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산행기

설악산국립공원, 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 따라가기(5)

범솥말 2023. 5. 23. 21:36

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에 대한 범솥말의 회고.

설악행각(雪嶽行脚)7일차, 산행 5일차

봉정암(鳳頂庵)에서 대청봉을 경유하여 오세암(五歲庵)까지까지

노산선생 일행이 백담사에서 하룻밤자고 아침 일찍 나선 산행길~

수렴동계곡을 지나고 쌍폭동을 지나고 구곡담을 지나고, 깔딱고개인 사자고개는 구곡담 우측 백단대를 지나 봉정암에 이르러 봉정암에서 여장을 풉니다.

봉정암 주지인 춘계스님과 바깥에 나가 산책을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별이 총총했을 하늘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무슨 소원을 빌었을지?

억지로 잠을 청하며 봉정암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자세한 기록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설악의 깊은 숲 속을 하나하나 열어가는 산행~

10월 6일 아침, 설악행각 제7일차 5일차 산행을 시작합니다. 

청봉고원(靑峰高原)의 적막(寂寞)

노산선생은 산행을 나서며 봉정암주지 춘계스님과 작별을 합니다.

<눈내리는 봉점암을 담았습니다.>

노산선생은 멀어져 가는 봉점암을 바라보며,

바위 봉우리에 둘러 쌓인, 높고 높은 고지 구름 속에 있는 절과 길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을 시한 수로 표합니다. 

사현절벽승의석(寺懸絶壁僧倚石)!->절은 절벽에 매달렸고 중은 바위에 지었는데

로출고봉객보운(路出高峯客步雲)!->길은 높은 봉으로 뚫려 나그네는 구름을 밟고 간다.

주지 춘계스님은 노산선생 일행과 작별하고 선실(禪室)로 들어가고, 일행은 설악의 최고봉 등정을 위해 구름인지 안개인지를 헤치며 암자 우측 송림 사이로 들어섭니다.

당시에는 봉정암에서 소청을 오르는 길이 무척 험준하고 넝쿨지대가 많았는지 노산선생의 글에는 독백 같은 문장으로 ‘실상인즉 아무러한 경치도 찾아볼 것 없는 이 길을, 가장 험난한 이 길을, 이다지 큰일 삼아 오르는 까닭이 대체 무엇이리까?’

우리도 산을 다니며 독백을 뇌까릴 때가 아주 많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모두 때려치우고 내려갈까? 누가 돈을 주라고 험한 길 가라면 가겠나? 라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산꾼들에게는 목적이 있으니 잠시 자신을 돌아보고 묵묵히 정상을 향해 오르는 거지요.

노산선생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힘들어 독백을 하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분명한 목적을 기록했으니 답은 설악의 최고봉인 청봉을 오르려는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암자를 떠난 지 약 30분 후 ―
어허! 이 무슨 특이(特異)한 장식(裝飾)입니까. 기암도 없고, 깎아지른 절벽도 없고, 잔잔한 흐름도 없고, 폭포도 없이, 모든 숲 경치나 물 경치라고는 그림자도 없는 대신, 인공으로 일부러 펴놓으려 해도 이렇게 골고루 굴려놓을 수는 없을 만큼, 수억만 덩이의 크기조차 같은 돌들이 온 산야의 광활한 비탈에 널려있습니다.
그 규모와 형태는 서로 다르지요 마는, 그 종류로 말하자면, 금강산 비로봉(毘盧峰) 오르는 길에 깔려 널린 「금서드리」 「은서드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만큼 금강의 「서드리」나 설악의 「서드리」가 다 한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밟지 않으면 안 될 거룩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금강의 그것은 조화옹이 조각하던, 설악의 이것은 또한 그의 설악 조각하신 근본 대공장이라 하겠습니다.

봉정암에서 길을 떠난 노산선생일행은 너덜겅지대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금강산 비로봉 오름길에 있는 너덜건과 비교하며 조물주의 조화로 여기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듯합니다.

사실 설악은 곳곳에 너덜겅이 참으로 많습니다.

소청길 너덜겅은 황철봉 너덜겅에비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인데 만약 황철봉 너덜겅을 보았더라면 무엇이라 적었을지 궁금합니다.

이어서 금강과 설악의 너덜겅을 비교하는데 금강의 너덜겅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켜낸 통밥이라 표현하는 반면 설악의 너덜겅은 깎아낸 대팻밥으로 표현합니다.

이어서 너덜겅 길을 지나 별세계를 만났다고 기록합니다.

<노산선생이 대청봉을 오르던 시절에는 소청대피소가 없었을 것인데 지금은 호텔같은 대피소가 있습니다.>

암봉과 너덜겅은 사라지고 푸르른 밭이 나타났다는데 바로 전나무 밭이라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키가 작다는 것인데 사방에 막힌 곳 없이 불어 닥치는 혹독한 바람으로 키가 자라려야 자랄 수가 없어 키 큰 나무가 겨우 2, 3척 인데 대신 몸통만 굵어져서 서너 아름씩 된다고 기록합니다.

너덜겅 길과 전나무 길을 지나 대청봉으로 발걸음을 이어갑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적막(寂寞)!
위대(偉大)한 적막!
상청봉(上靑峰)을 향하여 오르는 길은 다만 적막한 고원입니다.
이름 모를 높은 산꽃이 찬바람에 한 두 송이 제대로 피어 이 고원의 끝없는 적막을 한층 더 심각하게 해줍니다.
이 적막은 어느덧 내 몸뚱이의 세포속까지 배어들고 말았습니다. 아니, 내 마음속까지 완전히 동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제 가기를 잊어버리고 주저앉아 가쁜 숨을 거두고 나니, 이 고원의 적막과 내가 둘이 아니요 하나임을 알겠습니다.

