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륜산 산행기
산행일시: 2012년 03월 11일
누구와: 서울가고파산악회원 44명과 함께
산행거리: 약 6㎞
산행시간: 3시간15분(11:50~15:05)
산행코스:오소재(11:50)-오심재(12:17)-능허대(12:50,688m)-가련봉(13:15,703m)-두륜봉(14:15,630m)-진불암입구(14:40)-대흥사(15:05)
오늘은 명산 100 중 멀리 강진에 머물고 있는 두륜산을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러 가고파 산악회원과 함께 장거리 여행에 들어갑니다.
옛날 같으면 당일로 우리나라 육지로 제일 남쪽에 위치한 강진을 갔다 온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는데 고속도로를 사방으로 낸 덕택으로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며 당일로 산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곤륜산에서 시작된 맥이 백두산을 지나 남으로 뻗어내려 소백산맥 자락에 지리산을 만들고 지리산에서 가지를 친 맥은 영암의 월출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에 이르러서 융기하여 두륜산을 만들었는데 두륜산은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사찰과 유적지 등이 많고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에 있는 산으로 겨울에도 중부이북 지방에 비해 온도가 높아 온대성 활엽수와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곳곳에는 억새밭이 있어 가을이면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풍경과 만물상을 이루고 있는 암봉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유명한 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오소재 들머리
등로에서 보는 풍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6시30분에 사당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11시50분이 되어 두륜산 외곽 오소재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오늘따라 회원들이 여자가 많아 45명 중 15명 이상이 되는 것 같았고 한겨울이 아니라 스패츠나 아이젠을 착용하는 시간이 없이 막 바로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오소재에서 오심재까지는 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은 편이었으나 얼었던 땅이 녹아 진흙을 개놓은 것처럼 질퍽거리는 곳이 요소요소에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습니다.
깃발 꽂는 산행은 하지 않기로 했지만 오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선두가 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이른 야생화는 없는지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아직은 철이 이른지 보이질 않았고 고도가 높아지며 시야가 조금씩 열리면서 좌우로 설악산의 울산바위 같은 웅장한 바위를 보며 감탄사를 외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 하였으며 들 뜬 기분으로 한동안을 올라가 넓은 헬기장이 있는 오심재에 도착을 합니다.
오심재에서 본 노승봉
오심재는 두륜산 가련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능허대를 이루고 한동안 뚝 떨어진 지점이며 다시 솟구쳐 고계봉을 이루는데 오심재에서 보는 능허대와 고계봉은 상당히 위압적이었고 아름다웠습니다.
이곳 오심재에서 직진으로 내려가면 대흥사가 있는데 원래 등산코스는 대흥사에서오심재로 올라와 원점회귀를 하는 것이 정도인데 산악회에서는 사찰입장료를 내지 않으려 오소재를 들머리로 잡는 것 같았습니다.
능허대 아래 헬기장
오심재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좌측 이정표가 서있는 곳으로 능허대를 오르기 시작합니다.
능허대를 오르는 중간 바위에는 고드름이 달려있고 바람이 불어대니 밑에서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엄습해 오는 가운데 한동안을 올라 헬기장에 닿고 헬기장 앞에 우뚝 솟아 앞을 막고 있는 능허대를 보며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좌측으로 우회하니 등산객들이 긴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통천문이라고 해야되는지? 이 문을 지나야 능허대를 갈 수 있다.
통천문 을 올라서는 일행들
원일인가 싶었는데 두륜산의 유명한 석문에 도착한 것으로 속된말로 개구멍이랄까? 아니면 유식한 말로 통천문이랄까? 이 석문은 경사가 심해 쇠사슬과 로프로 안전장치를 해 놓았지만 여자들이 많아서 인지 정체가 심해 지체가 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대기하는 시간에 날아갈듯 한 강풍이 부니 모든 사람들이 자켓 모자를 쓰고 단단히 바람과 추위에 대비를 하나 나는 자켓에 딸려있는 모자도 떼어놓은 상태로 그대로 강풍을 맞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며 등산 모자도 벗어 배낭끈에 달아 강풍으로 인한 모자의 분실을 사전에 막아 봅니다.
통천문은 네발로 기어올라 한 사람이 빠져 나갈 수 있는 문이며 쇠사슬과 발 판을 만들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으며 통천문을 지나면 매몰찬 바람을 맞으며 10여분 올라서 능허대에 도착을 합니다.
능허대의 정상 의 모습
노승봉이라고도 불리는 능허대의 정상은 30여평 되는 통 바위로 경사는 있지만 평평하게 다듬은 듯해 위험성은 전혀 없으며 직벽을 이루고 있는 동북 방향으로 멀리 대흥사가 평화로이 보입니다.
능허대에서는 사방이 모두 열렸있습니다.
8개봉우리로 이루어졌다는 두륜산은 제일 높은 가련봉(703m)을 가운데 두고 동남으로 능허대라 불리는 노승봉(685m), 고계봉(638m)이 있고 서북에서 북으로 둘리치고 있는 봉우리로 두륜봉(630m),대둔산이라 불리는 도솔봉(672m), 연화봉(613m), 혈망봉(379m), 향로봉(469m)이 가운데 대흥사를 두고 감싸고 있는데 마치 분화구 한가운데 절을 지은 것 같은 분위기를 연상케 합니다.
