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에 대한 범솥말의 회고.
설악행각 8일, 산행6일차, 오세암~신흥사
노산선생은 오세암 주지 인공스님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듭니다.
추적거리며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니 그치고 천산만악의 구름은 바삐 날고 설악 최고봉인 봉황대 곁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10월7일, 제8일차 6일차 산행을 시작합니다.
마등령(馬登嶺)을 넘으며
오세암을 떠나는 노산선생 일행에게 오세암주지인 인공스님은 꿀물을 내오며, 떠나기 전에 마시고 가라며 호의를 베푸니 일행은 감사히 마시고 채득백화성밀후 부지신고수위청(採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甛)’이란 말을 생각하며 감사를 전한다 했으니 이는 온갖 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모았더니 가만 앉아 입 다신 이 누군지 모르겠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서 노산선생은 잠시 시간을 내어 인공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만경대 위로 오릅니다.
여기서 이곳을 선답했던 이의숙의 만경대기를 봅니다.
만경대다.
설악의 수많은 봉우리들 모두가 드러내고 가파르며 높고 험악함을 다투어 보여준다.
청봉 아래와 봉정의 위부터 산봉우리들은 주름살처럼 올록볼록 한 것이 늘어서 뻗쳤는데 10리에 걸쳐 끊어지지않은 것이 성 위의 담장 같다.
어떤 것은 사람이 단정하게 두손을 맞잡은 듯, 어떤 것은 예의를 갖춘 듯하다.
짐승이 뛰어 오르고, 새가 날어 오르며 끝이 우뚝 선 듯 하다
귀신 같기도 하고, 또는 신령 같기도 하며 변화가 끝이 없다.
이의숙의 만경대기에서는 마치 주름살 같이 보이는 능선미와 봉정암 뒤로 보이는 수없이 많은 암봉들을 사람의형상, 동물의 형상, 하늘을 나는 새의 형상, 귀신과 같이 변회무쌍함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제가 만경대에 올랐던 날은 날씨도 흐리고 박무로인해 봉정암 뒤 암봉들을 뚜렷하게 볼 수 없음이 아쉬웠습니다.
<만경대 전망 석대입니다.>
만경대!
만경대라고도 부르고, 망경대라고도 부르는데 만경대는 만가지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전망대라는 뜻이고, 망경대는 천하의 절경을 보며 속세의 모든 것을 잊게하는 전망대라는 뜻일 것입니다.
만경대는 설악산에 3곳이 있는데 외설악 천불동계곡 양폭산장 맞은편에 있고, 내설악 오세암 앞에 있고, 남설악 주전골 동쪽에 있습니다.
외설악 오세암 앞에 있는 만경대는 오세암을 기준으로 노산선생이 가야하는 마등령 반대편 방향으로 잠시 내려서면 고갯마루에 닿게 되는데 고갯마루에서 좌측으로 10~20분 경사진 길을 오르면 만경대에 오를 수 있는데 노산선생은 오세암까지 왔으므로 만경대를 보지 않고 지날 수 없으므로 인공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만경대를 올랐습니다.
본문을 봅니다.
오세암에 오는 이로는 반드시 이 만경대 상(上)에 오를 것이라 합니다. 올라서 오세암을 내려다보매, 진실로 오세암의 값을 알겠습니다. 전인이 다 이르되, 암자 터로는 조선 제일이라고. 과연 그 옳은 말임을 만경대 상에 올라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시 사방을 둘러보매, 내설악 연산이 행여 점고에 빠질세라 하고, 서로 다투어 보이는 것은 참으로 절승한 경관입니다. 밑으로 길게 흐른 가야동천(伽倻洞天)은 아직 아침 햇빛을 바로 받지 못하여, 어두운 그늘 속에 그대로 누운 것이, 마치 유장을 채 아니 걷고 눈만 뜨고서 그대로 자리에 누워있는 미인과도 같습니다. 오늘까지 다니면서 보는 경치는 너무 가까이서 혹은 너무 멀리서 본 것이언만, 이 만경대에 올라서는, 꼭 적당한 거리에다 두고 보는 최고로 좋은 조망 지점인줄 알겠습니다. 앞으로 갈 길만 없다 하면, 나는 여기서 종일 앉아 생각과 노래에 잠기고 싶습니다마는, 길이 바쁘매, 햇살이 많이 퍼짐을 두려워할 밖에 없음이 실로 이 자연을 대하여 죄송하고 불안함이라 하겠습니다. |
노산 선생께서 만경대에 올라 가야동계곡과 용아장성의 연봉을 보고 느낌을 예찬한 글입니다.
이 글의 요점은 첫째로 오세암자의 터에 대한 예찬입니다.
오세암이 암자 터로는 조선 제일이라고 하는데 본 글에 나오는 오세암 전경 사진이 제가 만경대에서 찍은 것으로 당시에는 오세암에서 많은 건축물을 세우고 있는 중이라 어수선 하지만 오세암 관음전 뒤로 우뚝 솟은 관음봉과 암자 좌우로 길게 늘어선 청룡과 백호가 뚜렷하니 좋은 터이기는 하지만 정녕 조선 제일의 암자 터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노산선생께서 제선 제일의 암자터라고 예찬하는 이곳, 누가 터를 잡았을까?
지난 설악행각7일, 산행 5일차에서 오세암에 대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초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은 전하기를 신라 때 자장법사가 설악산에 암자를 짓고 관음암이라고 했다고 전하기는 하나 오세암 사적에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기록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설정선사보다 100년을 앞서 이곳에 정착한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입니다.
그런 연유로 설정선사는 이곳에 오세암을 중건하며 암자이름을 오세암이라하고 매월당의 초상화를 구해 보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내설악의 자연 풍경입니다.