높은 산은 바람소리를 빼고는 조용했나봅니다.

요즘이야 주말이 아닌 주중이라도 산행하는 사람들을 수시로 볼 수 있고, 낮이 아닌 밤에도 야간 산행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지만 1930년도, 그것도 일제강점기 때이니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에 한가하게 산을 찾는 사람, 지금처럼 건강관리 한다고 산을 찾는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산은 조용했나봅니다.

봉정암에서 소청으로 오르는 길은 적막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여기 정도면 지금의 소청산장이 있는 곳일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소청산장이 없었는데 지금은 봉정암에서 0.7km거리입니다.

그런데 길이 가팔고 험했으니 몇 시간을 오른 듯한 느낌에 길가에 주저앉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소청산장의 전신은 봉정암 앞에 있던 봉정산장이라고 하는데 1970년대 생긴 봉정산장은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며 소청산장이라고 했는데 2008년까지 노후 건물이 있었는데 이후 설악산국립공원에서 현대식으로 새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2년 사월초파일, 대청을 처음 오르던 날 소청산장에서 하루 묵었는데 창문도 없고 냉방도 안 되는 곳에서 자다가 얼어서 죽을 뻔했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소청산장을 지나 약0.4km를 오르면 소청봉 이정표가 있는 3거리일대를 지나며 이름모를 야생화가 많았는지 야생화를 보며 야생화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더욱 쓸쓸함을 느끼게 한 것 같았으며 힘들 발걸음에 한 켠에 주저 않아 휴식을 취하자 앞서간 일행이 뒤처진 노산선생을 확인하기위해 소리를 지르니 답신으로 소리를 지르며 일행들을 따라 나서며 노래삼아 시 한 수를 읊습니다. 

높은 산 이 적막이 내 맘에 이리 좋아

가고 오고를 다 잊고 앉았는데

남들은 내 뜻 모르고 소리 질러 부르네. 

앞서고 뒤서고를 다투지 말았으라

쫓는 이 없는 길을 바삐 간다 자랑 마라

누구나 이를 데 이르면 더는 가지 못하나니.

운주봉(雲住峰)의 구름

적막(寂寞),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산을 오르다보면 주변은 조용하고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거친 자기 숨소리만이 적막한 산중을 깨는 것 같은 분위기......

노산선생께서 청봉을 오르는 기분을 그렇게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시원하면서 꿈같아서 깨고 싶도록 답답하다고 느끼는 곳, 영원한 평화를 맛보는 곳, 무거운 슬픔과 아픔이 가슴을 눌러주는 곳 바로 이곳은 노산선생께서 청봉고원을 묘사한 글입니다.

그리고는 청봉오름길에서 천불동 건너편하늘 높이 솟은 청봉과 청봉에 걸려 있는 구름을 보며 구름예찬이 이어집니다.

 

<노산선생께서 대청봉을 어르던 때는 소청봉은 없는 듯 합니다.

하청봉, 상청봉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언제부턴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소청봉이 있습니다.>

본문을 봅니다.

천불동의 우편에 솟은 운주봉에 구름 피어나는 모양이 여기 이곳에서는 더 좋은 그림입니다.
구름 한 조각이 떠가는 것을 우러러 볼 적에도 때로는 감개에 빠지는 때가 있는데, 이제 구름이 피어 도는 신비한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오리까.
자연 가운데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구름입니다.
포구에 깔린 안개도 좋고, 나무에 걸린 새벽달도 좋고, 창에 듣는 빗소리도 좋고, 어깨에 쌓이는 함박눈도 좋고, 이름 모를 들국화도 좋고, 구슬 같이 맺히는 이슬도 좋고, 머리카락을 불리는 봄바람도 좋고, 우수수 날리는 나뭇잎도 좋고, 지는 해, 반짝이는 별, 성난 파도, 잔잔한 못물, 낮에 우는 뻐꾸기, 밤에 우는 기러기, 공산에 떨어지는 솔방울 소리, 마을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그 중에서도 하나만, 오직 하나만 가지라 하면, 나는 구름을 가집니다.
구름을 사랑합니다.

구름예찬의 들러리로 안개, 새벽달, 빗소리, 함박눈, 들국화, 이슬, 봄바람, 낙엽, 지는 해, 별, 파도, 호숫가 물, 뻐꾸기, 기러기, 솔방울, 저녁연기, 백양목그림자, 시냇물소리 등이 나열됩니다.

그 많은 중 구름을 제일 사랑한다고 예찬을 하는데 스스로에게 왜? 구름을 제일 사랑하는지 물어도 답은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물어도 대답할 말이 내게는 없습니다.” 라고 하며 즉석에서 시를 읊습니다.

구름은 좋을러라 구름은 슬플러라

내 사랑 쏟는 그곳에 아픔 또한 있을러라.

운주봉은 대청봉을 뜻함 같습니다.

운주봉이란 봉우리의 이름을 적은 것이 아니고 대청봉에 반쯤 구름이 걸친 모습을 표현한 것 같은데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처음에는 화채봉에 구름이 걸친 풍경을 보고 운주봉이라 쓴 것인가 생각했는데 읽고 다시 읽으니 대청봉을 뜻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름 예찬을 하며 올라 하청봉에 올랐다고 기록합니다.

