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에 대한 범솥말의 회고.
설악행각(雪嶽行脚)4일차, 산행 2일차
연현리(淵峴里)에서 자양전(紫陽田)까지
노산선생 일행은 연현마을에서 하룻밤을 쉬고 아침을 맞습니다.
노산선생께서는 연현에서 아침을 맞으며 평화스럽고 신선하며 조용한 이곳이 후일 어느 때 번화하게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의 이 산촌의 아름다운 꿈의 정경이 머리에 남을 것이라고 하고는 “다시 길을 떠나는 시월(十月) 삼일(三日)은 설악(雪岳) 행각(行脚)의 제사일(第四日)입니다.”라며 2일차 산행을 시작합니다.
<클릭하면 큰 지도로 볼 수 있습니다.
설악명승학교 설악행각 조감도로 본 산행2일차 연현리~광계~한계천까지의 행로를 다음지도에 그려보았습니다.>
<동아일보에 15번째 실린 기사입니다.>
조탁암(鳥啄岩)과 한계고성(寒溪古城)
노산선생 일행은 연현리에서 마을 계곡을 따라 작은 능선을 넘으며 운흥사지 방향으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한계3거리에서 한계령을 거쳐 오생, 양양으로 2차선 넓은 도로가 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길이 없으므로 마을 소로 길로 이동 했던 것 같습니다.
<석황사에서 약1km거리로 첫날 산행을 마치고 숙박을 했을 것으로 보는 1차 추정지입니다.>
<석황사에서 약0.5km거리로 첫날 산행을 마치고 숙박을 했을 것으로 보는 2차 추정지입니다.>
본문에는 돌길을 지나고 때로는 풀길을 지나 20리를 지나서 광계동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건 조금 과장된 거리로 10리를 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입니다.
본문에는 광계동은 오래전 있었던 광계사에서 마을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하며 가까운 거리에 광계폭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본문을 보겠습니다.
광계동 아래 조탁암이란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한가운데가 꽤 깊이 패어 오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겨울이면 몇 천 마리의 새들이 이 바위 안으로 날아들어 바위를 쪼아 먹기 때문이라 하나, 실상은 바위 부스러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그 틈 속에 들어있는 벌레를 먹는 것이겠지요. 바위 확 속과 그 둘레에는 새들이 쪼아낸 돌 부스러기가 마치 수수 껍질 같이 널렸습니다. 들으니, 이곳 토착민 중에 어떤 분이 이 돌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아다 떡을 만들어보았으나 못 먹겠더라 하더라니, 이런 경우(境遇)로 보면, 사람이란 너무나 악착스런 동물인 것 같습니다. 짐승을 잡아먹고, 새를 잡아먹고, 그나마 부족해서 새가 먹던 바위 부스러기마저 행여나 하고 먹어보려 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그냥 넘길 이야기는 아닌듯합니다. 나는 지금 이 조탁암에서 좌우 숲속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
조탁암이라~
조탁암에 대해서는 아는바 없습니다.
조탁암에 대해서 인제군청은 「광계 아래에 있는 큰 바위로 새들이 바위틈에 들어 있는 벌레를 잡아먹으려고 쪼아 놓아서 패였다고 하며 주변에는 쪼아 놓은 바위부스러기가 흩어져 있다고 한다.」라고만 안내하고 있는데 이는 설악행각에 나오는 내용일 뿐 인제군청에서 현장을 실사하고 조탁암을 찾고 올린 글이 아니므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당연히 운운해야 했을 것인 운흥사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광계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광계동은 지금의 설악치마바위골관광농원 입구이거나 아니면 갱기골 초입으로 여겨집니다.
인제군청에서는 못재마을을 운흥사지가 있는 곳에 오래전 있었던 마을로 안내하고 있는데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노산선생께서는 운흥사지에 대한 언급이 없음이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한계사지에 도착해 “한계사가 불타고 20리 아래에 운흥사를 세웠다.”고 하며 “아침에 지나온 못재에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알고 있었지만 운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광계동, 광계사지, 광계폭포에 대해 운운할 입장은 못 되지만 갱기골은 우골로 들어서서 갱기폭포를 보고 좌골로 내려선 적이 있는데 좌골에 절터같이 넓은 터가 있기는 하지만 이곳이 광계사지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광계마을 아래 작은 폭포와 조탁암이 있다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조탁암에 대한 이야기가 말입니다.
노산선생은 바위가루로 떡을 해서 먹으려니 못 먹겠더라는 토착민의 말에 그냥 넘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고는 느낌을 시를 한 수 읊은 뒤에 심경을 토로합니다.
“만일 나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 다른 무엇이 되라 하면, 나는 단연코 저 새가 되어 극히 극히 짧을지라도 세상 근심 다 모르고 우리들의 소원인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삶을 누려보려는 것밖에, 더 다른 허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밝힙니다.
저는 이 문단을 보며 그 시대의 실상을 생각해보니 너무나 가슴 아프다는 생각이 스쳐 지납니다.
