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재이야기

종묘, 외대문 일원 이야기

범솥말 2023. 8. 5. 14:51

외대문 일원

 

우리의 문화재/종묘와 사직

2011-04-09 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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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대문은?

종묘의 정문으로 외대문(外大門) 또는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합니다.

정면 세 칸의 평삼문으로 되어 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정문 안 서쪽으로는 본래 종묘를 지키는 사람들이 기거하던 부장청이 있습니다.

 

외대문 밖

<외대문 앞 돌계단 복원공사를 하기전 모습으로 돌계단에 묻혀 보이지 않습니다.>

존묘의 전문인 외대문은 종묘의 남쪽에 있으며 전면 중앙에 난 계단으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여년사진을 보면 외대문은 밖에서 외대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현재의 모습과 같이 돌계단이 있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 넘들이 앞 마당을 메우며 외대문의 돌계단이 묻히며 사라졌었는데 2015년에 복원공사를 하여 메웠던 흙을 파내어 원래의 모습을 복원한 것입니다.

이 사진은 조선시대 외대문으로 우측 원 안의 사진은 고종인것 같습니다.

당시의 사진에서 보면 외대문은 지상과 높이의 차이가 있어 4단으로 계단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일제 강점기 때 사진으로 계단을 덮었습니다.

육안으로 봐도 덮은 곳이 볼록함을 느낄 수 있는데 2015년 전 돌계 복원공사를 하지전과 공사이후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추녀마루의 잡상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는데 잡상의 수는 사진이 희미해 확인할 수가 없으며 현재는 위 사진과 같이 잡상은 5개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외대문의 구조형태는 궁궐 정문과는 달리 아주 검박하고 단순한 편이며 정문밖에는 하마비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습니다.

종묘 앞 광장은 약5년의 공사를 거쳐 현재위 모습을 되찾았는데 공사하기전 광장 중앙 우측, 지금의 어정 자리옆에 하마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종묘광장 정비공사가 끝난 후 하마비는 종묘입구로 이전 설치하였으며 종묘광장 복원공사 이전에 없던 종묘 전교를 설치했습니다.

종묘 전교도 자세히 보면 가운데 높은 단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신로를 뜻하는 것입니다.

위 2장의 사진은 종묘 광장 복원공사를 하기 이전 사진입니다.

사진으로는 그런대로 좋아 보이지만 나무 아래나 도로 옆으로 노숙자나 술취한 자, 몸을 팔러 나오는 중국 교포 아줌마들이 들끙ㅎ던 곳이었는데 현재는 서울시에서 철저하게 관리를 하므로 공원내에서는 어떠한 불순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외대문의 돌계단 복원

종묘앞 광장 복원공사에 맞추어 종묘 외대문 돌계단도 2015년 광복절이 막 지나 복원공사를 하였습니다.

종묘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땅에 묻힌 돌계단 옛 모습을 복원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으며 일제 만행을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2

 

외대문 안

또한 외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종묘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헌장입석이 있는데 

"종묘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 유산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유산이란 당해 문화재가 세계적으로 특출하고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유산을 말한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유교적 전통 신전으로 1395년(태조4년) 에 지어졌으며 그 후 매년 이곳에서 종묘제례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묘세계유산비

종묘는 19952월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팔만대장경 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외대문을 막 들어서면 입구에 있으며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표석입니다.

이런 사진을 보면 옛 추억이 소환됩니다.

있을 때는 그냥 무의미하게 보았지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구 산물로 사진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외대문은 다른 이름으로 창엽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시대의 모든 문헌 어디에도 창엽문이라고는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답니다.

종묘의 건물들은 현판이 없다는 것이 특징인데 현판이 없는 이유는 여러 사람들이 출입하는 궁과 달리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신성한 공간으로 제관이외는 일반 백성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종묘 정문도 외대문이라고 불리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정문에 창엽문(蒼葉門)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한 때는 현판도 달렸답니다.

창엽문은 태조가 한양에 터를 잡을 때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가하면 무학대사가 지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조선역사 문헌에 없는 것으로 보아 창엽문의 현판은 일본사람들의 음모가 우세하다고 합니다.

일제는 푸르고 창창하다는 뜻의 창엽(蒼葉)을 창()艹八君으로 나누어 풀어 28임금을, ()艹世十八로 나누어 풀어 28세라 해석해 조선의 운명이 다했음을 전파시킨 것으로 유추해석을 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조선의 왕은 태조 이성계에서 고종까지 26명의 왕과 대한제국의 순종, 대한제국의 황태자인 영친왕까지 28명으로 보면 일본 애들의 주장이라는 것도 맞는다는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이런건 문헌에는 없는 추정일 뿐입니다.

외대문 안 신향로의 모습(안쪽에서 찍은 사진으로 왼쪽이 동쪽입니다.)

종묘에는 왕이 가지 못하는 길이 있습니다.

절대왕권의 조선에서 왕이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임금의 조상을 모신 종묘에서는 왕은 왕권을 누리는 왕이 아니고 제사를 올리는 헌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3도가 있는데 여기서 보는 3도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보는 3도와는 차이가 있는데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3도는 가운데 길로 임금이 다니고 좌우로 신하들이 다니지만 이곳 종묘의 3도는 가운데 길은 오로지신만이 다닐 수 있는 길로 신향로라 하고 동쪽의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서쪽의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전혀 못 다니는 게 아니고 예외가 있는데 예외란 신주를 종묘에 모시기 위해 외대문을 열고 사람이 신주를 들고 신향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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