원문을 보면 설악산의 청봉은 상청봉, 하청봉으로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상청봉은 대청봉을 뜻하는 것 같고, 하청봉은 지금의 중청봉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하청봉까지 오르고 상청봉을 오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며 안타깝다는 표현을 심히 섭섭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즘에도 한계령에서 설악동으로 산행하는 산객 중 대부분은 대청봉을 오르지 않고 중청봉에서 바로 하산하는 편입니다.

하청봉~

지금의 중청봉입니다.

중청봉 정상은 군부대가 진을 치고 있어 현재로서는 설악을 찾는 산객들은 중청봉을 에돌며 지날 뿐 군인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중청봉 정상을 밟을 수 없습니다.

소청을 지나 중청봉 사면을 돌아서면 중청봉대피소가 보이고 3거리에 닿는데 우측으로는 한계령, 서북릉으로 이어지는 길인 노산선생이 산행할 때는 한계령길이 없었는지 이렇다 할 글이 없습니다.

노산선생 일행은 하청봉에서 상청봉으로 오릅니다. 

동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계통

노산선생 일행은 하청봉을 떠난 지 40분이 지나 상청봉에 올랐다고 기록하며 상청봉 정상에서 동해바다와 일자로 늘어선 해변가의 부락과 속초, 대포, 낙산, 양양, 강릉을 내려다보며 무한한 감개를 느끼는 동시에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격에 복받쳐 오름을 느낀다고 적고 있습니다.

<중청대피소의 겨울과 중청대피소에서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풍경입니다.>

본문을 봅니다.

왜 나는 이 청봉 정상의 장엄한 자연 속에서 눈물지으며 울어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 터져 나오는 내 슬픔 속에는 ‘사람’된 슬픔도 있습니다. ‘우리네’된 슬픔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나’된 슬픔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슬픔을 참지 못하여, 위대한 자연 앞에 나와, 울음으로 내 뜻을 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서북쪽으로 아득한 구름 밖에 높이 솟은 봉을 바라봅니다. 저것이 금강산(金剛山) 비로봉(毘盧峰)! 비로봉의 높이는 1638미터, 여기 이 청봉의 높이는 1708미터니, 청봉이 약 70미터나 더 높은 셈입니다.

 노산선생의 복받치는 슬픔은 무엇일까?

목표했던 상청봉을 오른 후 허탈한 마음?,

아주 소수 정예만 오를 수 있는 상청봉 정복에 대한 감격?

당연히 그럴 수 있고 이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대청봉의 겨울풍경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1932년은 일제 강점기 때로 일본넘들은 조선의 풍습, 언어 이름까지도 바꾸는 극단적 조치를 실행했는데 이러한 억압이 드넓은 동해를 내려다보며 슬픔으로 폭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강입니다.

마음 한 구석에 있던 반일에 대한 감정이 솟구치기는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도 없었을 것이고 더구나 설악행각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이므로 솔직한 마음을 담아 쓸 수도 없었을 입장으로 가슴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격'을 이리 전달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북쪽으로 아득하게 금강산 비로봉이 보인다고 기록하며 비로봉의 높이와 설악 청봉의 높이를 비교합니다.

불과 10여년전만해도 설악에서 금강산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미세먼지가 심해 아주 재수가 좋은 날이 아니면 금강산을 볼 수가 없는데 금강산은 고사하고라도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속초도 형체만 보일뿐 사물을 판단하기 어려운 실정이니 걱정이 아니 될 수가 없습니다.

<위 사진은 오래전 청백산악회에서 모셔온 사진입니다.>

조선시대 많은 사람들이 설악산을 찾았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대청봉을 오르지 못했으며 대청봉을 오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권혁진님의 설악인문기행을 보면 대청봉을 올라갈 수 있나요?” “여기서 대청봉까지는 하루가 걸립니다. 오르는 길도 험하며 머무를며 숙박할 곳이 없습니다. 삼연선생도 반세기를 설악에서 보냈지만 대청봉에 오른 것은 한, 두 번뿐이며 저는 설악산을 4번 올랐는데 대청봉을 한 번 올랐습니다. 몸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아 오래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라는 대화가 나오는데 한설록의 저자 박성원과 이제원이 나눈 대화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정암까지 오른 것에 만족하고 하산 했다고 하니 이시대에 사는 우리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대청봉을 오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이어지는 글에서는 백두대간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현재의 산 체계는 백두대간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어느 구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인데 노산선생께서는 이를 당연시하고 남사고나 이수광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태백에서 북으로 설악을 통해 금강산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이설을 적고 있습니다.

본문을 봅니다.

이 설악산은 동부 백두대간에 속하거니와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들은 설악산뿐만 아니라 반도의 모든 산맥이 오직 백두로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며, 더욱이 남사고 같은 이는, 반도의 산맥뿐 아니라, 해중으로 은복하여 제주도의 한라산 및 일본도의 모든 산에까지 미친다 하였고, 이수광도 그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차설유리(此說有理)’라 하여, 같은 의견을 말했습니다.
강원도의 모든 산,
특히 설악산 같은 경우 백두간지가 아니라, 다시 가까이 말하자면, 금강산으로부터 남하한 것이 아니라, 산맥의 형세가 태백산으로부터 북진하여, 설악이 금강을 향하여 흘러 들어갔다는 이설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악의 산맥에 대하여, 나는 남으로 내려왔다거나, 북으로 들어갔다 거나를 시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이 청봉 위에 높이 서서, 구름을 뚫고 멀리 아득히 이 흥미진진한 반도의 산맥을 보는 듯이 생각할 때에, 내 가슴은 무한한 감격에 벅차오를 뿐입니다.