오세암 만경대에 올라서면 사방이 조망되는데 황철봉이나 마등령 방향은 가깝게 치받고 있어 절경을 제대로 볼 수 없지만 멀게 보이는 대청봉과 가까이 보이는 용아장성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노산선생이 표현한 「내설악 연산이 행여 점고에 빠질세라 하고, 서로 다투어 보이는 것은 참으로 절승한 경관」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용아장성을 보며 감탄한 것 같은데 당시만 해도 용아장성이라는 용어는 없었으며 용아장성이라는 용어는 설악행각 이후 일본인이 쓴 글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물론 만경대에서는 서북릉을 둘러볼 수 있는데 귀때기청봉이나 안산이 모두 드러났으니 참으로 절경이었을 것입니다.
세 째로 가야동에 대한 예찬입니다.
만경대에서는 가야동계곡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겨울철이라면 좀 더 넓게 볼 수 있겠지만 만경대에서 볼 수 있는 가야동계곡은 천왕문이 있는 주변에 국한되어 있으니 가야동계곡이라는 표현보다는 천왕문 일대라고 축소시키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가야동 천왕문일대에 대한 예찬은 「마치 유장을 채 아니 걷고 눈만 뜨고서 그대로 자리에 누워있는 미인과도 같다.」라고 했으니 발이 처진 침상의 실루엣으로 보이는 여인과 같이 미묘한 감정으로 다가서는 가야동계곡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잠시 더 있으면 아침햇살이 여인의 침상에 드리운 발을 걷을 것 같아 실루엣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기위해 자연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갖는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의구심을 가졌던 부분을 다시 짚어봅니다.
가야동계곡을 따라 천왕문으로 지났다면 만경대에서 어제의 천왕문에 대해서 단 한 줄이라도 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풍경에 대해서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았다는 게 전부였으니 저는 노산선생이 가야동계곡을 따라 내려서 천왕문을 지났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봅니다.
다시 만경대를 내려 노산선생은 인공스님과 작별을 하고 지금의 오세봉정길 3거리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며 "이것은 마등령(馬登嶺)을 넘어가는 길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경사진 돌길과 잡초가 우거진 길을 따라 1시간쯤 걸려 마등령 고개위에 올랐다고 기록합니다.
저도 마등령에서 오세암길을 2차례 지난 적이 있는데 특별히 어필할 만한 지형지물은 없습니다. 노산선생께서도 1시간 정도 올랐다고 기록하지만 오르면서 주변의 지형지물에 대해서는 기록한바가 없습니다.
마등령 고갯마루에 올라 공룡능선과 건너편 권금성, 칠성봉 일대 산봉에 구름이 걸린 풍경과
떨어지는 낙엽(落葉)! 절망의 허희(噓唏)! 아무리 비회(悲懷)의 그물을 벗어나려하여도, 벗어나려할수록 더욱 얽혀드는 내 마음의 고뇌(苦惱)!가 쌓이자 시 한수를 읊습니다.
비 지난 아침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이
어찌다 하나 둘씩 그리다는 비오듯이
날려서 어지러운 마음 더 괴롭게 하는구나.
낙엽에 싸인 돌길 막대로 헤치면서
가다가 문득 돌려 지나온 길 살펴보나
어딘지 낙엽에 도로 묻혀 알 길이 없는 것을.
마등령의 해발1327m!
이 산에서는 청봉(靑峯) 다음으로 높은 봉이라고 기록했지만 청봉-신선봉-노인봉-1275봉-큰새봉-나한봉으로 이어지는 대간 능선으로 이곳까지는 맞는 말이지만 이곳을 지나면 마등령보다 더 높은 황철봉이 있습니다.
고산을 가노라면 능선에서 아주 잠잠하던 기류가 절벽가까이로 접어들면 갈풍에 몸을 날려버리 듯 불어대고는 하는데 노산선생께서도 마등령에서 이러한 경험을 한 것 인지 몸을 날려버릴 듯한 강풍이 불자 바위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자신의 행동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펼쳐진 우뚝 솟은 침봉들을 보고 시 한 수를 읊습니다.
태초(太初)라 조화(造化) 사공 설악(雪岳) 큰 배 만드시고
구만리(九萬里) 하늘 길을 멀리 이리 오실 적에
저 ‘짐ㅅ대’ 네 공(功)이 크다 여기 우뚝 세웠나니.
금강문(金剛門)은 열려있다
노산 선생께서 마등령에서 내설악과 외설악에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마등령(馬登嶺)은 설악의 분수령으로 용아장성 능선 동쪽으로는 외설악, 서쪽으로는 내설악으로 구분하는데 성창산 이라는 사람은 둘이 아닌 상, 중, 하 3등분한다고 하며 자세한 내용을 실지 않았지만 대개는 문헌이나 요즘 부르기를 내외로 나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노산선생은 어제까지는 내설악을 누볐다면 오늘은 외설악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라고 적습니다.선답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10이면 7~8은 내설악만 보고 설악을 다 보았다고 하겠지만 내설악과 외설악을 다 보지 못했다면 설악을 운운할 자격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본문을 봅니다.
어제까지의 ‘아늑’은 오늘부터의 ‘기승스러움’으로 변하여, 여태껏 무희(舞姬)가녀(歌女)의 분 향기 속에 취하였던 것이, 대번에 호협장부의 억센 방망이에 훨쩍 깨어난 셈입니다. 더욱이 지금 우리가 내려가는 이 마등령 뒷골짜기로 말하면, 승려 사이에서는 소위 천불동(千佛洞)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마는, 실상 주민들은 ‘설악골’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설악산 중 진설악’이라 할 곳이 여긴 줄을 알겠습니다. 조금 과장으로 말하면 거의 수직이라고 할 만큼 경사진 이십리 긴 계곡이 기암촉석의 천 명의 병사와 만 마리의 말이 뿔뿔이, 그대로 빽빽이, 또 그대로 번뜻이, 다시 그대로 환하게, 제각기 한 자리 한 모퉁이씩을 차지하고서, ‘혼자의 자랑’을 여지없이 발휘한 그대로 또한 모여 ‘모두의 자랑’을 조화롭게 성취하였습니다. 마등령에서 굽어 바라보는 이 설악골 즉 천불동은 금강산의 만물초와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 하면, 금강산의 그것은 답사할 수 있는 것이고, 여기 설악산은 오를 길이 없는 것이겠습니다. |
천불동 예찬이 이어집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어제까지 답사한 내설악은 무희의 분향기에 취했다가 오늘 마등령에서 외설악을 보는 느낌은 분향기에서 화들짝 깨어난 기분으로 외설악의 풍경을 「긴 계곡의 기암촉석은 천 명의 병사와 만 마리의 말이 뿔뿔이, 그대로 빽빽이, 또 그대로 번뜻이, 다시 그대로 환하게, 제각기 한 자리 한 모퉁이씩을 차지하고서, ‘혼자의 자랑’을 여지없이 발휘한 그대로 또한 모여 ‘모두의 자랑’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 예찬합니다.
