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북정맥 명성지맥1구간
광덕산~각흘산~명성산 연계산행이야기
산행일시:2003년05월18일
산행거리: 약22 km
산행시간: 8시간35분(10:45~19:20)
누구와: 나홀로
주요산행처:광덕고개(08:25)-광덕산정상(09:25.1046m)-자등현(10:15)-각흘산정상(12:30.838m)-알바(50분)-약사봉(14:00)-약사령(14:20)-삼각봉갈림길3거리(15:55.910m)-명성산 정상(16:25.923m)-신안고개(17:50)
50년을 살면서 시계 및 도계를 넘나든 숫자를 모두 합해도 오늘의 산행에서 넘나든 숫자에 비하면 아주 미미할 것이다. 최초산행시점부터 산행을 마친 시점까지가 도계였으며 단지 도계가 아닌 지점은 명성산 정상 300미터 전 이정표부터 정상을 거처 산안 고개 못 미처 삼각봉 갈림길까지 약 3km만이 경기도와 강원도의 도계가 아니라 그러니까 약 17km를 도계를 넘나들었다는 것이다.
신선이 되다.
광덕산에 오르는 길은 그런 대로 잘나있었다.
주능선 좌측으로 백운동 계곡 쪽으로는 자욱한 안개에 휩싸여 딴 세상이라 차소리마저 끊긴 적막 속에 속세의 모든 잠을 벗어버린 천상에는 태초 에덴 동산처럼 지저귀는 새소리와 연분홍 빛과 진분홍빛의 철쭉들이 만개하였다.
어린 시절 비갠 후 높은 산봉우리를 구름이 감싸 앉는 것을 볼 때 저 구름 속 산에는 무엇이 있을까 용이 있을까? 아니면 용이 되기 위한 이무기가 승천을 시도할까?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용이나 이무기도 없었으며 등산화를 신고 등산배낭을 매고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신선이 있을 뿐이었고 신선이 가는 길에는 딱따구리의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 뿐이다.
광덕산 정상에는 그리 넓지 않은 공터가 있다.
선답자들이 많은 흔적을 남겼으며 이곳에서도 무사산행을 기원했을 것이다.
시계가 좋지 않아 사방을 조망하기엔 불가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박달봉쪽으로 내려선다.
<자등현>
정상과 삼각점 중간쯤 930봉에 누군가가 나뭇가지로 길을 막고 좌측으로 화살표를 해놓아 20분 정도 알바를 하게 만든다. 상큼한 삼림욕을 하다보니 자동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이내 자등현에 닿는다
뙤약볕 산행은 정말 싫어
자등현에서 각흘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고행이라, 이러한 건 각흘산을 거처 명성산 정상까지도 마찬가지다.
숲이 우거지지 않아 햇빛노출이 많았고 각흘산 정상부터 명성산 정상가까이까지 방화선과 억새능선으로 길가에 나무 한 그루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속에 더위와의 사투가 이어지는 길이다.
바람이 제대로 불어주고 안개 속에서 걸었던 광덕산이 그리워 광덕산을 바라보지만 희미한 형체만 보이는 광덕산은 아무 말이 없다.
<각흘산 정상>
<각흘산의 방화선 능선>
각흘산 정상을 A급은 못되지만 바위로 이어지는 봉우리와 능선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서쪽으로 용화저수지, 남으로 명성산 북으로 복계산과 대성산이 조망권 내로 들어온다.
방화선으로 민둥을 이룬 능선을 따라 한 구비 내리막과 오르막으로 힘을 쏟는다.
오른쪽으로 방화선이 계속 이어지고 (큰 소나무 한 그루 있음) 좌측으로 765봉으로 접어드는 길목3거리 (명성산으로 갈려면 좌측으로 가야함) 잠시 망설이다가 좌측으로 접어든다.
765봉을 지나 한동안을 내리막으로 내려서다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던 중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 속에 알바를 하기에 이른다.(약사봉 중간에서 다시 오던 길로 되돌 765봉을 지나 큰 소나무가 있는 3거리에서 용화 저수지 방향으로 방화선을 따라 내려가다 다시 되돌아오느라 약 3-4km약 50여분 알바)
박정희 전대통령과 장준하 선생을 그리며 약사봉을 넘다
알바를 마치고 봉우리의 중간에 와서도 제대로 가는 건지 잘못 가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비몽사몽간에 어영부영 봉우리 정상에 서니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은 헬기장이 있다.
사방을 돌아보니 밑으로 약사령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 봉이 약사봉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떠한 지명의 표시도 없다.
<약사봉으로 추정되는 폐헬기장>
약사봉!
장준하선생이 1975년 8월 17일 의문사로 57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 곳이다.
박전대통령과 장준하 선생과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한 사람은 만주 군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출발하고 또 한 사람은 일본 신학교에서 유학 중 일본 학병으로 끌려가 탈출한 뒤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나선다.
나중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니 훗날 유신 개헌을 하며 장기 집권을 자행할 때 또 다른 한 사람은 사상계의 사장으로서 국회의원으로서 독재를 위해 싸운다.
그 결과 이 곳에서 의문사 하였고 모 TV프로인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던 장준하선생을 그리며 힘없이 약사봉을 내려서 약사령 조금 못 미친 곳에 머문다.
소쩍새가 우는 사연
약사령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휴식을 갖는다.
약사봉쪽에서 소쩍새가 슬피 운다.
혹시 장준하선생의 넋이...
주로 밤에 슬프게 우는 소쩍새의 울음을 산행을 하다보면 이따금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소쩍새의 울음을 소쩍소쩍 이라고 표현하지만 중국에서는 귀촉도 귀촉도라고 한단다.
도원의 결의에 의해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촉나라를 세워 세를 확장한 후 그의 아들 유선에게 왕위를 넘긴다.
이후. 위나라의 명장 사마소가 촉을 치자 유선은 항복을 하고 촉나라를 사마소에게 넘긴다는것은 역사적인 것이고 소쩍새가 우는 전설은 사마소의 공격을 피해 산 속으로 달아난 유선은 길을 잃고 결국 산에서 죽으니 죽은 유선의 혼은 한 마리의 새가 되니 밤이면 귀촉도 귀촉도를 외친다고 하는데 귀촉도란 촉나라를 가는 길이 어디냐?라는 뜻이다.