 백두대간이 공식적으로 운운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하는 생각해보지 않았는지요?

자세한지는 잘 모르겠고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신라 때 도선국사는 우리나라의 지세를 음양오행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하나로 이어졌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고려시대의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하는데 북쪽 백두산에서부터 일어나서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히 이어져 대방군(남원)에 와서는 수천리를 서리고 얽혀있다.」라고 기록하였으니 백두산에서 지리산이 하나로 이어졌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형성된 백두대간의 개념은 조선 때 와서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우리나라의 지세는 백두산이 만리를 뻗어 기복을 이루어 마천령, 마운령, 철령,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이 되고, 경상도의 경계에 이르러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이 되었고 속리산이 이어져 지리산이 되었으나 바다가 곁에 있어 넘지를 못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와 같이 실려 있습니다.

본문에서 노산선생이 백두대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지만 이설을 다룬 것이 별도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사료를 들척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제가 아주 싫어하는 단어가 5번이나 등장합니다.

"나는 여기 마음의 속으로 반도(半島)의 지리와 아울러 이 설악의 산맥을 생각합니다."로 시작한 글에는 반도(半島)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옵니다.

반도(半島)

반도는 반은 섬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가 3면이 바다로 둘러쳐 있기는 하지만 육지가 분명한데 반은 섬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적절한데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반도(半島)라는 명칭은 일본넘들이 섬나라이므로 육지인 우리나라의 격을 그들과 같은 위치로 내리기 위해 만들고 쓴 것이라 누군가에게서 들은 바 있는데 사실여부를 떠나 저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으로 반도(半島)라는 단어는 쓰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묘고봉두(妙高蜂頭)에 서서

소목의 묘두봉두리는 것은 상청봉, 그리니까 현제 대청봉 정상을 의미합니다.

상청봉, 지금의 대청봉에서 글은 계속 이어집니다.

전편에는 상청봉에 오르는 과정과 상청봉에 올라 복받치는 슬픔을 피력하고 백두대간에 대한 글이 주를 이룬 반면 이번 편에는 설악산의 최고봉인 청봉에 대한 흥미로운 글로 시작됩니다.

본문을 봅니다.

이 청봉(靑峰)의 명칭에 관하여서는 한 개의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설화산인 무진자’의 오세암사적기에 의하면, 이 봉우리 이름을 청봉이라 하지 않고, ‘묘고봉명왈봉황대(妙高峰名曰鳳凰臺---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은 봉황대)’라 하였으며, 기타 다른 기록에는 봉정(鳳頂)이라고만 썼습니다.
다만 성해응의 동국명산기만에서 지금 부르는 청봉이란 이름이 처음 나오는데 성해응의 기록에서도 ‘봉정즉악지극처(鳳頂卽岳之極處---봉정은 산이 끝한 곳)’라는 것이 있음을 보면, 봉정(鳳頂)이라고도 하고 청봉(靑峰)이라고도 하는 듯이 보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세암사적기를 읽은 적이 없으므로 설악산의 최고봉은 봉황대라 적었다는 사실과 지금의 봉명인 청봉에 대해서도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 처음 등장한다는 것을 설악행각을 통해 알 수 있었으니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노산선생은 또 다른 의견을 냅니다.

설악의 최고봉은 봉정도, 청봉도 아닌 볼메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주장입니다.

봉(鳳)의 우리말이 부리, 즉 불 ->우리 겨레의 고신앙이었던 광명을 표상한 말의 이 불->불의 근사음 ‘푸르->푸르를 한자로 표기하여->청(靑)자로 된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악의 최고봉을 ‘봉황대’, ‘봉정’, ‘청봉’ 등 무어라고 하든지, 그것이 우리 고신앙의 광명이란 뜻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설악산 정상의 이름에 대해 논하였는데 이후 외람된 글이 이어집니다.

누군가 설악산 정상에 직은 제당을 만들고 치성을 드리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여기 이 최고 정상에 어느 후손의 치성으로인지 제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위비 가운데는 설악산봉국사천왕불신지위라 썼고, 좌측에는 ‘팔도산신중도신령’ 우측에는 설악산신령이라 썼다고 합니다.

의비를 보고 그곳에 절할 의무나 필요를 느끼지는 않지만 우리 계례의 나갈 길과 걱정을 하는 고뇌를 새기니 당시 사정을 감안하면 애국사상을 조금 드러내는 듯합니다.

<위 사진은 오래전 청백산악회에서 모셔온 사진입니다.>

그리고 노산선생은 상청봉에서 구름이 춤추는 설악의 만학천봉을 내려다보며 멀리 일망무제한 동해를 보며 자신과 인간, 그리고 우리 계례에 대해 스스로 깨달아 봅니다.

 

가야동(伽倻洞)의 신보유(信步遊)

노산선생은 상청봉을 내려서기 전 전장을 나가는 용사처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조선인으로서의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항을 글로서 나타내는 듯합니다.

당시 여건으로 보아 3.1만세운동 같은 일은 엄두도 낼 수 없겠지만 일본넘들도 보는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글에 당찬 본색을 드러냅니다.