이어지는 글에는 설악산을 금강산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금강산은 직접 오를 수 있지만 설악산은 오를 수 없는 신들의 정원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설악의 우수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이외에도 설악의 예찬이 계속되는데 설악의 기기묘묘한 암봉들을 설명하려면 문수보살과 이야기했다는 유마힐이 수다쟁이가 되어야 하며 세상에서 유식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설악에 대해서는 무식군이 된다고 기록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설악산 설악동이 그래 정말 어떻더냐?
예 그게 참 그렇지요 그게 저 그렇더군요, 자세힌 모르겠구요, 그저 모두 참 그렇지요..............
노산선생은 위 본문에서의 예찬으로 부족했는지 암봉들의 형상에 대해 다시 예찬이 이어집니다.
본문을 봅니다.
이 기기묘묘한 암봉은 사람들의 자질구레한 묘사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범자들이 아닙니다. 뾰족하다, 뭉툭하다, 끌밋하다, 반지르르하다, 우뚝하다, 납작하다, 둥글다, 움펑하다, 불룩하다, 걸쭉하다, 꼬불하다 …… 등 우리가 가진 이따위의 모든 어휘를 다 벌려놓아 무슨 문장을 짓는다 하여도, 결코 이것 자체는 만 가지 중 한 가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자 같고, 다시 보면 맹호 같고, 그리다간 노승 같고, 또 더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이 천 만 개가 다 그러하니, 진실로 여기서 이 변화무상한자, 아니, 이 변화무상한 관경을 무슨 말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 허망하고 부질없다.)이란 금강경의 대표적 명구를 과연 이곳에서 그 진리의 일단이라도 깨닫고 가는 것만이 가장 또렷한 사실인양 싶을 뿐입니다. |
노산선생 일행은 마등령에서 마등봉과 설악원골 사이 길을 따라 내려서는데 이 길은 현재 세인들이 이용하는 마등령에서 비선대로 내려서는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추리는 마등령에서 다음 지형지물이 금강문이기 때문입니다.
무척 경사진 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선다고 기록하며 이 길은 내설악과 외설악을 오가는 승려와 산객들이 이동하는 길로 길의 형적은 있으므로 미로에 들 염려도 없거니와, 비교적 위험도 적은 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금강문의 풍경이며 좌측으로 세존봉도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마등령 고갯마루에서 내려선지 한 30여분이 지나 좌편의 웅대한 바위가 조금 거리를 두고 마주 서서 닫힐 듯이 언제나 열려있는 천성(天成) 석문(石門)이 있음을 만나니, 이것은 금강문이라고 적으며 시 한 수를 읊습니다.
닫힐 듯 열리었네 밤낮에 열려있네
찬란한 금강문(金剛門)이 길이 여기 열리었네
우리 임 여신 문이니, 주저하지 말았스라.
아낄 듯 쓰라시네 마음대로 쓰라시네
풍성한 금강연(金剛宴)안에 남김 없이 쓰라시네
우리 임 주신 것이라 의심할 것 하나 없네.
막힌 줄 알지 마라 없는 양 알지 마라
언제나 열려있네 무궁무진 쌓여있네
진리(眞理)는 지금도 바로 네 발 앞에 놓였나니.
와선(臥仙) 비선(飛仙)의 쌍절경(雙絶景)
노산선생은 금강문에 대해서는 특별히 예찬한 바 없이 금강문을 지납니다.
금강문을 지나 30여분을 지나며 동쪽과 남쪽, 지금의 가는골 위 봉화대와 칠성대, 큰형제골과 작은형제골의 침봉들, 화채봉 아래 외설악 만경대, 토막골의 전람회길, 설악골의 왕관봉과 뒤로 이어지는 천화대와 범봉, 공룡능선의 노인봉, 1275봉, 나한봉 등의 암봉에 정신을 완전히 빼앗긴 듯합니다.
본문을 봅니다.
금강문을 벗어나 낙엽 쌓인 돌길을 헤치면서 오르고 내리는 동안, 나는 분명히 무슨 신비의 전람회(展覽會)에나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을 일으킵니다. 제1실은 장엄(莊嚴), 제2실은 화려(華麗), 제3실은 정결(淨潔), 제4실은 미묘(微妙), 이리하여 5실, 6실로 100실, 1000실, 몇 10000실일지 모르는 이 신비의 전람회장에 들어와, 그동안만도 웅기(雄奇), 소랑(昭狼), 현묘(玄杳), 원족(圓足), 적막(寂寞), 휘황(輝煌) 등(等) … 이루 셀 수 없는 많은 방을 거쳐 왔거니와, 과연 여기는 그래 제기호실(第幾號室)이며 또 무엇을 진열한 곳인가요. 지금 여기가 몇 호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방의 이름은 ‘유심(幽深)’인것 같습니다. 설악이 본시 산이요 산중에도 심산이매, 여기 와서 따로 ‘유심’을 말함이, 얼른 생각하면 얄궂고 우스운 말일법하나, 설악 중에서도 완전히 또는 전문적으로 ‘유심’한 곳은 이 곳이겠습니다. |
저도 설악의 침봉과 천화대를 보며 한 동안 넋이 나간 듯한 적이 있었는데 노산선생께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암봉 하나 하나를 보며 전람회장에 온 듯한 비유로 엄봉의 아름다움에 취해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분간 못할 듯 경승에 흠뻑 빠진 듯합니다.
