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에 대한 범솥말의 회고.
설악행각 5일, 산행3일차, 자양전~백담사
노산선생 일행은 자양전 하룻밤을 잔 듯 만 듯, 달과 물소리로 더불어 세고서 아침 일찍이 「부디 평안히 가시오.」하는 촌 늙은이의 다정한 인사에 두 번 세 번 답례를 하고, 일행을 서로 부르며, 바삐 서둘러 대승폭(大勝瀑)을 향하여 왼편 발길로 쫓기는 듯 돌립니다.
10월 4일, 제5일차 오전 8시 3일차 산행을 시작합니다.
<설악행각 산행3일차는 자양전에서 시작되는데 장수대분소와 장수대 계수대부터 따라 나서봅니다.>
대승폭(大勝瀑)의 기우특관(奇又特觀)
<1933년11월12일 일요일, 동아일보에 연재한 설악행각 19회 기사입니다.>
노산선생 일행은 자양전에서 2일차 밤을 보내고 3일차 대승폭을 지나고, 대승령을 오른 후 흑선동계곡으로 내려서 백담사로 향합니다.
자양전에서 한계를 따라 계속 오르면 오색령을 지나 약수로 유명한 오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 대승폭으로 오릅니다.
오르는 길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리가 현재 장수대 분소에서 대승폭포로 오르는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승폭을 보고 싶은 마음에 빨리 오르고 싶지만 점점 가팔라지는 험한 등로와 이슬에 젖은 낙엽은 바쁜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지연을 시킨듯합니다.
그런 가운데 한참을 올라 숲을 한차례 지나 바위전망대에 오르니 주변경치와 맞은편 가리봉의 경관에 환희를 느끼는듯합니다.
본문을 봅니다.
여기 바위 위에 올라서 뭐니 뭐니 해도 남쪽으로 가리봉(加里峰) 구불구불 먼 멧부리들을 바라보는 것이 경치치고는 으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른쪽으로 부터 몸을 제대로 틀어 올려 기껏 뾰족해보자, 기껏 솟아보자 한 봉이 가리봉이요, 그 다음으로 끝은 칼날 같은 선으로 삥 돌리고도 안으로 휘우듬이 패어서 밥을 푼다면 한 번에 십만섬을 퍼낼법한 것이 이곳 특유의 주걱봉이요, 또 그 다음으로 키도 맞추어 차례로 큰 것이 어버이 명령을 받자와 공수하고 선 듯한 것은 물을 것 없이 삼형제봉(三兄弟峯)입니다. 이것들이 가로 늘어서 남쪽하늘 한 면을 통히 가리고서 남의 경탄과 찬미를 허락도 없이 모조리 빼앗아 가는 것을 느낍니다. |
본문을 보니 바위라고 적시한 곳이 요즘 대승폭포가지 전 인공물로 만든 데크전망대가 있는 곳에서 맞은편 가리봉과 주걱봉 능선을 본 듯합니다.
이곳에 서면 흐르는 땀을 식힐 겸, 쉬어갈 겸, 대부분 산객들이 가리봉 능선을 보며 쉬어가는 곳으로 한계령방향과 옥녀탕 방향의 경치도 음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의 주변 풍경을 보겠습니다.
<위 사진은 겨울, 아래 사진은 여름으로 전망대에서 한계령 방향을 본 풍경입니다.>
<전망대에서 맞은편 가리봉과 주걱봉을 본 풍경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이 바위 길을 넘어 다시 숲속을 헤치며 얼마쯤 가노라니, 어디서 문득 흰 용이 번쩍하고 눈앞을 지나가면서, 쏴하는 이상한 소리가 고막을 깊이 때립니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순간에 불가사의한 직감을 주는 이것이. 여기가 어디 오니까 이 무딘 머리를 번개 칼로 때리는 황홀한 여기가. 어허! 장엄한자여. 어허! 웅대하고 화려한 자여. 어허! 하나님 신비한 솜씨로라도 애 쓸 대로 애써 된 자여. 어허! 번뇌 속에 타고 타던 중생으로 하여금 저 이른바 「서늘하고도 맑아서 디시는 더운 번뇌가 없다.」라는 것을 맛보게 하는 자여. 그래 네가 누구? 네 이름이 무어? 가로되 설악산<雪嶽山> 그리고는 또? 가로되 대승폭<大勝瀑> 과연 만 길이나 되는 대승폭이 허공으로 떨어지는 신비한 큰 광경을 건너편 바위 위에서 바라보며 미친 기쁨에 몸과 마음을 둘 곳을 모릅니다. 더구나 이 대승폭의 기묘하고도 특이한 경치라 할 것은 지금 저 아침 햇빛에 반사되어 생긴 무지개입니다. 우리가 이 무지개를 보려고 일부러 오전에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만은 어김없이 그 무지개가 여기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노산선생은 대승폭포에 와서 무척이나 감탄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장도 많을 것입니다. 저도 아주 여러 해 산을 다니지만 남에게 듣던 것보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찍어 올린 사진보다 또는 기대보다 더 나은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는 명승을 찾은 계절에 따라 또 우기나 갈수기 등 여러 가지 주변 환경에 따라 시각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대승폭포 전망대입니다.>
<여름날 대승폭포의 풍경으로 물이 없음이 아쉽습니다.>
<겨울 대승폭포의 풍경입니다.>
본문 내용을 보면 무지개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올랐다는 점인데 예상이 적중해 무지개가 춤을 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산선생이 대승폭포를 찾았던 10월4일 폭포의 물이 제법 많았던 것 같습니다.