본문을 봅니다.

유혹의 매연에 그을어 희미해질 뻔한 내 정결의 거울을 이 청봉 위에 올라 다시금 번쩍하게 밝혔습니다.
조선사람으로 하여 차라고 나선 무장이 튼튼한지 아닌지를 이 거울에 비춰 더욱 분명히 살펴봅니다.
낙망의 광풍에 가물거려 꺼질 뻔한 내 정열의 횃불을 이 청봉 위에 올라 다시금 힘차게 태웠습니다.
조선사람으로 하여 달려 나가는 길에 무슨 험난이 있나 없나를 이 횃불로 비춰, 이제는 주저 없이 갈 것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만행 ― 저 세상속에 들어있어 오늘은 무슨 일로 서로 다투나! 시기하나! 훼욕하나! 음모하나! 유인에 전도되는지, 현실의 고통은 얼마나 한지, 영혼의 번뇌는 어떠한지 하고 생각나는 내 형제와 내 자매들 ― 그러나 가슴 미어지는 쓰린 생각을 이 새로운 힘과 용기로 다 물리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작심한 듯한 마음이 현실을 생각하며, 빼어 들었던 칼을 다시 칼집에 꽂는 것 같은 의미없는 행위가 비치는 것 같습니다. 저의 해석이 맞는다면 당시 일제강점기 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으로 마음은 있지만 실행하기 힘든 여건임을 감안했을 겁니다.

그리고서 이 청봉을 내려서며 일행들끼리는 아무런 대화 없이 침묵으로 일관 한 채, 혼자 웃음을 짓습니다.

노산선생일행은 올라갈 때 힘들었던 길이었지만 청봉에서 봉정암까지 단숨에 내려섭니다.

오전에 떠났던 봉정암에 다시 내려서 시원한 샘물을 얻어 마시고, 이번엔 사리탑이 서있는 석가봉 밑 우측 길을 따라 동쪽계곡으로 내려섭니다.

<위 사진은 KBS에서 항공촬영한 봉정암의 풍경으로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얼마쯤 내려서니 장경암(藏經岩)을 만난다고 합니다.

저는 봉정암에서 오세암으로 딱 한번 지난 적이 있는데 장경암을 알지 못합니다.

본문에 나올 정도의 유명한 바위라면 알아야 하는 것이 맞는데 장경암 안내도도 없고 이곳을 지난 많은 사람들의 산행기에서도 장경암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장경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위는 이곳과 금강산에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설악산에 있는 장경암이 금강산의 장경암보다 10배는 더 크다고 합니다.

장경암(藏經岩)?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한문을 보니 감츨장(藏), 지날경(經), 바위암(岩)인데 위에서 금강산에도 있다하며 금강산보다 설악 장경암이 10배가 크다고 하니 책바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 바로 책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저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이름으로 바위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우리말로 책바위가 친근감이 더 가니 저는 개인적으로 책바위라고 적기로 하고 기회가 되면 꼭 찾아보고 설악의 책바위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바위가 바로 장경암입니다.>

추신으로 적습니다.

장경암에 대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납니다.

제가 설악을 다니느라 권혁진님이 펴낸 설악인문기행을 구입하고 수시로 읽었는데 설악인문기행1권에 보면 장경암의 사진이 있는데 그런 것도 모른 채 다른 곳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권혁진님의 설악인문기행책에 실린 사진을 올립니다.

장경암에 대한 설명을 질서정연하게 겹쳐진 돌이 자못 대장경이 저장된 것 과 비슷하나다. 라는 것입니다.

이원복은 설악상환일기에서 장경암과 대장경봉을 매우 높고 크다, 아래서부터 꼭대기까지 모두 돌조각이 책꽂이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라고 설명했으며 봉정암에서 가야동계곡으로 내려서며 장경골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래는 가파른 산등성이인데 무너져 내린 모래와 바위가 보인다. 한 번 발을 잘못 헛디디면 만 길 깊숙한 계곡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니 가슴이 두근거려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이에 수레에서 내려와 줄로 허리와 배를 묶고 한 사람이 뒤를 따르면서 줄을 당기게 하였다. 또 한 사람은 앞에 있게 해서 어깨와 겨드랑이를 부여잡고서야 비로써 하산을 감행하였다.

지금 잘 다듬은 돌계단 길과 비교하면 당시에 너무나 차이가 많은데 당시 설악을 찾는 사대부들은 목숨을 건 산행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경바윗골에서 장경암 이외에도 구미 당기는 글이 나옵니다.

장경바윗골을 가운데 놓고 장경암 건너편에 6~7봉의 깎아지른 큰 암봉들이 있는데, 이것을 불러 노선봉(老禪峰), 상좌봉(上座峰), 향탑봉(香榻峰) 등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 부분도 처음에는 어디를 말함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장경바윗골로 내려서며 장경암이라는 책바위는 계곡 좌측에 있다는 느낌이며 노선봉, 상좌봉, 향탑봉은 용아장성 능선의 암봉 중 하나일 것이라는 감이 잡힙니다.

노선봉(老禪峰), 상좌봉(上座峰), 향탑봉(香榻峰)? 그래도 미심쩍에 인터넷을 몇 시간을 두드려 보지만 해답이 없습니다.

누군가 아는 사람은 없을까?

봉정암 노승에게 물어본다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지난번 석가봉, 나한봉, 지장봉, 아난봉, 가섭봉, 할미봉을 알아보려고 봉점암으로 전화를 했었는데 직접와서 스님께 물어보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 이런 문제, 설악산관리공단에서 알아가지고 안내문을 세우던가, 홈피에 올려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본문을 봅니다.

