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이야기
종묘의 배치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좌묘우사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인 왼쪽에 종묘를 두고 서쪽인 오른쪽에 사직을 배치하였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새로운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착공하던 해인 1394년 12월에 종묘 건립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395년9월 준공을 보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본전을 7칸으로 만들어 개성에서 모셨던 선왕4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
종묘는 원래 현재와 같이 사방을 둘러 축대를 쌓은 산이 아니었는데 태종 때 3차례에 인공으로 산을 만들어 정전을 가운데 두고 좌로 내청룡, 우로 내백호를 만들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세종 때는 본전인 정전 서쪽에 영녕전을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선조임금이 선왕들의 위패를 받들고 개성으로 몽진을 나서자 왜군들이 종묘에 주둔하였는데 이유 없이 죽는 일이 생기자 조선왕조 선왕들의 신령 때문이라 하며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현재 정전에는 태조를 시작으로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 등 49위를 모시고 있으며 영녕전에는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 순종황제의 황태자인 영왕과 왕비가 모셔져 있으며 정전 좌측 남쪽에는 역대 공신 83위를 모신 공신당이 있으며 현재 종묘에 남아 있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 전사청, 재궁, 향대청, 공신당, 칠사당, 외대문, 부장청(서수문장청) 등이 있습니다.
종묘는 이러한 곳?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이며 종묘제례는 나라의 가장 중요한 예로서 엄격한 절차와 격식에 따라 왕이 친히 모셨으며 종묘제례악이 어우러져 장엄함을 더 했합니다.
종묘는 야트막한 산과 숲에 둘러싸여 있으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제례 준비에 필요한 몇몇 부속 전각으로 이루어 졌고 전각은 최소한의 색만 사용하고 화려한 단청을 하지않았으며 장식과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였습니다.
이는 종묘가 조상신의 영혼을 모신 엄숙하고 경건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5월 첫째 일요일이면 종묘에서 종묘제례가 거행되는데 조선왕조는 사라졌지만 조상들을 위한 공간과 제사와 제사를 지낼때 사용한 음악은 오늘날까지 절 보존되어 오고 있는데 선대의 왕과 왕비를 위해 제례를 올리고 그 전통을 600년이 넘게 이어온 사례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종묘는 사적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국보 제227호인 정전과 보물 제821호인 영녕전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인 종묘제례악과 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인 종묘제례가 있으며 종묘는 1995년12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종묘제례와 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선조들의 종묘에 대한 애정은 전시에도 변함이 없었다는데 선조임금께서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 가던 그 바쁜 와중에도 종묘에 있던 신주를 챙겨갔던 사연은 유교사회인 조선에서는 효(孝)와 충(忠)이 나라의 근간이었으므로 조상에 대한 제사는 효의 연장이고 그 중심에 신주가 있다고 봤으므로 두고 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신주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은 작은 나무패에 불과했지만 옛사람들은 신주에 망자의 혼이 깃든다고 생각했으므로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그 안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현재 종묘 정전에19실에 49위가 모셔져있고 영녕전에 16실에34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묘에 모신 신주는 총83위가 모셔져 있는데 역대 임금 이외에도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나중에 추존한 5분(덕종,원종, 진종, 장조, 문조)과 그 왕비들이며 안타깝게도 역대 임금27분가운데 광해군과 연산군은 폐위되었으므로 왕비와 함께 빠져 있으며 그외 중전의 지위를 누렸으나 빠진분은 드라마로 우리와 친숙한 희빈 장옥정이 빠졌다는게 아쉽습니다.
왕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종묘에 모셔진 이유는?
장옥정과 광해군 같은 사람들이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격도 없이 그런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며 그것은 그들을 죽인 사람들 혹은 몰아낸 사람들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견도 있습니다.
예컨대, 광해군을 종묘에 모실 경우에는 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의 정통성을 세울 수 없게 되며 마찬가지로 장옥정을 종묘에 모실 경우에는 그를 격하하고 죽여 버린 서인 혹은 노론 세력의 정당성을 세울 수 없게 되므로 그들은 실제적 사실관계와 관계없이 종묘에 모셔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왕후나 임금 역할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종묘에 모신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결코 그들에 대한 효심이나 존경심의 발로가 아니었으며 이 역시 승자의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이 인조 쿠데타 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고 종묘에 모셔진 것은 그에 대한 인조의 효심 때문도 아니었고 또 그가 왕이 될 재목인데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선조의 법통이 광해군이 아닌 원종(정원군)을 거쳐 인조에게 계승되었다는 명분을 창출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할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종묘에 모셔졌느냐 여부를 기준으로 중전 혹은 임금 여부를 판단한다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는 그 속에 당대의 정치적 편파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 글은 일부의 소견일 수 있습니다)
종묘의 연혁
묘(廟)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곳입니다.
사서가에서는 기묘 또는 사당이라고 하고, 왕실에서는 종묘라하여 조종을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입니다.
조선은 1392년 개국 직후 효사관을 세워 추존4대왕(태조의 4대로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을 모셨으나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자 그해 12월 종묘를 짓기시작하여 다음해 9월 태실7칸에 석실(신실) 5칸을 만들고 동서로 협실을 2칸씩 만든 뒤 태묘라고 했습니다.
종묘가 완성되자 개성에 모셨던 추존4대왕의 신주를 새 종묘로 모시기위해 1396년 윤9월 26일 이안고유제를 올리고 한양으로 옮겨 현 종묘에 이틀 뒤인 음9월28일 이안제를 올리고 봉안하였습니다.
종묘의 중건
세종1년인 1419년 정종이 죽자 5칸의 신실로는 보족하여 송나라 벌묘제도를 본받아 1421년 태묘 서쪽에 4칸의 익실과 각1칸의 별묘를 세워 영녕전이라 하고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위를 이안하였습니다.
이후로 역대왕은 태묘(정전)에 모시다가 4대가 지나면 영녕전으로 조천되었는데 공덕이 있는 왕은 불천위라하여 조천하지 않고 세실하다보니 수요가 중가됨에 따라 명종2년인 1547년 정전에 4칸을 증건하니 11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조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는데 이때 신주만 수습하여 신의주로 몽진하여 불행중 다행으로 신주는 불타지 않고 보존할 수 잇었습니다.
몽진후 1년이 지난 1593년 한양으로 환도해서 정릉동 월산대군 집에 임시로 모셨다가 동대문 밖 권안소를 마련하여 그곳에 모셨습니다.
종묘를 수습해야하지만 전란느오 재정도 부족하고 길일을 잡는다고 시간을 보내다가 선조41년인 1608년 1월에 재건 공사를 착수하여 정전11칸, 좌우 익실 각각 2칸으로 증건하고, 영녕전은 가운데 4칸, 좌우 익실 각각 3칸씩으로 공사를 하여 광해왕 원년 5월에 완공하였습니다.
현종8년인 1667년 6월 영년전 익실을 좌우 4컨씩으로 개축하였고, 영조2년인 1720년3월에 정전을 기존건물의 동쪽에 4칸을 증건하여 15칸이 되었습니다.
현종2년인 1836년에는 다시 동쪽으로 4칸을 증건하여 현재와 같이 19칸이 되었으며 영녕전도 익실을 좌우로 2칸씩 증건하여 현재의 16칸이 되었습니다.
종묘의 건축물
전 : 정전, 영녕전
청 : 전사청, 악공청, 소악공청, 향대청, 부장청
궁 : 재궁
당 : 칠사당, 공신당
루 : 망묘루
기타 :수복방, 제기고, 외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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