수백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날리는 물안개에서 만들어진 무지개를 보고 무척 감흥을 받은 듯하며 길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람에 좌우로 요동치며 무지개를 만드니 신비한 풍경을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는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듯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이 기이한 풍경 앞에서 더 원할 것이 있다면 다만 저 폭포가 한 번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주었으면」이라고..... 하면서 삼연 김창흡의 시를 읊습니다.
산을 보려거든 준령을 보게 물을 보려거든 폭포를 보소
위태도 하이 <한계록>이여 만 길 절벽에서 떨어지누나
벽이 높아 물이 못 붙고 다만 창창한 한 장 바윌래
가벼운 바람 물 허리를 휘어 안개만 남북으로 날리더니
물연기 물거품 빙빙 돌다가 잣나무 가지위로 흩뿌리는데
잣나무 단풍나무 그늘이 길어 저 아래 골짜기란 살필 길 없고
서산에 해 저물거니 등대에 더 앉아 있을 길 없네
이 길로 물 근원 더듬어 올라 오늘밤 절간에서 자고 가야지
노산선생도 지적한바와 같이 삼연 김창흡은 해가질 무렵 대승폭포에 올라온 것 같은데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詩) 마지막 소절에 절간에서 자고 간다고 한 것으로 엿 보인다.
삼연집에 의하면 김창흡은 대승암으로 숙박을 하러 갔는데 절간의 중은 이미 어디론가 다 떠나 거미줄이 친 빈 절간에서 일행들과 대충 자고 백담사로 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창흡의 시에 이어 소유 권상용의 시를 읊고, 다시 금원이 14세 소녀시절 썼다는 호동낙서기 중 대승폭포에 관련된 시를 읊습니다.
대승령(大勝嶺) 넘어 조추(槽湫)까지
<1933년11월15일 수요일, 동아일보에 연재한 설악행각 20회 기사입니다.>
노산선생 일행은 예전에 전망대가 없던 시절 전망바위에서 오래 머무른 듯합니다.
대승폭의 찬란한 무지개도 해살이 퍼짐을 따라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전망바위 옆 반석위에 있는 구천은하(九天銀河)란 넉자의 각자(刻字)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용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기세로 사람이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호평하고 있습니다.
<대승폭포 전망대 암반에 있는 각자로 안내판에는 곡운김수증의
글씨라고 안내하는데 설악행각에서는 봉래 양사언의 글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양사언에게 한 표.....>
대승폭포를 가본 사람들이라면 구천은하라는 각자를 보았을 것입니다.
반석이 평편했다면 각자를 더 잘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 같다거나, 사람이 썼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하는 호평은 무척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각자는 봉래 양사언의 필적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전하되, 이 각자는 선조 때 방랑객 양봉래(楊蓬萊)의 글씨라 하거니와, 금강산 만폭동(萬瀑洞), 묘향산의 상원암(上院菴), 등 몇 곳에 있는 각자와 그 체의 글씨일 것으로 보아 그 말이 옳을 것 같습니다. |
노산선생은 이렇게 대승폭포를 보고 골짜기를 따라 오릅니다.
빼곡하게 나무가 들어선 숲을 지나며 눈은 계속 푸른 숲을 보고 있는데 귀는 아무런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섭섭하다 생각했는데 이때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노산선생은 딱따구리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며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는 가슴에 못을 박는 듯하다며 구슬프게 들린다며 시한 수를 읊습니다.