궁예의 전설이 묻혀 있는 명성산
약사봉을 지나 한동안을 내려서 약사령에 이른다.
<한이 많이 서려 있는 약사령>
비포장도로인 이 고개는 군사도로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민간인 출입이 허용되고는 있지만 차량의 통행이 자유로운지는 알 수가 없다.
약사령에서 명성산으로 접어들며 급경사 길로 한 동안을 오른다.
한동안 힘을 쓰다보니 급경사 길이 끝나고 넓은 대평원이 펼쳐진다.
이곳부터 정상 못 미처 삼거리로 좌측능선을 끼고 이어지는 억새평원은 전국에서 제일 유명하다.
지금은 새싹이 자라는 민둥의 능선은 더운 열기 속에서도 시원함과 후련함을 더해준다.
<명성산 주능선3거리>
직사광선을 그대로 받으며 계속이어지는 경사진 민둥의 능선을 몇 구비 올려치자 비축한 힘이 모두 소진되는 듯한 느낌이 들 즈음 정상이 가까운 주능선과 만난다.
뒤돌아보면 아득하기만 하고 능선을 지나 방화선이 뚜렷한 각흘산을 지나 희미하게 보이는 광덕산이 멀게만 느껴진다.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삼각봉이 있고 우측으로 300여m를 더가야 명성상 정상이 있으며 그 뒤로 궁예봉이 있으니 힘을 내어 얼마남난지 않은 정상으로 향하고 좌측 발 아래 펼쳐지는 산정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가다보니 정상에 도착한다.
<명성산 정상>
나 외 아무도 없는 정상은 이 시간 나를 위해 마련된 장소다.
자그마한 정상석과 긴 말뚝처럼 높은 곳에 박힌 정상목 3년여만에 다시 찾는 명성산이 감회가 새롭다.
북서로 넓은 철원 평야와 금학산. 북동으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광덕산과 국망봉, 북으로 신 철원 시가지와 우측으로 복계산이 보인다.
각흘산과 걸어온 민둥의 능선과 광활한 억새평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명성산은 태봉국을 세운 궁예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잃고 이 곳에 머물다 부하들과 함께 울자 산도 같이 울었다고 하기도 하고, 궁예왕의 말이 하염없이 울자 산도 같이 울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이 산에 은거하며 통곡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고도 하는 설에 의해 명성산이라는 산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어떤 설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이 정말 울긴 울었나보다.
하산은 신안고개로.....
한동안 정상에서 산정호수에 시선을 주다가 하산길을 생각한다.
능선길을 택해 편히 내려갈까 아니면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신안고개 방향으로 택할까? 망설이다 북서쪽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정상을 떠난다.
좌측 암릉으로 내려서다 좌측 숨은폭 계곡길과 직진방향 궁예봉능선을 타고 내려 갈까 다시 망설여지는데 모두 초행길이긴 하지만 장거리를 산행해서인지 피로한 듯 하여 짧은 계곡길로을 택해 내려선다.
이 계곡길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험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어 길의 흔적도 이따금씩 끈어지기도 하고 바위에 이끼가 끼어 무척이나 미끄러웠고 너덜로 계속 이어지다가 무척 대단한 폭포를 만났는데 물은 거의 없는 편이었는데 아마도 장마철에는 폭포의 위용이 대단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폭포가 지도상에서 보았던 숨은폭이었나본데 아마도 장마철에만 모습을 나타내고 장마철이 지나면 모습을 감추어 숨은폭이라 불리는 것 같았다.
<신안고개를 거의 내려 온 지점에서 본 궁예봉능선>
숨은폭을 지나 한동안을 내려서면 길은 점차 좋아지면서 이정표가 있는 3거리에 닿는데 왼쪽으로 난길로 삼각봉가는길이라는 안내가 있다.
산세도 너무 좋고 물도 좋고 계곡도 너무 좋다.
<신안고개에서 산정호수로 이동하며 본 궁예봉>
계곡의 어둠이 물들기 시작할 때 산에서 벗어나 산안고개에 닿고 뒤돌아 명성산을 보며 외눈박이 궁예왕의 슬픔을 그리며 류시화님의 시를 천천히 천천히 음미해본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
-중략-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한북정맥 명성지맥2구간
사향산~관음산 연계산행이야기
산행일시:2010년09월08일
산행거리: 약17 km +도내지고개에서 운천터미널까지 약4km
산행시간: 8시간35분(10:45~19:20)
누구와: 나홀로
주요산행처:산정호수(10:45)-여우봉(12:10)-여우고개(13:00)-사향산정상(735m,14:25)-낭유고개(15:35)-관음산정상(733m,17:00)-501봉(18:25)-43번국도상 도내지고개(19:20)
<관음산 정상 - 뒤로 명성산이 보인다>
산정호수에도착하여 주차장에서 자판기커피를 한잔하며 산행을 준비한다.
의정부역 동부광장에서 8시20분에 산정호수를 향해 출발하는 138-6시내버스를 타려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8시10분에 의정부역에 도착했지만 버스정류장을 잘 못 알고 있다가 나중에 성*현씨와 통화 후 정확한 위치로 갔을 때는 시간으로는 8시20분이 채 안되었지만 이미 버스는 출발한 건지 아니면 결행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8시40분가지 기다려봤지만 버스는 오지 않아 결국 138번 버스를 타고 포천으로 이동하고 포천에서 운천행으로 갈아탄 뒤 운천에서 산정호수로 가는 17번 버스는 10시에 떠나 40여분을 기다려야 할 입장으로 택시를 타고 산정호수까지 이용하게 되었으니 중간에 버린 시간도 많고 택시비로 버리지 않아도 될 10.000원을 지불해야했다.
<비 선 폭 포>
차 한 잔으로 마음을 추스르고 비선폭포에 도착해 폭포의 비경을 카메라에 담고 폭포건너편 좁은 입구로 들어서며 여우봉으로 향한다.
