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재이야기

창덕궁 후원, 옥류천 권역

범솥말 2023. 6. 3. 23:43

옥류천 권역

우리의 문화재/창덕궁  2011-06-06 21:2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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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동쪽의 산줄기의 하나인 응봉에서 창덕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응봉능선이 있습니다.

옥류천은 인조임금 때인 1636년, 응봉계곡의 물줄기를 옥류천으로 끌어 들여 계곡과 더불어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약간의 변형을 주어 만들어진 궁궐의 숨은 계곡입니다.

 

소요암(逍遙巖)과 옥류폭포(玉流瀑布)

옥류천에 중간 부분에 소요정과 마주보고 있는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에는 이 계곡의 이름인 옥류천(玉流川)이라는 3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이 玉流川이라는 글씨는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어필로 전하고 있습니다.
옥류천이라는 인조의 어필이 있는 바위를 소요암이라 부르는데 소요암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세워진 바위에 인조의 어필과 숙종의 오언절규가 새겨져있습니다.

또한 숙종임금도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는데 소요암에 오언절구시를 새겼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비류삼천척(飛流三百尺)이니 날아 흐르는 물이 삼백척이요

요락구천래(遙落九天來)라 아득히 떨어지는 물은 구천에서 내리네

간시백홍기(看時白虹起)이니 볼 때 흰 무지개 일고

번성만학뢰(翻成萬壑雷)라 골짜기마다 우레 소리 가득 하네

2단계는 바닥에 인공으로 가미하여 만든 물골을 따라 흘러가는 물을 곡수라고 합니다.
소요암 바닥  평평한 부분에 경주의 포석정을 본 딴 물골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파내었고 맑은 곡수는 물길을 따라 한바퀴 돌아 정자 앞에 이르러 물이 직각을 이루며 폭포를 만듭니다.
3단계는 물골을 따라 흐르던 곡수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폭포를 만드니 이 폭포를 옥류폭포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옥류폭포는 순전한 자연 폭포가 아닌 인공을 가미한 폭포로 물이 아래쪽으로 직각을 이루는 곳과 물이 떨어지는 바위면을 매끄럽게 깎았다는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물골을 따라 흐르는 곡수에 술잔을 띄우고 풍류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이곳에서 글짓기 내기를 하였는데 이를 유상곡수연이라합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암반위에 물길을 따라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는 풍류놀이로 곡수놀이라고도 불립니다.

유상곡수연이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전에 운에 맞추어 시를 짓고 즐기는 풍류놀이로 알려져 있지만 당초에는 제례의식의 하나인 계욕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계욕이란 음력 상사일에 동류라고 하는 물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멱을 감음으로써 상서롭지 못한 재액을 떨어버리는 연중행사였다고 합니다.

계욕을 마친 뒤에는 물가에 앉아 제물을 나누어 음복을 하는데 이를 계음이라 하는데 이러한 계욕과 계음이 변형이 되어 풍류놀이로 변했고 그 하나가 유상곡수연으로 역사에는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정조임금 17년인 1793년 봄, 정조임금이 신하들과 그 자제를 후원으로 부르고 승지나 사관을 지냈던 사람들을 초청하여 후원의 여러 경치를 구경케 하고 옥류천에 이르러 술과 음식을 베풀었으며 신료들로 하여금 소요암 암반의 굽이쳐 흐르는 곡수에 술잔을 띄우고 그 술잔이 자기 앞을 지나기 전에 시를 짓고 잔을 들어 마시게 하였는데 저녁이 돼서야 끝이 났는데 이곳에서 곡수연을 즐겼던 정조임금은 그 소감을 시로 표현했는데 풀이를 하면 이러합니다.

옥같이 맑게 튀어 흐르는 물 굽이굽이 길기도 한데,

  난간 곁의 산 빛은 초가을 서늘함을 보내어 오네.

  호량에는 절로 물고기 구경하는 낙이 있으니,

  난정에서 술잔 돌리는 풍류 정도뿐이랴. 』

 

정조임금과 신하들이 옥류천 소요암에서 풍류를 즐기며 곡수연을 베풀며 지은 시는 현재 경복궁 안에 있는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정(御井)

소요암 뒤, 청의정 앞에 있는 샘으로 현재는 어정의 뚜껑을 대리석으로 만들어 덮었는데 아마도 어정의 정비는 고종이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소요정에서 어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돌다리를 건너야 하며 어정 주위는 이끼가 자라 아름다움을 더해주며 어정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수량의 변화가 없이 계속 흘러 넘칩니다.

어정이라는 샘의 이름으로 보아 예전에는 임금이 이곳 샘물을 마셨으리라 생각되는데 지금은 어정 물을 먹을 수 없습니다.