탁목조 나무 쪼는 소리 빈산에 나무 쪼는 소리
나그네 여읜 가슴을 뼈 속 들이 쪼는 소리
애닲아 귀 막고 가는 뜻을 아는 이는 아리다.
딱따구리 소리도 점점 멀어집니다.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 것보다 멀어져 가는 딱따구리소리가 더 적막함을 느끼게 하는 적막한 산길.
<대승령으로 오르는 길로, 같은 위치에서 본 겨울과 여름 풍경입니다.>
등로는 오르고 또 올라도 계속 오름이 지속되고 등로 주변으로 산작약과 당귀가 보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대승암터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삼연 김창흡이 폐허된 절간에서 잠을 지고 갔다는 기록을 보았을 것인데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대승암 터라고 이정목을 세운 건 아니라 할지라도 ‘대승암 터를 찾으려 했는데 모르겠다.’라는 기록도 없다는 것입니다.
노산선생 일행은 대승폭포를 떠난 지 1시간이 되어 대승령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빠른 진행입니다.
저의 경우도 빠르게 올랐지만 50분에서 55분이 걸렸는데 예전에는 지금보다 길이 좋지 않았을 것이고 일행이 여러 명이었으니 빠른 걸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본문을 봅니다.
이리하여 폭포를 떠난 지 1시간 만에 고개 위의 시원을 맛보게 되니 이 고개가 바로 대승령입니다. 가슴에 가득하였던 숨찬 <답답> 내쉬는 한숨 몇 번에 상쾌 무상한 시원으로 변하는 맛은 그야말로 참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전(特典)이겠습니다. 고갯마루에 올라 잠깐 동안 눈을 감고 헐떡이던 숨을 진정하거니와 저 참선하는 이들이 이르는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안으로 헐떡임이 없게 하라.」는 것도 바로 이것을 이름이나 아니온지요. |
노산선생 일행은 무척 힘들게 대승령으로 오른 것 같습니다.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는 표현을 '참는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하였으니까요.
대승령에 올라 얼마를 쉬었는지 기록은 없으며 안산갈림길로 들어서는 1358고지나 음지골로 내려서는 능선의 1369봉, 1241봉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수렴동계곡을 가운데 두고 보이는 공룡능선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귀때기청봉이나 대청봉
은 보이지 않으니 기록이 없음은 당연한 것이고요.
<대승령에서 보는 주변 겨울 풍경으로 1396봉 방향, 가리봉능선 방향, 황철봉 방향입니다.>
시간은 적지 않고 잠깐 쉬어 내설악 골짜기를 마주 보며 고개 아래로 내려섭니다.
대승령을 가운데 두고 대승령으로 오를 때와 다른 느낌을 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0여척 되는 소나무 숲이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1척이 30cm이면 약18m되는 단풍나무가 우거졌는데 12m정도까지는 가지가 없고 그 위쪽으로 가지가 우거져 마치 천상의 화원을 지나는 느낌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대승령에서 흑선동으로 내려서는 능선길 입구이며 사진과 같이 길은 뚜렷하게 나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는데 함께 동반한 포수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봅니다.
우리 일행 중에 처음부터 동반이 되어있는 포수는 아직까지 전쟁을 못 치른 병정 모양으로 나뭇잎만 부스럭해도 ‘이크’하고 받들어총을 할 지경입니다.더구나 이곳에는 짐승이 많다 할뿐더러 권소유(權少遊)의 옛 기록에도 바로 이 지점에서 「풀 나무가 우거져서 우러러도 하늘을 볼 수 없는데 바람이 불어 잎사귀만 부스럭 해도 문득 서로 놀라며 <범이다.>하고 말하지만 끝내 범은 없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들도 우리 모양으로 나뭇잎 부스럭하는 소리에 무척 놀랐던 모양입니다. |
그러나 끝까지 아무런 일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유 권상용이나 노산 이은상께서 이처럼 호랑이에 대해 신경을 쓴 것은 김창흡의 영시암 기록에 찬모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사건이 있었고 당시만 해도 험한 설악산에 호랑이가 실존하던 시절이므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본문 포수 이야기입니다.
포수가 몇 명인지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15명의 일행이라면 최소한 2~3명은 되었을 것 같은 생각입니다.