처음부터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길에는 이따금씩 단풍취가 야리야리한 꽃을 피우고 능선 미치지 못한 지점에는 사약으로 쓰였다는 천남성이 외로이 나 있다.
비선폭포를 떠난지 20분만에 능선에 닿고 색 바랜 이정표에는 지나 온 비선폭포는 0.5km, 가야할 여우봉은 2.1km이다.
능선상의 묘지는 아직 벌초를 하지 않아 풀이 무성하였고 풀들 사이에는 왕고들배기가 우뚝 솟아 묘지를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참취와 등골나물이 흰꽃을 피우고 산오이풀이 짙은 자색의 열매로 단장을 했는가하면 철지난 까치수염은 꽃은 지고 길다란 수염에는 많은 씨방을 달고 있다.
능선길을 오르며 길에 나와 일광욕을 즐기던 살모사 한 마리가 일광욕을 방해해서 불만이 많은지 느린 걸음으로 길을 비켜준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살모사를 보니 이 넘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않고 있다
해발이 300m정도의 숲이라면 까치 살모사가 아닌 쇠살모사일 것인데 입은 옷은 까치 살모사처럼 뚜렷하다.
스틱으로 장난을 치자 이내 숲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후부터는 억새나 갈대가 길로 쓰러져 있는 곳을 지날 때 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요즘이면 이 넘들의 독이 최고도에 이르고 있어 물리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북바위를 지나며 이것이 거북바위인지를 몰랐다.
사방을 조망하니 명성산은 나뭇가지가 가려져 있고 가야할 사향산과 관음산이 지척이다.
사향산과 관음산의 경계역활을 하고 있는 낭유고개의 V자 라인이 뚜렷한 게 위압감마져 들고 여우고개의 V자 라인도 상당하게 느껴지고 V자 라인 뒤로는 국망봉의 긴 능선이 한눈에 드러나고 국망봉 우측 뒤로는 명지산의 봉우리가 살포시 고개를 들고 있다.
거북바위에서 흔들바위로 오르는 구간은 암릉으로 이어져 있으면서 산 꽃들이 제법 피어있다.
소나무 밑 그늘에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며느리밥풀과 한 고을의 돌림병을 한 청년의 지기와 용기로 극복한 전설을 지니고 있는 뱀의 침대라는 사상자가 오름길을 장식하고 있다.
색바랜 이정표가 서있으니 지나온 거북바위는 0.3km, 가야할 여우봉은 0.3km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흔들바위다.
아쉬운 점은 흔들바위에 대한 안내판이 없고 흔들바위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가 흔들바위를 덮고 있으나 잘 다듬어 놓지 않을 바에야 잘라내는 게 흔들바위가 더 돋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설악의 흔들바위처럼 흔들리는지 사방의 각도를 잡아 흔들어 보지만 큰 바위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바위 밑으로는 공간이 생겨있고 작은 돌로 밀리지 않게 받쳐져 있어 힘을 가해 흔든다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흔들바위를 지나서 여우봉에 이르는 구간은 구절초가 흰꽃을 피우고 있고 청머루와 때늦은 원추리가 외로이 있는가 하면 우산나물 서식지가 있다.
여인의 얼굴처럼 환하게 핀 구절초의 사연을 떠 올리며 여우봉으로 향한다.
천상의 꽃 구절초의 사연
아주오랜 옛날 옥황상제를 보필하는 어린 선녀가 꽃을 좋아한 나머지 상제의 보필에 소홀해 그만 지상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지상에 내려와서 살던 선녀는 가난하고 시를 즐기는 시인을 만나 결혼해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녀의 미색이 입소문을 타고 고을 사또의 귀에 들어갔고 욕심많고 호색한이였던 사또는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꾀를 다 내다가 그녀의 남편을 불러 놓고 제안을 하게 됐다.
첫 번째 제안은 시 짓기 시합이었는데 남편이 손쉽게 이겼으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사또는 이번에는 말타기 시합을 하자고 말 두필을 대령했는데 사또가 탄말이 그만 미친듯이 날뛰는 바람에 또 지고 말았다.
그러자 사또는 선녀를 잡아다 옥에 가두고 모진 협박과 회유로 선녀를 유혹하였으나 선녀는 절개를 지킨 채 거절을 하였고 이 일이 의금부에 알려져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옥고를 심하게 치른 선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결국 옥황상제가 있는 천상으로 돌아갔고 너무 슬픈 남편은 그녀를 따라서 죽고 말았다.
이듬해부터 그들의 집주위에 가을이 오면서 피어나기 시작한 하얀 구절초, 천상의 선녀가 그토록 좋아했던 꽃이였으니 절개를 뜻하는 천상의 꽃이라고도 한다.
구절초의 사연이 머릿속에서 가시기전 능선에 다다르니 이곳이 여우봉이며 연인들의 추억이 깃드는 곳이라는 연인봉이다.
<여우봉 정상 -예상외로 초라했다.>
선답자들의 글에서 보면 각흘산악회에서 세운 장상목 이정표와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정상표지판이 있었으나 정상표지판은 흔적이 없고 정상목이정표는 방향을 가르키는 이정표는 흔적도 없고 말뚝처럼 서있는 정상목이 전부다.
배낭을 나뭇가지에 걸고 증명사진을 찍은 후 10여분 휴식을 취하며 여우고개 방향을 잡는데 흔적이 너무 희미해 몇 번이고 확인을 하고 또 하다 희미한 길을 따라 내려서니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고 갈대가 며칠전 쓸고 지나간 태풍 콘파스와 말로로 인해 이리저리로 방향을 바꿔가며 무질서하게 쓰러져 있고 조금전 살모사를 본터라 무작정 들어서기가 자신이 없어 나뭇가지를 꺾어 급한대로 임시 스틱을 만들어 갈대를 헤치고 두두리며 갈대숲을 지난다.
쓰러진 갈대 사이사이로 물봉선과 슬픈전설의 주인공인 쑥부쟁이무리들이 큰 키에 짙은 보라색으로 화장을 한 채 말없이 미소를 보낸다.
