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산행기

설악산, 한계산성릿지~감투봉~십이선녀탕계곡 산행이야기

범솥말 2024. 5. 22. 00:20

설악산, 한계산성릿지~감투봉~십이선녀탕계곡 산행이야기

설악산, 한계산성릿지~감투봉까지.

 

산행일시: 2021년03월24일

누구와: 나홀로 산행

산행거리: 약15.02km

산행시간: 9시간23분(08:40~18:03)

산행코스:장수대(08:40)-옥녀탕감시초소(09:05)-한계산성(09:46)-통천문(10:25)-천제단(11:06)-왕궁터추정지(11:20)-1061봉(12:09)-1070봉(12:22)-1259봉(12:54)-전망바위(13:15)-감투봉(13:20)-안산밑안부(14:40)-12선녀탕계곡상부(15:16)-두문폭포(16:00)-복숭아탕(16:22)-응봉폭포(16:40)-승폭(17:13)-12선녀탕탐방안내소(17:57)

<노산 이은산 선생이 안산과 우측 2개의 암봉과 함께 3각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삼각봉으로 기록했습니다.>

갈 때:동서울(06:30)-장수대(08:40)

올 때:윗남교버스정류장(18:13)-원통터미널(18:27->19:30)-동서울(21:30)

<천제단 각자로 해석문을 찾으려 해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요지점 통과 및 이동거리

08:40 장수대에서 산행시작, 해발512m

09:05 옥녀탕휴게소 국공감시초소, 산행거리2.27km 소요시간24분, 해발433m

09:08 옥녀탕

09:46 한계산성, 산행거리3.31km 소요시간1시간06분, 해발580m

10:20 첫 번째 하강로프지점

10:24 통천문, 산행거리3.68km 소요시간1시간44분, 해발751m

10:29 능선조망바위

10:32 적암조망처소, 산행거리3.74km 소요시간1시간52분, 해발771m

10:46 산부인과바위

10:47 노송 쉼터전망대, 산행거리3.88km 소요시간2시간07분, 해발846m

10:51 하강릿지지점, 산행거리3.91km, 소요시간2시간11분, 해발862m

11:06~10 천제단, 산행거리4.00km, 소요시간2시간26분, 해발891m

11:20~33 대궐터추정지, 산행거리4.23km, 소요시간2시간40분, 해발903m

11:54 1054봉 전 우회 길, 산행거리4.51km, 산행소요시간3시간15분

12:09 1061봉(마지막 성곽 봉우리), 산행거리4.70km 소요시간3시간30분

12:22 1070봉

12:54 1259봉, 산행거리5.33km, 산행소요시간4시간15분 1386.1봉

13:15 전망바위, 산행거리5.58km 소요시간4시간35분, 해발1361m

13:20~14:06 감투봉(조망 및 점심), 산행거리5.67km, 산행소요시간4시간40분, 해발1392m

14:40 안산 밑 안부, 산행거리6.59km, 산행소요시간6시간00분, 해발1367m

15:16 십이선녀탕계곡상부 합도지점, 산행거리7.36km, 산행소요시간6시간36분, 해발1114m

15:21 이정표(십이선녀탕입구6km, 복숭아탕1.8km)

15:46 두문교

15:58~16:09 두문폭포, 산행거리9.35km, 산행소요시간7시간20분, 해발824m

16:22 복숭아탕, 산행거리9.85km, 산행소요시간7시간42분, 해발744m

16:35~43 응봉폭포, 산행거리10.49km, 산행소요시간7시간55분, 해발662m

16:49 구선대

16:52 출렁다리

16:55 칠음대, 산행거리11.06km, 산행소요시간8시간15분, 해발604m

17:05 이정표(십이선녀탕입구3km)

