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산행과 섬 트레킹이야기

강화, 교동도 화개산 산행기

범솥말 2024. 9. 10. 23:49

강화 교동도 화개산 산행기

연산왕 유배지를 가다

 

산행일 : 20150119

누구와 : 나 홀로

산행시간 : 16:05~18:20(2시간15)

산행거리 :7.33km

주요산행처:교동면사무소(16:05)-연산왕유배지(16:20)-주능선(16:36)-화개약수터(16:45)-화계산정상(16:54~17:07,251m)-봉수대(17:11)-화개사(17:26)-일몰(17:41)-교동읍성(17:44)-읍내리정류장(17:50)-교동면사무소(18:20)

대중교통 이용방법

갈 때 : 홍대입구에서 강화행 3000번버스->강화터미널->교동행 18번군내버스(터미널출발,07:25, 09:30, 12:20, 13:40,                   15:00, 50분소요)

올 때 : 종점(월선포)출발시간,10:40, 13:30, 14:50, 16:10, 17:30, 19:10->강화터미널->서울(월선포->교동읍성 5,

           면사무소가 있는 대룡110분소요)

오후 2시가 넘어서 별안간 교동도 화개산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승용차를 몰고 강화로 출발을 한다.

강화에는 산이 제법 많은 편인데 강화의 산은 대부분 거의 올랐으므로 이번에는 강화에 속한 교동도에 있는 화개산을 산행하기 위한 것이지만 교동도에는 화개산 만큼이나 구미가 당기는 것은 연산왕 유배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기 때문으로 조선왕릉 시리즈에 교동도 유배지를 소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기 위함도 있다.

전에는 교동도를 가려면 별립산 들머리인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가야만 했는데 교동도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교동대교가 2014620일 임시개통을 시작으로 이제는 누구나 간단한 검문만 응한다면 언제든지 교동도를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연화리 검문소에서 인적사항을 적어내니 임시출입증을 준다.

그리고 연화리에서 교동대교 입구로 이동을 하니 출입증을 확인하고 오후 6시까지 교동도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며 출입을 허용한다.

지난 10월경 교동대교를 건너갔다가 온 적이 있었는데 이번이 2번째 교동대교를 지나는 셈이다.

대교를 건너 큰길을 따라 계속 직진으로 들어가 이정표에 교동면사무소라는 이정표를 보고 면사무소로 들어가 안전하게 주차를 한다.

 

면사무소를 들머리로

교동도에는 작은 산을 포함해 몇 개의 산이 있는데 교동도를 대표하는 산이 화개산으로 해발 259.6m로 높지는 않다.

산행을 하기 쉬워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하고 강화둘레길 연장선으로 강화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둘레길이 있어 걷기 동호인들도 제법 많이 찾는 편이다.

<교동면사무소입니다.>

<교동면사무소에 있는 화개산 등산안내도입니다.>

그런데 산행에 중요한 들머리 날머리를 제대로 표시하지 않아 산행하려는 사람들로서는 어느 곳을 들머리로 잡을까? 망설이기도 하는데 화개산 산행들머리는 면사무소가 제일 좋은 편이다.

면사무소 주차장 한편에 설치한 산행안내도를 찍어 참고하기로 하고 산행 장비라고는 스틱만을 가지고 홀가분한 산행을 시작한다.

어제 내린 눈이 녹아 길이 무척 질었는데 이정표에서 보듯이 이곳을 조금지나면 길이 갈라지는데 좌측길로 들어서야 한다.

넓은 길을 따라 약5분을 걸으면 이정표가 있는 4거리 안부가 나오는데 산행길은 직진인데 우측에 연산왕 유배지가 있으니 그냥갈 수는 없어 잠시 샛길로 들어서 연산왕 유배지로 들어선다.

길 양쪽으로는 숲이고 100m들어서니 철문은 자물통으로 채워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그랬는지 우측으로 우회하여 들어가면 된다.

철문을 지나 큰 입석을 세운 곳으로 다가섰는데 입석에는 연산군 유배지라고 음각을 했는데 이 비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실제로 연산왕 유배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교동도 지도를 보면 연산왕 유배지로 추정되는 곳이 3곳이 있는데 그중 한 곳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연산왕은 어떤 인물인가?

역사를 간추려 보면, 이조 518년을 이어 오면서 27명의 왕이 있는데 그중 제일 포악한 왕으로 결국은 여색에 빠져 닥치는 대로 해치우다가 그만 연산왕 친 숙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을 범하게 되었고 이로 숙모가 목을 매 자살을 하게 되니 박원종이란 사람이 자기 누이의 원한을 푼다고 반정을 일으켜 성공을 하였고 이에 패주 연산은 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연산왕의 못된 습관은 부전자전이라는 말과 같이 연산의 아버지인 성종이 여자관계가 많았고 역대왕 중 부인을 제일 많이 둔 왕이었는데 연산의 엄마인 윤씨를 사랑해서 후궁이 되었고 한명회의 딸인 정비가 죽자 성종의 계비가 되었는데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인수대비에 의해 결국 성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데 이때 흘린 피적삼으로 훗날 연산이 미치광이처럼 폭정을 하고 갑자사화라는 피바람을 일으킨다.

