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침전 대조전 권역
우리의 문화재/창덕궁 2011-04-06 19:13:23
왕이 평상시 거처하는 침전이 있는 구역은 흔히 내전이라고 부르며 내전의 중심은 왕비가 거처하는 정전이고 그밖에 왕의 어머니인 왕대비전 등이 있습니다.
<이사진은 1917년 대화재로 침전이 불타기 이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대조전에 대하여
대조전은 1985년1월8일 보물 제816호로 지정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로 중궁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 그리고 철종과 순종이 승하하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답니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으며 1917년 원인 모를 대화재가 발생하여(일본인들에 의한 고의 방화로 추정함)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었고 대조전 측면 합각의 환기창을 보면 동측에는 복(福), 서측에는 수(壽)라고 조각하여 표시하였으며 환기창 주변은 행운을 기원하는 뇌문과 만자문을 혼합한 독특한 무늬를 놓았으며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습니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이며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으며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조전 행각>
특히 대조전은 건물 지붕의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으로 일설에 의하면 임금을 용으로 일컬었으므로 대조전은 중궁전으로 한 지붕아래 두마리의 용이 있을수 없다는 설과 어두운 밤에도 용마루를 보고 왕비전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건축 양식을 변경했다는 설이 있는데 후자가 맞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왕비전의 용마루가 없는 것은 이곳 창덕궁뿐이 아니며 경복궁의 교태전과 창경궁이 통명전도 모두 같습니다.
대조전의 현판은 궁궐지에 의하면 순조임금의 어필이었다고 합니다.
<대조전 합각입니다.>
위는 동쪽, 아래는 서쪽 합각인데 동쪽합갑 환풍구에는 목숨 수(壽), 서쪽합각 환풍구에는 복 복(福)으로 글짜를 새겼는데 이는 왕이나 왕비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좌로부터 서유기에 나오는 1.삼장법사 2.손오공 3.저팔게 4.사오정 5.이귀박 6.이구룡 7.마화상입니다.
<대조전의 거실>
대조전 중건 상랑문에는...
.“우리 조정의 근검에 관한 교훈을 반드시 준수하는데 의의를 두었으나 대지와 원유의 아름다움을 감정은 남에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대조전 거실 서쪽 왕비 침실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백학도라는 진귀한 그림이 있습니다.
<동쪽 왕위 침실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봉황도라는 진귀한 그림이 있습니다.>
<대조전 거실의 화여한 조각과 아래는 대조전 거실 천장으로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청룡과 황룡을 그렸습니다.>
<왕의 침실입니다.>
<왕비의 침실로 침대와 침실용 의자가 있습니다.>
<침대 문양>
<침대 용머리>
<침실의 쌍의자.>
지금은 대조전을 하나의 건물로 부르지만 옛날에는 정전을 양의전이라 했으며 임금의 처소인 동침실을 여일전이라 부르고 왕비의 처소인 서침실을 정월전이라 하여 각각 이름 붙였으나 이후 통칭하여 대조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조전 왕비 침실 안쪽으로 왕비가 사용했던 욕조, 세면대, 욕실 전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프랑스나 이태리에서 수입한ㅁ 것이라고 하는데 보존 상태가 좋아 국제 경매시장에 나간다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나올 듯 합니다.
흥복헌에 대하여
흥복이란 복을 불러 일으킨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뜻과는 반대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건물로 순종임금이 일본의 협박에 못이겨 한일합방 조약을 체결한 역사의 현장으로 경술국치라는 치욕적인 곳으로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곳 입니다.
흥복헌은 주로 황제의 아들이나 형제 그리고 조정대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합니다.
흥복헌 내부입니다.
민족의 수치인 경술국치를 경정하기 위한 마지막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책상같이 보이는 물건과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보이는 건 책상이 아니고 이발도구입니다.
그러니까 고종과 순종의 이발장소로 이용했던 것인데 이발의자이고 책상같아 보이는 건 거울이 달린 이발도구함, 가운데는 머리를 감기기 위한 세면대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경훈각에 대하여
이곳은 화재가 나기전 2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1층은 경훈각이고 2층은 징광루라는 누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17년 화재 이후 복원할 때 경복궁의 자경전을 헐어 이곳에 옮겨 지으며 1층만 복원하고 2층은 복원하지 않았으며 경훈각의 원래 이름은 광세전 또는 광연전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이 선조임금에게 준 망의와 어필이 있었는데 대화재때 모두 타버렸고 현재는 등록문화재인 벽화로 "조일선관도"와"삼선관파도"가 덩과 서쪽 벽에 그려져 있습니다.
경훈각 뒤 화계의 십장생굴뚝
우리나라 궁궐의 굴뚝 중에는 경복궁의 자경전 굴뚝으로 중국의 아미산 굴뚝을 닮았다고 하는데 이곳 경훙각은 경복궁의 자경전을 헐어 옮겨 지어서인지 굴뚝을 십장생을 넣어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십장생은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학, 사슴, 거북입니다.
송녹문---소나무와 사슴을 함꼐 넣은 문양
송학문
봉황문
???---천마같은데 머리가 용이나 도철문같습니다.
송마문---소나무와 말을 넣은 문양이라
송마문이라 했는데 송마문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위에 기록된 송록문이나 봉황문 그리고 송학문은 정식으로 있는 문양입니다.
수라간에 대하여
대조전 행각 서쪽문인 경극문을 지나면 현대식 주방이 잇는데 이곳이 수라간입니다.
1917년 대 화재로 모두 불탄 후 신식으로 개조되어 전기시설과 오븐까지갖춘 현대식입니다.
임금님의 진지를 수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의 고유의 말이 아니고목고에서 전해진 말이라고 하며 조반을 오전 10시가넘어야 드시고 저녁은 오후 5시경에 드셨는데 수라는 대조전 동온돌에서는 임금님이 서온돌에서는 왕비께서 받으셨는데 이해안가는 사실은 왕과 왕비가 한자리에서 겸상을 하지 않었다고 합니다.
가정당에 대하여
대조전 뒤 화계 너머에 있는 건물로 이자리에는 전에 수정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는 수정전보다 품계가 한단계 아래인 가정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옛날 궁궐의 양식에 어긋나는 점은 가정당 마당에는 넓은 잔디가 깔려 있는데 잔디는 죽은 사람의 공간에 활용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묘를 만들 때 쓰이곤 하였으며 궁궐에는 맨 땅으로 마당이 조성되었습니다.
동궐도에는 없는것으로 일제 강점기 때 덕수궁에 있던 가정당을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가정당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순종이 승하하기전 많이 아파서 대전의 궁녀들이 가정당에 모여 밤낮으로 쾌유를 빌었다고 전합니다.
대조전에서 가정당을 갈때 2개의 문이 있는데 중앙에 있는 추양문은 가파른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는데 이문은 종친들이 주로 이용했던 문이며 우측의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계단으로 오르는 문은 천장문이라하고 하는데 이 문으로는 임금이 출입을 하였다고 합니다.
천장문과 추양문에 대하여.
가정당을 오르는 우측의 문으로 주로 임금님이 사용하던문으로 작지만 아담하고 예쁘게 지어졌으며 무지개 형태로 지어졌으며 문 윗쪽 양쪽으로는 학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전통 궁궐양식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50여M 떨어젠곳에는 천장문과 똑같은 문이 하나 더 있는데 추양문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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