17:12 승폭, 산행거리11.88km, 산행소요시간8시간32분, 해발500m

17:20 흑백교

17:27 응봉출렁교

17:30 설악문, 산행거리12.72km, 산행소요시간8시간50분, 해발425m

17:42 곧은지티실계곡

17:45 십이탕출렁교

17:57 십이선녀탕계곡 탐방안내소, 산행거리14.39km, 산행소요시간9시간17분, 해발315m

18:03 윗남교버스정류장, 산행거리15.02km, 산행소요시간9시간23분, 해발322m

 

○산행 전 이야기

이번 산행계획은 장수대~옥녀탕~한계산성릿지~감투봉~안산~큰함지박골~두문폭포~복숭아탕~응봉폭포~십이선녀탕입구~남교리 코스였는데 안산 안부에 도착해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안산~큰함지박골을 생략하고 안산 안부에서 십이선녀탕계곡 상부로 내려서서 십이선녀탕계곡으로 하산했습니다.

이번 코스로 몇 차례를 출산하려하면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거나 집안사정으로 산행이 지연되다가 지난3월1일 폭설이 내린 후로 설악은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2년 전만 해도 눈이 많이 왔다고 산행계획을 접는 일은 없었는데 이제는 겁부터 나니 나이도 많지 않은데 늙었나 봅니다.

그래도 설악에 미련이 있어 다른 사람들이 올린 설악 산행기라도 참고를 하려고 수없이 인터넷을 뒤져보지만 설악산행기는 올라오지 않습니다.

폭설이 내린지 20여일이 지났으므로 눈이 녹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설악에 들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번 산행은 장수대에서 하차해서 옥녀탕휴게소로 이동한 후 성골로 진입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웁니다.

특히 이번코스는 노산 이은상 선생의 「설악행각」에서 노산 이은상선생께서 지났던 길과 중복되는 구간이 아주 많으므로 「설악행각」과 비교하보고, 예전에 불리던 지명이 현재는 모르거나 달리 부르는 지명, 이해되지 않는 기록에 대한 생각, 옛 지명에 얽힌 전설이나 관련 이야기 등을 함께 기록해보겠습니다.

「설악행각」은 노산 이은상(1903~1982)선생께서 31살이던 1930년9월30일~10월8일까지 8박9일 동안 설악을 돌아보고 「설악행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남긴 산행기를 남겼는데 이 산행기록을 1933년 동아일보에 여러 날 동안 연재했었습니다.

당시 일정으로 설악행각 3일차(산행1일차)와 4일차(산행2일차)가 이번 산행과 중복되는데 설악행각 3일차이자 설악산 산행 첫날은 십이선녀탕으로 진입해서 감투봉으로 오른 후 갱기좌골 좌측능선으로 하산했으며, 설악행각 4일차이자 산행 둘째날은 옥녀탕휴게소에서 한계산성 대궐터까지 갔다가 성골로 내려와 장수대까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산행은 역방향으로 진행하므로 설악행각 4일차(산행2일차)에서 3일차(산행1일차)로 진행하며 노산성생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려 합니다.

오늘 산행을 통하여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설악의 지명이 현재 사라졌거나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는 지명을 하나하나 헤아려 볼 요량입니다.

학서암, 적암, 응암, 삼신암, 삼장군봉, 공기돌바위, 삼각봉, 감투봉, 두문곡, 응봉폭포, 구선대, 칠음대, 승폭, 설악문, 지리곡, 구유소 등의 잊혀져가는 지명이 있습니다.

그중 다중이 알고 있는 응봉폭포는 응봉폭포가 아니고 응봉폭포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이번에 응봉폭포가 어디에 있는 어떤 폭포인지 제대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언제나 명품 산행을 만들려 노력하는 범솥말의 산행,

노산 이은상선생의 「설악행각」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장수대~옥녀탕~한계산성~감투봉~십이선녀탕계곡으로 이어 갑니다.

 

○장수대에서 옥녀탕휴게소까지 국도 이동 구간

장수대에서 양반바위와 가리봉을 올려다보고 44번국도를 따라 10분정도 내려서면 국도는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이곳에 거대한 절벽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이 절벽을 하늘벽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절벽은 오래전 그러니까 1930년경에는 하늘벽이 아니라 학서암이라고 불렀다.