이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으니 바로 토막골의 전람회길입니다.
선답자들의 예찬이 쏟아지고 가보고는 싶은데 길은 모르고 이리저리 뒤적여보지만 제대로 된 전람회길을 가는 방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대충 메모를 하고 무작정 떠난 전람회길...........
토막골을 지나 형제폭포를 보고 올라선 전람회길.....
많고 많은 이름 가운데 누가 전람회길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서 생각하니 노산선생의 설악행각이 원조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전람회에 빠져든 노산선생은 몇 호실에 있는 지를 잊은 채 유심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유심,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하고 깊은 곳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금강문에서 한 30분 동안, 극히 고급적이요 극히 항구적인 매혹성을 가진 이 심산미에 다시금 취하면서 내려오다가, 잠깐 우편 송림 사이로 갈려 들어가매, 반석(盤石)에 반야대(般若臺)라 각자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이 반야(般若)란 것은 지혜란 의미의 범어(梵語) ‘프랏냐’를 음역한 것입니다마는 이 반야대로 말하면, 이 산에서도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 …과수렴동(過水簾洞), 등사자항(登獅子項), 역반야대(歷般若臺) 비파대(琵琶臺)… (창산기(昌山記)--- 라 한것을 보면, 이미 지나온 내설악 중에도 반야대란 곳이 있는 모양이나, 나는 필경 찾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기 이 반야대의 대 아래에는 반야폭(般若瀑)이라는 폭포가 있습니다. 과연 수성(水聲) 산색(山色)에 고요히 묵념만 하고 앉았다 하면, 범상을 넘는 그런 지혜도 생겨날 것 같습니다. |
금강문에서 30분을 내려서서 우편 소나무 숲 사이로 들어가 반야대와 반야폭포가 있음을 적었습니다.
창산기를 인용한 본문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과수렴동(過水簾洞), 등사자항(登獅子項), 역반야대(歷般若臺) 비파대(琵琶臺)---- 아는 것 없고 보잘 것 없지만 제 나름대로 풀어보면 수렴동을 지나 사자항에 올랐다, 반야대를 지나 비파대가 있다----라고 볼 수 있으니 오세암 전 사자고개 인근에도 반야대와 비파대라는 곳이 있는 듯한데 본문에 의하면 노산선생도 그냥 지나쳤음을 아쉬워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사진은 킬문님이 2018년 일행 6명과 함께 토막길을 지나며 찍은 사진을 귀하게 모셔왔습니다.>
외설악 반야대???
구미당기는 곳입니다.
어디일까?
인터넷에서 반야대를 치면 누군가 약간 훼손시킨 듯한 마애각의 반야대를 볼 수 있는데 누가 찍은 사진인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운 좋게 반야대를 간 사람들, 사진을 찍은 주인을 알 수 있었으며 위치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킬문이라는 닉을 쓰는 분이 일행 10여명과 함께 토막골에서 전람회길을 지나고 형제폭포를 지나, 형제폭포에서 약15분 정도 지난 곳에서 반야대를 찾았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일찍 읽었더라면 토막골에서 전람회길 그리고 형제폭포를 지나 정상 등로로 오르는 곳 어디엔가 있는 반야대를 찾을 수도 있었는데..... 다음 기회가 되면 진정 반야대를 찾고 반야대 위에서 주변 경치를 보리라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토막골 형제폭포로 노산선생이 적은 반야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사진은 킬문님이 반야대 인근에서 찍은 사진으로 설마 이곳을 반야폭이러고 했을까? 의문이 갑니다.>
반야대 아래 있다는 반야폭포입니다.
노산선생은 반야폭을' 물소리와 주변 경관을 음미하며 묵념에 잠기면 뛰어난 지혜가 생길 것이다.'라고 예찬했으니 분명 큰 폭포일 것이므로 반야폭은 현제 우리가 부르는 형제폭포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설악행각을 읽은 초기에는 반야대와 반야폭포를 찾느라 노산선생이 하산한 초태막골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었는데 초태막골로는 지나는 사람들이 없는 편입니다.
설악명승학교에서는 설악행각을 따라가기 산행에서 반야대와 반야폭포를 어느 곳으로 특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반야대를 가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여기서 돌아내려, 아까 내려오던 본로로 나와서는 갈지(之)자가 연속되는 길을 따라 약 오리(五里)가량을 끌리듯 내려오다가, 비로소 설악 동곡의 계수를 만납니다.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물을 따라 내려가지 말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굉창(宏敞)한 계류(溪流)를 소상(溯上)한지 한 10분여에 와선대(臥仙臺)를 만나니, 이 와선은 단명으로서, 단의 높이는 약 3척, 그러나 폭이 10여간이나 되매, 이를 일러 와선이라 한 모양입니다. 백여명이나 앉을만한 소광(昭曠)한 암상(岩床)에 잠깐 바랑을 베고 누웠으니, 과연 무엇으로 보든지 남의 눈엔 신선으로 보일 것입니다. |
본문 위 첫 소절, ---여기서 돌아내려---
위 소절의 뜻은 「물체를 돌아서 내려간다.」라는 뜻이 아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로에서 좌측 반야대로 내려섰다가 다시 본로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하산하는 초태막골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내용을 적지 않았으며 단지 지그재그로 수없이 반복하며 내려서서 설악동계곡을 만났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내려선 지점은 현재 다니는 길이 있는 비선대가 아니라 한동안 아래지점인 와선대 아래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문신 김유는 금강산을 가는 길에 이곳 신흥사를 보고 지금의 비선대와 와선대인 상식당암과 하식당암을 보고 예찬의 글을 썼으니 김유의 와선대를 보면 이러합니다.
「점심 식사 후 상, 하 식당암을 가보았다. 식당암은 신흥사에서 남쪽으로 10쯤에 있다.