노산선생은 저보다 52년 먼저 태어난 분입니다.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 거치며 살았는데 이글을 쓸 때는 일제강점기 때로 정말로 굶기를 밥 먹 듯 하던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의 세대만 해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해 점심시간에 굶는 친구들이 반 정도 되었는데 1930년대만 해도 더 했을 것은 일제 강점기라 배고픔도 큰 걱정거리이지만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본문에서와 같이 자유와 평화가 없으니 무엇인들 재미가 있었을 것이며 삶의 보람과 가치를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설움 중에는 배고픈 설움이 제일인진대 얼마나 배가 고프면 돌가루로 떡을 해먹을 생각을 했을까? 가슴이 뭉클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탁암도 보고 싶기도 하고 광계폭포는 어떠한 곳인지도 궁금합니다.
<갱기좌골로 내려서며 찍은 사진인데 이 넓은 곳이 노산선생께서 말하는 광계사터는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곳 갱기좌골의 넓은 공터를 광계사터로 추정해 본 것은 운흥사지를 넘이 길은 분명히 이곳으로 지났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광계? 광계골? 현재 이곳은 갱기골 또는 굉기골이라고 부르는데 오래전 광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해서 추정해보는 것입니다.
<광계사터로 생각되는 터에서10여분을 내려선 갱기골로 다리를 지나 한계천과 만납니다.>
운흥사지가 인근에서 작은 능선을 넘어 치마바위좌골로 내려서 한계천으로 내려섰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치마바위골입구에서 갱기폭포가 멀리 보일 수도 있는데 광계폭포는 작은 폭포라하니 갱기폭포일 가능성은 적은 듯합니다.
암튼 노산선생은 조탁암을 보고 시 한 수를 읊습니다.
공중에 나는 저 새 쉬는 곳곳 제 집이요
먹으려 입으려 근심이란 없는 것이
공명도 본시 모르고 제 뜻대로 사는구나.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아침 이슬 저녁 놀에 자유의 노래 부르면서
목숨이 지는 날까지 제 뜻대로 사는구나.
조탁암의 가슴아픈 현실을 본 노산선생은 조탁암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도착하는데 한계천은 한계령에서 시작된 천이 한계3거리까지 이어지는 주계곡입니다.
한계의 어원은 너무나 추운 계곡에서인데 더 가깝게 접근하자면 유래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계(寒溪)에는 지금의 귀때기청봉과 안산을 어우르는 한계산(寒溪山)이 있고 한계산 아래있는 마을이라 해서 한계동(寒溪洞)이 있고 한계산의 계곡인 한계천이 있습니다.
이 모두 동일한 한계에서 비롯되는데 인제군청 안내에 의하면 한계의 유래는 신라말 마의태자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김씨대종원의 기록에 마의태자가 935년10월 서울을 떠나 지금의 한계리에 도착했는데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 눈보라가 심한 한겨울이었다며 이들 일행이 몹시 추웠던 것을 기록으로 한계(寒溪)란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산행2일차 한계에서 자양전까지 행로 추정도로 클릭하면 큰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한계를 끼고 얼마쯤 오르다가, 좌편으로 한두 채 촌가를 만나는 목에서 가던 길을 그대로 버리고서 잠깐 좌측 산길로 기어오르는 것은, 이 산에서 가장 고적지로 이름난 한계고성(寒溪古城)을 찾자 함입니다. 길은 그리 험하지 않건마는, 힘은 들대로 들어, 숨이 턱밑까지 받쳐 오르고도 더 오를 데를 찾습니다. 너무나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라, 몇 걸음에 한 번씩은 무릎방아를 찧고야 오릅니다. 이리하여 겨우겨우 고개를 오르고, 고개 언덕에서 숨을 내쉬고는, 다시 숲속을 헤치게 됩니다. 숙인 고개를 한번만 들게 해 달래도 좀체로 허락하지 않는 나직 답답한 수평 길인데, 이것을 따로 성골이라 부릅니다. |
본문과 개념도를 보면 노산선생은 광계마을에서 한계천으로 내려선 후 한계천을 따라 오르다가 옥녀탕 휴게소에서 능선으로 오른 듯합니다.
