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궐내각사 권역
우리의 문화재/창덕궁 2011-08-04 19:5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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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內閣)
내각은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입니다.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많은 전란을 겪으며 완전 훼손되었었습니다.
그러하던 궐내각사가 복원된 것은 1995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5년경까지 공사를 하여 현제에 이르고 있습니다.
권내각사란 글자 그대로 궁궐 안에 있는 누각들이라는 뜻으로 원뜻은 규장각의 별칭이었지만 쓰임은 궁궐안에 있는 관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내각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궐내각사 권역에는 규장각, 검서청, 봉무당, 책고, 금천을 건너서는 홍문관, 예문관, 약방, 억석루가 있습니다.
현재 내각의 현판은 규장각을 들어가는 남문 행랑채에 걸려 있는데 예전에는 이문원(摛文院)이라고도 불렀으며 규장각 학사들이 근무하던 곳입니다.
규장각(奎章閣)
규장각은 왕의 명에 의해 궁궐에 설치한 도서관이자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입니다.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는 능력도 없으면서 기득권만 주장하는 사대부들에게 신물을 느꼈는지 1776년에 창덕궁 후원 영화당 뒤편 높은 곳에 새로은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규장각(奎章閣)의 한문은 별이름 奎, 글 章을 씁니다.
규장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씨를 뜻하지만 奎는 하늘의 대표적인 28수의 하나인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라고 하는데 28수의 하나인 별자리를 인용하는 별 규(奎)를 처음 사용한 임금은 인조로 창덕궁 옥류천을 넘어가는 곳에 취규정이라는 정자가 인조가 세우고 붙인 정자로 규건이 몰려든다는 뜻으로 세운 정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규장은 별들이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하여 학문을 높이므로 많은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암튼 정조 임금이 만든 규장각에서는 실력만 있다면 서얼 출신들도 등용시켰으며 규장각의 학사들은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으며 이 결과 정조는 많은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따르는 신하가 충성을 다하였으니 업무 영역을 확대하여 전에 홍문관이나 예문관에서 관장하던 업무를 상당히 많이 규장각에서 처리하였습니다.
규장각에서는 국가의 많은 책을 관리 보관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경성제국대학교에서, 해발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남아있는 책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규장각에 걸려있는 현판은 궐내각사를 보원할 때 새로 단 것입니다.
운한문(雲漢門)과 봉모당(奉謨堂)
운한문은 봉모당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운한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지칭하며 봉모당으로 들어가기 위해는 운한문을 지나야 하는데 운한문으로 가려면 궐내각사로 들어가서 규장각을 지나 천연기념물 194호 향나무가 있는 우측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봉무당은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입니다.
정조 임금이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주합루에 보관해 오던 선왕들의 유품들을 옛 열무정(閱武亭) 건물로 옮기고 이 곳을 봉모당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1857년 철종 때 봉무당에 보관하던 선대 왕들의 유품을 기능이 상실된 규장각 이문원 부속 건물 대유재(大酉齋)로 옮겼습니다.
1911년 옛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봉모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지어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는데 지금의 봉모당은 소유재 자리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검서청(檢書廳)
규장각의 검서(檢書)들이 당직을 서던 규장각의 부속 건물입니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규장각을 처음 만들고 1779년에 규장각에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임금의 갑작스런 부름에 대비하고자 번갈아 가면서 밤을 새웠는데 처음에는 규장각의 구석방에서 대기하다가 1783년 여름 규장각의 왼편에 방 2칸, 마루 1칸의 부속채를 짓고 거기서 당직을 하게 했는데 이 곳이 검서청입니다.
책고(冊庫)
책고는 이름에서 보듯이 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봉모당 뒤쪽에 세 채가 있습니다.
억석루(憶昔樓)
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영조가 써 준 ‘입심억석’에서 따 온 말입니다.
억석루는 2층으로 지너진 건물로 신선원전 남쪽 행각에 위치하므로 억석루가 구선원전 권역에 속하는지 궐내각사권역에 편입되는지 조차도 애매했던 곳입니다.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합니다.
이로 보아 억석루가 내의원에 속하는 건물로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농씨는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약초를 알아내어 질병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신농씨(神農氏)가 자편(赭鞭)이라는 신기한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식물들을 때려서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했다고도 합니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고 합니다.
예문관(藝文館)
예문관(藝文館)은 예문을 담당하는 관서’란 의미로, 예문은 육례에 관련된 도서를 총칭합니다
예문관은 홍문관과 함께 왕의 곁에서 왕명에 의한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의 작성하기도 하고 사초를 작성하여 신록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를 보관하던 중요한 부서였습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집현전 학자들이 바른 소리를 하자 이에 화가난 세조는 집현전이 없애 버리고 집현전에서 수행하던 인재 양성과 학술적인 기능을 예문관에서 맞아 보기도 했습니다.
현재 궐내각사에 포함되어 있지만 건물로 보면 인정전 서측 행각으로 향실과 붙어 있는데 향실은 동쪽, 예문관은 서쪽으로 등을 맞대고 있는 형태입니다.
찾아가기는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약방을 지나서 양지당 00문 앞에서 우측 건물과 건물사이로 들어가 막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인정전 서측 행각에 있는 숭범문을 닫아 찾기가 힘들었는데 최근 숭범문을 개방하고 있어 조금은 수월해진 것 같습니다
옥당(玉堂)
옥당은 홍문관(弘文館)의 다른 이름입니다.
텔레비전 사극에서 홍문관이나 예문관이라는 관청이름을 많이 들어보았겠지만 그러나 옥당이라는 단어나 관청은 들어본 적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홍문관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옥당은 낯설기만 합니다.
궐내각사의 홍문관은 돈화문으로 들어서서 진선문으로 가기위해 금천교를 막 건너며 왼편 금천을 끼고 있는 건물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현판은 홍문관이 아닌 옥당이라고 걸려있습니다.
홍문관의 일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직할 대변인실이나 부속실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으므로 출세를 위해 가고 싶어 하던 부서였을 것입니다.
홍문관의 일은 본래 정종 때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에서 맡아 하였는데, 세조 초에 세조 집권에 반대한 사육신이 주로 집현전 학사들이었기 때문에 세조가 그 기구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겨 폐지했다가 나중에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하였습니다.
약방(藥房)
궁궐의 약을 조제하거나 약제를 관장하던 부서로 내의원(內醫院), 내약방(內藥房), 약원(藥院)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1999년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조선시대 의학이나 환자들 관리에 익숙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혜민서니 약방이니 하면서 허준이 약을 조제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창덕궁 궐내각사에도 약방이 있습니다.
금천교를 막 건너며 진선문으로 들어가기 전 왼편으로 골목이 있는데 골목으로 들어가면 넓은 건물이 나오는데 이곳이 약방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설명하면 인정전 서편행각 숭범문을 지나면 바로 약방이니 왕이 아프다고 하면 어의가 빠른 시간내에 도착할 수 있게 옆에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던 약방을 조선말 성정각 행랑채로 축소 이전시켰으니 지금은 창덕궁 안네 약방이 2곳이 있는 셈입니다.
2010년도엔가 창덕궁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예전 약방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이곳에 며칠 약방을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약을 다리는 냄새가 진동을 했고 드라마에서 보았던 약첩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한의학에 조애가 깊고 자격증을 갖고 있는 분들이 약사로 나왔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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