동에 국사당이 존재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신사의 개념이 지금은 무당의 집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팔각정에서 조금을 내려서면 목멱산 봉수대가 있는데 봉수대는 5개로 설치되어 있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당시 5봉수 제도로 운영되었는데 1봉수는 함경도-강원도-아차산을 통해 남산으로 전달되었고 2봉수는 경상도-충청도-광주천림산을 통해 남산으로 전달되었고 3봉수는 평안도강계-황해도-무악 동봉(지금의 인왕산이 아닐까?) 그리고 4봉수는 평안도의주-황해도해안-무악서봉(지금의 안산이 아닐까?) 마지막 제5봉수는 전라도-충청도-양천의개화산을 통해 남산으로 전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수대 터를 지나 서편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보며 급히 내려서는데 아래쪽에서 하나 가득 관광객을 태운 케이블카가 남산 종점에 도착하고 있다.
옛날 서울에서 생활 할 때부터 케이블카는 운행하였으나 이제까지 남산 케이블카는 한번도 타 본적이 없다.
누군가를 모시는 차원이라면 케이블카를 타봤겠으나 그럴만한 일이 없었고 젊어서야 걸어서 수없이 오르고 내렸었기에 타 볼 기회가 없었고 케이블카를 타기위해 인현동 까지 가야한다는 사실도 타 보지 못한 이유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동안을 케이블카를 구경하다 해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서서 옛날 어린이 회관이 있던 안중근 광장에 도착하여 뒤돌아 남산타워를 바라본다.
<안중근광장에서 본 남산타워>
집채만한 정원석에 안중근 의사의 명언을 기록하고 구리빛으로 물든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선다.
김구광장으로 들어서야 하거늘 공사중으로 차도를 따라 내려서 경사진 미끄러운 인도를 따라 남대문앞에 당도한다.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초기의 건축물로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으나 2008년2월10일 고양시에 거주하던 채종기(73세)가 일산의 소유토지가 있는 부근에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토지보상에 대한 불만으로 시너를 뿌리고 방화를 하여 누각 전체가 전소되었다.
지금 채노인은 마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으로 노인 한사람의 착오로 인해 우리나라의 국보1호가 불타 없어져 다시는 옛 건물을 원형을 볼 수 없으며 국민들이 분노했던 다른 사건은 현장 검증때 그래도 사람은 안 죽었으니 다시 지으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노인은 많은 반성을 하고 있다하며 복원 공사중인 남대문은 2012년12월이면 옛 모습을 일반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하니 그날에는 더욱더 하나같은 애국심으로 우리의 문화재를 아끼고 기리 보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국보1호인 남대문---화재로 인한 복구작업이 한창이다>
한동안 남대문에 취해있다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건너 상공회의소를 지나 서소문으로 접어든다.
상공회의소를 지나 잘 나있는 길을 따라가면 소소문으로 이어진다.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의 제자리님의 글을 인용하면 1902년 남대문과 서수문사이에 시구문을 내기로 결정했었다고 하는데 고종이 덕수궁에 거하고 있는데 매일 서소문으로 상여가 나가므로 궁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시구문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려던 같은 생각이 든다.
서고문으로 들어서니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해 차량들이 하나 둘 전조등을 켜고 지나는 모습이다.
신촌 방향에서 시청으로 접어들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서소문은 서울 8문 중 4소문 중의 하나인 서소문의 명칭은 소의문이다.
소의문은 건축당시 소덕문(昭德門)으로 명명되었으나 성종 때 들어 예종 비인 장경왕후의 휘를 소덕으로 올리고 문의 이름을 소의문으로 바꿔부르게 되었고 하기도 하고 영조 때까지 소덕문으로 부르다가 소덕문의 초루를 다시 세우고 그 명칭을 소의문으로 바꾸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전 자료들이나 실록에서 각기 다른 주장이 대두되므로 향후 역사학회에서 이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한강으로 통하는 용산과 마포 그리고 서강으로 통하는 문으로 성내의 장례행렬이 지나는 문이기도 했으며 1914년 일제가 도시계획을 한다는 구실로 헐었으며 지금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이야 어찌 글로 다 할 수 있으랴.
<소의문(紹義門)--- 4대문 사이에 있는 4소문 중 서소문>
아쉬움을 안고 배재학당을 지나 옛 신아일보를 지나 덕수궁 돌담이 보이는 정동길로 들어서 구 러시아 영사관이 있는 지역을 걸으며 일본군과 러시아군 그리고 청나라군이 조선을 쟁취하기위해 암투를 벌이던 시절을 연상하니 골치가 아팠을 고종황제의 얼굴을 떠 올리고 결국은 일본군을 견제하기위한 비책으로 러시아 군을 끌어들였으나 이를 눈치챈 일본군은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는 명성황후가 걸림들이라 생각하고 경복궁에 있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제압한 후 여주사람인 명성황후의 처참한 주검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서서히 접어들기 시작했던 역사의 현장인 러시아 영사관과 덕수궁이 있는 정동길을 걸어 정동4거리에 오니 벌써 어둠이 사방에 번지고 있고 모든 차량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속력내기에 바쁘다.
<돈의문(敦義門)--- 4대문 중 미복원인 서대문>
서울성곽의 서쪽 대문으로 창건된 돈의문은 원래 지금의 서대문 주변이 아닌 사직동과 독립문을 잇는 부근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종 15년(1422년)에 현 위치로 이건 되었으며, 임진왜란 등에 의해 멸실되어 숙종 때 중건하였는데 처음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민진후가 임금에게 청해 문루를 만들었으며 이후 4대문의 위용을 긴직한 채 유지하던 돈의문은 1915년 일제 강점기에 전차궤도 복선화로 인해 철거되었다고 한다.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의 제자리님의 글을 인용해 당시의 매일신보의 기사내용확인해 본다.