<옥녀1교를 건너기전 폐쇄된 휴게소가 있으며
휴게소 뒤로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있는데 아마도 노산선생 일행을 이곳으로 오른 것 같습니다.>
<옥녀탕 휴게소 뒤로 오르는 능선길로
노산선생일행은 능선길에서 성골로 내려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요즘 성골좌릉을 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한계산성을 답사한다고 해도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옥녀탕이 있는 곳에서 성골을 따라 오르므로 능선길에 대한 사정을 알 수 없겠지만 본문을 보면 가팔기는 하지만 그리 험하지는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능선을 붙어 성골에 이르기까지 본문을 보면 숲이 무척 우거져 계속 쪼꾸리거나 고개를 숙이고 나무 사이를 지난듯한데 요즘 성골을 가면 숲이 우거져 고개를 숙인 채 걸을 만 한 곳은 찾아볼 수 없으며 키 큰 나무들이 숲을 만들고 있으므로 키 작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위 사진은 성골 좌측, 아래사진은 성골 우측 사진으로
복원된 형태인데 노산선생 일행이 왔을 당시는 무너진 성곽을 보았을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지나서 소나무 숲과 암릉길을 만나 어디가 길인지 모르게 내려서 결국 한계고성에 닿게 됩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한계 옛 성에 대해여 여지승람, 문헌비고(文獻備考)와 성창산(成昌山)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등에도 다 기록되기는 했으나, 그 자세한 역사와 구조에는 언급한 것이 없으므로, 지금 와서 남은 돌무더기 아래 서서는 더욱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마는, 이곳 사람들의 말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때 쌓은 것이라 전합니다. 그러나 여기 남은 돌중에서 몇 해 전에 어떤 분이 ‘지정(至正) 18년’이란 연호가 박힌 기왓조각을 얻어, 지금 인제군에서 보관중이라 하니, 그것으로 보면, 지정(至正)이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이므로, 그 18년은 우리 고려 공민왕(恭愍王) 7년(서기 1358)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이 성이 신라말엽에 된 것이 아니라 고려말엽에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더우기 사기에 경순왕이 여기에 성을 쌓은 사실이 없고, 고려 공민왕 시대로 말하면...... 나는 이 성을 고려 말엽 공민왕 시에 쌓은 것이리라고 생각합니다. |
한계고성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곳 주민들의 말로는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설이 있는 신라말엽에 쌓은 것이라고 하지만 어떠한 기록도 없는 것이므로 노산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쌓은 것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 생각하기를 규모는 크지만 유적을 돌아볼 길이 없으며 조금만 벗어나면 성곽의 흔적을 찾을 길도 없고, 높이는 약6m 정도인데 문은 다 무너져 마치 굴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에 16번째 실린 기사입니다.>
삼각봉과(三角峰)과 옥녀폭(玉女瀑)
노산선생은 한계고성 허물어진 대위에 서서 숙연한 마음으로 깊은 산속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나그네의 쓸쓸함을 되새기며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이 성을 쌓은 이들 다 어디로 가 계시고
비바람 반천년에 성마저 흘린 터를
무상한 길손이 지나니 눈물 왜 아니 흐르오리까
몇 덩이 남은 돌이 그게 더욱 애닯은데
낙엽이 불려 날려 쌓여 덮여 가리는군요
상하여 눈물짓는 이더러 왜 우느냐 묻지마오
시를 한 수 읊고서 노산선생은 성곽에 올라서 북쪽하늘에 구름속에 우뚝 솟은 삼각봉을 바라보며 길이 없어 가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경관을 봅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나는 지팡이를 끌고서 성머리에 올랐습니다. 북쪽으로 구름 밖으로 솟은 삼각봉(三角峰)은 진실로 장관입니다. 아마 설악에서도 이곳 한계에 있어서는 옛 성에 서서 삼각봉을 바라보는 것이 봉만(峰巒) 경치로는 우두머리라고 하겠습니다.삼각봉은 길도 물론 없거니와, 또 밑에서 먼 하늘과 함께 치어다 볼 경치이기로 굳이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바라보니 단풍으로 불붙는 삼각봉이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에 높이 솟은 것은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이 감춰두었던 값진 보배를 인간에 허락해준 듯합니다. |
어렵게 한계산성에 오른 노산선생은 성곽 높은 곳에 올라서서 삼각봉의 자태를 보고 감탄했던 것 같은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한계산성에서 북쪽으로 보인다는 삼각봉입니다.
실제로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성골에서 암봉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은 제한되어 있는데 계곡에서는 보이지 않고 암봉을 볼 수 있는 곳은 성골 우측 성곽이거나 성곽 주변 어디엔가 있을 전망바위로 여겨집니다.
저는 성골에서 우측 성곽을 따라 천제단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직접 답사해 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노산선생께서 찍어 1933년 동아일보에 올린 삼각봉 사진과 최근 한계산성 상성으로 오른 사람들의 블로그에서 모셔온 사진을 대조해보며 어느 정도 삼각봉의 3봉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삼각봉은 어느 3개봉을 일컫었을까?
상당히 궁금합니다.
<위 사진은 노산선생께서 찍은 삼각봉의 사진입니다,
노산선생이 찍은 사진은 찍은 위치가 더 아래 좌측에서 찍은 것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노산선생께서 올린 삼각봉의 사진과 어느 님의 블로그에서 모셔온 사진을 비교해보면 같은 위치에서 찍은 것이 아니므로 같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맨 좌측 봉우리가 안산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리라고 한다면 이상한 점은 안산은 이름이 있는데도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삼각봉으로 불렀을까? 하는 점입니다.
산행 첫 날 안산 주변을 지났음에도 안산을 거론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난 글에서 거론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안산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했는데 산행 4일차에서 영산담을 설명하며 안산이 나오면서 모든 게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삼각봉의 경치를 보고 성곽을 내려서며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청 비단 고운 보에 싸두었던 붉은 옥을
너도 보라시고 퍼놓으니 저 삼각을
받자와 품에 품고서 웃고 돌아 내립니다.