‘장경바윗골’을 1시간쯤 걸려 내려가면, 우편으로 와룡여울이라 부르는 반석 길과 좌편으로 가야동(伽倻洞)으로 들어가는 분류가 서로 합수되는 곳을 만납니다.
우리는 와룡여울 길을 두고 좌측 길로 내려가다가 가야동으로 들어섭니다.
이 설악을 왜 성난 계곡물이 바위와 부딪치는 곳, 급한 여울이 있는 곳, 위태로운 바위길 만으로 말합니까. 여기 이곳은 ‘잔잔한 벽계수(碧溪水)’를 이루어 반석 위에 깔린 물이 흐르는지 머무는지를 분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수록산무압(水綠山無壓)---물이 푸르러 산이 좋아하고
산청수자친(山靑水自親)---산이 푸르러 물이 좋아라네
호연산수리(浩然山水裡)---시원스러운 산과 물 사이를
래왕일한인(來往一閑人)---한가한 나그네 홀로 오고 가누나 
이러한 고구(한순계의 산수가)를 외우면서, 나도 또한 가는지 오는지 신보유상하는 맛은 참으로 좋습니다.

 조금 답답합니다.

장경바윗골을 알 수가 없어서입니다.

특별한 골짜기가 아닌 봉점암에서 오세암을 잇는 현재의 등로와 같은 길을 지났는지, 그럴 경우 지금 지나는 길이 장경바윗골인지, 아니면 다른 계곡길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서입니다.

분명 봉점암과 오세암을 잇는 산길이 예전에도 있었을 것으로 예견되는데 예전부터 있었을 길이 지금 사람들이 지나는 이른바 오세봉정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답답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설악명승학교에서 만든 개념도가 생각나서 개념도에서 컨링하기로 합니다.

개념도를 보니 봉정암에서 오세봉정길로 들어서서 얼마 내려서지 않아 오세봉정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계곡으로 내려선 것으로 표시하고 있으니 내려선 계곡이 장경바윗골인 듯합니다.

오세봉정길이 아니고 지금은 없어졌을 계곡으로 빠졌으므로 장경암을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봉정암을 떠나 1시간을 내려서 합수곡에 닿게 되었으니 우편으로 와룡여울, 좌편으로 가야동이라 적고 있지만 좌측이나 우측이나 모두 가야동계곡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세봉정길 아치형 목교가 있는 곳 아래쪽으로 길게 펼쳐지는 대암반 반석길을 와룡여울이라고 기록하며 잔잔한 벽계수라고 표현하고 이곳을 본 소감을 '반석 위에 깔린 물이 흐르는지 머무는지를 분간하기조차 어렵다.'라고 합니다.

저는 지난 해 설악동에서 시작해 설악골로 들어서 범봉 아래를 지나 공룡능선을 넘어 공가골로 내려서 가야동계곡을 지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곳 대암반이 펼쳐지는 물이 흐르는 반석길을 지나며 큰 환희를 느낀 적이 있는데 마치 꿈속에서 계곡을 지나는 듯했는데 노산선생은 몇 줄의 글과 한순계의 산수가로 간단히 마무리 한 것이 아쉽습니다.

노산선생이 정말로 반석계곡을 지나며 산수가를 부르며 가야동을 지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노산선생이 컴퓨터도 아니고 차후 산행기록을 하며 산수가를 삽입했을 것입니다.

<가야동계곡 와룡연의 청아한 풍경입니다.>

물이 흐르는 대 암반 반석계곡을 지나 주변 산세를 구경하며 10분여를 내려서면 높이는 높지 않으나 담이 아주 크고 깊은 곳이 나오는데 이곳을 와룡연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다시 10여분을 내려서면 잘생긴 무명폭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내려서 천왕문이 나오는데 천왕문은 대 암반 반석계곡에서 2km 거리로 약1시간이 걸립니다.

노산선생 기록에는 암반계곡에서 중간의 풍경을 생략하고 바로 천왕문이 나옵니다.

본문을 봅니다.

더욱이 가야동 중의 대표적 명물인 천왕문(天王門)이란 석벽(石壁) 안과, 그 속에 숨어 떨어지는 천왕폭(天王瀑)의 절경은 그대로 천계(天界)의 일구(一區)를 소요(逍遙)함 같은 생각이 나게 합니다.
물론 천왕문이니 천왕폭이니 하는 이름은 우리 고교(古敎)로부터 남아 끼친 일(一) 영장(靈場)의 표시(表示)이겠거니와, 과연 가야동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옳거든! 옳거든’하는 감탄을 연발하도록, 이렇게 맞을 수가 있겠습니까. 참 옳거든요! 

가야동계곡의 예찬은 예상외로 짧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야동계곡에 합당한 시한 수를 읊습니다.

가야동(伽倻洞) 가야고를 타는 이 거기 뉘신고

청아(淸雅)한 저 소리를 듣는 이 거기 뉘신고

타는 이 천녀(天女)이온데 내가 있어 듣노라.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를 고로고로 짚으올쩨

소리도 갖을러니 손 더 아니 고우신가

취(醉)하여 듣거니 해지는 줄 몰라라.

다시 본문에 나오는 가야동계곡의 천왕문이야기입니다.

