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100산산행기

화왕산 산행기

범솥말 2025. 4. 19. 09:38

화왕산 산행기

 

산행일시: 20120329

누구와: 주산나산악회원44명과 함께

산행거리: 10.1

산행시간: 5시간25(10:25~15:50)

산행코스:화왕산주차장(10:25)-전망대(11:06)-755.8(11:50)-배바우(12:15)-환장고개(12:34)-정상(12:50.756.6m)-천문대(13:28)-청간재(13:44)-관룡산정상(754m,14:06)-용선대(555m,14:52)-관룡사(15:10)-옥천리주차장(15:50)

 

창녕을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로 30여년전 온천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창녕에 있는 부곡하와이는 무척 유명했습니다.

집사람과 부곡하와이 온천을 찾았던 게 처음이었고 이번에는  100대 명산 답사를 위해  창녕을 오게 되었는데 산은 여러 인연을 맺어주니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이라는 생각을 다시 느끼게 합니다.

화왕산은 4계절 특색이 있는 산으로 봄이면 진달래가 온산을 뒤덮으므로 마치 산이 불이 타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여름이면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으로 어느 산에 뒤지지 않으며 가을이면 정상부 6만여 평이나 되는 평원에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덮인 평원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므로 4계절 산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화왕산(火旺山)은 원래 화왕산(火王山)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옛날 화산활동이 활발하던 시절 산꼭대기에서 불을 뿜으므로 큰불뫼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왕자가 한문으로 에서 으로 바꾸어졌는데

갑설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지명을 일본넘들 마음대로 바꿀 때 임금 왕()자 앞에 일본의 앞글자인 날일()자를 앞에 넣어 왕성항 왕()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게 맞는 말이라면 창녕에서 서두르고 전 국민이 동의하여 전에 쓰던 산 이름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며

을설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창녕은 강의 하구가 있어 예로부터 홍수피해가 잇따르면서 물의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서 임금 왕()자 앞에 날일()자를 앞에 넣어 왕성할 왕()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화왕산의 억새태우기 축제는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로 황홀함과 슬픔을 함께 가지고 있는 축제로 화왕산의 억새태우기 축제는 1995년을 시작으로 19962, 20003, 20034, 20065, 20096차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는데 당시 화왕산 억새태우기 축제는 창녕군민은 물론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사로 상당한 사람들이 축제에 참가하여 밤하늘을 붉은 불길이 춤추는 장관을 보며 감흥에 젖기도 하였는데 6차 행사인 2009년 대보름맞이 축제를 보기위해 3만 여명이 운집하였는데 강한 바람과 돌풍이 불어 불길이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있는 방향으로 불어와 뒷사람 생각할 겨를이 없이 뒤로 밀리며 맨 뒤에 있던 사람이 절벽 밑으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있어 참가했던 사람들이나 뉴스를 접하는 전 국민이 슬픔을 함께하기도 하였는데 인명사고로 인해 억새태우기 축제는 일시 중단인지 완전 폐지인지는 모르지만 중단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며 차치단체에서 각별한 주의 속에 다시 화왕산 정상에서 억새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 장관이 다시 연출되기를 고대해 볼 뿐입니다.

창녕읍을 지나 화왕산 입구 주차장에 내리니 산행을 하기 전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고분군이 입구 좌측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6가야 시대의 고령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던 대가야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눈앞에 보이는 교동 고분을 비롯해 송현동 고분 등 20여 곳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아쉬운 점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놈들이 모두 도굴했다는 사실과 당시 출토되었던 많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으로 아마도 일본의 보물들이 이곳 등에서 가져가서 근거도 없이 일본의 보물로 지정한 건 아닌지..................

주차장에서 포장된 도로를 따라 1km이상 올라가면 갈림길 한편에 산행안내판이 있는데 산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안내판에 나와있는 3개의 산행코스중 하나를 선택하여 산행을 하는데 우리 일행은 전망대를 이용한 제1코스로 오르라는 대장의 지시가 있었으니 우측길로 들어섭니다.