삼각봉을 보고 다시 발길을 돌려 대궐터로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대궐터로 올랐습니다. 이 대궐터라는 것은 신라 경순왕이 머무르시던 곳이요, 또 조금 뒤에 있는 망경대(望京臺)란 것도 그가 잃어버린 옛 도읍을 바라보던 곳이라 전합니다.그러나 이것은 금강산 영원동(靈源洞) 뜰목에 있는,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에 쓰인 이름을 여기서도 한번 흉내내려한 어떤 말 좋아하는 이의 부질없는 짓이요, 더욱이 경순왕의 마의태자도 아니요 바로 경순왕 그이라 하는 것은 더 딱한 전설입니다. 다만 여기에 한 고성이 있자, 거기서 나타난 민중들의 신라를 조상하는 심정일 것입니다. |
<이곳이 한계산성 대궐터라고 하는데 필자도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 대궐터를 가보지 못했으므로 확실한 위치를 알 수 없는데 어느 사람은 천제단 오르기 한참 전에 있다고 기록하는가 하면 또 어느 사람은 천제단을 지나 릿지길을 지난 위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기도 하는데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설악행각을 읽으며 다른 사람들이 올린 사진으로 대궐터 천제단을 보았을 뿐인데 노산선생께서는 대궐터와 망경대만 운운하시고 첸제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대궐터와 망경대가 나오는데 노산선생은 이곳 대궐터와 망경대라는 것은 누군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하며 이 같은 전설은 금강산에 있는 전설을 흉내 내는 것이라 기록하였습니다.
노산선생은 대궐터를 돌아보고 능선 우측 사면길을 지나 계곡으로 내려섰고 이어서 대천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산성을 내려서 옥녀폭포으로 내려서는 성골의 풍경으로
노산선생 일행도 이곳 풍경을 보며 옥녀폭포로 내려섰을 것입니다.>
부연하여 대천은 성골로 한계산성이 있던 상류라고 기록했는데 이곳에서 대천이라 함은 합수곡을 만난 큰 계곡이라는 뜻인데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오른다고 하는데 사실은 아래로 50분만 내려가면 옥류폭이 있다는 것을 놓칠 수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일행은 성골을 따라 내려서서 옥녀폭포에 닿았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시내의 오른편 구석에 다른 골짜기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옥녀폭은 층층이 큰 바위를 뚫고 3번 꺾여, 3번 괴어 흐르는 곳입니다. 소유 권상용(勸相容)의 기에는 이것을 옥류(玉流)라 쓰고 거기에 설명을 썼으되 「폭포 꺾인 것이 3번, 돌확으로 된 것이 셋, 꺾여서는 물을 뿜어 흰빛이 나고 괴어서 있지 아니한다.」하였습니다. 물론 그 묘사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요령을 얻었다 하겠거니와, 그 이름에 있어서는 내가 듣는바 옥녀(玉女)와 그가 쓴바 옥류(玉流)가 서로 다릅니다. 아마 옥녀와 옥류(玉流)가 음이 비슷한 데서 생긴 것일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기록을 따라 옥류라 하지 않고 이곳 사람들이 전하는 옥류를 취하는 것은 폭포 위에 있는 묘한 바위를 공기바위라 하여, 옥녀가 가지고 놀던 것이란 말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위에 2번 꺾인 폭포는 작은 것이지마는 아래 1번 꺾인 것은 꽤 긴 폭포요 또 여기 돌확이라는 것은 저 탕수동의 명물인 탕(盪)과 같은 것이어서 여기서는 흔히 옥녀탕이라고도 합니다. |
옥녀탕을 보고 기록한 내용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옥녀폭포는 3번 꺾이고 3개의 돌확이 있다고 하며 위 2번은 짧지만 아래 1번은 길며 돌확의 깊이도 길어 이곳 주민들은 탕수동의 복숭아탕과 같이 탕을 붙여 옥녀탕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산보다 먼저 설악을 답사한 권상용은 이곳을 옥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옥녀라고 부르는데 옥녀탕 위에 있는 묘한 바위를 공기돌바위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계곡 위에서 보는 옥녀폭포입니다.>
<맨 위 3폭3탕이며 공기돌 바위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옥녀탕을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인 1990년대 초였는데 당시에는 아주 멋있었고 사람들도 아주 많이 찾던 곳입니다.
