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기

장호원, 백족산 산행기

범솥말 2025. 1. 18. 12:54

남이장군과 지네의 전설이 있는 굴바위를 찾아서

 

산행일시: 20111217

누구와: 나홀로

산행거리: 4

산행시간: 1시간 55(08:45~10:40)

산행코스: 진암2리과수원들머리(08:45)-약수터(09:15)-백족산정상(09:25,402.2m)-굴바위(10:00)--백족산정상(10:20,402.2m)-과수원(10:40)

 

 

오늘은 여주에서 11시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작은 산 하나 섭렵하고 모임에 가려고 산행지를 고르다가 여주와 가까운 장호원 백족산으로 정하고 새벽부터 서둘러 장호원에 도착합니다.

백족산은 장호원 시내와 아주 인접해 있는 그리 높지 않은 해발402m의 자그마한 산으로 오래전부터 아주 여러 차례 보며 지났던 산인데 산이 작아 오르지 않은 산입니다.

산은 작으나 백족산은 오래전 부터 전해내려오는 남이장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하는 산으로 큰절의 많은 승려를 잡아먹은 지네와 지네의 정기를 안고 태어났다는 남이 장군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의 산입니다.

일찍부터 서둘렀으므로 이른 아침에 장호원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들머리가 어디인지 등산길은 잘 나있는지 전혀 정보가 없어 막막하기만 합니다.

장호원 3거리에서 안성방향으로 나가다 고가도로 밑에서 직진하며 비보호 좌회전 신호에서 좌회전을 하여 좁을 길을 지나 개천 길을 따라 올라가니 3거리에 진암3리와 무량사입구를 알리는 입석이 나옵니다.

이곳 3거리에서 망설이다 무량사 길을 버리고 직진을 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무량사로 들어서는 것이 정상적인 등산로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진암2리를 지나 자동차 전용도로 굴다리를 지나 좁은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과수원이 나오고 과수원이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차량이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석선생님댁 과수원에서 보는 풍경으로 장호원읍내와 뒤에는 오갑산입니다.>

<석선생님댁 과수원에서 보는 백족산입니다.>

<주택너머 멀리보이는 희미한 산은 점동에 있는 강금산입니다.>

한쪽에 주차를 하고 과수원 집앞으로 오니 과수원 주인인 듯한 사람이 있기에 인사를 하고 백족산에 대해 물으니 신바람이 나서 설명을 해줍니다.

언제부터 짓다가 마무리를 안했는지 이런 상태로 노후건물 냄새가 풍기는 집 옥상으로 주인인 석선생이 안내하여 백족산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와 진암2리가 석씨 집성촌이라며 석씨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합니다.

진암2리는 옛 마을 이름이 못골이라고 합니다.

<못골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큰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족산의 유래에 대해서는 산의 골짜기가 백쪽은 될 것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고 하는데 한문으로는 百足山(백족산)이라고 쓰는데 글자대로 풀어보면 백개의 발을 가진 산이라고 는 뜻으로 골짜기가 백쪽이 되어 붙여졌다는 석선생님의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신바람 강의를 듣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과수원 위를 통해 임도로 접어들어 임도에서 좌측으로 가야하는지 우측으로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 망설이다 좌측으로 3개의 골을 지나니 정상적인 등산로와 만나게 되는데 이 길이 무량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로 무량사 입석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들어섰다면 고생도 덜하고 좋은 길로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길이 합류하고 인접한 곳에 약수터가 있는데 추운 겨울에도 약수터의 물은 얼지 않고 미지근했는데 이 샘물은 바위틈으로 나오는 석간수였습니다.

한참을 약수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본격적인 산행으로 들어서니 주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많았는데 산이 작아서인지 얼마 되지 않아 주능선에 오릅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능선을 걷는 기분은 아주 상쾌했지만 오늘은 올 들어 수은주가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강추위였는데 능선으로 불어대는 바람 앞에서는 작게만 느껴집니다.

주능선에서 가파른 계단을 몇 번 거듭하다보니 정상의 헬기장에 도착을 합니다.