우측 길로 들어서 등산로를 벗어나 좌측으로는 100m 떨어진 곳에 약수터가 있는데 약수터를 들리는 일행은 아무도 없으나 화왕산을 눈으로만 평가하는 것보다 입으로도 음미하고자 약수터에 들려 시원한 약수를 한 바가지 들이 키고 맑은 정신으로 삼림욕장으로 들어서 멋드러진 조선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명상의 숲을 지나갑니다.

이제껏 순탄한 길을 걸어왔는데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아주 짧은 길이지만 가파른 길로 힘들게 오르면 자하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정자에 올라 한숨을 돌리고 가야할 산세를 조망합니다.

중앙으로는 능선 길로 755.8봉을 오르면서 계속 기묘한 암릉을 지나는 길로 화왕산 오름길 중 최고의 코스입니다.

우측으로는 장군바위코스로 길게 늘어선 능선을 따라 암릉이 멋들어지게 들어서 있으며 좌측으로는 소나무 능선을 따라 화왕산의 정상이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전망대를 뒤로 하고 오르는 길은 처음부터 755.8봉에 이르기 까지 별반 다른 점이 없으나 차이가 있다면 정상을 바라보는 각도의 차이와 기기묘묘한 바위군들을 밑에서, 눈높이에서, 발아래 두고 보는 점이 다르다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암릉 길을 오르다 보면 거대한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수 십 년을 모진 비바람과 싸우며 살아온 아름다운 자연분재 소나무가 곳곳에 있으니 보기에 더 없이 좋았습니다.

한 시간이상 암릉 길을 오르며 보는 각이나 위치에 따라 모습을 바꿔 보이는 자연의 신비를 느끼다 보면 주능선에 닿게 되는데 이곳은 정상과 높이가 비슷하고 조망도 좋은 편이나 특별한 봉의 이름은 없으니 755.8봉으로 부릅니다.

각각의 봉우리 마다 조망의 의미를 달리 할 수 있는데 이곳 755.8봉에서는 창녕시내는 물론이고 주차장에서부터 전망대를 지나 이곳까지 이어지는 암릉을 빠짐없이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직선거리 200m 되는 거리에 있는 배바위와 가운데 넓은 평원을 두고 마주보이는 정상의 모습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755.8봉에서 일행들과 이제까지 흘린 땀의 보상으로 시원한 바람과 사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휴식을 취하다 755.8봉을 뒤로하고 지척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데 산 정상을 한 눈에 관측할 수 있는 요새에 세워져 있으나 산불감시원은 없는 듯 하였습니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동측으로 멀지않은 곳에 배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창녕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산 정상에 있는 이곳에 배를 매어놓았다 해서 배바위로 전해진다고 하는데 더 이상의 전설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볼 수는 없었는데 해발 756m나 되는 산꼭대기까지 물이 찰 정도면 세계 각처가 물바다가 되었을 텐데 그렇게 큰 홍수가 발생했던 때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외에는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는데 노아의 방주 때 이곳에서는 배바위에 배를 묶어 생명을 유지하였다면 성경의 역사도 다시 바꿔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일행들 대부분은 배바위에 잠시 들리거나 아예 들리지 않은 상태로 서문이 있었던 환장고개를 향해 내려가고 조용해진 배바위에는 나 혼자 남아 배바위 밑에서 배바위를 올려다보며, 배바위 위에서 정상과 관룡산을 보며, 동문 앞 새로 복구한 성곽을 보며 많은 추억을 만들어 카메라에 담고 떠나는 시간이 아쉬워 한동안을 머물고 넓은 평원의 억새를 헤치며 서문으로 이어갑니다.