인제군에서는 옥녀탕휴게소가 문을 닫게 된 계기를 미시령터널이 개통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적어서라고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른데 사라인지, 곤파스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해인가 큰 태풍이 설악을 지나며 큰 피해를 주었는데 당시 옥녀탕 아래 한계천은 큰 못이 생겨 경치가 매우 좋아 여름이면 가족단위 물놀이를 하고는 해서 많은 사람이 붐볐는데 태풍으로 모두 쓸려 내려가 밋밋하고 특징 없는 일반 하천으로 바뀌고 보니 옥녀탕의 주변 경관이 바뀌니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그런 연유로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결국 옥녀탕휴게소가 문을 닫게 되고 빈 휴게소는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군에서는 쓰레기 대란을 철망을 쳐서 차단하다보니 을씨년스런 곳으로 변하고 주차장이 있어도 머물지 않는 흉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중간 2폭2탕으로 탕의 깊이가 제법 깊습니다.>
<맨 아래 1폭1탕인데 탕은 완전히 메워져 있습니다.>
얼마 전 가 본 옥녀탕은 맨 위 1폭1담은 짧고 외소하며, 2폭2담은 폭은 밋밋한데 담은 아주 깊게 패여 있으나 찾는 사람이 없고, 마지막 3폭3담은 물줄기가 약해 폭포로서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아래 큰 담은 수해로 모두 쓸려 내려갔거나 메워져 담의 흔적도 없으니 소유권상용 선생이나 노산이은상 선생께서 현재의 옥녀탕을 보았다면 뭐라고 기록했을지 궁금합니다.
노산선생은 경사진 폭포 위에 걸터앉아 백옥선녀가 공기돌놀이 하는 모습을 그려보며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름만 남겼다며 서운한 마을을 표하며 이렇게 시한수를 읊습니다.
어여쁜 백옥선녀 공기 받든 그 모양이
하마 보일까 해 기다리고 앉았건만
흐르고 쏟고 떨어지고 물소리만 들리네.
옥녀 안 뵌다 마라 저 물이 바로 옥녀로고
물굽이 치고 밀고 지금 한창 공가를 받네
사람은 옥녀를 잘 못 보고 폭포라고 부르네.
<동아일보에 17번째 실린 기사입니다.>
삼선봉(三仙峰)과 학서암(鶴棲巖)
노산선생 일행은 옥녀탕을 떠나 대천을 따라 간다고 하는데 여기서 대천이라 함은 한계천을 말합니다.
우측으로 느아우골을 보며 삼장군봉에 대한 예찬을 하는데 삼장군봉이 따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삼형제봉을 말함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가리봉에서 능선을 따라 서북으로 내려서면 주걱봉이 나오고 주걱봉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래로 길게 나 있는 계곡이 느아우골인데 옥녀탕에서는 삼형제봉이 보일 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계천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다른 삼봉, 즉 삼장군봉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러다 다시 보니 맞은편 언덕을 보니 조금 전 보았던 삼장군봉과 같은 뾰죽한 봉우리가 세 개가 또 있습니다.그러나 이번 것은, 호걸찬 대신 수려하고, 용맹스러운 대신 온유해서 첫 번째 것은 밝은 채 부드럽고, 두 번째 건 맑은 채 빛나고, 세 번째 둥근 채 묘하다 함직한, 그러기에 대번에 시원한 맛이 돌고, 평화한 빛이 괴어, 만일 활개만 들면 나도 문득 하늘로 날 것 같은 새 맛을 주는 것들인데, 과연 이름을 듣고 보니, 삼선봉(三仙峰)이라 합니다. |
삼장군봉과 삼선봉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봉우리들입니다.
얼마 전 장수대에서 하차하여 성골로 가기위해 걸어서 이곳을 지났는데 노산선생은 당시 길이 없으므로 계곡치기로 지났지만 지금은 한계로를 따라 걸으며 주변 풍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욱하게 낀 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날씨가 좋았더라면 하늘벽, 삼선봉, 삼장군봉을 볼 수 있었을 것인데 안개가 걷힌 곳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삼장군봉인 아니가 싶습니다.
<옥녀탕과 마주보고 있는 느아우골로 주걱봉으로 오를 수 있는 계곡입니다.>
<이 암봉은 하늘벽 끝 능선이며 옥녀탕에서 장수대 방향으로 가며 우측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선봉은 어디일까? 퍼즐을 맞추기 위해 2016년10월 찍은 사진을 찾아보니 노산선생이 지난 행로와 지금은 장수2교가 나 있는 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노산선생께서 당시 찍어 동아일보에 연재 때 올린 사진과 비교해 보니 찍은 위치가 다르므로 제대로 확신할 수가 없지만 근사치에 접근 할 수 있었습니다.
<노산선생께서 찍어 동아일보에 올린 삼선봉 사진입니다.>
<장수2교에서 하늘벽을 바라본 풍경으로 이곳이 노산선생이 기록한 삼선봉같습니다.>
암튼 노산선생은 삼선봉과 주변 풍경을 보고 다시 시 한수를 읊습니다.
좋구나 삼선봉이 웃고 한번 솟았구나
물소리 흘려놓고 흥거로이 솟았구나
활개 곧 들기만 하면 나도 둥실 뜨겠구나.
다시 본문을 봅니다.