열흘 정도 돈을 받고 동행하는 입장에서 뭔가 한 건 올려서 뭔가 보여 주고 싶은 맘도 있겠지만 포수도 사람이라 무서움이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낙엽이 바람에 이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자 하는 행동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그러나 끝내 아무 일없이 50분 정도 내려서 물이 있는 계곡에 내려서 목마름을 해소했다고 합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끝내 아무 일없이 50분 정도 내려서 계곡의 맑은 물을 만나게 되어 한참 말랐던 목을 넉넉히 축임은 사막 아닌 이 산중에서 오아시스의 찬치를 성대히 차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시내를 건너서 다시 화전 이룬 밭 언덕길을 끼고 내려가기를 10분 쯤에 절벽 병풍이 천길 높이 둘렀는데 반은 풀이 덮여 푸르렀고, 반은 단풍으로 붉은 것이 두 눈만 가지고는 감상하기에 너무나 부족함을 느끼게 합니다.그리고 벼래 아래는 넓고 큰 반석이 있어 붉은 무늬 푸른 점이 다시 한 번 사람의 눈을 희롱하는데 이 큰 반석과 벼래 사이로 흐르고 떨어지는 물이 마치 말구유와 같습니다. |
저는 2018년 여름 흑선동 계곡으로 내려서 백담사로 지난 적이 있습니다.
노산선생의 기록을 보면 마치 제가 계곡을 내려가는 것같이 동요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승령에서 흑선동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은 2길이 있는데 첫 번째 길은 대승령에서 귀때기청봉 방향으로 약20m정도 지나면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는데 이곳이 능선 길인데 저는 이곳 능선길로 내려섰는데 아마도 노산 선생께서도 이곳으로 내려선 듯 합니다.
두 번째 길은 대승령에서 안산 방향으로 100~150m 정도 지나면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지만 등로 사정은 알 수 없는데 이곳에서는 공룡능선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대승령에서 1시간05분을 내려서서 계곡을 만납니다.>
<흑선동계곡 무명1폭포입니다.>
<흑선동계곡 무명1폭포입니다.>
능선길로 내려서면 오래전 세웠던 이정표가 곳곳에 있어 내려서는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으며 현재는 휴식년이 끝나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능선길을 따라 40~50분 내려서면 우측으로 넓은 습지를 지나 10분을 더 내려서면 와폭이 나오는데 이곳 계곡의 돌들은 검은색에 붉은색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퍼즐을 맞추는가 했는데 다음 문장에서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시내를 건너서 다시 화전 이룬 밭 언덕길을 끼고 내려가기를 10분 쯤에 절벽 병풍이 천길 높이 둘렀는데」계곡으로 내려서서 계곡을 건너고 화전을 끼고 10분 쯤가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에 도착했다는 점입니다.
계곡에 내려서 4번의 와폭을 지나는데 쉬지 않고 계속 내려선다고 해도 약12분 정도 내려서면 축대가 쌓인 흔적이 있는 곳을 지나는데 저는 이곳이 절터라고 생각했는데 노산선생의 기록에는 화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승령에서 1시간20분이 지나 닿은 곳, 석축이 있어 절터라고 생각했던 곳입니다.>
<절터에서 10분을 내려서서 무명4폭포를 만납니다.>
석축이 있는 곳에서 25분 정도 내려서면 좌측으로 낙수골이 있으며 낙수골 입구에서 5~7분 내려서면 소유권상용과 노산선생께서 말하는 한 면이 벼래 즉 절벽이며 절벽 아래는 좁은 골폭포가 길게 이어지는데 좁고 깊습니다.
본문을 봅니다.
과연 그 이름도 구유소라 부르거니와 소유 권상용의 기록에 』간류협이심(澗流狹而深) 여마조(如馬槽) 명조추운(名槽楸云)---시냇물이 좁고 깊어 마치 말구유와 같아 이름하여 구유소라 한다.」이라 한 것이 이것인줄 알겠습니다. |
본문의 글을 보면서 제가 골폭포라고 표현한 곳이 권상용이 말구유와 같아 구유소라고 표현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대승령에서 이곳까지 1시간이라고 기록했는데 저의 경우 휴식과 점심 식사를 하며 이곳까지 2시간15분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산악마라톤을 한다면 모를까? 1시간에 15명이 이곳까지 내려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아마도 노산선생께서 시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중에 백담사에 도착하는 시간을 역으로 계산하면 답이 나올듯합니다.
시냇물이 좁고 깊어 마치 말구유와 같아 이름하여 구유소라 한다는 곳, 구유소..............
저는 이곳을 지나며 이곳 풍경에 반해 15분을 머물렀던 곳이며 좁은 골 깊은 골을 보고 골폭포라 이름했던 곳입니다.
