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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정문 돈화문 권역

범솥말 2023. 6. 4. 00:21

정문 돈화문 권역

우리의 문화재/창덕궁  2011-08-04 19:5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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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敦化門)---1963년 1월 21일 보물제383호로 지정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은 경복궁에 머물면서 형제의 난 등을 겪은 현장이어서인지 별도의 이궁을 건립토록 명하여 1405년에 창덕궁을 건립하였으며 이후 궁의 건물이나 돌다리인 석교, 그리고 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1412년 5월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돈화문의 옛모습입니다.

초라한 모습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문앞에는 신사복 정장을 한 사람도 보입니다.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돈화문 밖 광장을 정문의 높이와 같이 메웠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차량등으로 출입하기 용이하게 앞을 메웠다고 합니다.

대문 안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지금은 없는 건물로 궁금증을 유발시킵니다.

돈화란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돈하게 교화란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돈화문은 5칸의 건축물로 좌우 양쪽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설치하고 가운데 3칸은 대궐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는데 가운데 문은 임금만 출입할 수 있는 문이고 좌우 문은 3품 이상인 당상관과 3품 이하로는 3사라하여 홍문과, 사헌부, 사간원에 대해서는 좌우 문을 출입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습니다.

궁궐의 문은 중국의 황제가 있는 궁궐의 문에 대해 5칸을 지을 수 있고 그 외는 5칸을 지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5칸으로 지어 문제가 되자 좌우 2칸을 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로 바꾸고 3컨만 대문으로 사용한다고 하여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돈화문은 처음부터 이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듯 하며 40년후인 1451년 문종이 즉위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중수했다고 합니다.

 

금호문(金虎門)

금호문은 돈화문 서측에 있는 문으로 창덕궁의 서문인 경추문의 역할을 담당했던 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승정원의 승지 등을 비롯한 궁궐의 벼슬아치들이 통용하던 문으로 금호(金虎)란 금 호랑이의 뜻으로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나타내며 호랑이는 사신 중 서쪽을 수호하는 신으로 궁궐의 안위를 위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여겨지며 편액은 성림이란 사람이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단봉문(丹鳳門)

창덕궁의 남서쪽이 있는 문으로 종친부, 왕족 및 친,외척과 상궁이 출입하던 문입니다.

선전관이라는 부서에서 개폐를 담당했는데 개폐가 무척 엄격하였으며 성종임금 때 문이 잠긴 후 제멋대로 열자 교수형으로 다스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정조임금 때 숙위대장이었던 홍국영이 한밤중에 이 문으로 드나들어 문제가 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성종 때인 1475년8월 궁안의 29개의 문에 이름을 붙였는데 대부분 없어지고 광범문, 숭범문, 단봉문과 숙장문 등이 현존하고 있는데 본 단봉문의 이름도 당시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추문(景秋門)

창덕궁의 서문으로 되어 있으나 역할을 금호문이 대신 해왔습니다.

궁궐의 문은 동쪽은 춘(春), 서쪽은 추(秋), 남쪽은 화(化), 북쪽은 무(武)를 넣어 이름 지었습니다.

(*창덕궁->영춘문, 경추문, 돈화문, 건무문 *경복궁->건춘문, 영추문, 광화문, 신무문)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의 경우 궁궐의 벼슬아치들이 통용한 것과 같이 창덕궁에서도 경추문이 그 역할을 해야 하나 돈화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호문이 있어 금호문으로 벼슬아치들이 출입을 하였으므로 경추문은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추문은 궁 밖으로는 불교박물관 가는길 우측에 있는데 현재 경추문 밖 좌측에 보면 3~4평정도 4각으로 파놓았는데 최초 담장의 기초가 되는 장대석의 위치를 보면 도로포장으로 현재 도로가 1m이상을 담장을 메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추문의 편액은 없습니다.

 

 

5.요금문(曜金門)

요금문은 창덕궁 서측 담장에 있는 문으로 경추문에서 100m정도 올라가다 우측에 있는 문입니다.

 

요금문 바깥쪽입니다.

요금문 안쪽입니다.

이 문은 궁중에서 왕족을 제외한 내시나 상궁 그리고 궁녀들이 죽게되면 시체가 나가는 문인데 이 문에도 중요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숙종임금 때 인현왕후와 희빈장씨(장옥정)가 중전의 자리를 놓고 한판 싸움을 벌였을 때 숙종임금은 희빈장씨의 손을 들어주니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시체가 나가는 문인 이 요금문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갔을 것입니다.