화왕산 정상은 분화구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북과 남은 750m대를 유지하는 반면 동과서는 북과 남에 비해 50~100m는 해발이 낮으며 서문과 동문 주위에는 샘도 있으며 입구에서 제2코스를 택하여 오르면 삼림욕장을 지나 서문 직벽을 올라오는데 이 고개 이름이 환장고개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내려다보이는 동문은 4곳 중 해발이 제일 낮은 곳으로 동문주변의 성곽은 보수가 진행 중이며 동문 옆 삼지가 있는데 굴삭기를 동원하여 공사가 한창입니다.

삼지란 화왕산성안에 있는 세 군데의 분화구를 말하며 용지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정기를 받아 창녕 조씨의 시조인 조계룡(曺繼龍)이 태어났다는 탄생설화와 창녕 조씨 득성비에 그 유래가 적혀있다고 하나 멀리서 바라 볼 뿐 성곽을 한 바퀴 도는 시간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화왕산~~~

전자에 논한 것처럼 화왕산하면 떠오르는 것이 산정상 억새평원에서 억새태우는 행사입니다.

2009년 6차를 마지막으로 역새평원 태우기 축제는 없어졌습니다.

산림이 우거져 화재위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상부근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불바람이 불어오자 아비규환이 된 상태에서 절벽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있어서 입니다.

불과 3년 전일로 그때 사고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서문에서 정상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쉽게 오를 수 있는데 사방을 둘러보며 여유를 가지고 일행들이 모두 떠난 정상에 혼자 주인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가깝게 내려다보이는 시내와 남쪽과 정상을 잇는 중간은 갈대가 부는 바람에 노래를 부릅니다.

옛날에 큰 사고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촛불과 같이 새로 나올 새싹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며 한 줌의 재로 변했을 갈대들의 합창이............

축제에 참여했다가 참사를 당한 그 영혼을 위한 노래를...........

정상에서 한동안을 머물다가 한동안 갔을 일행을 쫒아 발걸음을 옮긴니다.

축제를 연상하며 환희에 젖어보며 점점 멀어져가는 억새의 합창을 뒤로하고 북쪽 중간봉을 지나 3봉 중간에 내려서니 많은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자리를 같이하고 늦게서 합류하여 식사를 하면 시간을 지체하고 그것이 여러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여 행동식으로 준비한 떡으로 요기를 합니다.

급히 서들러 일행의 뒤를 따른다고 빠른 걸음으로 북쪽 3봉을 지나 무너진 성곽 주위로 나있는 길을 따라 내려서다 보니 이 길로 내려서면 동문으로 가거나 허준촬영 쎄트장으로 가야 하므로 다시 3봉으로 올라서 능선으로 나섭니다.

소나무와 잡목이 있는 사이를 지나며 진달래의 명산으로 꼽히는 화왕 진달래 군락지에 들어서 길 양쪽으로 늘어선 굵은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봄이면 꽃 터널이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지만 능선을 따라 있는 진달래도 많기는 하지만 화왕산의 진달래 명성은 허준촬영 세트장건너편은 넓게 펼쳐진 능선을 칭하는 것으로 아직은 꽃눈을 키우고 있지만 4월 중순이 되면 이 일대는 진달래로 물들 것입니다.

허준 쎄트장 위쪽으로 나 있는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파란색 스레트건물 한 동이 보이는데 이 건물은 경북대학교 천문대 동아리들이 별을 연구하는 곳인가 봅니다.

은하철도가 다니는 하늘나라의 별은 우리는 깨끗하고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생각하지만 천문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수백광년의 거리에 있는 별들이 다수이므로 지금 보는 별빛은 이미 수백년전에 보낸 빛으로 현재 눈에 보이는 별이 현존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우주를 관장하는 제우스는 인간이나 님프들을 하늘 별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하니 제우스에게 큰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하늘의 별자리가 되어 항상 하늘에서 아래 인간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다고 합니다.

<위 비는 당시 천문회 회원이었던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여 마음을 담아 세운 비입니다>

작은 천문대 건물뒤에는 작은 표지석이 있는데 표지석에는

그대여 하늘에 별이 되소서, 홍이를 보내면서 친구가-----“

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주인공이 되는 자는 천문학을 공부하던 천문회 회원으로 불운의 사고를 당한  것같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무명봉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상월지를 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무척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으므로 일행을 만났어야 했는데 능선에는 일행이 없으니 대부분 천문대에서 허준 쎄트장으로 내려갔는지 일행이 없어 혼자서 청간재까지 걸어 봅니다.