갈대밭에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조금올라 무명봉에 오르고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을 지나 낙엽송 숲을 벗어나 묵밭에 도착하니 평소 5분이면 도착할 여우고개를 10분도 더 걸려 내려 가야하는 현실은 가시덤풀과 물봉선 그리고 며느리 밑씻개가 군락을 이루며 빈틈없이 묵밭을 메우고 있어 살모사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섣불리 지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 뀌 꽃>
여우고개(520m)에 도착해 상점에 들려 막걸리 한 병을 사서 배낭에 넣고 포장된 군사도로를 따라 오르니 길가에는 철늦은 달맞이꽃과 고들빼기가 무성하고 태어나서 오늘 처음 아름다움을 느낀 여뀌가 군락을 이루고 붉은빛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어 한동안 꽃들에 취해 시간을 보내다 깊은산골팬션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올라서 잣나무숲을 지나 갈대가 무성히 자란 방화선을 따라서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무명봉에 도착하자 상점에서 산 막걸리를 꺼내 거푸 3잔을 마시고 또 다시 군부대를 향해 한 구비를 오르니 685봉이다.
685봉 능선에는 짙은 노랑꽃을 피운 금마타리가 여기저기 제법 많이 피어있는데 금마타리는 대부분 도시에서 재배를 하여 미관을 위해 심어 놓은 것이 대부분이며 자연속에 있는 금마타리를 보는 것은 그리 흔하지는 않다.
금마타리를 배경으로 한 국망봉은 남북으로 길게 뻗으며 북으로 도마치봉, 백운산, 광덕산, 회목봉을 지나 복주산이 보이고 남으로는 견치산을 시작으로 민둥산, 강씨봉을 지나 귀목봉을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청계산과 원통산 그리고 운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심과 들판은 위에서 보면 아주 평화스런 모습이다.
평화스런 일동을 뒤로하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군부대 철책에 닿고 대부분 오른쪽으로 향한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오른쪽 내리막 사면은 철조망 주위로 사계청소를 하여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있어 거북바위 오름길에서 본 살모사의 공포가 아직 가시지 않아 길이 더 험하다는 왼쪽 길을 택하고 조심스럽게 철조망을 잡으며 내려서 오르고 내리기를 수차례 거듭하다보니 서측 비상문앞에 다다르고 긴 한숨을 쉬고는 5분여 거리에 있는 정상으로 오른다.
사향상 정상(734.8m)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다.
<사향산 정상-건너편 이동시내와 국망봉이 보인다.>
하지만 사향산 정상도 조망은 대단히 좋은 편으로 명성산과 일동 일대가 자세히 한눈에 들어오며 선답자의 산행기에서는 군견 훈련장으로 쓰였다하는데 정상 어디에도 훈련장으로 쓰였던 흔적은 없다.
산정호수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사향산정상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25분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배낭을 내려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30분이 지나서 무거운 몸을 바로 세워 관음산으로 나선다.
사향산 군부대 오기전부터 시작된 방화선은 사향산을 지나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고 벙커가 있는 670봉에 서니 가야할 관음산 능선이 길게 살아 움직이는 용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관음산을 가기위한 난관으로 발 아래 놓인 낭유고개를 하염없이 내려섰다가 다시 내려간 만큼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니 쉬운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피해 갈 방법도 없어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방화선을 따라 급 강하하며 곤두박질 치듯 떨어져 339번 지방도로인 낭유고개와 닿는다.
한동안 장거리 산행을 하지않은 탓에낭유고개면 반 정도밖에 오지않았는데 힘이든다는 생각이 들고 이래가지고 도내지고개까지 갈 수 있을까하는 내 자신을 내가 의심하게 된다.
이따금씩 굉음을 내며 전속으로 내 달리는 자동차를 보며 관음산으로 오른다.
보기보다 실제가 힘이 더 든다.
폐타이어의 길을 따라 20여분을 오르면 첫 번째 헬기장이 나오고 5분여를 더 오르니 탄피로 만든 화생방종이 매달린 훈련장이 나오고 단숨에 오를것만 같았던 정상은 그렇게 쉽게 내게 다가와주지 않고 5분씩 5번을 쉬고서야 사향산을떠넌지 약2시간10만인 5시가 되어 관음산 정상(733m)에 도착한다.
외로운 정상목이 항상 자리를 지키던 정상에는 정상묵은 헬기장 바닥에 반듯이 누워있고 아무 인적도 없는 정상은 그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제까지 오면서 보지 못했던 짚신나물이 때 늦은 노란 꽃을 피우고 외롭게 나를 맞는다.
누워있는 정상목을 벙커입구쪽에 세우고 증명사진을 찍고 헬기장을 뒤 덮고 있는 그령을 보며 고사성어의 결초보은을 생각해본다.
<그령으로 뒤 덮인 관음산 정상 - 누군가 정상목을 헬기장에 누워놓았다>
결초보은 (結草報恩)의 풀 그령
죽어 혼령이 되어서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뜻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이 혼령이 되어 풀포기를 묶어 놓아 적이 걸려 넘어지게 함으로써 은인을 구해 주었다는 중국 춘추 시대진나라 위과(魏顆)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그 어원은 진나라 사람 위과가 상반되는 아버지의 두 가지 유언을 선의로 해석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구한 고사(古事)에서 나온 말로,
옛날 진나라에 위무자(魏武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소에 아들 위과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너의 서모(庶母)는 아직 나이도 젊고 아기를 낳아 보지도 못하였으니 개가 시켜 살도록 하여라.”고 일러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위무자는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아들을 불러 다시 말했다.
“내가 죽거든 너의 서모도 나를 따라 죽게 하여 나와 함께 합장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 뒤 위무자가 죽게 되자 위과는 서모의 처리에 대하여 상반되는 아버지의 유언을 두고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던 끝에 판단하기를 아버지께서 병이 들었을 때에 분부하신 말씀은 정신이 혼미하여 하신 말씀이니 평소에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뜻을 따르리라 생각하고 그의 서모를 개가하도록 하였다.
이후 진나라 장군이 된 위과는 전쟁이 발발하자 상대 대장군 두회와 결전을 앞두고 고민하던 중 비몽사몽간에 청초파로 가라는 말을 듣고 청초파에 진을 치고 두회 군사를 유인해 협공을 하는데 원래 강한 두회의 힘에 밀려 죽음에 이르기 전 두회가 풀에 걸려 넘어지고 이때를 틈타 위과가 두회를 사로잡아 전과를 올렸다.