학서암(鶴棲岩)

학서암은 학이 집을 짓고 살던 바위라는 뜻이다.

「설악행각」본문을 본다.

오른 편 맞은 언덕에 높이와 넓이가 모두 몇 백길이나 됨직한 큰 바위 벼랑를 만나는데 윗단 한 모퉁이에 깨어진 자취가 있습니다. 돌 빛으로 보아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듯한데 이것은 여기에 학이 대대로 깃들이고 있었던 것을 독사란 놈이 해치려다가 마침 벼락이 떨어져서 천벌을 받은 자취라고 합니다. 학들은 그 천둥바람에 새끼들을 독사한테 물리지는 않았지마는 그길로 이곳을 떠나가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하며 지금은 이름만 남아 ‘학서암(鶴棲巖)’이라고 전할 따름입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네들 정상과 다름없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옛집을 버린 것이 어찌 저 학 만이겠습니까.
(학이 떠난 학서암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시 한 수를 읊는데 참으로 가슴이 뭉클한데 명 시(詩)를 감상하겠습니다.)
정들인 제 집이라 날아들고 날아가고
대대로 어이 새끼 예서 살던 학두루미
이 좋은 강산을 버리고 어디로들 가던고.
새끼들 거느리고 정처 없이 떠 돌면서
오늘은 어느 곳에 눈물의 깃을 쳤노
언제나 고향 산천으로 웃고 돌아 올런고.


 

이 글을 쓴 시기는 1933년으로 일제 강점기였으며 이 당시 잘 나간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들이었는데 이 설악행각을 읽으며 노산 이은상 선생에 대해 사전에서 보니 일제에 항거하다가 옥살이도 한 분으로 정말 학식과 인품을 갖추 분이라고 생각이 든다.

위 글 후반부 「우리네들 정상과 다름없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옛집을 버린 것이 어찌 저 학 만이겠습니까.」 라는 부분은 노산 이은상 선생의 애국심이 보이는 부분으로 우리네 정상이란 뜻은 일본에게 나라 잃고 언제인지 모를 해방을 기다리는 마음을 나타내며 그 마음을 시한수로 달래는 장면이다.

학서암을 지나면 장수2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지나며 우측을 보면 기암절벽이 보이는데 기암 우측은 몽유도원도릿지 구간입니다.

예전에는 몽유도원도 릿지구간은 없었는지 설악행각에서는 몽유도원도는 나오지 않는데 중앙은 붉은 색을 바위절벽을 1930년대에는 적암이라고 불렸던 곳이며 절벽 좌측은 한계산성릿지 길로 잠시 후 지날 릿지능선이며 적암 이외에도 절벽지대 제일 높은 곳을 응암(鷹岩)이라고 했으니 응암은 매바위라는 뜻이다.

장수2교를 지나 장수3교로 접어들며 뒤돌아보면 학서암 서편이 되는 곳으로 바위3개가 돌출된 곳이 있는데 노산 이은상 선생은 이 바위를 삼선봉이라 하고 흑백사진까지 곁들였으며 삼선봉 우측 마치 칼을 세운듯한 바위가 나란히 3개가 있는데 이를 삼장군봉이라 적었다, 그러나 3장군봉은 사진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고 추청해본 것이다.

잊혀져가는 학서암, 매바위, 적암, 삼선봉, 삼장군봉을 보고 조금 더 걸으면 좌측으로 주걱봉으로 가는 느아우골이 있고 우측으로 보면 옥녀탕이 보인다.

삼장군봉은 설명만 곁들였고 사진을 올리지 않아 확실하지 않고 이곳은 추정입니다.

지난번에는 옥녀탕휴게소 국공초소에 국공직원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느아우골 아래로 내려서서 계곡을 건넜는데 지금은 물도 많고 철망을 새로 설치해 내려서기도 만만치 않아 조심스럽게 옥녀탕휴게소로 다가선다.