이제보니 이곳이 소유 권상용, 노산 이은상께서 말하는 구유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을 길게했지만 흑백사진 한장으로 부족해 곳 제가 찍은 사진을 올립니다.
<노산 이은상께서 동아일보에 올린 구유소입니다.>
<구유소는 2단폭포인데 위 2장은 상부폭포입니다.>
<보기에는 얕게 보이지만 물이 맑고 깊이도 제법 깊습니다.>
구유소를 보고 노산선생께서는 신선이 사는 산에서는 하늘 말 밖에 먹일 것이 없는데 옛날에 먹였던 자리인지, 지금도 먹이는 중인지, 혹은 뒷날에 먹일 것인지 속된 눈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하며 시 한 수를 읊습니다.
하늘말 만리를 가며 이 산 위를 지나다가여기 내려와 이 물을 마셨기로사람이 이곳을 일러 구유소라 이르더니.
신령한 하늘 말이라 속된 눈이 못 보오나오늘도 이 땅에 내려 행여 이 물을 마시는가뒷날에 그 용맹 떨쳐 쓰일 날이 있으려니.
<하늘의 말 천필을 먹일 수 있는 곳이라고 호평했던 규유입니다, 아주 깊습니다.>
<좌측 절벽은 이끼로 보기가 좋았습니다.>
구유소를 보고 시 한 수를 읊은 노산선생은 절벽을 보고 다시 시를 읊습니다.
천길 돌벼래를 단풍으로 입혔는데곁에 선 나무조차 제 이름 다 버리고못 붉어 누르면서도 단풍인체 하는구나.
단풍은 붉으라하라 타듯이 붉으라하라날이 붉다고 너도 따라 붉어야 하나
네 자랑 황금빛이니 제 빛대로 섰거라.
자산주찰(玆山主刹) 백담사(百潭寺)
<1933년11월16일 목요일, 동아일보에 연재한 설악행각 21회 기사입니다.>
노산선생은 구유소의 단애와 단풍이 좋아 시를 읊고 한동안 쉬어 간 듯합니다.
얼마를 쉬어 간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어서 30분 남짓 걸려서 큰 내를 가로 만나니 여기는 백담동(百潭洞)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저의 경우 쉬는 시간 없는 계산으로 45분 정도 걸려서 수렴동계곡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구유소에서 15분 정도 내려서면 우측으로 가는골이 있으며 가는골 입구에서 20분을 내려서면 아주 멋있는 암밤과 주변 바위의 경치가 뛰어난 곳이 있는데 노산 선생은 기록에는 이곳 대암반 협곡에 대한 설명이 없음이 이상합니다.
이곳에서 정확하게 10분을 내려서면 수렴동계곡에 닿습니다. 노산께서는 수렴동계곡에 닿은 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노산선생은 수렴동계곡에 닿고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본문을 봅니다.
여기서 오른편 서쪽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시(永矢), 오세(五歲) 등 암자로 가는 길이요, 왼편 동쪽으로 물을 따라 내려가면 백담사가 됩니다.우리는 우선 오늘밤을 백담사에서 쉬고, 내일 다시 이리로 거쳐 안산 경치를 차례로 볼 것입니다.백담사까지 가는 동안, 계곡의 푸른 물, 푸른 돌은 그 성격이 지나온 다른 데와는 특별한 것이어서 그 훤한 품으로는 금강산 장안동구(長安洞口)와 같다 하겠고 그 밝은 바탕으로는 묘향산 향로동부(香爐洞府)와 비길 만합니다. |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노산선생께서 착오를 일으켰던지 아니면 좌측과 우측을 집필할 때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흑선동계곡에서 수렴동계곡으로 나오며 우측 편에 영시암과 오세암, 그리고 서쪽 편에 백담사가 있는 것은 맞지만 우측이 동쪽이고 좌측이 서쪽인데 방향을 잘 못 기록한 것입니다.
흑선동계곡에서 수렴동계곡으로 나와서 백담사를 가는 길은 2가지로 첫 번째는 수렴동계곡을 건너지 않고 하류쪽으로 20~30분 내려서면 됩니다.
<합수곡에서 흑선동계곡을 본 풍경입니다.>
오래전에는 백담사에서 이 길을 통해 대승령으로 오르던 길인데 한동안 흑선동계곡이 휴식년제에 묶여 통행이 제한되며 이 길을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길은 수렴동계곡을 건너서 정규등산로를 따라 길골을 지나서 백담사로 가는 길인데 노산선생께서는 옛길을 따라 백담사로 간 듯합니다.