그날밤 위과가 막 잠이들자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서 두회를 잡을 수 있었던점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 위과는 읍하며 노인과 나는 일면식이 없는데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라고 답하자 노인이 말하길 "나는 곧 조희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장군이 부친의 치명을 받들어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내 딸을 좋은 배필을 골라 개가 시켜 주어 노구(老軀)가 구천 지하에서 딸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이번 차제에 미력한 힘이나마 사용하여 장군으로 하여금 군공을 이룩케 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를 일러 후세 사람들은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고 한다.
정상에 선 시간이 5시 정각이다.
여기서 도내지고개까지는 아직도 멀다.
발 빠른 성*현씨가 2시간정도 결렸으니 알바를 하지 않는다 해도 2시간30분은 잡아야 하는데 산속에서 7시가 넘어서까지 있다는 건 무리다.
가다가 파주골로 내려설까 망설이다 도내지고개까지 목표를 세우고 관음산 정상을 벗어나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지맥길로 들어서니 길 좌우로 멧돼지들의 놀이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이리저리 파헤쳐 놓았다.
멧돼지 식흔으로 불안한 상태로 진행을 하다가 관음산 1-4 소방구조표지판을 지나고 태양열 시설물을 지나 내리막을 뛰고 있는데 갑자기 땅을 쑤시고 있던 멧돼지 한 마리가 자기를 잡으러 왔는지 알고 부리나케 줄행랑을 치는데 얼마나 빠른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시간도 없다.
다른 사람들 산행기에 멧돼지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산행을 하면서 멧돼지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이제까지 멧돼지는 느리고 둔하다는 내 고정관념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이어지는 길은 아직도 길 양옆으로 땅을 쑤셔놓아 또 다른 무리가 있는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지역을 벗어나며 멧돼지 식흔이 사라지자 안심을 하지만 또 하나 불안을 조성하는 것은 산속에서의 어둠이다.
<501봉 -사방이 점점 어두워 진다>
빠른 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하며 정상에서 출발한지 20여 분만에 관음골3거리와 산정리로 갈리는3거리를 지나고 그로부터 15분이 지나서야 약초재배지의 경계를 구분하는 철망에 도착하여 철망을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낮은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며 힘겹게 오른 봉우리가 501봉으로 관음산을 출발한 지 1시간15분이 지났다.
숲속의 어둠이 점점 짙어오며 불안을 조성시키는 가운데 501봉에서 5분여를 지나 큰 바위가 있는 봉우리에서 길은 좌측으로 흘러간다.
잠시 내려가다 501봉을 지나 460봉에서 독도에 주의해야 한다는 선답자들의 충고가 생각나 다시 봉우리로 올라서 우측으로 내리막길을 확인하려 내려서 봐도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아 다시 봉우리로 올라서 처음 들어섰던 좌측길로 들어서니 급경사로 떨어지며 길은 점점 희미해지니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알바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봉우리로 올라서니 시간도 없는데 아까운 시간을 15분정도 까먹고는 460봉에서 우측능선을 따라 내려서면서도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이제는 잘 못 들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경으로 희미한 흔적을 찾으며 내려서지 표식리본이 보여 제대로 들어섰음을 인지하고 마음을 놓고 진행을 한다.
사방이 어두워지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철탑을 만나니 아직은 제대로 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철탑에서 좌측 내림길로 들어서 소나무 숲과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43번 국도위로 달리는 차량들의 굉음과 불빛을 보며 이제는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음을 느끼며 안도감을 느끼며 어둠속의 밭뚝 사이를 타고 43번국도의 도내지 고개로 내려서며 긴 구간을 마무리 한다.
<43번 국도상 도내지고개 - 사방이 어둠이다>
한북정맥 명성지맥3구간
불무산~보장산 연계산행이야기
산행일시:2010년09월18일
산행거리: 약 18.5km
산행시간: 9시간20분(09:30~18:50)
누구와: 나홀로
주요산행처:도내지고개(09:30)-능선(10:35)-불무산정상(662m,10:56)-648벙커봉(11:30)-방골고개(12:55)-271.5봉(13:45)-운산리고개(15:20)-정상전헬기장(16:50)-보장산벙커(555m,16:55)-보장산정상(555m,17:15)-353봉(18:15)-군부대유격장(18:50)
명성지맥2구간을 마친 지 10일이 되어 3구간을 나선다.
지난번 의정부역에서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고생을 한 적이 있기에 일찌감치 정류장에 가서 차를 기다리니 뒤 늦게 버스가 오고 축석령 오름길부터 소흘읍까지 꽉 밀린 도로를 지나 포천읍과 경복대를 거쳐 산정호수 입구 전정거장인 문암리에 정차하니 태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뱀의 침대라는 뜻에서 비롯된 사상자>
길을 건너 한동안을 올라가 서부자동차공업사 뒤쪽 밭뚝으로 진입하니 길이 없어 밭을지나 묘를 지나 언덕에 올라서니 마루금은 갈퀴넝굴로 우거져 마루금을 빗겨 밭으로 내려서 농장 옆을 지나 군부대 옆으로 올라서니 묵밭과 주위에는 사상자가 만발한 가운데 비포장 농로를 따라 오르니 마루금과다시 맞닿는 지점이 신일 기도원 입간판이 세워진 곳이다.
그러고 보면 차에서 내려 길 건너 정비소 옆 문암리버스 정류소에서 우측으로 나있는 부대입구 길을 따라 들어왔으면 시간도 절약되고 아침이슬에 바지와 등산화를 적시지 않아도 될 걸 그랬다.
부대 철조망을 따라 100여m 오르다 좌측으로 오르는 폐타이어 길을 따라 경사진 오름길을 오르니 벙커가 나오고 벙커를 지나 묘지를 조성한곳을 지나니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선답자의 글에서처럼 기분이 산뜻한 것이 아니고 개운치 못하다 표현을 해야 하는 건지 축축한 기분으로 가파른 날등을 타고 오르니 지뢰지대라는 군부대 경고판이 나온다.