오래전 옥녀탕 휴게소는 사람들이 많아 성황을 이루었는데 어느 해 큰 홍수가 나며 일대가 훼손이 되어 휴게소도 문을 닫게 되었고 넓은 주차장은 늘 썰렁하게 비어있는 편이다.

비어있는 휴게소 건물 뒤로 국공초소가 있는데 직원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는데 아마도 없는 듯하다.

○장수대에서 옥녀탕휴게소까지 산행거리2.27km, 소요시간25분, 해발433m, 현재시간09시05분이다.

 

○옥녀탕휴게소에서 천제단 구간

「설악행각」에서 노산 이은상 선생은 이곳을 어떻게 지났을까?

한계고성을 갈 때는 능선으로 갔다가 내려올 때는 옥녀탕으로 내려섰다.

국공초소에서 되도록 먼 곳에서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국공초소를 지나 능선으로 갈까 하다가 옥녀탕을 보아야 하므로 한계천 넓은 계곡으로 내려선다.

옥녀폭포 아래서 우측으로 기어올라 2단폭에 올라서면 3단 폭포는 큰 바위돌 아래 있는데 3단폭포를 덮고 있는 큰 바위는 옥녀가 가지고 놀던 공기돌로 공기돌바위라고 하는데 옥녀는 이렇게 큰돌로 공기를 했나 싶다.

공기돌바위 아래있는 3단폭포는 늘 물이 차있는 곳이므로 근접하기는 힘든데 누군가의 산행기록에 보면 어디엔가 조선시대 이곳을 지난 사람이 새긴 마애명이 2개인가 있다고 하는데 찾아 볼 수가 없다.

2단폭에서 폭포 위로 올라가려면 좌측 바위사면으로 붙어서 네다리로 기어서 조심스럽게 올라야 하는데 실제로 혼자서 옥녀탕을 지나는 것은 쉽지 않다.

산악회에서도 이곳을 지나는 팀도 있지만 대부분 능선으로 우회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옥녀폭포를 지날 때 일행이 있어 밑에서 받쳐주던지, 아니면 위에서 스틱으로 끌어준다면 편하게 지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폭포를 막 지나면 지나기 애매한 바위가 있다.

지난번에도 어렵게 지났는데 그때는 물이 적은 바닥에다가 큰 돌을 쌓아 징검다리를 놓고 지났는데 이번에는 물이 많아 징검다리를 만들 수 없다.

훌쩍 뛰어 바위에 붙으면 되는데 바위는 미끄러워 손을 잡을 곳도 없고 발을 딛을 때도 없는 반질반질한 바위다.

그냥 무식하게 뛸까 하다가 운수가 사나우면 미끄러지면 하반신이 물에 잠기던지, 재수가 없으면 뒤로 벌러덩하다가 뇌진탕이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아 가파른 사면으로 기어 올라가 능선에서 내려서는 등로를 만나 폭포가 있는 계곡 위로 내려선다.

그런데 노산 이은상 선생은 성골을 능선으로 진입해 한계고성을 보고 대궐터로 올랐다고 기록했는데 오르는 과정이 상세하지 않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인 견해와 삼각봉을 찍은 사진의 위치로 보면 능선이 아닌 계곡으로 따라 올라 대궐터로 오른 것 같다.

대궐터를 보고 노산 이은상 선생이 옥녀탕으로 내려서며 쓴 글을 본다.

옥녀폭은 층층이 큰 바위를 뚫고 3번 꺾여, 3번 괴어 흐르는 곳입니다.
소유 권상용(勸相容)의 기(記)에는 이것을 옥류(玉流)라 쓰고 거기에 설명을 썼으되
「폭포 꺾인 것이 3번, 돌확으로 된 것이 셋, 꺾여서는 물을 뿜어 흰빛이 나고 괴어서 있지 아니한다.」하였습니다.
물론 그 묘사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요령을 얻었다 하겠거니와,
그 이름에 있어서는 내가 듣는바 옥녀(玉女)와 그가 쓴바 옥류(玉流)가 서로 다릅니다.
아마 옥녀와 옥류(玉流)가 음이 비슷한 데서 생긴 것일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기록을 따라 옥류라 하지 않고 이곳 사람들이 전하는 옥녀를 취하는 것은 폭포 위에 있는 묘한 바위를 공기바위라 하여, 옥녀가 가지고 놀던 것이란 말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위에 2번 꺾인 폭포는 작은 것이지마는 아래 1번 꺾인 것은 꽤 긴 폭포요 또 여기 돌확이라는 것은 저 탕수동의 명물인 탕(盪)과 같은 것이어서 여기서는 흔히 옥녀탕이라고도 합니다.