결국 연산이 여자에 빠지고 폭정을 하게 된 일부의 책임은 성종에게도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위 역사에서 본다면 연산왕은 죽어 마땅한 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연산왕의 기록은 후대인 중종 때 쓴 기록으로 반정에 성공한 무리들이 쓴 기록으로 100% 믿을만한 기록은 아니다.

학교다닐 때 배운 역사는 연산은 폭정으로 왕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사를 알아가면서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는데 간단한 예를 들어 본다.

연산의 엄마 폐비윤씨의 묘는 지금 경희대학교 안에 경희의료원 건물자리에 있었으며 연산이 왕으로 있을 때는 회릉이라고 명명했고 연산이 왕위에서 밀린 이후 회묘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년 경희대학교 안에 있던 회릉이 지금 서삼릉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리 세도가 당당했던 연산이라면 엄마 무덤에 부장품으로 귀고리, 팔찌 비녀 등의 금부치나 그밖에 백자나 청자 등 다수의 부장품이 나왔어야 했는데 폐비윤씨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은 없다는 것이다.

회묘 이장할 당시 각각의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모두 사진을 찍었으니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필자의 혼자서 내린 결론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연산왕의 기록은 반정에 성공한 무리가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연산을 죽을 넘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필자는 연산군이라는 칭호를 연산왕이라 쓰고 있다.

그렇다고 연산왕이 정치를 잘 했는데 억울하게 반정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연산왕의 행실은 대부분 조작이라는 생각이다.

유배지 주변은 온통 밤나무로 사유지 밤농장 같은 생각이 들었다.

들어 오는 입구에 자물쇄를 채운 것도 그러하고 유배지 입석 동편으로 허름한 집이 있는데 밤농장 관리숙소인 듯 했다.

연산왕 유배지를 둘러보고 다시 안부사거리로 나왔다.

안부에서 계곡으로 내려서 우측으로 등로가 이어지는데 바로 앞에 에스키모의 집처럼 생긴 돌집이 있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한증막이라는 것인데 보존상태가 아주 좋은 편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요즘 찜찔방의 원조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고 하는데 교동에는 이러한 한증막이 여러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훼손되어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계곡에 있는 이곳 한증막에서는 뜨거운 열기로 몸을 데운 뒤 바로 옆 계곡에서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그는 형식을 반복했다고 하는데 1970년대까지 이용했다고 하는데 보존상태가 너무나 좋은 편이었다.

한증막에서 다시 등로로 나왔고 등로 주변은 리키다 소나무 밀집지역으로 산림욕을 하기에 좋았다.

오르는 중앙에 작은 아치형 목재시설에 천천문(天千門)이라 편액을 달아 놓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한증막에서 나와 소나무 산림욕을 하며 10분을 오르면 화개산 정상에서 고구리로 흐르는 주능선에 오를 수 있는데 능선 안부에는 벤치를 설치해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를 조성했다.

들머리인 교동면사무소로부터 스마트폰 GPS에 의한 산행거리 1.56km이다.

능선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눈이 쌓인 길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니 등산로는 돌담을 가르며 지나간다.

주변을 살피니 이것이 화개산성이다.

화개산성(華蓋山城)은

교동면 고구리 산145번지 일원에 있는 산성으로 강화군 향토유적 제30호로 화개산 위에 지어진 내·외성을 갖춘 산성이다. 총길이 2,168m에 이르는 포곡식 산성으로 남쪽은 산정상부의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북쪽은 화개산의 북록에 걸쳐 전체적으로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다.

화개산성의 최초 축조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명종 10년(1555년) 최세운이 증축하고, 선조 24년(1591년)에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영조 13년(1737년)에 개축하여 군창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산성으로 들어서 조금을 오르니 안전 로프지대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면 넓은 분지가 있는데 마주보이는 곳에 화개약수터가 있다.

<화개산 화개약수>

사방을 둘러보고 약수터로 다가선다.

목이 마르지는 않지만 귀한 약수이니 물맛을 봐야할 것 같았는데 오늘 이전에 다녀간 발자국이 2~3명이 있었는데 모두 약수터로 접근한 자국은 없다.

약수터 우측 기둥에는 어느 시인이 화개약수에 대한 시를 써서 부착해 놓았으며 약수터의 작은 물컵에 졸졸 넘치고 있는 물을 한잔 들이켰는데 물맛이 좋고 안 좋고는 알 수가 없고 입안부터 뱃속까지 찬 느낌이 용트림하듯 요동을 친다.