윤형 철조망을 쳐 놓아 능선을 오를 수 없어 철조망을 따라 사면으로 오르고 내리기를 여러차례 반복하다 가파른 오름짓을 하고나니 정상능선에 닫는다.
우측은 군부대로 통하는 길로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고 불무산 정상은 좌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야 한다.
<불무산정상----북에서 남으로 3개의 봉마다 이와 똑같은 벙커가 있다>
능선을 따라15분정도 오르면 묶은 헬리포트가 나오고 이곳에서 지나온 능선과 군부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곳에서 5분여를 오르면 큰 벙커가 있는 불무산 정상에 서게 된다.
정상 뒤로는 비 가림 가건물이 있는데 군인들의 훈련 시 군수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보인다.
가파른 정상을 내려서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던 길은 칼날처럼 길게 이어진 암릉 구간을 지나 정상을 떠난 지 30분이 못되어 648봉에 도착한다.
648봉 정상은 불무산정상과 똑같은 벙커가 있으며 서쪽으로 20여분 거리의 서봉에도 이와 같은 봉우리에 똑같은 봉우리가 있으니 삼형제봉의 삼형제 건축물이라는 게 인상적이기도 하지만 남북으로 대치되어 있는 분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가슴 아픈일이다.
중봉의 벙커를 한 바퀴 돌며 가야할 마루금이 보장산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능선을 바라보기도 하고 명성산을 비롯한 일대의 산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왔던 길을 50여m 되돌아가 오던 방향으로 우측으로 90도 직각으로 꺾어 급한 내리막길을 한동안 걷다보면 전망 좋은 전망바위가 나와 한동안을 쉬면서 아래 풍경을 감상하고 동시에 계속 이어지는 총소리를 들으며 안전에 대한 이상은 없는지 생각을 하게 된다.
<불무산에서 방골고개로 하산하는 길에 만난 배초향>
한동안을 내려서다 잡초가 우거진 묶은 헬리포트를 지나 절개지에 이르니 이곳이 8번군도 2차선도로 대회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에서 영북면 대회산리로 넘어가는 대전차장애물이 설치되어 있는 방골고개다.
방골고개의 길을 건너 가파른 군 작전도로를 따라 오르니 길가에 밤송이와 알밤이 많이 떨어져 있어 그냥 가려고 해도 알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10여분 밤을 줍는다.
잠시 그런대로 밤을 줍고 지그재그로 조금 더 오르니 좌측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헬기장을 지나336봉에 올라선 후 우측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따라 20여분을 가서 250봉에 이르러 점심식사를 하며 20여분 휴식을 취한다.
점심식사 후 내리막을 가다 다시 오르막이 되면서 작은 봉우리 7부 능선에서 오른쪽으로 우회도로가 나있어 힘을 아낄 심사로 우회도로로 들러서니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길이 뚜렷이 나있어 아무생각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표식리본이 2곳이나 붙어 있어 제대로 왔다 싶어 속력을 낸다.
갈림길이 나와 우측을 살피니 흔적이 없고 좌측을 살피니 묶은 흔적이 있어 한동안을 경사심한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점점 길이 희미해진다.
불안한 마음에 급경사 오르막을 힘을 들여 올라서 선답자 산행기를 봐도 감을 잡을 수 없고 개념도를 펴들고 봐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7부 능선에서 우회했던 지점이 마음에 걸려 그곳으로 돌아가는데 1m이상 되는 유혈목이가 길에 나와 일광욕을 즐기다 재빠르게 도망 친다.
7부능선 우회 봉우리로 올라서니 마루금은 오던 방향에서 좌측으로 진행해야 되는데 우회하다보니 우측으로 들어서게 되어 30분여를 힘 낭비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으니 이 알바로 인해 나중에 울지도 못할 곤경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마루금을 찾아 잃어버린 시간을 복구할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하니 선답자들이 말하는 고철 컨테이너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나 방치되어있다.
<무슨 용도로 쓰였던 것인지 폐 컨테이너기 방치되어 있다>
고철 컨테이너를 뒤로하고 가다보면 노란 금마타리가 피어있는 작은 진지를 지나고 솔밭에 이르게 되며 솔밭을 앞으로 질러 내려서면 운산리 고개에 이른다.
고갯마루에는 대형 마을 표지석을 세웠고 그 옆에 운산리 버스정류장이 있다.
<운산리 고개>
버스정류장 뒤로 올라서는 길목에는 A4용지의 코팅 “입산금지”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 그것도 한곳이 아니고 여기저기 여러 곳에 붙어있으며 비닐테이프로 출입을 금한다는 표시로 줄을 쳐놓았는데 내용은 “위 보장산 일대는 사유지이면서 임산물(장뇌삼 더덕 등) 재배지역이므로 365일 입산을 금지하는 구역이라며 누구든지 산에 오르는 사람은 불법채취자로 간주하여 발견 즉시 관할관청에 고발조치 및 손해배상을 청구 하겠다" 는 것이다.
그런가보다 생각을 하고 입산을 하였으나 선답자들이 입씨름을 하며 올랐다는 생각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들어서서 능선을 따라 간다.
잣나무 숲에서 약10분 알바를 하고 다시 마루금으로 들어서 솔향기를 맡으며 한동안 내려서다 올라서며 임도를 만나게 된다.
임도 위 능선은 표식리본도 달려있지 않고 흔적이 없어 선답자들처럼 임도를 따라 오르다 알맞은 지점에서 마루금으로 붙기로 하고 임도를 따라 가다보니 점점경사가 심해지고 마땅히 붙을 곳이 없어 하염없이 임도를 따라가다 8부 능선에서 치고 올라 얼마 오르지 않으니 완만한 능선과 임도가 나타나는데 아마도 아까 오르던 임도를 따라오면 이 길과 연결이 된 듯 싶다.
<정상 직전 헬리포터>
시간은 걸렸으나 별로 힘들이지 않게 오른 게 다행이기도 하여 기분 좋게 임도를 따라 오르니 넓은 헬리포터에 도착을 하고 헬리포터에는 여러가지 꽃들이 제각각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바닥에는 결초보은의 풀인 그령이 빈틈마다 돋아나있고 건너편 종자산이 지척에 있다.