피어린 육백리에 실린 설악행각에는 백담사에 도착한 시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연재된 신문 기사를 보면 저녁이 되어 백담사에 도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기사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후자(後者)를 택(擇)하여 오늘밤을 백담사에서 쉬고, 내일 다시 이리로 거쳐 내산(內山) 진경(珍景)을 차례차례 볼 것입니다.백담사까지 가는 동안, 계곡의 벽수(碧水) 청석(靑石)은 그 취(趣)가 지나온 다른데와는 자별(自別)한자라 하겠거니와, 그 소려(昭麗)한 품으로는 금강(金剛)의 장안동구(長安洞口)와 같다 하겠고, 그 청기(淸奇)한 질(質)로는 서산(西山)의 향로동부(香爐洞府)와 비기겠습니다.석양(夕陽)입니다. 백담사의 저녁 염불(念佛)을 재촉하는 석양입니다. |
노산선생 일행이 백담사에 도착한 때는 저녁5시경으로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장수대에서 백담사까지는 약8.8km~9km가 됩니다.
오전8시 자양전을 출발해 오후 5시경 백담사에 도착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약9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시간을 논하는 것은 본문 중에 50분만에 검붉은 폭포가 있는 계곡에 도착했다거나 그곳에서 10분을 내려서 화전에 도착했다거나, 화전에서 10분을 내려서 절벽이 있는 구유소에 도착했다거나, 구유소에서 30분이 지나 수렴동계곡을 만났다는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길이 좋지 않아 요즘 산행하는 사람보다 더 빠르게 다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15명 일행이라면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시간에 대해 논하는 것은 제가 같은 코스를 2018년 여름 지났는데 기록대로라면 산악마라톤을 하듯 움직였어야 했으므로 헷갈리기를 여러 차례였기 때문입니다.
<석양이 질 무렵 백담사에 도착합니다.>
석양이 물들어 백담사에 도착했고 백담사에서는 저녁 염불이 있었나 봅니다.
이후 본문은 백담사의 내력으로 이러합니다.
이 백담사의 전신은 자장율사(慈裝律師)의 창건(創建)인 한계사요, 그것이 신라말엽에 못재에 자리를 잡았던 운흥사(雲興寺)가 되었다가, 그것마저 고려때에 없어지고서, 다시 그 뒤에 동훈(東薰), 준희(俊熙) 등(等)이 북쪽을 60리 지점에 옮겨 짓고 심원사(深源寺)라 개명(改名)하였습니다.그 심원사가 세종(世宗) 14년(서기 1431)에 또 다시 불타고 2년 뒤에 해섬(海暹), 취웅(翠雄) 등이 30리 아래 내려가 다시 세우고 선귀사(旋龜寺)라 했다가 그것마져 불타고 뒤에 서쪽 1리 되는 곳에 영취사(靈鷲寺)를 지었고 그것 또한 세조(世祖) 원년(서기 1456)에 불났다가 이듬해에 재익(載益), 재화(載和), 신열(愼悅) 등이 옛 터의 상류(上流) 20리 되는 곳에 새 절을 짓고 비로써, 백담사라 이름하였습니다.그랬던 것이 서기 1915년에 160여 간(間)이 재가 되고 지금 있는 이 집은 4년뒤에 지금 이 산중 오세암(五歲菴)에 거하는 인공노선(印空老憚)이 중건한 것입니다. |
백담사의 내력으로 지금의 장수대에서 시작한 절은 운흥사->심원사->선귀사->영취사->백담사->심원사->백담사로 7번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화재로 절이 불타자리를 옮기기도 했고 지금의 백담사는 백담사로 이름 지었다가 다시 심원사로 바꾸었다가 원래대로 백담사로 바꾸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유서 깊은 백담사는 세인들의 시야에서 잊혀 져가는 듯 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거하며 전 국민이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찾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물도 크고 법당 유물도 있는 대찰이 되었지만 노산 선생은 지금 위치한 곳이 여러 번 이사 다닌 곳 중 주변의 산수는 제일 못하다고 평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 닦는 것이 어찌 반드시 산수 위치의 좋고 굳은데 매인 것이겠습니까, 다만 승려들 자신이 지극히 공부로 산수마저 빛내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선방 한구석에 목침을 베고 누워 하룻밤 피곤한 몸을 쉬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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