화개약수의 수량은 아주 작아 하루 종일 받아야 20리터 물통으로 2~3통 정도밖에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수량이 적었다.

약수터 바로 위에는 넓은 공터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다가서 자세히 보니 효자묘라고 하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청주골에 살았던 어느 노인과 효성이 지극한 아들의 이야기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청주골에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청년이 징병을 나가 이곳 화개산 정상에서 복무를 하게 되었고 아들이 걱정된 병든 아버지는 이곳 화개산 아래 고읍마을로 이사해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쟁으로 목숨 부지를 보장받지 못하던 때라 매일 살아남는다면 산성북루에 하얀 적삼을 걸어 살아있음을 전하는 것으로 약속하고 매일매일 이를 실행했는데 어느 날 이러한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수장이 이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자 북루에 흰 적삼이 걸리기를 바라던 아버지는 흰 적삼이 걸리지 않자 아들이 죽은 것으로 오신을 하고 자살을 하였다.

수장은 아들의 이러한 행동을 적과 내통하는지 취조를 하다가 병환이 깊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성내 안장을 하고 모든 병사에게 매일 아침 참배하도록 하였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로 지금까지 효()의 근본으로 그 자취를 보존하고 있다고 ....................

효자묘를 지나 정상을 그리 멀지 않다. 우측으로 화개산성의 잔해가 남은 돌무더기를 따라 조금 오르면 길 가운데 잣나무가 맞아주고 이곳을 지나면 안전로프지대가 나오며 로프지대가 끝나며 큰 바위가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이 바위 위가 정상으로 우측으로 돌아 오르게 되어 있다.

<화개산 정상을 오르며 처음 보이는 정상의 풍경입니다.>

<화개산 정상목에서 인증사진을 찍습니다.>

<화개산 정상 북쪽으로 정자가 있어 강화를 조망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화개산(華蓋山)!

화개산이라는 산명은 전국에 몇몇이 있다.

그러나 한문표기는 서로 다를 수 있는데 여수에 있는 화개산은 교동의 화개산과 한문표기가 같았는데 여수의 화개산은 개()자가 덮는다는 의미로 산의 형상이 솥뚜껑을 닮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확실한 유래를 알기위해 교동면사무소 총무계와 연결을 하여 유래에 대해 물어보니 "교동 향토사"에 의하면 '산의 형상이 솥뚜껑을 닮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화개산의 이름이 솥뚜껑산이라는 것이다.

들머리인 교동면사무소로부터 스마트폰 GPS에 의한 정상까지 산행거리 2.09km, 산행소요시간 50분, 해발 251m(정상목 259.6m와 약9m오차)이다.

 

정상에서의 조망

<정상에서 본 석모도로 좌측 바위산은 성주산, 우측은 해명산입니다.>

<정상에서 본 면사무소가 있는 대룡1리이고 넓은 뜰은 삼선리와 인사리 일대입니다.>

<정상에서 본 고구리 저수지와

바다 건너는 북한 땅으로 날씨가 좋은날은 송악산이 가까이 보입니다.>

<정상에서 본 별립산이며 멀리 희미하게 고려산이 보입니다.>

<정상에서 본 교동 읍성과 읍내리 방향입니다.>

정상에 올라 13분을 머물며 인증 사진도 찍고 사방을 조망하며 주변을 살폈다.

전에는 교동도가 아주 작은 섬으로만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큰 섬으로 제일 큰 섬 제주도를 시작으로 14번째에 등록이 되었으며 정상에서는 잡목에 가려 새로 난 교동대교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으며 지난 10월 전망대에서 가깝게 보았던 개성의 송악산은 연무로 인해 가시거리가 짧아 볼 수 없었는데 어쩌면 정상 북쪽의 나무가 가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화개산 봉수대의 모습입니다.>

정상에서 다시 봉수대로 이동을 한다 정상과는 불과 150m로 가까이에 있으며 능선길도 편해 금방 이동이 가능하다.

안내판에 의하면 '현재 낮은 석단만이 남아 있는데, 가로 4.6m, 세로 7.2m이고 잔존높이는 1.2m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남쪽으로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하음 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수대 위에서 찍은 사진으로 뒤로 화개산 정상이 보입니다.>

<화개산 봉수대를 지나 내리막에는 안전로프를 설치>

암릉지대를 내려서면 3거리에 도착한다.

있어야할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다.

정상에서 교동읍성의 위치를 파악했으므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고 내려서기를 약4분 예기치 않았던 안내판이 서있었는데 문무정에 관한 전설이다.