샘 위쪽으로고 감사원이나 성균관대학교가 있어 물이 오염될 수도 있겠지만 관리자가 신경을 쓰고 주기적으로 어정을 청소하거나 관리를 해야하는데 관리는 하되 청소는 하지 않아서 더욱 음용이 불가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요정(逍遙亭)

상림3정 중의 하나로 옥류천 구역 중에서 가장 절묘한 위치에 서있는 정자로 옥류천 폭포와 인접해 있으며 태극정과 청의정의 경관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인조임금 시절인 1636년에 정자를 세우고 탄서정이라 불렸는데 나중에 소요정으로 바뀌었으며 소요정으로 정한 이유를 소요정기에서 정조임금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정자를 소요로 이름한것은 마음과 땅이 서로 잘 만남 때문이다.

마음에 물(物)이 없는 사람은 능히 물(物)을 소요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땅을 얻지못하면 아무리 소요하고자 하여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비록 그런 땅이 있더라도 어떻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

지경이 마음과 더불어 함께 광활하고 물(物)이 사람과 더불어 잘 어울려서, 하늘과 땅 사이에 다시 어떤 사물이 내 마음의 즐거움을 옮길 수 있으지를 알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소요정이 소요라는 명칭을 얻게 된 까닭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소요”란 속세를 초월하여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경지를 말합니다.

 

 

청의정(淸猗亭)

태극정 서측 사각 연못(논) 가운데 지은 초가 정자로 인조임금 시절인 1636년에 소요정과 태극정과 함께 지은 정자로 창덕궁의 정자 중 유일한 초가지붕으로 되어있는 정자입니다.

청의란 맑고 잔잔한 물결이란 뜻으로 천원지방설에 따라 지붕은 둥글고 마루는 네모지게 만들어 졌습니다.

해마다 봄철 경칩이 지나면 청의정이 있는 작은 논에 모내기를 하는데 이는 농사가 근본인 나라에서 임금이 농사를 모른다면 안 된다 하여 임금이 직접 농사일을 해 봄으로 백성의 수고로움을 조금이나마 느껴 본다는 절대군주의 백성사랑을 엿 볼 수 있음입니다.

 

태극정(太極亭)

청의정 동쪽에 있는 정자로 안정감을 주는 아(亞)자 모양의  정자입니다.

평난간, 깨끗한 화강암 축대, 주변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적정한 건축규모 등이 태극정이 갖추고 있는 중요한 미적 요소들입니다.

이곳의 정자의 이름은 운영정(雲影亭)으로 물에 비친 구름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인조임금이 소요정과 청의정과 함께 다시 지으면서 태극정으로 바꾸었는데 태극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실체 또는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이전의 세상 만물의 원시 상태 등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농산정(籠山亭)

농산이란 직역을 하면 “둘러쌓인 산“이지만 정자의 이름으로 삼은 깊은 뜻은 산으로 둘러 싸고 있는 계곡의 물소리 때문에 세속의 시비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정조임금은 제사 전날 마음을 수양하는 절차를 밟는 재궁의 역할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모친인 혜경궁 홍씨는 환갑잔치를 위해 화성으로 행궁에 관여한 신하들을 이곳 농산정으로 불러 음식을 장만하고 대접하는 반빗간으로 이용하기도 하였고 순조임금은 이곳에서 본인의 실력으로 관직을 갖은자가 아닌 조상의 공으로 관직을 가진자들에게 특명을 내려 이곳에서 학문을 시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취한정(翠寒亭)

취한정은 옥류천으로 들어서면서 첫 번째로 만나는 정자입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며 숙종임금 이전부터 독서와 휴식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취한이란 푸른 소나무와 찬 개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여름에도 한기가 감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정자는 임금님이 어정의 약수를 든 후 잠시 쉬었다 가는 공간으로도 이용된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자는 옆면에 창이없는 정자인데 정자 4곳의 기둥을 보면 엎면으로 벽체나 창문을 달았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사방이 막히고 창문을 냈던 정자라고 보고있습니다.

 

 

취규정(聚奎亭)

후원 존덕정을 지나 옥류천으로 가는 길에 경사진 오르막을 막 올라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옥류천으로 내려가기 전에 있는 정자입니다.

이 정자는 인조임금 시절인 1647년 건립되었으며 휴식과 독서 공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취규란 "별들이 규성으로 모여든다."는 의미로 규성은 28수의 하나로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규성으로 별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인재가 세상에 나와서 천하가 태평하고 도덕과 학문이 높아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능허정(凌虛亭)

이 정자는 후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자연에 동화하는 기능을 가진 소박한 정자로 숙종임금 시절인 1691년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능허란 "시원하게 높이 솟아있다"라는 뜻으로 세속을 떠난 초월적인 공간 또는 높은 정신세계를 능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산림이 울창하여 능허정에서 궁궐 밖을 구경하기도 힘들지만 옛날에는 임금님이 이곳에 나와 세상 구경을 하곤 했나봅니다.

능허모설(凌虛暮雪)이라 하여 능허정에 올라 눈 내리는 저녁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상림10경 중 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