옥녀폭포는 3번 꺾이고 3개의 돌확이 있다고 하며 위 2번은 짧지만 아래 1번은 길며 돌확의 깊이도 길어 이곳 주민들은 탕수동의 복숭아탕과 같이 탕을 붙여 옥녀탕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했다.

옥녀(玉女)와 옥류(玉流)의 차이가 발생한다.

권상용의 산행기에는 옥류(玉流)라고 기록했다고 했으며 또 조선시대 다른 사람 산행기에서도 옥류(玉流)라고 쓴 기록도 있는데 노산선생은 이곳 토박이들이 부르는 옥녀로 기록을 한다.

우회하여 계곡으로 내려서면 얼마 전 강풍으로 많은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거나 중간에 동강이 나기도 한 나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곳을 지나 잠시 후 3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직진은 성골을 따라 한계고성을 지나 안산으로 오르는 길이고 우측으로 계곡을 가로질러 건너 10분을 가면 한계산성에 닿는다.

한계산성(寒溪山城)

안내문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 때 축성되었다고 추정하며 고려 말 보수한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하는데 그 크기가 약7km나 된다고 한다.

산성이 7km가 된다면 무척 큰 산성인데 이곳은 일반적인 산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지인데 성골에 남문지 일대를 제외하면 가파른 절벽지대에 절벽을 이용해 쌓은 성으로 아마도 신이 쌓았다고 봐야지 인간이 쌓기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할 정도다.

이곳 한계고성 축성연대를 노산 이은상 선생은 안내문에 기록한 것같이 신라시대 경순왕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고려 공민왕 연호가 박힌 기와조각이 나온 것으로 보아 1358년경으로 추정한다.

노산이은상 선생의 기록은 성골진입->한계산성, 대궐터, 망경대와 삼각봉그리고 옥녀폭포가 전부로 지금부터 대궐터까지는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릿지구간이 아닌 계곡을 통해 대궐터까지 왕복한 것으로 추정해본다.

한계산성 계곡에는 산성의 정문이 되는 남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복원되지는 않았으며 수년전 새로 축성한 성곽이 계곡 양옆으로 길게 있다.

산성에서 성곽을 따라 우측으로 4~5분 이동하면 절벽지대에 닿게 되며 이곳부터 험준한 암벽, 암릉지대가 시작된다.

가파른 경사지에서는 로프지대가 연이어 나타납니다.

 

경사지 정상으로 올라서면 불탄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5분정도 오르면 성골 건너편 성곽이과 성골 좌측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 치마바위와 안산이 나뭇가지의 방해를 받지만 모습을 나타내고, 10분정도 오르면 연속 로프가 나며 고도를 한층 끌어 올리며 15분 정도 오르면 바위지대에 왕 마사가 있어 미끄러운 경사지를 오르며 20분이 지나면 적송이 나타나고 적송 사이로 안산의 모습이 제대로 잡히며 언젠가 불이 났었는지 불탄 흔적이 나타나며 경사지 상부로 올라선다

그러니까 한계산성 안내문이 있는 곳에서 경사지 상부까지 20분을 땀 빼며 올라서야 한다는 말이다.

경사지 상부에서 1~2분 지나면 우측으로 가리봉과 주걱봉이 모습을 조망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5분여를 지나면 적암 절벽지대가 눈에 들어오고 치마바위, 안산정상, 우측 무명암봉과 함께 성골의 심장부가 한눈에 보인다.