<능선에서 읍성으로 내려서는 등로는 작은 자갈길로 이어집니다.>

<문무정 안내판>

설화나 전설이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지방마다 이러한 전설이나 이야기가 없으면 너무 삭막할 것 같다.

이러한 전설이나 설화는 과학이 발달한 지금의 잣대로 잰다면 모두가 모순이겠지만 아주 오래전 친자연적인 삶을 살았던 선대들에게는 신앙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그러기에 믿고 숭배하며 이를 따라 생활 했을 것이다.

<화개사의 모습>

문무정에서 길이 넓어지더니 비포장 임도가 끝난 지점에 보호수인 소나무가 있고 그뒤 기와집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화개사이다.

그러니 화개사 현판은 보이는데 모두 문이 닫혀 있었고 필자에게는 더 급하고 우선시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교동도 일몰이었다.

사진 한 장만 찍고 계단을 내려서 포장된 길을 계속 뛰었다.

주변이 붉게 물들고 있었으므로 나뭇가지에 가린 채 해가 질까봐 계속 뜀박질로 내달려 산림을 벗어났는데 이직 일몰이 시작되기 전이다.

도로 삼각지점에 비석을 모아 세운 비석군이 있다.

비석군으로 안내판에 의하면 조선시대 공적이 있는 교동지역의 목민관,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등 40기가 있는데 이 비들은 교동 관내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1년부터 이곳으로 옮겨 유림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비석군 우측길로 300m를 들어서면 유림인 교동향교가 있다.

<일몰을 보기위한 장소를 정하고 화개산을 본 풍경입니다.>

 

일몰

<일몰이 시작됩니다.>

<일몰이 지속되면서 주변도 어둠이 몰려옵니다.>

산행을 하느라 등에서 흐른 땀이 등산복을 적셨는데 한 자리에 서서 5분 이상 일몰을 보고 있노라니 추위가 온 몸을 엄습한다.

일몰이 끝나고 읍성 좌우를 보고 읍성안 읍내리로 들어선다.

<읍성을 들어서며 본 우측 성곽입니다.>

<읍성을 들어서며 본 좌측 성곽입니다.>


<
읍성을 들어서서 본 읍니리 마을의 풍경입니다.>

<읍내리 마을 골목 돌담길입니다.>

<큰길을 따라 내려와 읍성의 남문에 도착합니다.>

<남문을 안쪽에 서 본 모습으로

아치형 문 위로는 유량루라는 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
앞에서 본 남문의 모습입니다.>

남문 앞에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인천시 시념물 제23호인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처음 쌓았으며, 영조 29년(1753)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성문을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고, 각 문에는 망을 보기 위해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고 하였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고 하나, 현재는 3문이 모두 남아있지 않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으로 무너져 반원 형태의 홍예문이 남아 있다.

돌로 쌓은 성곽이 보존상태가 아주 안 좋은 편으로 남문 안쪽의 사진을 보면 홍예문의 석재가 대부분 오래전부터 남문에 사용되었던 돌인데 바깥쪽에서 보면 홍예석의 일부와 홍예석을 둘러쌓고 있는 석재들이 대부분 최근에 복원한 것 같아 보기도 안 좋았지만 문화재의 무관심으로 훼손되었음이 안타까웠다.

들머리인 교동면사무소로부터 스마트폰 GPS에 의한 남문까지 산행거리 4.3km, 산행소요시간 1시간40분이다.

<남문을 떠나며 본 읍내리 풍경입니다.>

읍성에서 나와 버스가 다니는 대로로 나왔다.

15분전 일몰을 보기위해 대기하고 있을 때 버스가 지나갔으므로 다음 버스는 715분경 지나간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는 1시간25분 정도를 기다려야 하므로 버스에 대한 기대는 할 수가 없고 걸어서 면사무소까지 가기로 하고 대로를 따라 간다.

읍내리에서 출발해 대룡2리를 지난다. 길가 주변으로 빈 집들이 많이 보였는데 보기가 언 좋았는데 모두 도심으로 빠져나가 집이 빈것인지 도회지 돈좀 있다는 사람들이 농가주택을 사 놓고 비워 놓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두워지며 음산한 기운이 사방에 뻗친다.

한참을 걸어 교동 중고등학교앞을 지난다.

교동 중고등 학교를 지나 작은 고개를 넘으니 대룡1리가 전개된다.

처음 오는 곳이지만 이곳이 면 소재지임을 느끼고 지름길을 택해 골목길로 들어선다.

길은 교동초등학교로 이어지고 교동초등학교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보니 면사무소입구 차도에 닿는다.

반가운 맘으로 면사무소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애마가 주인을 반갑게 맞는다.

들머리로 시작해 날머리가 된 교동면사무소까지 스마트폰 GPS에 산행거리 7.33km, 산행소요시간2시간15분이며 읍내리에서 면사무소까지 약3km로 30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