넓은 헬기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태극기가 나부끼는 정상으로 올라서니 동편 운동기구에서 나 보다 일찍 올라와 운동을 하고 있는 여자2분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정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이 여자들은 하산을 하니 굴바위로 가야 하는 저는 누구에게 물어 볼 사람도 없어 난감하기 짝이 없어 한동안을 서성이며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올라오던 방향에서 직진방향인 오남헬기장으로 내려섭니다.

보기 좋은 소나무 숲을 지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작은 헬기장이 나오고 헬기장 한편에 굴바위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어 우측으로 내려서니 책에서 읽었던 남이장군의 전설을 지니고 있는 굴바위에 도착을 합니다.

옛날 이 굴바위에는 천년을 묶은 지네가 100m 아래 절에 많은 승려들을 잡아먹고 지네가 죽자 지네의 혼령이 장호원 청미천 건너 감곡의 영산리 남씨댁으로 스며드니 그로부터 한 아이가 태어나니 곧 유명한 남이장군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니 이러합니다.

굴바위의 전설

「 장호원읍 백족산 위에는 굴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굴이 있고 굴바위 100여m 아래는 허름한 절터가 있는데 한때는 수백명의 승려들이 들끓던 거찰이었으나 지금은 인적은 간데 없고 빈터만 남아 있다.

옛날 이 절에는 수백명의 승려들이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밤이면 꼭 한사람씩의 승려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남은 중들은 전전긍긍하여 하나씩 둘씩 절을 떠나버리고 마침내 중 하나가 홀로 남게 되었는데, 믿음이 깊은 이 중은 사라진 중들이 모두 부처님이 극락으로 데려갔을 것으로 믿고 자신도 떠나기 전에 평소 각별히 지내오던 장호원에서 조금 떨어진 노탑리에서 글방선생을 하는 친구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해 두기로 하였다.

전부터 이 괴변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오던 글방 선생은 친구인 중에게 지금 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절로 떠나줄 것을 권고하였으나 중이 이 말을 듣지 않으므로 무명옷 한 벌을 내어 주면서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마지막 청이니 이 옷을 입고 가게나. 냄새가 좀 나더라도 절대 벗어버리지 말고 꼭 입고 있어야 하네."하고 간곡히 당부했다.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온 중은 친구가 준 무명옷이 약간 거무칙칙한 빛깔에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지만 친구의 간절한 부탁도 있고 해서 부처님 앞에 나아가 염불에 열중하고 있었다.

얼만큼 지났을까 밤이 깊어지자 별안간 천둥치듯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지내 한마리 가 나타나 중을 덥석 물고는 굴바위쪽으로 사라져갔다.

이튿날 친구의 안위가 궁금해진 글방선생이 절에 올라 중을 찾아보았으나 절 안은 텅텅빈채 친구의 간 곳이 묘연했다.

주변을 찾다보니 굴바위 앞에 거대한 지네 한마리가 자빠져서 있고 그 목에는 자신이 친구에게 주었던 무명옷 자락이 걸려있었는데 옷에 칠해 둔 독한 담뱃진 때문에 중을 삼킨 지네도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니 백족산 허리 부근에 오색영롱한 구름이 감돌더니 구름에서 나온 상서로운 기운이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청미천 건너에 있는 개미실(지금의 충북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상평리 일대)로 날아가서는 마을에 있는 한 농가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남씨댁이었는데 남씨댁의 부인이 그 달부터 태기가 있더니 열 달 후에 귀여운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자라면서 남달리 영민하고 비범한 자질을 나타냈다.

하루는 선비차림의 길손이 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남씨 아이가 노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아이를 앞세우고 부모를 만나 자신이 아이를 가르치겠노라고 자청했고 아이의 부모도 쾌히 승낙하여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온 선비는, 그날부터 아이에게 글공부와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우칠 만큼 자질이 뛰어났다.

아이가 선비에게 글공부를 배우기 시작한 지도 수년이 지난 어느 날 밤의 일이다.

선비가 자는 사랑방 앞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는데 손에 비수를 든 작은 그림자는 깊이 잠든 선비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니 선비의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는 것이 아닌가?. 이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병풍 뒤로부터 깊이 잠든 줄 알았던 선비가 나타났다.