<보장산의 정상>
헬기장을 뒤로하고 조금을 오르니 일반적으로 정상이라고 말하는 벙커봉에 도착해 10여분 쉬면서 풍광을 카메라에 담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장산 정상으로 이동한다.
보장산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고 작은 바위하나가 해발555m의 최고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5분여를 쉬면서 가야할 긴 능선을 본다.
이곳에서 독립군4인방의 성*현, 조*근이 직진을 하여 창옥병으로 진행을 하였다하여 신경을 써서 우측 배모루로 향하는 길로 들어선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한동안 내려서며 표식리본이 보이지 않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불안했는데 기다리던 표지기를 만나 마음이 한결 놓인다.
선답자의 글에서 하산시간을 1시간20분정도로 예상했으니 6시40분이면 어둠이 오기전 알맞게 하산하므로 지난번 2구간 때 처럼 7시가 넘어 어둠속에서 길을 찾는 어려움을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체력이 어느 정도 고갈되니 주위를 관찰한다는 생각없이 길이 있으니 있는 대로 따라 갈 뿐이며 주위에 어떠한 꽃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무감각한 상태로 간다.
<산친구 산악회에서 표시한 353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암릉을 기어올라 봉우리 하나를 올라서니 353봉이라고 산친구산악회에서 안내 코팅지를 달아놓았는데 지난2구간에서도 501봉에 표식을 달아놓았었는데 이번에도 353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드는데 산친구산악회는 서울근교 한북정맥과 한북정맥에 딸려있는 지맥을 주로 찾는 산악회로 회장은 일반교통을 이용해 전철이나 버스로 이동하는데 화악지맥마지막 구간인 월두봉~물안산~보납산을 같이 한 적이 있다.
<폐 러이더 기지>
353봉을 지나 폐 레이더기지를 지나며 마지막봉우리에 닿으며 좌로 흘러내리는 영평천을 보며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 생각없이 길을 따라 내려서니 간간이 로프가 매여 있는 지역을 지나 군부대유격장으로 들어서고 이내 좌측으로 부대후문이 보인다.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탈출로를 묻기 위해 후문으로 다가서 초병을 불러 보지만 초소는 있는데 초병은 없다.
5분여 초병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벌어진 틈으로 군부대로 잠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수 없어 내려오던 길로 다시 가서 우측으로 3~4분 정도를 가니 좌측으로 비포장도로가가 갈라지는 길이 나오고 직진으로 가는 곳에는 건너편에 군부대 막사가보이고 불이 켜있어 군부대로 따라가니 우측으로 연못이 있고 앞에는 철조망이 둘러 쳐 있는 곳에 조금 전 부대처럼 대형 철망문이 닫혀있다.
초병을 부르면 누군가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초병을 불러보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사병들은 내무반에서 쉬면서 떠드는 소리는 끈임 없이 들려오지만 거의30분을 목이 터져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문 밑으로 철조망통과하는 방법으로 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옷이 찟겨 지거나 상처가 날 수도 있을 수 있으니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좌측 200여m 밖에는 고속으로 달리는 차량들의 굉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지만 철조망을 따라갈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는지라 막막하기만 하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첫 번째 부대에서 두 번째 부대로 이동할 때 좌측으로 나있던 비포장 길로 들어서 야트마한 산을 넘을 생각으로 왔던 길을 뒤돌아 어두워진 길을 찾아 산으로 올라서는 길은 경사면을 따라 우향하는 상태로 원을 그리며 정상부로 가는데 중간쯤에 좌로 희미한 길이 보이기는 하는데 이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르고 가고 있는 넓은 길을 따라가면 밖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넓은 길을 따라 조금 올라서니 넓은 공터에 훈련용 2층 건물이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있고 길은 이곳에서 멈춘다.
순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 길이 없는 곳으로 불빛만보고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잡초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니 갈퀴넝쿨이 주위를 꽉 메우고 있으나 그렇다고 여기서 밤을 샐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가슴높이의 갈퀴넝쿨을 밟고 몸으로 밀고 넘어지기를 여러 차례 수풀을 통과하여 숲속으로 들어서니 나무 때문에 캄캄하여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으나 앞에서 비치는 불빛에 희망을 걸고 내려서니 아파트가 보여 이제는 살았다 싶어 어둠속에서 아파트쪽으로 가보니 5층의 군인아파트로 보이는데 한 키가 넘는 철조망이 둘러쳐있으니 또 좌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사람을 부르면 되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소리를 외쳐 사람을 부르니 1층의 아파트에서 어느 여자가 방에서 베란다로 나와 반가움에 말을 붙이려하자 창문을 닫고 그냥 들어가 버린다. 텔레비전이라도 보는데 외침이 방해가 된 모양인지....
다시 소리를 쳐 대니 2층에서 어떤 남자가 베란다를 열어 내가있는 방향을 보기에 길을 잃었으니 도와달라고 외치는 중에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문을 닫고 사라진다.
그래도 나는 그 남자가 나를 도우러 나오려나 싶어 계속 불렀지만 그놈은 과 그년은 오지 않는다.
철망을 뚫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철망을 뚫을 도구가 없어 발로 철망을 늘리고 몸이 들어 갈만한 구멍을 넓혀도 고무줄이 아닌 철망이 늘어날 리 없고 철조망을 넘고 싶어도 2m이상 되는 철조망을 넘을 재간이 없고 나무를 이용할까했으나 철조망 옆에 올라가 뛸만한 나무가 없다.
실망 실망 실망...............
꼭 소설의 한 장면 같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꿈이라면 좋은걸 이건 꿈이 아닌 현실이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렇다고 숲속에서 서서 밤을 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선답자 중 119에 도움을 청했다는 글을 올린분이 있어 119에 도움을 청할까하다 아직은 내 힘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왔던 길을 오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니 울고 싶도록 막막하고 늘 필수로 가지고 다니던 후래쉬도 오늘따라 가지고 오지 않음이 그렇게 큰 후회가 될 수가 없다.