다시 거론 되겠지만 위 3개암봉을 노산 이은상 선생은 삼각봉이라고 기록했는데 당시에는 안산이라는 산명이 없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이곳에서 안산을 거론한 적이 없고, 설악행각 1일차 감투봉에서 안산을 지나 치마바위를 거론하면서도 안산에 대한 한 마디가 없었던 점으로 보아 안산이라는 산명은 1930년대 이후에 생긴 것 같다.

조망처에서 삼각봉을 보고나서, 등로는 약간 우측으로 로프를 타고 내려서며 V곡 안부로 내려서게 되는데 한계산성 안내문에서 약30분이 지난 시간이다.

V곡 안부로 내려서면 등로는 약간 우측으로 비틀리며 명물로 안내하는데 바로 통천문인데 어떤 사람들은 석문으로 기록하기도 하는데 노산선생은 이런 글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계곡으로 올랐을 가능성을 확고하게 한다.

통천문은 아주 넓어 서서 그것도 몇 명이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으며 통천문을 지나 좌우전후를 구경하며 오르막 등로를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우주선 같은 바위에서 안산일대의 조망과 맞은편 노송이 있는 전망터에서 가리봉과 주걱봉 그리고 적암절벽을 조망할 수 있는 특권으로 보상 받는다.

우주선같은 바위전망대라고 표현한 곳으로 안산과 치마바위, 고양이바위는 물론 삼각봉의 축을 이루고 있는 2개의 무명봉도 조망권입니다.

장수2교에서 멀게 보았던 적암절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잠시 조망을 하고 능선을 따라10분을 오르면 암봉 좌측으로 로프를 잡고 돌아 오르며 구멍바위를 지나 해산굴로 표현하는 굴을 빠져나가는데 굴로 지나지 않고 위로 지나도 되는데 추억을 만들거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굴을 빠져 나가는 것이다.

해산굴을 빠져 나가면 노송이 있는 최고 중 하나인 멋있는 조망터가 기다리고 있어 해산굴을 지난 사람들에게 쉼을 제공한다.

해산굴은 굴로 지나도 되고 위로 지나도 됩니다.

노송쉼터에서는 가리봉과 주걱봉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망터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등로로 들어서면 로프가 있는 지대가 나오는데 위험하지는 않지만 눈이나 비가 있을 때는 로프가 필요한 곳이다.

로프를 잡고 잠시 고점으로 오르면 암봉에는 노간주나무와 소나무가 바위를 쪼개며 살아가는 끈질긴 생명력의 표상을 보여주고, 암봉과 건너편 암봉 가운데는 약30여m 낭떠러지기 V곡이 있다.

로프가 있다고 해도 내려서는 게 장난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가늘고 낡은 로프에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이고 낡은 로프가 마음에 걸려 배낭에 있는 슬링을 걸까? 생각하다가 걸린 로프를 당겨보니 끊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 무게를 분산시키며 내려서기는 했지만 지금도 이곳을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낡고 가느다란 로프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섭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맞은편 로프지대로 오르며 거북 등가죽 같은 지나온 험지를 본 풍경입니다.

안부로 내려서서 거북 등가죽 같은 암벽을 보고 또 봐도 험지였는데 내려와서 보니 좌측에도 로프가 걸려있는데 위에서는 볼 수 있는 위치도 아닌데 이 로프는 한번 이곳을 지난 사람이거나 아래서 위로 오를 때 이용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V곡에서 다시 내려선 높이보다 더 높게 올라야 하는데 로프가 계속 이어져 있지만 역시 만만하지는 않은데 눈비가 있을 때는 로프가 있어도 주의가 필요한 곳이며 중간 한 곳은 로프가 있어도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할 곳이 있다.

오르면서 조금 전 내려선 암벽지대를 돌아보고 다시 또 돌아보았는데 어떻게 이런 곳에 산성을 만들 수 있을까?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로프를 잡고 씨름을 하다보면 로프지대가 끝나고 붉은 색 적송이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서니 아~ 천제단이었다.