여기서 좌편 잡목 너머로 멀리 보이는 장엄한 암벽을 적암(赤岩)이라 하는데, 우리가 지나온 옛 성 언덕 위 대궐 터로 부터 흐르는 물이 저리로서 떨어집니다.얼마만에 송정(松亭) 언덕을 넘어, 밭돼기 복판을 가로지르고 지나면서, 동북 쪽으로 돌벼랑 늘어선 벽을 바라보는 보는 맛은 참으로 가슴을 시원케 합니다. 그중에서도 한 가운데 높이 빼어난 자가 있으니, 그것은 응암(鷹岩)이요, 응암은 모양으로 일컫는 이름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는 거의 이 근처를 압도하는 위력을 가진 점에서 더 무섭게 보입니다. |
실제로 글은 길지만 옥녀탕에서 계곡치기로 느아우골을 지나고 위 본문에 나오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은 불과 10분 정도 되는 가까운 곳입니다.
계곡에서나 지금은 도로가 된 계곡 약간 위지점에서나 본문에서 설명하는 적벽은 모두 볼 수 있는데 성골 우측 능선으로 성곽에서 대궐터로 오르는 암릉 지역에 약간 붉은 색으로 보이는 암벽을 적벽이라 설명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설악을 다니며 비선대를 품고 있는 장군봉과 적벽을 보고는 했는데 설악산에 적벽이라 불리는 바위가 이곳에 또 있다는 점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소나무 숲을 지나고 밭을 가로지르며 동북으로 응암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한계천에서 우측으로 올라서 현재 장수1교와 2교 사이를 지나며 본 풍경으로 생각됩니다.
동북 방향이라면 한계천 좌측으로 오승골 우측 현재는 지도에 미륵장군봉이라 부르는 암봉인 듯합니다.
미륵장군봉이라면 예전에는 음암, 즉 매바위라고 불리던 암봉이 어느 때 현재의 미륵장군봉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며 표현을 ‘주변을 압도하는 위력을 가진 점에서 더 무섭게 보인다.’ 라고 했는데 당시 응암의 기세와 위용이 뛰어나게 본 듯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이어갑니다.
다시 좁다소라한 숲길로 들어섰다가 잠깐 만에 널펀한 돌길을 넘어 가면서 끊였던 물소리를 또 듣게 됩니다.오른 편 맞은 언덕에 높이와 넓이가 모두 몇 백길이나 됨직한 큰 바위 벼랑를 만나는데 윗단 한 모퉁이에 깨어진 자취가 있습니다.돌 빛으로 보아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듯한데 이것은 여기에 학이 대대로 깃들이고 있었던 것을 독사란 놈이 해치려다가 마침 벼락이 떨어져서 천벌을 받은 자취하고 합니다.학들은 그 천둥바람에 새끼들을 독사한테 물리지는 않았지마는 그길로 이곳을 떠나가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하며 지금은 이름만 남아 ‘학서암(鶴棲巖)’이라고 전할 따름입니다.나는 이것이 우리네들 정상과 다름없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옛집을 버린 것이 어찌 저 학 만이겠습니까. |
학서암에 대한 전설이 나옵니다.
학서암은 현재 우리는 하늘벽이라 부릅니다.
하늘벽 절벽 중간 부분에 움퍽 패인 곳이 있는데 움퍽 패인 곳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냥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이곳을 지나며 하늘벽을 보려했는데 안개가 전체를 덮어 불과 20~30m 거리인 도로에서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짙게 껴서 하늘벽을 찍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학서암의 전설을 기록하며 노산선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겁니다.
학이 떠난 학서암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시 한 수를 읊는데 참으로 가슴이 뭉클한데 명 시(詩)중에 명 시(詩)를 감상하겠습니다.
정들인 제 집이라 날아들고 날아가고
대대로 어이 새끼 예서 살던 학두루미
이 좋은 강산을 버리고 어디로들 가던고.
새끼들 거느리고 정처 없이 떠 돌면서
오늘은 어느 곳에 눈물의 깃을 쳤노
언제나 고향 산천으로 웃고 돌아 올런고.
이 글을 쓴 시기는 1933년으로 일제 강점기였으며 이 당시 잘 나간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들입니다.
이 설악행각을 읽으며 노산 이은상 선생에 대해 사전에서 보니 일제에 항거하다가 옥살이도 한 분으로 정말 학식과 인품을 갖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왜람된 이야기지만 남이섬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할까합니다.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남이섬을 간 적이 있습니다.
맹꽁이차를 타고 외곽을 돈 적이 있는데 맹꽁이차 기사가 남이섬을 설명하는데 아주 대단했습니다.
남이섬은 홍수가 나면 늘 피해를 보던 북한강 강가에 있는 농지였는데 1944년 청평댐을 만들며 주변 일부가 수몰되면서 섬이 아닌 섬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남이섬은 46만여 평으로 국유지나 시유지가 아닌 개인 소유의 땅입니다.
이러한 남이섬의 주인은 누구일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1965년 민병도라는 사람이 46만여 평 되는 땅을 샀으며 민병도는 제일은행장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으며 이 사들이고 가꾸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맹꽁이 차 기사가 자랑을 합니다.
이러한 땅을 통째로 살 수 있는 재산가???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친일파후손이었습니다.