<와룡연에서 10분을 내려서면 잘생긴 무명2단폭포가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노산선생 일행이 가야동계곡을 따라 내려서다가 천왕문을 지났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가야동계곡을 따라 내려섰다면 주변 산세와 암봉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고 와룡담과 무명폭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천왕문으로 다가서면 협곡을 지나는 이야기, 천왕문 아래서 천왕문과 주변 산세를 논하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입니다.

<천왕문 협곡을 지나면 거대한 천왕문이 열립니다.>

또 다른 궁금한 것은 천왕문에서 오세암으로 가는 길입니다.

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 찾기가 힘들고 위험한 구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도 천왕문에서 오세암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간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천왕문에 대한 이야기는? 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다음날 오세암을 떠나기 전 망경대에 올라 멀리 있는 지금의 용아장성능선과 천왕문을 내려다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글로 묘사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오세암(五歲庵)의 암호변(庵號辯)

노산선생일행이 오세암에 도착한 시간은 10월 황혼이 물든 때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아마도 5시경쯤 되었을 것입니다.

소목의 「오세암의 암호변」이라는 뜻은 오세암 암자의 ‘이름에 대하여’라는 뜻으로 이 오세암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암자의 옛 이름은 관음암(觀音菴)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른 조선 인조 때 설정스님이 중건하고 현재의 이름인 오세암이라 암자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세암의 풍경입니다.>

오세암(五歲庵)

설악산의 신흥사는 모를지언정 백담사, 봉정암, 오세암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세암의 유래를 컴퓨터에서 알아보았다던가, 오세암에 홍보용으로 있는 안내문을 보았다면 재미있는 전설, 다섯 살 동자승의 이야기와 이로 인해 오세암이라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노산선생께서 오세암의 전설을 「오세암 사적기」를 인용해 적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오세암의 전설은 이러합니다.

『고려 때에 설정(雪頂)이란 명승(名僧)이 있었는데, 이 암자를 중수하고, 불공을 드린 지 이미 오래였더라. 그에게는 다섯 살 먹는 조카아이가 있어,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여기 와 함께 살았는데. 겨울인 10월 달이었다.
스님은 영동에 일이 있어, 조카에게 부탁하기를, 너는 꼭 관세음보살만 외우면서 밥을 먹고 오늘밤을 자라. 그러면 내가 내일이면 돌아오마 하고, 재를 넘어 갔었더라.
 이 밤에 눈이 퍼내려 산과 같이 쌓인지라, 길이 막혀 스님은 돌아오지 못하였더라.
그해 겨울이 지나 봄이 된 뒤에, 스님이 돌아오매, 죽은 줄만 알았던 조카아이가 방에서 관세음을 부르고 있다.
스님은 깜짝 놀라며 그동안 어찌된 지를 물으니, 조카아이가 말하기를 엄마가 늘 와서 젖도 먹이고 밥도 먹이더라는 것이었다. 얼마 뒤에 과연 한 젊은 백의부인이 관음봉으로서 내려와, 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이어 보리기를 주고서는, 파랑새로 변하여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래 오세동자가 견성득도한 곳이라는 뜻으로 오세암이라 했다.』

최초 관음암에서 나중에 오세암으로 암자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 사적기에 나오는 위 전설에서 기인했다는 것인데 노산선생은 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오세암 범종루의 모습으로 범종루 안에는 불전사물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노산선생은 매월당 김시습 별호를 인용한 사례로 보고 있는데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오세 문제에 있어서, 나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별호를 고쳐 부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찍 단종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시자, 그 충절을 참기 어려워, 거지꼴의 미친 시인이 되어, 남북강산을 두루 돌아다니던 매월당이 그의 문집 본전에도 명기한바와 같이, 양양, 강릉 등지에서 놀기를 좋아하였고, 설악, 한계, 청평 등 여러 산에 오래 머물었던 것인데, 특히 이 관음암에 많이 있었던 것이므로 그의 ‘오세 신동’이라는 별호를 암자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일 것입니다.

부연하여 전설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설명하는데 첫째는 설정조사가 5세 조카아이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눈이 많이 왔다 하여 암자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면 불교 교의인 자비에 크게 어긋난다는 점을 들었으며 둘째는 매월당이 이 절에 오기 전에 암자의 이름이 바뀌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암자의 이름이 오세암으로 바뀐 것은 문헌의 기록이 없는 만큼, 어느 것이다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시기적으로 매월당이 죽은 뒤 150년이나 지났다는 점, 그러니까 매월당이 이 암자에 왔다가 간 이후이며 매월당을 5세 신동이라고 별호를 가지고 있었던 점을 들어 노산선생은 매월당에서 오세암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고려 때 설정이 암자를 중수하였다라고 설화산인 무진자가 1920년에 기록한 오세암 사적기도 고의거나 아니면 착오로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황경원이 쓴 「인제현 오세선원기」에는 '---매우 깊숙한 곳에 앞이 탁 트여 훤하니 옛날에 매월당 유적이었다. 영조25년 설정이 설악산에 올라 오세선원을 찾으니 폐허된지 100년이 되자 그 터 자리에 다시 세웠다. 3년10개월이 지나 암자가 완성되자 선생의 초상화를 구해 나에게 기록을 청하였다.' 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1753년 이원복이 쓴 「설악왕황일기」에는 '호남의 스님 설정이 재목을 모아다 암자를 짓는데 토목공사를 겨우 끝내놓고 한창 서까래를 설치하고 색깔을 칠하고 있었다. 암자의 이름은 오세동자에서 취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오세암 측에서도 고려 때 설정이라는 주장은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며 오세암은 원래 설정이 암자를 세운 것이 먼저가 아니고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한 것이 먼저라는 것임을 확인 할 수 있는 만큼 오세암의 암자이름은 전설속의 5살 동자가 아닌 오세동자라는 별호를 가진 매월당 김시습에서 비롯됨이 맞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매월당(梅月堂) 유상(遺像) 앞에서

오세암(五歲庵)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과 오세암이 연관된 인물은 누가 있을까?