이후 다시 왕후로 복원되었으며 이후 8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세월은 흘렀어도 역사는 변하지 않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금(曜金)이란 금빛이 빛난다는 뜻으로 금(金)은 서쪽을 의미하며 편액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신자겸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성종임금이 신자겸의 글씨에 감탄하여 요금문 편액을 쓰게 하였습니다.

 

 

6.금천교(錦川橋)

조선시대에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풍수지리에 의한 주택이나 건물을 지었으며 궁궐도 예외가 아니어서 위와 같은 풍수지리적인 입장을 고려하여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여 어구를 진입공간에 두었습니다.

이곳을 흐르는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경계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 천을 금천(禁川)이라 불렀으며 금천을 건너기 위한 돌다리를 놓았는데 창덕궁은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른다“하여 이를 금천교(錦川橋)라불렀습니다.(참고, *경복궁->영제교, 창경궁->옥천교, 덕수궁->금천교(禁川橋), 경희궁->금천교(禁川橋))

창덕궁의 금천교는 1411년 진선문과 함께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존하는 서울의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금천교는 홍예교로 만들어 졌고 측면에는 귀면 조각이 있으며 그 아래는 석상 조각이 있는데 남쪽에는 해치모양의 석상이 있습니다.

귀면의 원형은 중국 고대 도철문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형상은 중국 고대사회의 조신제 가운데 지하의 망령을 달래는 원시 주술적인 진혼 의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망령의 모습은 몸체가 없이 얼굴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인데 은시대에 고분에서 발견된 도철문에서 그 상징적인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도철은 눈이 크고 이빨이 튀어 나온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도철은 시각이 예민하여 사악한 마귀도 찾아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면의 문양은 우리나라 특유의 도깨비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 설이 더 한층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나라 귀면은 중국의 도철문처럼 괴기스럽거나 공포감을 주기보다는 도깨비의 성격처럼 인간적이며 익살스러운 해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측에는 귀면 밑에 거북모양을 한 석상이 있습니다.

거북은 사방신의 하나인 현무로서 북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신앙되기도 했는가 하면 달의 화신과 수성의 천지음양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거북에 관한 이야기로 옛 문헌에 나타나는 하도낙서 전설이 유명한데 중국 하나라의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라는 강가에서 거북이 나왔는데 45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9개의 무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무늬가 나중에 팔쾌와 정치도덕의 9가지 홍범구주의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해치는 주작과 더불어 남쪽을 수호하는 신으로 화기를 막는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금천교 주 난간석 위에 익살스럽게 세워져있는 동물은 나티라고 하는데 나티는 짐승모양을 갖춘 석상으로 궁궐입구에서 재난과 악귀를 막고자 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금천교를 건너며 나오는 진선문은 1411년3월 태종 때 세워졌으며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이 전소될 때 불타 없어졌으며 1609년 광해군 때 창덕궁이 복구 때 다시 지어졌다가 1908년 순종 때 일본사람들이 강제 철거하였으며 1999년 복원공사 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옛날 금천교의 모습입니다.

돌다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잇어야 할 자리에는 넓은 공터가 차지하고 있고 좌측으로 행각과 궐내각사도 없는 쓸쓸한 궁궐의 모습이지만 좌측 느티나무는 지금도 그자리에서 금천교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또한 금천교를 건너기전 좌측 느티나무는 연리지입니다.

같은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으면 연리지라 부르고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로 붙으면 연리목이라 부르는데 연리지에 관해서는 한나라 말기의 문인 채옹의 이야기가 유명한데 이러합니다.

한나라 말기의 문인 채옹은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가 늘 병상에 누워있자,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3년 동안 옷을 벗고 쉬지 못했다. 또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자 100일간 잠자리에 들지 않고 보살펴 드렸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상을 치렀는데 그 후 채옹의 집 앞에 두 그루의 나무 싹이 돋아났는데 싹이 점점 커지면서 나무 결이 붙은 가지가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채옹의 효성 때문에 생긴 기이한 일이라고 했다.  

이 연리(連理, 결리붙다)는 처음에는 효성의 뜻으로 쓰였지만 후대에는 부부간의 깊은 사랑을 표시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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