한일합병을 지지하고, 매국공채 당시5만원을 발행하여 부정축재로 조선갑부반열에 선 민영휘의 손자가 민병도이고 민병도는 제일은행장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습니다.
기사는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다고 힘주어 이야기 했지만 친일 후손이 아니었다면,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한국은행 총재를 할 것이며 많은 돈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한심한........
남이섬에는 창경원(昌慶苑)이 있습니다.
율곡로에 있는 창경궁이 일본 넘들이 강제로 동물원을 만들며 왕궁은 격하시켜 창경원으로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 이곳에 창경원이 있습니다.
창경원은 민병도의 부인 임창순의 이름에서 가운데 창(昌)을 따서 창경원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하는데 이해가 가는지요?
영화 겨울연가가 대박을 치면서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꼭 찾아야하는 명소로 거듭났는데 물론 여기에는 방송국과 한국관광공사가 일조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옛말에 ‘중이 고기맛을 알면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더니 남이섬 주인인 민병도 후손은 돈맛이 찌들려 설립자의 본래 취지에 벗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인 입장료를 10.000원씩 받으며 수백억대 매출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입장료를 1천원으로 내리고 수익금은 사회에 일부 환원하는 결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개인 사유지라고 하지만 매국행위로 번 돈으로 산 땅이므로 국민전체의 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설악행각에 관한 글을 쓰면서 본의 아니게 남이섬에 대한 장문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이섬 이야기를 하는 건 노산선생의 시가 너무나 가슴에 와 닿기 때문입니다.
정들인 제 집이라 날아들고 날아가고
대대로 어미 새끼 예서 살던 학두루미
대대로 살아가던 우리 선대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살던 집을 버리고 오늘도 정처 없이 떠돌기만 했던 때입니다.
기약 없는 광복의 기다림이 마지막 소절에 나옵니다.
언제나 고향 산천으로 웃고 돌아 올런고.
아마도 노산 이은상선생은 이 시를 지으며 조선의 광복을 기리며 썼을 것입니다.
날지 못하는 학의 새끼를 잡아먹으려던 독사는 벼락을 맞아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되니 아마도 벼락은 1945년 미국이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이 되는 듯합니다.
이런 시를 쓰신 이은상선생과 돈에 미친 남이섬 섬주들의 행태가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동아일보에 18번째 실린 기사입니다.>
한계사(寒溪寺)의 폐허(廢墟)
학서암(지금의 하늘벽)을 떠난 노산선생은 좌편으로 올라선 것 같습니다.
길가에 화전민 집이 있는데 허술한 집에는 주인은 없고 방문 앞에 개 한 마리가 있는데 짓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풍경을 보고 눈물나게 적막함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방문을 열어보니 조그만 궤짝 하나와 빈 사발에 숟가락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비참한 화전민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음을 기록합니다.
왜 화전민만이겠습니까?
조선은 일본 넘들 손에 넘어갔고 친일이나 매국노가 아니라면 당시 우리 백성들의 삶이 모두 그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국노가 되어 많은 재산과 부를 누리는 것보다 가진 것 없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칡뿌리로 연명을 할지라도 순수하게 살아가는 화전민의 삶이 더 행복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엌을 가보니 솥 앞에 나무젓가락 2쌍이 있는 것을 보고 위로를 삼으며 화전민 집을 나와 북편 범바위 밑 한계사 터로 발길을 이어갑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조그맣게 일구어놓은 조밭 한 뙈기를 헤치고 나니, 우거진 풀 숲 속에 깨어진 탑 하나가 넘어져있습니다. 이 탑을 보니 여기가 절 섰던 터인 줄을 알겠거니와, 과연 탑이 섰던 아래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초석이 있던 자리와 기와 조각이 군데군데 흩어져있습니다. 문헌을 상고해 보니 여기에 섯던 집은 한계사(寒溪寺)이었습니다. 이 한계사라는 절은 지금 이 산중의 주찰(主刹)인 백담사(百潭寺)의 전신이었는데, 신라 진덕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여기에 창건하고, 미타상 세 분을 봉안한 것 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신라 신문왕 10년에 불타고, 다시 그로부터 30년 후 성덕왕 18년에 다시 세웠다가, 또 그로부터 70년 후 원성왕 원년에 불탔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 5년에 이 절의 중들로 종연 광학(宗演廣學), 각동 영조(覺洞靈照), 법찰설흡(法察雪洽) 등이 이 터를 떠나 여기서 30리 되는 곳에 새로 절을 세우고, 운흥사(雲興寺)라 이름을 고쳤으니, 그 운흥사도 지금은 옛 터만이 우리가 지나온 못재에 있었습니다. |
화전민 집을 지나 5~10분 거리인 한계사 터로 이동해 폐허가 된 한계사를 돌아보며 한계사에 대한 내력을 기록합니다.