어둠으로 전혀 분간이안가는 상태에서 손은 더듬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가다 경사가 시작되니 두 발짝 오르다 한 발짝을 미끄러지며 올라서니 가시덤불이 있는 곳으로 왔으나 아까 지나갔던 곳이라면 지나기가 수월할 텐데 엉뚱한 곳으로 올라섰으니 또 다시 가시덤불과 씨름을 해야 할 판이며 팔과 다리에 약간의 상처를 입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으나 뱀에게라도 물린다면 생명을 보장할 수없는 지경이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몸이 조금 상해도 민첩하게 움직여야 되겠다"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가시덤불을 넘어 폐허가 된 훈련용 건물 앞에 왔으나 쉬고 싶어도 사방이 풀섶이라 쉴만한 곳이 없어 어둠에 희미한 길을 따라 내려서다 우측으로 좁은 길을 보았지만 그 쪽으로 가서 조금 전처럼 철조망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갈 수도 없어 첫 번째 부대 후문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왔던 길을 찾아가지만 어둠이 사방을 메워서 왔던 길도 못 찾고 성급한 마음에 미리 우측으로 붙으니 가시덤불이 가로막아 사방을 헤매다 철조망으로 붙고 보니 후문은 더 가야하고 철조망을 따라 후문으로 이동하며 몇 번을 구르며 팔다리에 갈퀴넝쿨에 찰과상을 입으며 후문에 도착한다.
아직도 해결해야할 문제가 태산이건만 사지를 벗어난 마음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초병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어 틈새로 부대로 잠입하기로 하고 배낭을 내려놓고 대형 철망으로 문과 문을 쇠사슬로 감아 자물쇠를 채운 문틈으로 몸을 넣으니 틈이 좁아 들어갈 수가 없다.
실망이 크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가 없다.
심호흡을 한 뒤 초인적인 힘으로 문을 당기니 문틈이 벌어지고 간신이 몸이 빠져 들어 갈 정도로 벌어지니 군부대로 잠입하는데 성공을 하고 시멘트포장 위에 큰 대자로 누워 생각해 보니 독립군 4인방 중 2명이 명성지맥을 마쳤으나 정상에서 길을 잘 못 들어 창옥병으로 떨어졌다는 게 얼마나 그들에게는 행운이었으며 제대로 걸어온 내게는 산행 20년만에 최고의 불행이었다는 자책을 하고 또 한다.
한숨을 돌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 넓은 길을 따라 부대안으로 들어서니 호텔과 같은 부대건물이보이고 환하게 불을 밝힌 2층 현대식 막사에는 군인들의 떠드는 목소리가 멀리서도 들린다.
건물가까이 가니 1층 좌측 문이 열려있고 불도 켜 있어 무조건 들어서니 식당이다.
유격장에 도착해 다 내려왔다고 생각해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물을 마져 마셔 버리고 캄캄한 암흑 속을 한동안 미친듯이 오가며 넘어지고 뒹구르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으니 목이 말라 정수기로 다가가 연거푸 물을 4컵을 마셔대며 군인들을 보니 내가식당을 들어 왔는지도 모르다가 물을 몇 컵 마실 때 3명이 나를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한심한 군대가 어디있단 말인가?
적군이 수류탄을 5개 가지고 잠입했다면 이 부대는 흔적이 없어졌을 것이고 부대안의 많은 군인들은 지금쯤은 모두 사망을 했다고 봐야하며 이러한 설정 아래서라면 그 후 10여일 후면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한 개판인 부대와 장병이 국립묘지에 묻히고 국가가 이들의 가족에게 연금을 지원해주고 국가유공자라는 칭호가 주어진다면 열심히 세상을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분개하고 손해를 보는 것인가..........
물을 마시고 군인3명을 부르니 의아해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당직사관을 불러오라는 말에 졸병인 듯한 군인이 본인이 갔다 오겠다고 자청을 하고 3~4발자국 가다말고 다시 와서 어느분이 찾는다고 전해드려야 하는지를 물으니 다시한번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호통치 듯 애기한다.
"산행하던 사람이 길을 잃어 찾는다고 전해라"
5분 후 계급이 중사를 단 당직사관이 왔는데 처음 보자마자 아주 깜짝 놀라며 어떻게 부대안으로 올 수 있었냐고 몇 번을 묻고 또 묻는다.
철조망을 자르고 들어 왔냐고 동문서답을 하며 물어댄다.
유격장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애기해주자 부대안으로 사람이 들어올 수가 없다고 내말을 믿지 않으며 탈출하는 길이 있는데 몰라서 그랬다며 개고생을 한 나에 대해서는 고생했다며 우리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다는 생각은 전혀 않고 부대가 뚫린것에 모든 신경을 쓰고 나는 집에 갈 걱정이 되어 차 탈 걱정이 되어 안내를 부탁한다고 하니 위병소밖에 매시 30분마다 전곡가는 버스가 있다며 전곡택시를 불러 주냐고 묻는데 개고생은 개고생 한 것이고 버스가 아직 있는데 택시를 탈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버스를 타고 나가기로 했지만 그래도 너무 안쓰러워 군부대에서 전곡까지 모셔다 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 아직도 고생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일어서다 말고 당직사관에게 목이 마르니 캔맥주 하나를 사달라 하자 박스로 팔기 때문에 안된다고 하니 이 녀석 혼을 내 줄까 생각을 하다가 순한 양으로 돌아서 일직사관에게 명을 받은 일직부관이 위병소로 안내를 하고 8시가 돼서야 위병소를 벋어나며 길고 긴 미로를 탈출하는 순간이다.
위병소를 나오며 우측을 보니 철조망이 없는 것으로 보여 희미한 오름길을 오를 때 우측으로 나있던 좁은 길이 위병소 옆으로 빠져나가는 길로 보여 지니 미로를 탈출할 수 있는 가까이에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해 1시간 이상을 헤맸다는 사실과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다행이지 만약 독사에 물리거나 가시덤불속에서 부상을 입어 생명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면 죽음과 삶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까이에 있음을 다시 한번 깨우친다.
15분을 기다려 포천가는 버스로 갈아타 포천에서 동서울로 갈아타 무사히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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