그리고, 놀랍게 선비를 죽이려 한 괴한은 선비가 가르치던 아이였던 것이다.

선비는 아이를 처음 본 순간, 아이가 비범한 상을 타고 났으면서도 그 미간에 깊은 살기를 지니고 있어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이부자리 속에 짚으로 만든 인형을 넣어 잠든 것처럼 가장하고는 아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너는 천년 묵은 지네의 정기을 타고났기 때문에 지네의 원한이 깃든 살기를 너도 모르게 지니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지네의 살기도 없어졌으니,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되도록 하여라.” 선비의 말에 아이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이 소년이 자라서 십칠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임금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1467년(세조13)에는 우장군(右將軍)이 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의산군(宜山君)에 봉해 졌으며,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이르는 등 촉망을 한 몸에 받았으나, 간신 유자광(柳子光)일파의 모함으로 반역죄로 몰려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남이장군이다.

일찍이, 소년 남이가 길을 가다가 어떤 작은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그 보자기 위에 하얀 분칠을 한 귀신이 앉아 있으므로 기이하게 여겨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 간 즉 그 하인이 어느 집으로 집에 들어갔는데 얼마 있다가 집안에서 곡성이 나길래 집안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집 대감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래서 마귀의 작간(作奸)임을 아는 남이는 그 집 하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어가서 그 처녀를 살리겠다.」 고 하니 그 말을 전해들은 재상집에서는 별로 믿으려 하지 않다가 그래도 행여나 하고 그를 들어오도록 허락해 주었다.

남이가 처녀의 방에 들어가 본 즉 과연 어여쁜 처녀가 숨을 거두고 죽어 있는데 가만히 살피니 아까 보았던 사악한 마귀가 처녀의 가슴에 눌러 앉아 있었다.

남이장군이 호통을 치자 귀신이 밖으로 도망을 쳐 버렸고 그로부터 처녀는 차차 소생하였는데 그 처녀가 좌의정(左議政) 권람(權覽)의 4녀였으며 그녀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

<의령남씨 사천백공종친회에서 퍼왔으며 일부 편집을 하였습니다.>

그리 깊지도 않은 굴을 들어가 이리저리로 서성이다 굴바위 아래 있는 절터를 가보기 위해 비탈진 좁을 길을 따라 100m 내려서니 잡풀만 우거진 공터가 있으니 옛날 많은 승려들로 들끓던 절이었으나 지금은 인걸은 간곳없고 바람에 흔들리며 풀잎의 소리가 적막함을 달래줍니다.

다시 굴바위를 오르며 전설에 나오는 내용을 생각하며 사색에 잠겨봅니다.

굴바위를 벗어나 다시 정상에 왔지만 굴바위의 전설은 아직도 생생하게 재연되고 있고 지네의 정기를 받은 남이는 태종 이방원의 외증손이었는데 지나가는 선비가 내가 키우겠으니 아이를 내게 맡겨 달라고 했다 해서 아이를 지나가는 선비에게 주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전설은 전설로 끝내야 하는 게 아닌가?

정상 백족정에 앉아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장호원과 남이장군의 태몽을 안겨주었던 감곡일대는 평안하게 보일뿐입니다.

남이장군 출생지에 대해서는 종친회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어느 사람의 주장은 전설에 나오는 감곡이라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여주에서 출생했다고도 합니다.

현재 음성에 속한 감곡은 오래전 감미면과 거곡면이 합쳐진 이름이고, 경계를 이루고 있는 여주에 속한 점동면은 근동면과 점량면이 합쳐진 이름인데 오래전 거곡면과 점량면의 경계에 위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남이 출생지가 여주와 음성이 데두되고 있는 것으로 남이의 출생지가 여주라고 해도, 음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이글을 올린 후 산우 한분이, 서울 방송통신대학교를 마주보고 있는 대학로 대로변에는 대리석으로 남이장군 집터라고 표석을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이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생을 여주에서 하고 성장기나 성인이되어 이곳에 집을 두고 살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