능허대에서 가련봉이나 두륜봉의 조망도 아주 뚜렷했으며 가련봉을 오르는 산님들의 갖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자켓은 마치 봄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능허대에서 불어대는 바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1분여를 버티지 못하고 내려서는데 사방을 조망한다고 5분 이상을 있으려니 손이 얼어 마음먹은 대로 카메라 조작을 할 수가 없어 능허대를 내려섭니다.
능허대에서 본 가련봉의 모습
능허대에서 본 두륜봉과 대둔산(도솔봉)
능허대에서 내려서는 길은 완전 암릉으로 로프와 쇠사슬이 매여져있으나 강풍이 불고 여자들이 많아서 정체가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능허대를 내려서면 우측으로 우회하여 가련봉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가련봉은 4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봉이 최고봉이며 1봉은 옆으로 우회하여 오르지 않고 바로 최고봉인 2봉을 오르게 되어 있는데 험한 암릉이라서 정체는 항상 이어집니다.
가련봉 정상석이 초라하다
가련봉은 4개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고봉은 2봉이고 바로 앞이 3봉 다음이 4봉이다
서두루지 않고 앞사람을 따라 올라선 가련봉은 능허대와 마찬가지로 강풍이 불어대더니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며 어렵사리 올라선 사람들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합니다.
정상에서 서면 남해의 다도해가 한눈에 조망되고 제주도 한라산도 조망이 된다는데 오늘은 눈보라가 치니 남해 조망도 남의 집 일같이 느껴지고 한라산은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가련봉에서 보는 노승봉과 고계봉
그나마 대흥사를 감싸고 있는 8개봉이 뚜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가련봉을 중심으로 둥근원을 그린 봉우리의 모습이 산 이름에서 묻어나는 것 같이 바퀴처럼 둥근 모양을 지니고 있다 해서 두륜산아라는 이름이 붙었다하며 또 다른 일설에는 대흥사의 전 이름은 대둔사였는데 대둔사지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고 명산인 백두산의 “두”와 중국의 명산인 곤륜산의 “륜“자를 따서 두륜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추워 증명사진 한방 부탁하기도 미안했지만 그래도 안면 몰수하고 누군지 모르는 산님에게 부탁하여 증명사진을 찍은 후 가련봉을 내려섭니다.
가련4봉에서 본 두륜봉과 대둔산(대둔산은 두륜산 도솔봉이라 부름)
가련봉에서 만일재로 내려서며 본 입석
가련봉에서 만일재로 내려서는 길은 데크계단을 설치하여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전망대를 겸한 계단에서 건너편 두륜봉이나 도솔봉을 보는 풍광도 그만이지만 발아래 펼쳐진 만일재의 모습도 장관이었습니다.
긴 데크계단을 내려서 이어지는 암릉길을 지나 억새가 만발하면 보기가 좋다는 만일재에 도착을 하여 이정표를 보니 천년수가 만일암쪽으로 200m떨어진 곳에 있다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천동과 천녀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천년수를 꼭 보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등산로에서 벗어난 지점에 있다하니 천년수를 보러 갔다 올까 망설였는데 도로상태가 어떤지 모르고 천년수를 보러 갔다 올 경우 확정은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도솔봉을 경유한다는 복선을 깔고 있었기에 천년수를 포기하고 두륜봉으로 오릅니다.
만일재
만일재에서 본 가련봉
이른 봄으로 나뭇잎도 나지 않아 삭막하다는 생각이었는데 대나무가 있 곳으로 들어서 양쪽으로 하늘로 치솟은 협곡에 도착하니 마치 중국무협영화에 나오는 장소 같은 착각에 빠진 곳은 구름다리 입구 3거리였습니다.
다시 되돌아 올 것이라 기대했으므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입구에 들어서 신비스러운 하늘다리를 지나 두륜봉으로 오릅니다.
두륜봉에서 본 가련봉으로 능허대가 더 높이 보이며 만일재로 몰려드는 인파가 줄을 잇는다
두륜봉은 큰 3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봉이 제일 높으나 잡목이 있어 조망을 가리고 직벽의 위용도 없어서인지 만일재 방향으로 50여m 떨어진 봉우리에 두륜봉 정상석이 있고 이곳에서는 만일재와 가련봉을 한눈에 볼 수 있었으며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강풍도 이곳에서는 멎은 상태였습니다.
구름다리 위 모습으로 마치 거북이가 목을 길게 빼고 입을 벌려 다리를 만든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잠시 시간을 보내다 다시 구름다리로 돌아와 위와 아래로 지나다니기도 하며 한동안을 구름다리 위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누군가는 이 구름다리를 보고 코키리코를 닮았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마치 거북이 길게 목을 빼 돌과 돌을 이어 다리를 만든 것 같이 보였습니다.
