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신선원전
우리의 문화재/창덕궁 2011-04-06 20:48:21
신 선원전은 조선총독부가 각각의 궁궐에 있던 선원전을 모두 헐고 의해1921년 창덕궁 북측 대보단 자리에 새로이 선원전을 지었으니 이 건물이 신선원전입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1921년에 덕수궁(경운궁)의 선원전을 옮겨다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 자리에 짓고 다른 궁에 있는 선원전은 모두 헐고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원래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궁마다 선원전이 있어 고종이 경복궁에 묵을 때는 경복궁 선원전에 선대왕들의 어진을 모셨고, 창덕궁에 묵을 때는 창덕궁 선원전에 어진을 모셨고, 덕수궁에 묵을 때는 덕수궁 선원전에 어진을 모셨습니다.
경술국치 때 덕수궁에 묵었으므로 당시 선대왕 들의 어진은 덕수궁 선원전에 모셨다가 일제에 의해 이곳 신선원전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당시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익종), 헌종까지 의 어진이 신선원전으로 옮겨 모셨는데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되었습니다.
창덕궁 의효전(昌德宮 懿孝殿)
의효전은 신선원전의 동남쪽에 위치한 건물입니다.
원래 고종 때인 1868년 경복궁에 처음 세워져 혼전으로 쓰이던 문경전이라는 전각이었는데 황태자였던 순종의 첫 번째 아내 순명효황후 민씨의 혼전이 되면서 의효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혼전이 되면서 생긴 이름은 상례가 끝나면 사라지고 원래 이름대로 돌아가는데 순명효황후는 순종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계속 위패를 의효전에 모시면서 그대로 이름이 굳어졌다고 합니다.
고종이 죽자 일제가 덕수궁에 있던 의효전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인데 경복궁에 있을 때는 문경전으로 있다가 덕수궁으로 옮기며 의효전으로 이름이 바뀌고, 일제에 의해 덕수궁에 있던 의효전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 건물을 의로전(懿老殿)으로 알고, 쓰기도 했는데 의효전(懿孝殿)의 효(孝)를 로(老)로 잘못 읽어서 전각의 이름이 잘못 알려졌다는 것인데 2007년에 문헌 조사를 통해 실체를 확인했다고 하는데 의효전(懿孝殿) 현판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창덕궁 몽답정(昌德宮 夢踏亭)
의효전의 서쪽에 있는 정자로 몽답(夢踏)이란 꿈길을 밟고 간다'는 뜻입니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숙종이 꿈에 이 정자에 행차했다하여 몽답정이라 했다.고 적었고, 「영조실록」에서는 김성응이 북영에 작은 정자를 한 채 지었는데 영조가 대보단에서 바라보고 이름을 몽답정이라 내려주고 이를 걸게 하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건물 앞 에는 네모난 연못을 두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연꽃이 있어서 경치가 빼어났다고 합니다.
창덕궁 괘궁정(昌德宮 挂弓亭)
신선원전의 서남쪽에 위치하는 정자입니다.
신선원전의 또 다른 정자 몽답정의 북쪽에 위치하며 중앙고등학교 운동장 담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괘궁이란 활을 건더는 뜻으로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북영이 있었던 곳으로 활을 쏘던 장소입니다.
기단 옆 바위에 괘궁암(挂弓岩)이란 글자가 있고 그 옆에 기유년(己酉年)이라고 새겨져있는데 동궐도와 궁궐지를 참고하면 기유년을 1849년(헌종 15년)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영조 때 윤기라는 사람이 몽답정에 올라 쓴 시에 괘궁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기유년은 1729년(영조 5년)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영조때부터 있었던 정자인데 기단 옆 바위에 괘궁암(挂弓岩)이란 글자는 헌종 때 새결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합니다.
정자는 1칸으로 아주 작고 동서 그리고 남쪽으로 난간을 둘렀으며 북쪽 면은 출입을 위해 난간이 없으며 현판은 없습니다.
신선원전 수복방
신선원전 수복방은 신선원전 서쪽에 위치하는건물로 제를 지내기위한 부속건물, 신선원전을 지키는 사람이 기거하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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