여기서 보면 지금의 한계사터로 올라가 대웅전 터와 탑이 서있었던 터를 보고 있음을 말합니다. 저는 한계사지를 2번 올라가 보았는데 넓은 잔디에 건물이 있던 곳에 주춧돌이 놓여 있고 장수대 들머리 방향으로 3층석탑이 있는데 노산선생이 찾았을 때에는 탑은 깨진 채 넘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계사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3층석탑이 2개가 있는데 북3층석탑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료에는 하나만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한계사지의 풍경입니다.>
이어서 한계사지의 주변 풍경을 보며 터를 잘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뒤로는 범바위와 장쾌한 3개의 봉우리가 열 지어 있고, 앞으로는 한계천 너머 주걱봉이 마주보이고, 한계천 건너 바위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자란 것이 양반이 말을 타고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양반바위라고 부르는데 명물이 아닐 수 없으며 양반바위 위쪽 중간에 뾰족한 송곳봉이 있는데 저마다 독창적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여기서 설악산의 바위 지명을 확인합니다.
어떤 사람의 글을 보면 한계사지 뒤로 범바위가 있다고도 하고 양반바위가 내려다보고 있다고 하여 범바위와 양반바위가 같은 바위로 알았는데 설악행각 글에서 확인되는 것은 범바위와 양반바위는 서로 다르며 위치도 한계천을 기준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수대에서 본 양반바위입니다.>
양반바위는 한계천 건너 마주보이는 곳에 있는 바위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송곳봉이라는 명칭도 나오는데 중간 부분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쇠리라고 부르는 곳이 예전에는 우적동이라 불리었나 봅니다.
우적동으로 넘어가는 저녁 햇빛이 깨어진 탑을 비추어 노산선생 얼굴 위에 쓸쓸함을 던지고, 깨어져 흩어져 있는 기와를 덮은 낙엽을 비추니 감개와 와 함께 부질없는 눈물을 흘리게 한다며 한계사지에서 시 한 수를 읊습니다.
나그네 석양을 띠고 한계사 찾아 드니
절도 주인도 없고 바람 부는 빈 터인데
깨어진 옛 탑이 마저 풀숲 속에 묻혔구나.
흩어진 기와 조각 비 맞고 흙이 묻어
이끼로 깔린 것을 지는 잎 또 위에 덮이네
구트나 뒤지지 말자 휘파람 불며 내리리라
한계사지를 돌아본 노산선생 일행은 대승폭포가 있는 골짜기로 내려서서 계곡을 따라 오릅니다.
본문을 봅니다.
다시 한 번 장엄한 폭포가 골 안을 가로 막아 떨어집니다. 사중폭(四重瀑)이라고 부르는 것은 폭포 4개가 잇달아 있기 때문에 이른 것입니다. 이 폭포를 돌아올라, 오십층대를 기어오르면, 이곳에 제일 유명한 대승폭(大勝瀑)이 있습니다마는, 길이 너무 험할 뿐 아니라 대승폭 구경은 내일 아침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사중폭만 보고, 우리가 잘 곳인 자양전(紫陽田)으로 향합니다. |
사중폭포.
사중폭포는 장수대분소에서 대승폭포로 오르는 등로를 따라 약10여분 정도 오르면 계곡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있는 폭포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이목이 있어 들어서려다가 들리지 못한 미답의 폭포인데 다음에는 꼭 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미답인 사중폭포로 좌측은 쪽지님의 사진이고 우측은 노산선생이 동아일보에 올린 사진입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노산께서는 사중폭포는 다녀왔으면서 사중폭포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물이 말라 폭포로서의 위용이 다단치 않은 것인지..............
다시 본문을 봅니다.
대승폭동을 내려 한계 본류로 나오니, 해는 이미 꺼지고, 황혼 속에 흐르는 물 소리만 더욱 찹니다. 동쪽으로 상투봉 위에 달이 둥실 솟아올라, 나그네 오늘밤 잠자리를 또 한 번 불안하게 하려합니다. 나는 문득 불우한 방랑객 매월당(梅月堂)의 한계시(寒溪詩)를 읊으며 갑니다. |
명인한계수(鳴咽寒溪水) 공산일야류(空山日夜流)
목매어 우는 한계의 물아 빈 산에서 밤낮 흐르나
몽혼귀미득(夢魂歸未得) 표전실감수(飄轉實堪愁)
꿈 속에도 돌아 못 가고 떠도는 이 심정 시름에 찼네
대승골을 내려서는 노산선생일행은 날이 컴컴해서 한계천 가에 있는 자양전에 도착해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가기로 했는데 자양전은 현재 장수대가 있는 자리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수대 도로에서본 풍경으로
우측 한옥이 장수대로 노산선생이 2일차 숙박을 했던 자양전은 장수대 좌측으로 생각됩니다.>
잠자리에 누눈 노산은 계곡 물소리에 잠이 오지 않자 창문을 여니 밝은 달을 보고 조선시대 미곡 박수증이 어느 산촌에서 불렀던 시를 읊어 봅니다.
개문망견산천색(開門望見山川色) 월상동천만학명(月上東天萬壑明)
문 열고 산천을 바라 동천에 달이 솟아 온 산이 밝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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