청간재는 화왕산과 관룡산을 구분하는 고개로 능선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포장된 도로가 있으며 남북으로는 화왕산과 관룡산을 잇는 안부이기도 하며 청간재에서 관룡산 정상까지는 800m로 그리 멀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으며 길도 호젓하고 좋은 편이나 길 양쪽으로는 정비되지 않은 소나무 숲이 답답함을 느끼게 합니다.

관룡산 정상은 헬기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석도 없고 정상목이나 나뭇가지에 정상을 알리는 정상판도 없고 코팅지로 정상을 알려주는 A4 용지도 없으며 누군가 보도블록에 관룡산이라 써서 작은 돌로 쓰러지지 않게 세워놓았는데 보기에 안 좋았습니다.

정상 헬기장 사방으로는 잡목이 우거져 관룡산 병풍바위의 조망이 어려운 편으로 지자체에서 병풍바위 방향의 잡목을 제거하여 조망은 물론 포터라인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습니다.

이곳 정상에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은 남쪽 방향입니다.

병풍바위는 동쪽에 있어 혼자서 병풍바위로 갈까? 몇 번을 망설였으나 병풍바위에서 관룡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병풍바위 쪽으로 간다고 결정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헬기장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10여명의 일행이 올라서니 이들과 함께 용선대로 내려서기로 합니다.

용선대는 정상에서 1시간 정도 내려서면 있는데 용선대는 보물제295호로 수십길 낭떠러지기 위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불인데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병풍바위는 좌불 좌측에 두고 있는데 이 부처님은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전해지므로 소원성취 기도처로 이름난 곳이라고 전합니다.

누군가가 쓴 글에서는 멀리서보면 마치 불상이 바위로 지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형상인 반야용선(般若龍船)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용선대를 오르는 계단을 설치하여 그러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단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문화적 가치가 높은 만큼 훼손되지 않게 관람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행들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옛날 선인들은 이러한 절벽위에 어떻게 어떠한 기술로 큰 돌을 옮겨 석불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현재와 같이 이동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고 평지가 아니라는 점으로 보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한 목소리였는데 돌의 성분을 분석해 같은 돌이라면 이곳 불상이 놓인 지점에 몇 개의 바위 중 하나는 불상을 조각하고 하나는 탑신을 만들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용선대에서 500m 정도 내려서면 관룡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원효대사가 제자 1.000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화한 절로 제자 송파와 함께 칠성 백일기도를 마친 날 화왕산 꼭대기의 월영삼지에서 아홉마리 용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다 해서 볼 관()’자에 용 용()’자를 써서 관룡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산 이름도 구룡산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모든 건물은 불에 탔으나 약사전은 화마를 빗겨 갔는데 이는 부처님의 영험한 힘이라고 전합니다.

관룡사에는 용선대의 석가좌불 말고도 보물 제212호 관룡사 대웅전, 보물 제146호 관룡사 약사전, 보물 제519호 관룡사 석조여래좌상으로 약사전에 모신 석불입니다.

휴식을 취하며 후미 팀을 기다리느라 관룡사를 둘러보고 일주문을 나서는데 일주문에는 관룡산이 아닌 화왕산 관룡사로 표기하고 있든 사실로 미루어 옛날 화왕산은 관룡산까지 넓은 의미에서 불렸던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문 계단을 내려서면 관룡산 등산안내도와 이정표가 있는데 병풍바위를 통해 능선으로 이어진 등산로가 표기되어 있으니 병풍바위로 우회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게 느껴지지만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병풍바위로 우회했을 경우 용선대를 보지 못했을 것으로 멀리서 병풍바위를 볼 수 있었음을 행운으로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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