너럭바위가 시내를 끊었는데 가로는 한길이고 길이는 배가 된다. 점차 작아지면서 2층이 되는데 작아진 곳은 바른 것이 사람이 공을 들인 것 같다. 물이 그 위로 베를 널은 듯 흐른다. 기이한 봉우리가 끼고 있는데 높은 절벽이 솟기도 하고 웅크리기도 하며 입을 벌린 듯 아래로 임해 있다. 쳐다보니 정신이 오싹해 진다.」
<와선대의 풍경입니다.>
제가 와선대를 아주 오랜만에 지나며 삼연 김창흡이 새겼다는 '와선대' 각자를 찾는다고 계곡을 헤매였지만 찾을 수 없었고 와선대를 설명한 작은 안내판에는 옛날 마고선인이 바둑과 거문고를 즐기며 아름다운 경치를 너럭바위에 누워 감상하였다고 해서 와선대라고 부른다는 내용인데 내용도 부실하고 설명도 부실하였습니다.
권혁진의 설악인문기행을 보면 김홍도의 '와선대' 사진을 실었는데 사진을 보면 와선대는 기로지른 석대와 위쪽에 있는 연(淵)이 2개를 포함하고 있으며 뒤로 높게 솟구친 장군봉과 적벽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노산선생은 와선대에서 특별한 설명없이 잠시 머물고 비선대로 향한 듯 한데 와선대 석대에서 잠시 누워 신선이 되어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신선 누운 곁에 나도 같이 누웠나니
사람들 날 대하여 신선이라 이르렸다
속일래 속이었겠소 과히 허물 말으시오.
열없이 신선인양 잠깐 속여 누웠다가
원하고 안 될 일을 구태 바라 무엇하리
이윽고 일어앉으매 나도 민망 하구료.
와선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노산선생은 계류를 건너고 다시 건너기를 반복하며 20여분을 올라 비선대에 당도했으니 예전에는 금강굴로 내려서는 길이 없는 듯 했으며 와선대에서 비선대로 이어지는 길도 따로 있지 않고 계류를 따라 지난 듯합니다.
비선대(飛仙臺)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월이 지났지만 비선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고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경승지이며 문화재청에서는 2013년 설악10경을 국가명승으로 지정했는데 비선대와 천불동 일원을 국가명승 제101호로 지정하기도 한 곳입니다.
설악산에서 반평생을 보낸 삼연 김창흡은 비선대를 보고 조선의 제일이라고 극한 예찬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합니다.
「벽하담은 장쾌한 물줄기를 자랑하나 땅이 좁기 그지없고, 선유동은 그윽한 맛이 있다고 하나 멋스러운 풍채가 부족하고, 파곶동은 큰 반석이 장관이나 크기만 하지 쓸데가 없으며, 병천애는 영롱한 것이 기묘하다고 하나 주위와 어울림이 전혀 없고, 백운대는 위로 푸른 봉우리와 아래로 흰 돌들이 펼쳐있어 조금 굽에 쳐다볼 수 있으나 빽빽한 나무들이 줄 지어 있어 멈췄다가 쏟아 붓는 운치를 감추지 못해 뜻과 멋이 쉽게 다 하여서 식당암과 나란히 논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위 글에서 벽하담은 금강산의 명승으로 푸르른 시내물이 물안개를 일으키며 흘러드는 소(沼)라고 하는 곳이며, 선유동은 전국 곳곳 수없이 많아 아디를 뜻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문으로 보면 경치가 아름다워 신선이 노닐던 곳을 뜻하는 곳이니 아름답기에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는 경승지일 것이며, 파곶동은 괴산 화양동에 있는 경승지로 화양구곡의 제9곡이며, 병천애는 이터넷 상에서 찾을 수가 없네요, 그리고 백운대는 북한산 정상을 뜻하는 것인지 금강산 백운대를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흰 구름이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절경입니다.
위와 같이 이름난 절경에서 모자라거나 미흡한 점을 이곳 상식당 곧, 비선대는 모두 갖추고 있다고 예찬 했으니 삼연은 전국의 최고 명승으로 꼽았을 것입니다.
<비선대 식당바위 일대와 식당폭포 그리고 적벽과 장군봉의 풍경입니다.>
노산선생의 비선대 선입견은 어떠했을까?
본문을 봅니다.
반석 위에는 어느 때 어떤 사람들인지 빈틈없이 이름을 새겼는데, 얼른 보니, 제각기 제 이름을 새긴 것이 아니라, 누가 이름 마차를 끌고 가다가 쏟아놓은 것 같이 보입니다. 비록 견분(개똥)이라도 그것은 주워가면 비료로 쓰려니와, 여기 흘려놓은 이 명분(똥같은 이름)은 주워가 쓸데가 없는 것이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이 비선대의 풍경을 감상함에 있어서 왠지 모를 불쾌감을 주는 죄는 천추만대에 이 이름들이 지고 갈 것입니다. 그는 여하간에 과연 이 비선대의 절경만은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자랑할 뿐일 것이니, 또한 이것만이 그대로 기쁨이 아니오리까? |
따끔한 질책입니다.
비선대 넓은 식당바위 위에는 수없이 많은 마애명이 있습니다.
어느 것은 크고, 어느 것은 작고, 어느 것은 정체로, 어느 것은 초서체로, 어느 것은 보기 좋게, 어느 것은 조잡하게 새겨져 있으며 마애명만 있는 게 아니고 銀瀑上下(은폭상하) 僊人飛臥(선인비와)라는 마애각도 있습니다.
표현의 방법을 보는 사람마다 다른데 저의 경우는 그리 싫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경승지에 가면 마애명이나 마애각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전무한 곳을 보면 왠지 경승의 가치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도 받기도 하는데 설악 비탐지역 깊은 곳에 들어가면 무척 멋있는 경승을 많이 접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아무런 마애명이나 마애각이 없는데 때로는 "이런 곳에 멋있는 필체의 마애명이나 마애각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노산선생은 이러한 마애명을 보고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는지 본문에서와 같이 마차로 실어다 쏟아 놓은 개똥에 비유하며 개똥은 거름으로 쓰지만 개똥만도 못한 마애명은 아무 쓸데가 없다고 혹독한 비판을 합니다.