1914년 12월 23일자에는 훼철하기로 결정된 서대문, 길을 넓히기로 부득이 서대문을 헐어버리게 되었으므로 근일 내로 그 문의 입찰을 행한다.
1915년 1월 20일자 서대문통 의주로 금년 여름 안에 준공예정
1915년 3월 2일자 서대문 불하기(西大門 拂下期)
서대문은 래 6일 오전 10시 토목국 조리과(土木局 調理課)에서 경매에 부할 터인데 석재는 도로공사에 이용하기 위하여 제외하였더라.
1915년 3월 2일자 매물된 서대문, 6일에 경매집행
3월6일 오전 열 시 총독부 토목국 조리과에서 경매입찰을 행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경매로 팔 것은 서대문의 목재와 기와뿐이오 돌은 하나도 팔지 않고 도로개정에 쓴다더라.
1915년 3월 4일자 "여(余)는 경성 서대문(西大門)이올시다"
나는 세종조 3년인1421년에 축성도감의 지휘하에 팔도 장정 삼십만 명의 손으로 탄생된 경성의 여덟 성문 중에 둘째 되는 돈의문(敦義門)이올시다. 세상 사람이 통칭 부르기를 서대문 또 새문이 경성의 여러분과 인연이 지나서 오는 육일에는 경매가 되여 간다 합니다.
1915년 3월 7일자 서대문의 낙찰 목재만 205원에
시구의 개정으로 인하여 경성 서대문을 헐기로 결정하고 총독부 토목국 조리과에서는 6일 오전에 경매입찰을 행하여 입찰자 십여 명 중에서 결국 이백 오원 오십 전으로 경성 염덕기(廉德基)에게 낙착되었는데 본래 경매한 것은 거의 목재뿐이오 석재는 이것을 도로의 개수에 사용하고 또 고고학상에 참고할 자료될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영구히 보존한다더라.
1915년 6월 11일자 최후의 서대문, 마지막 슬픈 소리와 영구히 사라질 새문
경성의 사대문 중에 하나되는 서대문은 근 오백 년의 역사를 섭섭히 머무르고 이백 오십 원의 화목감으로 경매되여 지난번에 문루와 문짝 등은 없어지고 돌덩이 홍여 형상만 두어 달 동안 풍우의 침로에 맡겼더니 십일 정오 경에는 아주 홍여 형상의 큰돌까지 붕괴되여 버렸더라. 이전에 한양의 백성이 편안하라고 쌓았던 도성의 성문이라. 홍여 틀어쌓은 석재는 주초돌말고 열일곱 개이라. 그것이 모두 길이 다섯 자, 폭이 석 자, 두께가 석 자, 한 개의 중량이 삼천 근이나 되는 큰돌인고로 인부가 우에서 무너떨어칠 때에는 슬프다 ‘쿠아앙─’하고 땅을 울리더라. 그리고 문의 좌 옆에 쌓인 돌은 모두 이, 삼 일 안에 무너 없애버린다 한즉 이로써 서대문은 영구히 그 그림자가 사라지겠더라. (위 매일신보 내용 글은 제자리님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을 참조했습니다.)
<조선말기의돈의문 주변의 풍경으로 공터는 경희궁터인 시 교육위원회 부근으로 보입니다.>
서울시는 서울성곽 4대문 중 유일하게 미 복원 상태로 있는 돈의문 복원을 위한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 중에 있으며 2012년~2013년에는 돈의문 복원공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계획으로 돈의문 시계의 개방감을 확보하고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서대문 사거리의 고가차도를 2011년까지 철거하기로 결정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변한 게 없는 상태다.
위 사진에서 보면 고층건물이 들어선 현재의 모습과 한복차림을 한 우리 선대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성곽에 기대 지은 판잣집과 삿갓을 쓰고 다니는 장사꾼과 나무꾼이 나무를 팔기 위해 소 등짐에 나무를 싣고 장안으로 들어선 모습과 일제에 의해 놓여 진 전차가 돈의문을 통과하는 모습이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보이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가는 어린아이는 지금쯤 살아 있다면 100세가 넘었을 것이니 이미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더 어둡기전에 끝내야 된다는 생각에 기상대가 있던 송월동으로 들어서서 400여m를 가면 서울 성곽의 마지막 볼거리인 홍난파 생가가 있다.
"우리나라 애국가보다 더 많이 불려졌다"고 하는 고향의봄은 이원수 선생이 14세에 쓴 동시에 홍난파선생이 곡을 부친노래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남북한을 통 털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일제하에서 압박의 설움을 봉선화 노래로 승화시키기도 했던 홍난파 선생은 일제 말기 친일 행적으로 친일파 명단에 들어 있기는 하나 그가 친일 행각을 한것이 꼭 그의 죄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두워진 그의 집앞에 있는 홍난파 흉상앞에서 잠시 묵상에 잠겼다가 얼마 남지 않은 구간을 찍기위해 빠른 발걸음을 떼어 놓다보니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두워진 인왕산 입구는 차가운 바람이 감돌고 있으나 굳굳히 자리를 지키는 인왕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을 건강으로 바꿔주는 수호신이 되어 우리를 부르고 내일도 모레도 계속하여 우리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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