앞서 여러 차례 나온 매월당 김시습은 물론이고 또 누가 있을까?

만해 한용운선생이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 발기 33인 중 한명이기도 한데 1917년 만해 한용운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3.1운동 이후인 1925년 이곳에 머물며 「십현담주해」를 탈고했다고 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님의 침묵」도 같은 해 이곳에서 탈고했다고 합니다.

노산 선생이 오세암에 도착하자 오세암 주지인 인공스님이 맞아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오세암 사적기」에 의하면 1888년 백하선사가 절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여 2층으로된 전각과 응진전을 6칸으로 준공하였는데 미흡함을 완성시킨 분이 인공선사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인공이 노산선생이 오세암을 찾을 당시 오세암의 주지로 있으면서 노산선생을 맞아준 것입니다.

하루 종일 메고 다녔던 바랑을 내려놓고 인공스님의 안내로 원통전(圓通殿) 법당 안과 2층 대장전(大藏殿)으로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오세암의 관음보전입니다.>

2층 대장전에는 보물과 같이 중요한 장경이 많이 보관되었는데 조선 고종원년에 남호스님이 보개산에서 대장경을 가지고 나와 이듬해 8월 오세암에 가지고 와 이제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매월당 초상 앞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다고 합니다.

본문을 봅니다.

나는 이 절에 보관해둔 ‘삼연고경(三淵古磬)’이라 새긴 옥경을 배관하고, 또한 매월당 김시습의 유상 이본 앞에 마음의 고개를 몇 번이나 조아립니다.
금원여사의 기행문에 ‘설악지명(雪岳之名), 개이이공익저(盖以二公益著)---설악산이란 이름은 무릇 두분 때문에 더욱 나타났다.’라 한 그 두분 즉 매월당(梅月堂)과 삼연(三淵)은 실로 이 산을 이름나게 한이라 아니할 수 없는 만큼, 이 산과 같이 영원히 살아있을 사람들입니다.
-----중략-----
매월당의 그 애달픈 일생을 생각하며, 그의 끼친 유상을 우러러 뵈올 때에, 그가 생전에 자기 화상에 자찬한 말인
이형지막(爾形之藐)---네 꼴이 지극히 못나고
이언대사(爾言大伺)---네 말이 크게 어리석으니
의치지구학지중(宜置之溝壑之中)---마땅히 너를 시궁창 속에 두어야겠다. 란 것이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외어집니다.
이제 이 화상이 있으매, 그를 친히 뵈온 듯 합니다 마는, 아니, 이 화상은 비록 없었더라도, 여기 와서는 그를 생각함이 분명 그를 뵈옴이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귀하고 귀한 보물을 보았습니다.

삼연고경이라고 새긴 옥경과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이 그것입니다.

김시습의 초상은 학교 다닐 때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진품 초상은 정말 귀한 것이며 삼연 김창흡이 자신의 호를 새긴 옥경을 오세암에 전한 것 같은데 실제로 이 2가지는 국가 보물로 지정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 걱정, 의구심이 있습니다.

<불전사물 중 범종,

지옥의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동시에 불법의 진리를 깨우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불전사물 중 법고,

법고의 저음(低音)을  듣고 땅위에 사는 네발  달린 짐승들은 마음의 평온을 얻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 때 오세암이 소실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귀한 보물, 삼연고경이나 매월당의 초상이외의 사찰에서 지니고 있는 대장경이외의 값진 물건들이 불에 타지 않고 잘 보관되어 있는지? 그러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바랍니다. 노산선생은 매월당의 초상을 보고 실제로 매월당을 직접 뵌 듯한 감정을 토로합니다.

이층에서 내려온 노산선생은 누대에 기대 앉아 적적하고 공허한 뜰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부릅니다. 

산사(山寺)에 깊은 황혼(黃昏) 물소리 더욱 차다

뜰 밖을 내다보매 사람은 하나 없고

낙엽(落葉)만 바람에 불려 헤락뫼락 하는구나. 

어느덧 밤이 깊었습니다.

일행은 다들 곤한 잠 속에 들었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창문을 열어 보니 이 깊은 산, 깊은 절, 깊은 밤에 궂은비가 내립니다.

늦가을 깊은 밤을 이 산에 비가 오네

괴로운 내 가슴에도 찬 비 또한 오는구나.

끊임 없는 빗소리에 생각도 끝없어라 

노선(老禪)도 눈을 감고서 말이 없이 앉았구나.

불켜인 장명등(長明燈)이 빗속에 밝았나니

어두운 내 마음에도 저 등불이 그리워라.  

<불전사물 중 운판.

허공을 헤매는고독한 영혼을 천도하고 허공을 나는 조류계의 중생ㅇㄹ 제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불전사물 중 목어,

공명(共鳴)의 울림이 수중(水中) 중생들은 한없는 해탈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기숙사의 사감과도 같이 인공스님이 방으로 들어오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정을 넘기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