경승지의 마애명에 대해 무척이나 혹독한 비판한 2사람이 있었으니 남명 조식선생과 연암 박지원선생이 있습니다.
남명 조식선생은 ‘대장부의 이름은 사관이 책에 기록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하는데 구차하게 산 속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을 전하려 한다.’고 꾸짖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선생은 ’풍악산을 유람할 때 -------깎아지른 천길이나 높이 서있어 그 위에 나는 새 조차도 끊겼는데 김홍연이란 이름 세글자가 있었다.----봉래 양사언도 이곳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거늘 저 이름을 써 놓은 자가 누구이기에 다람쥐와 원숭이와 목숨을 다투게 했단 말인가?‘라고 기록하며 혹독하게 꾸짖었습니다.
<노산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개똥을 수레로 쏟아 놓은 것 같다는 마애명입니다.>
삼연 김창흡이 조선의 제일아라고 하며 상식당에는 비선대, 하식당에는 와선대라고 새긴 곳, 노산 이은상은 비선대의 예찬보다는 수없이 많은 마애명을 보고 개똥만도 못한 행위라고 비판 했던 비선대를 조선 영조때 벼슬을 지낸 간옹이헌경은 무어라 표현했을까? 간옹 이헌경은 ‘식당폭명(食堂瀑銘)이라는 글을 봅니다.
「양양부의 부쪽 40리에 절이 있는데 신흥사라고 한다. 설악산에 있으며 절에서 남쪽으로 비스듬하게 골짜기로 들어서 가면 식당폭포가 있다. 폭포는 아래로 흐르며 시내가 되는데 어떤 곳에서는 질펀히 흘러 씻을만 하고 어떤 곳은 깊고 검은 색을 띠어 두려워할만 하다. 바위에 막히면 싸우기도 하고 벼랑을 만나면 날아오르기도 한다. 장사가 꾸짖으며 소리치는 듯 귀신이 기침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는 것은 물의 기이함이다. 눕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며 우뚝 선 것은 화내는 듯하고 걸출한 것은 때려잡는 듯하다. 시내는 모두 8~9구비인데 매번 한 구비 들어갈 때마다 보이는 것이 더욱 놀랍다.---- 폭포의 양옆에 너럭바위가 있어 40~50명은 앉을 수 있다.」이곳을 찾은 옛 선비들은 식당암(비선대)의 전체적인 풍경을 보고 예찬한 것과 달리 이헌경은 숲보다는 나무를 자세히 보는 스타일로 바위와 폭포의 흐름을 적고 있습니다.
기기묘묘한 바위와 구비치는 물을 보고 감탄한 표현이라 할 것 같습니다.
<위 사진의 비선대는 윤순의 글씨라고 전합니다.>
<삼연 김창흡의 글씨로 알려진 비선대 마애각>
노산선생은 개똥보다 못하다고 혹독하게 나물한 후 마음의 평정을 찾고 비선대의 절경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기쁨이라고 예찬하며 삼연 김창흡의 비폭층담(飛瀑層潭)이라는 시를 적어봅니다.
경대부금담(瓊臺俯金潭)---바위위에 올라 앉아 금담을 굽어 볼 제
우선배청봉(右扇排靑峰)---오른편에는 부채살 같이 청봉이 늘어섰네
융시비중묘(融時備衆妙)---괴인 물 높은 산이 온갖 묘함 갖췄거니
개유세기장(豈惟勢奇壯)---장하다 기이하다 그 말로만 그치리요
명산랍극편(名山蠟屐遍)---명산을 찾아 들어 이곳저곳 두루 밟아
시협단구상(始愜丹丘想)---신선 생각에 비로소 맛이 들어
욕락금강암(慾落金剛岩)---아차! 금강암에 떨어질까 하다 말고
경우경주장(驚吁更柱杖)---깜짝 놀라서 막대를 고쳐 잡네
그리고는 비선대 식당바위 위에 새겨진 마애각 중 비선대(飛仙臺) 3자(字)는 누구의 글씨인지 군금하게 여기며 대승폭포 전망대에 새긴 봉래 양사언의 글씨가 아닐까? 생각하며 단정 지을 수는 없음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노산선생의 추측은 틀렸다는 게 현재 학계의 주장입니다.
식당바위위에는 飛仙臺라는 마애명이 2개가 있는데 눈에 잘 띠는 초서체의 飛仙臺는 숙종때 관찰사와 판서를 지낸 윤순의 글씨라는 게 정설이며 식당바위 중간에 오랜 세월 물이 흐르며 일부 깎여 희미하게 있는 정체의 飛仙臺는 삼연 김창흡의 필체라는 게 정설입니다.
신흥사(神興寺)와 계조굴(繼祖窟)
노산 선생은 비선대를 내려서고, 와선대(臥仙臺)를 지나 신흥사로 들어섭니다.
신흥사는 한자로 神興寺가 맞을까? 아니면 新興寺가 맞을까?
모두 정답입니다.
신흥사의 전신은 설악동 주차장 가기 전 켄싱턴스타호텔 맞은편에 오래 전에 자장율사가 세운 향성사라는 사찰이었는데 불에 타자 이후 의상이 내원암 자리에 선정사라는 사찰을 지었는데 다시 불에 타게 됩니다.
2년이 지나 영서, 혜원, 연옥 3명의 승려가 다시 세우기로 하고 기도를 올리는 중 비몽사몽간에 백발 신인이 나타나 지금의 신흥사 자리를 점지해 주고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후 그곳에 절을 지으니 지금의 신흥사로 신인(神人)이 나타나 절터를 점지해주었다고 해서 神興寺라 했는데 1995년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는 취지에서 新興寺로 바꾸어 부른다고 합니다.
신흥사 동천스님의 안내로 보제루(普濟樓)에 오르니, 사방 벽에 수많은 시판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제루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입니다.