한 동안을 구름다리에서 시간을 보내다 우측으로 난 길로 내려서며 이곳으로 내려가면 구름다리 입구의 길과 만날 것이라 예상을 했는데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으니 입구3거리에서 직진으로 나가면 능선을 따라 도솔봉으로 이어지는데 구름다리위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은 동백나무 숲을 지나 진불암으로 내려서는 길이니 다시 구름다리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조금 가다보면 도솔봉으로 빠지는 길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내려서다 보니 진불암으로 되돌리기엔 너무 많이 내려왔으므로 도솔봉은 포기한다고 마음을 먹으니 한편으로 아쉬운 점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귀찮은데 잘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불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동백나무 숲이다
동백나무 숲을 하염없이 지나며 행여나 일찍 꽃망울을 터트린 나무는 없을까? 신경을 쓰며 내려왔지만 아직 꽃이 피기는 이른가 봅니다.
진불암골은 봄을 재촉하는 물소리가 우렁차다기보다 활기에 찬 느낌이었으며 위에서 내려다 봤을 때보다 실제로 걸으니 계곡 길은 의외로 깊고 길었습니다.
한참을 걸어 앞이 터지며 표충사와 대흥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표충사 전경-표충사는 절이 아니고 사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표충사는 절이 아닌 서산대상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었으며 표충사 호국문 앞 장군샘은 전설이 있는 샘이었는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인지 볼품이 없었습니다.
호국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보연각이 있으며 보연각 맞은편에는 의중당이 있는데 의중당은 의중당은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당시 6군의 군수가 봄ㆍ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법회를 열어 그 정신을 전승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제문으로 들어서면 3개의 작은 전각이 있는데 가운데전각이 서산대사의 초상을 모신 표충사이며 우측의 전각은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각이며 좌측의 전각은 조사전입니다.
표충사 호국문 앞에 있는 장군샘
표충사를 둘러보고 호국문을 나서는 앞의 직은 샘은 장군샘으로 이 샘물은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해마다 한 번씩 호수의 흐름같이 물이 소용돌이치며 솟구쳤다는데 어느 스님이 이 물을 받아 마시고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고산 윤선도가 이 절의 스님들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 능히 장군을 낳을 샘이라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물을 받아 마셨다는데서 유래되어 장군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안내문이 있으나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식음을 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표충사를 나와 대흥사로 접어듭니다.
대흥사 전경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위치한 대흥사는 신라진흥왕 5년에 아도화상에 의해서 창건되었다 하는데 서산대사가 마지막으로 설법을 하였던 곳이며 서산대사는 바다와 산이 이곳을 둘러 안고 있는데다 골짜기 또한 그윽하여 만세의 땅이라 하였다고 합니다.일제 때 대흥사라 고쳐 부르다가 1993년 대둔사라는 이름을 회복했다 하는데 아직도 일제의 잔재인 대흥사로 부르고 있으니 하루 빨리 대둔사로 표기하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보현전
표충사에서 나와 위쪽으로 올라서니 넓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전각이 하나씩 있어 이곳이 대웅전으로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보현전과 문수전으로 보현전은 보현보살을 주불로 한 전각으로 보현보살 중생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덕을 가졌다 하는데 보현각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가 끝난 후 서울로 돌아가면서 대흥사에 들러 서글픈 귀양살이 속에서 인생관이 바뀐 추사의 심정이 잘 드러낸 낸 글씨라고 하며 추사는 귀양 가기 전에도 이절에 들러서 무량수각이란 현판도 써 주었다고 합니다.
보현전을 내려서 천불전을 들리고 나서 대웅보전으로 가는 도중 연리근을 만났는데 이제까지 연리지나 연리목은 들어보고 실제 나무도 보았지만 연리근은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연리근 느티나무
연리근 느티나무 아래 이러한 안내문이 있습니다.
연리근(連理根)
<천년의 인연, 만남, 약속>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라고 합니다.
오랜세월을 함께하며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만나면 연리목, 가지가 만나면 연리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라고 불립니다. 삼국사기와고려사에도 연리나무에 대한 기록이 전하는데 우리 조상은 연리나무가 나타나면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로 여겼습니다. 대흥사의 연리근은 천년된 느티나무로 그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왼쪽 나무는 음위 형태이며 오른쪽 나무는 양의 형태로 언듯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연리 나무 앞에서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사랑의 소원이 성취되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사랑, 소원, 희망. 승진, 건강, 화합, 우정, 합격, 성공 등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에 대흥사에서는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합장합니다.
대흥사 대웅보전
연리근과 종각을 지나 외진 곳으로 들어서 작은 도랑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 대웅보전으로 갑니다.
대웅보전은 도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편액에 대하여는 뜻 깊은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이 편액은 안내문에서 밝히는바와 같이 이광사가 쓴 것인데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가며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렸다가 이 편액을 보고 촌스럽다며 추사가 새로이 편액을 써 주었는데 9년 동안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려 이광사의 글씨를 이해하고 다시 바꾸어 달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웅보전의 좌측에 있는 무량수각의 전각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대웅보전으로 들어서 대충 둘러보고 대흥사를 나서며 뒤 돌아보니 두륜산과대흥사는 산세와 사찰의 조합이 잘 이루어 졌는데 지금도 그 당시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에 선하여 현실을 보는 듯 착각으로 빠져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