1770년 영조 때 세운 건축물로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건물물 용도로 쓰이지 않고 신흥사 본전인 극락보전으로 가는 길이 되는데 그런데 1층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데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이유?
조선시대 신흥사를 찾는 선비들은 그래도 지체가 높은 사람들로 본전까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들어오고는 했었다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가마나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층간의 높이를 낮게 지었다고 하는데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 같은 생각이 듭니다.
2층 누각으로 된 건물로 아래층은 빈 건물로 요즘 건축방식으로 치면 필로티로 우리 선조들은 필로티 방식의 건축물 수 백 년 전부터 이용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보제루에는 귀한 물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의 보제루입니다.>
저는 불신자가 아니므로 절간에 가면 부처에는 관심이 없지만 건축물이나 불전사물(법고, 운판, 범종, 목어)에 관심이 많아 신흥사에 갔을 때 불전사물을 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보제루 안에 있는 듯 했는데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불전사물에 관심이 있어 오세암, 영시암, 백담사의 불전사물은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노산선생께서 보제루에 올라 제일 희귀하다고 느낀 것은 추사 김정희의 소년시절 시를 쓴 필적이라적었는데 노산선생께서는 시인이므로 이러한 시판이나 추사의 친필을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노산선생은 신흥사의 연혁을 적었으니 처음 자장의 향성사->의상의 선정사->이후 노서(露瑞), 연옥(蓮玉), 혜원(惠元) 등이 현재의 신흥사라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보우(普雨), 청허(淸虛) 휴정(休靜) 등 명승 60인의 진영있다고 적었습니다.
<신흥사를 지나 울산바위로 가는 길 우편의 안양암입니다.>
신흥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안양암과 내원암을 지나 토왕성폭포가 보이는 울산바위에 도착합니다.
본문을 봅니다.
울산바위 밑 계조굴에 이르니, 어느덧 석양이 비겼습니다. 거대한 암석 아래 대문을 짜 넣고 방을 들여 6간이나 됩니다. 나는 이 암굴에 방을 넣은 것은 더 할 수없이 마음에 좋았으나, 대문을 짜 세운 것은 입맛에 안 맞음을 느낍니다. 방주를 찾으니, 성암이란 노승이 나옵니다. ---중략--- 이 계조암에서 가장 눈 뜨이는 것은 집도 돌이요, 벽도 돌이요, 문도 돌이요, 뜰도 돌인데, 오직 하나 뜰 한가운데 조그마한 땅을 얻어 거기서 자라난 수십장되는 ‘전나무’입니다. 더욱이 가지라고는 하나도 없는 젓나무이기로, 하도 이상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성암노승은 웃으며, “아마 수십년 전(前)입니다. 여기에 어떤 중 한분이, 밤이면 젓나무 가지에 부는 바람 소리가 듣기에 너무나 괴로워서, 나무 가지를 죄다 쳐버렸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
노산선생이 울산바위 아래, 계조암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노을이 질 때이니 어둠이 서서히 대지를 덮을 즈음인 5~6시가 되었나 봅니다.
시간이 없다보니 울산바위 위도 오르지 못했나 봅니다.
모르겠습니다, 1932년 당시에는 지금처럼 울산바위 꼭대기까지 오르는 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가 없는데 어쩌면 없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울산바위, 즉 천후산에 대한 예찬이 없음이 아쉬운 대목으로 만경대에서 가야동계곡을 보고, 마등령에서 외설악의 풍경을 보고 예찬이 끊이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계조암에서는 주마간산 격의 구경을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계조암 뒤로는 거대하고 우람한 울산바위가 있습니다.
노산선생은 울산바위에 대해 많은 지식이 있을 것인데 울산바위에 대해서는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설악산 울산바위라고 부르는 이곳은 오래전에는 천후산(天吼山)이라 불렀습니다.
하늘천(天), 울후(吼), 뫼산(山)을 씁니다.
천후산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는데 갑설에 의하면 바람이 스스로 불으니 바람소리를 하늘이 운다는 설이고 을설에 의하면 바람이 불려고 하면 산이 먼저 운다는 설로 이유가 어찌되었던 바람소리가 대단하다는 것에는 같은 맥락입니다.
허목은 설악을 여행하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후산은 설악산 동쪽 기슭의 다른 산인데 간성의 남쪽 경계에 있다. 돌산이 신기하고 빼어나게 아름다운데 아홉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산이 크게 울면 큰 바람이 불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후산이라 하였는데 산에 풍혈이 있다.」라고 기록했으니 우리도 이제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아닌 천후산 울산바위로 다시 이름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있잖아요, 안산같이............
울산바위가 있는 산을 천후산라 불러도 안산과 같이 설악산 안에 있는 것이니까요.
<계조암과 울산바위의 풍경입니다.>
계조암은 오래 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이 굴에서 수도를 하며 신흥사의 전신인 향성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이후 동산, 각지, 봉정, 의상, 원효 등 이름난 승려들이 수도하던 도량이라 하여 계조암이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합니다.
계조암 내부는 밖에서 보면 제법 넓어 보이는데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어떠한 글이 붙어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348년 전 조선시대 윤휴라는 사람이 보았다는 글이 지금도 있을까? 궁금합니다.
금강산을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설악산 계조암에 들렸던 윤휴는 풍악록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이 굴은 의상이 수도하던 곳이다. 동으로 동해를 보면 망망한 바다에 해와 달이 떴다 잠겼다 한다. 남으로 설악을 바라보면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눈 안에 죽 들어온다. 안개 낀 동정호의 물결이 제아무리 경관이라 해도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있다고 들어보지 못했다. 중국의 여산이 비록 도인들이 앞 다투어 찾는 곳이지만 역시 만경 청파가 없다. 그런데 여기는 모두를 겸비하고 있다.」
계조암은 의상이 수도하던 곳으로 중국의 이름난 동정호와 여산에 비해 월등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계조암을 처음 찾은 건 1970년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였습니다.
설악산을 먼저 다녀왔던 친구가 울산바위, 비선대, 토왕성폭포, 비룡폭포, 육담폭포에 대해 얼마나 뻥튀기를 해서 말해주었던지 막상 가보고는 너무 기대가 커서 실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몇 차례 계조암을 찾으며 참 맛을 느낄 수 있었지요.
지금 용바위 옆아니면 계조암 정면 흔들바위 옆에 있는 큰 전나무가 노산선생께서 가지가 없는 전나무는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바람소리를 참을 수 없어 가지를 모두 베어냈다~~~
재미있는 이야기 맞습니다.
이에대해 노산선생은 세상의 번뇌를 다 잊으려는 자로 이곳 굴속 계조암에서 수도하는 승려로 부는 바람소리에 동요됨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어디 정을 가진 사람으로 금욕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님을 인정하는 지 이 같은 시를 읊습니다.
이 세상 온갖 일을 버리고 잊으려고
빈 산 석굴에 혼자 들어 누웠거늘
창 밖에 저 바람 소리 남을 어이 괴롭히나.
찬 하늘 오는 바람 다시 불어 가는 바람
바람 다니는 길에 나무 아니 심을 것이
밤 중만 가지 우는 소리에 도인(道人)도 잠을 못 이루다니.
다시 본문을 봅니다.
우리는 이 전나무를 돌아 마당바위로 올라가니, 또 한 가지의 기관은 동석(흔들바위)입니다. 금강산이 가진 온갖 것을 다 가진 설악산으로, 하마트면 흔들바위 하나가 빠질뻔하였지만, 기어이 여기에 와서 동석까지 있고야 만 것은 유쾌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 흔드나 만 사람이 흔드나 꼭 같이 흔들리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묵묵한 채 위대한 존재 같아, 경의를 드립니다. |
울산바위 아래, 즉 계조암을 갔다면 흔들바위가 빠질 수 없습니다.
비룡폭포, 비선대, 계조암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설악의 3대 비경으로 계조암 앞 너럭바위 위에 있는 흔들바위를 빼 놓을 수는 없음입니다.
본문을 보면 금강산에도 흔들바위가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설악산에 흔들바위가 없다면 금강산에 비해 한 수 눌리고 들어가는 것이 되니 설악에 흔들바위가 있음이 다행이고 기쁨이라고 적습니다.
수학여행 때 이곳 흔들바위에서 친구와 셋이서, 담임선생님과 둘이서 찍은 색바랜 흑백사진이 있습니다.
친구와는 지금도 자주 연락을 하지만 담임선생님께서는 생전에 계시는지 알 수가 없으니 ........
선생님의 옛 자취를 더듬어 봅니다.
계조암 앞에 흔들바위가 있고 흔들바위에서 남쪽으로 넓적한 바위가 약10m정도 서있으니 이 바위가 용바위라고 부릅니다.
노산선생의 설악행각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어두워지므로 시간이 없어 제대로 안 본 듯합니다.
용바위에는 비선대와 같이 수없이 많은 마애명이 있습니다.
중간 아래 큰 글씨로 계조굴이라고 암각되어 있으며 용바위에서 주목해서 볼 점은 좌측 상단에 연암박지원과 그의 아들 박종간의 마애명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승경지에 마애명을 새긴다며 혹독하게 꾸짖던 연암은 무슨 연유로 이곳에 마애명을 남기게 되었는지 두고두고 모를 일입니다.
설악행각에는 기록되지 않은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목탁의 전설인데 이러합니다.
설악산 계조암에서 수도를 하면 빨리 깨우친다는 소문을 들은 중이 쉽게 도를 깨우치고자 계조암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 중은 수도에 정진할 생각은 없고 빈둥거리며 시간만 보내면서 도를 깨우친다는 생각을 가진 중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잠을 자기 위해 누웠는데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귓전을 울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 눈을 뜨면 조용하고 아무도 없더랍니다.
그러나 자려고 하면 계속 목탁소리가 나니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때부터 수도에 정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도를 깨우치게 되었더랍니다.
이후 목탁소리의 비밀을 풀기위해 달마봉에 올라가 계조암을 보니 계조암 지붕이 되는 바위가 목탁같이 둥글고 옆으로 지나는 능선이 마치 목탁을 치는 방망이와 같음을 알고 목탁소리의 비밀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산 선생 일행은 얼마 후에 계조암을 떠나 신흥사로 내려와 여장을 풉니다.
이 밤을 지나면, 나는 설악산을 떠나 속계로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목침을 베고 누우니 설악행각 10일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났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매, 나는 그동안 느낀 것도 많고, 배운것도 많고, 뉘우친 것도 많고, 결심한 것도 많았다.」고 독백을 합니다.
설악산(雪岳山)이여. 나는 당신의 품속을 벗어나, 이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당신 품속에서 흐르는 그 영원한 생명의 법유는 내 피가 되고 내 살이 되고, 또 내 뼈가 되어, 내가 사는 동안에는 당신이 곧 나요, 내가 곧 당신임을 벗지 못할 것입니다.
<신흥사의 극락보전과 석등입니다.>
먼 후일 내 영혼에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을 때, 나는 다시 당신의 품속을 찾아와 지고지애(至高至愛)의 세례를 받고 갈 것입니다.
지금 노산 이은상 선생께서 설악행각이라는 제목으로 1932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과 노산선생께서 직접 설악을 오른 길을 따라서 오래전 제가 걸었던 길을 비교하며 회고해 보았습니다.
총 6회에 걸친 글로 지루할 수도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설악을 오르고, 대청봉에서 동해를 내려다 보며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한탄하며 울분을 토했던 안타깝고 용기있는 글이었습니다.
이후 노산선생은 설악을 다시 찾고 쓴 글이 있는데 아주 짧고 내용면에서도 설악행각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설악명승학교의 카페에 들어가 자료를 송출한 바 사죄합니다.
그러나 카피를 할 수 있도록 올린 것은 이글을 여러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배려한 점이라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설악을 여러번 찾아야 하는 저로서 설악을 오를 때마다 노산선생을 생각해보며 자연경관을 감상하려합니다.
그동안 모든 글 읽어 주신 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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