천제단은 이렇게 오르기 어려운 곳, 신성의 의미로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말라는 하늘의 명령인 듯 했다.

천제단으로 오르는 로프지대입니다.

천제단에 올라 인증사진을 찍어 봅니다.

○장수대에서 천제단까지 산행거리4.00km, 소요시간2시간26분, 해발891m, 현재시간11시06분이다.

 

○한계산성 천제단에서 감투봉 정상 구간

한계산성 천제단(寒溪山城 天祭壇)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은 전국적으로 보면 상당히 많다.

대표적인 천제단으로 강화 마니산과 태백산 천제단, 지리산 노고단이 생각나며 설악산에도 여러 곳이 있었겠지만 노산 이은상선생의 설악행각을 보면 대청봉 옆에도 1930년대에는 제단이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내설악 직백운계곡과 곡백운 계곡 사이 제단골이라는 계곡이 있으니 제단골 어디엔가도 천제단이 있었다고 하는 풍문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천제단이 이렇게 험지에 쌓은 곳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천제단은 좁고 길쭉한 돔 형태로 쌓은 3개의 탑이 있는데 이 탑이 고려 말부터 이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산성복구 때 복구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대부분사람들은 이곳 천제단에 올라 막걸리를 놓고 제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 정좌하고 배를 올리고는 하는데 필자는 마음으로만 제를 올렸다.

천제단으로 가깝게 접근해 돔형 돌탑을 자세히 보면 작을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돌이 돌탑 하나에 하나씩 있는데 가방끈이 짧은 것도 있지만 글씨가 작고 세월이 흐르며 바위꽃이 피어 알아보기 쉽지 않다.

천제단에서 동북으로 몇 분 이동하면 안산이 잘 보이는 전망터가 있는데 아마도 노산 이은상 선생께서 적은 망경대가 이곳을 지칭하는 듯하다.

망경대(望京臺)

설악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망경대는 오색의 남설악 망경대, 양폭 위 외설악 망경대, 그리고 오세암 옆 내설악 망경대 이렇게 3곳의 망경대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곳 한계산성 릿지에도 망경대가 있다고 기록했다.

노산 선생 기록에는 대궐터, 망경대가 나오는데 천제단이라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데 만약 1930년 당시에도 천제단이 있었다면 대궐터, 망경대까지 올랐는데 천제단을 안 왔다가 갈리는 없다.

더구나 천제단 3개의 돌탑에는 각각 하나씩 한문으로 음각한 돌이 박혀 있는데 노산선생이 이 음각된 돌을 보았다면 해석하고 견해를 달았을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노산 이은상 선생께서 이곳에 올랐을 때는 천제단이 없었다고 유추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제단에서 주변을 서성이다가 망경대에서 노산 선생께서 말하는 삼각봉도 보고 성곽을 따라 10여분 가면 V곡 넓은 지형이 나오는데 이곳을 대궐터 추정지다.

소나무에는 천으로 인쇄한 ‘한계산성 상성 발굴지’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 서쪽 2-1구간 170m는 천제단까지인 것 같고 서쪽 2구간 치성 444m 중 석축구간 44.3m는 1061봉 마지막 성곽을 일컬는 것 같다.

대궐터 발굴안내문 서쪽2구간이 붙은 참나무 뒤로는 성골 우지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다, 아마도 노산 이은상선생도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올랐을 것으로 추정해보는 성골 우지계곡 하산하는 길입니다.

대궐터를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다시 갈 길을 이어간다.

이곳에서는 이제까지 올라온 능선과는 달리 경사는 심하지만 펑퍼짐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등로 흔적이 사라졌는데 사방을 보아도 흔한 표지기가 없다.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조금 오르다 보니 위쪽에 붉은색 표지기가 안내하는데 이곳부터 감투봉을 오르기까지 가끔 흑마의 붉은 표지기를 볼 수 있었다.

진달래나무와 잡목을 빠져나가는 곳에 말굽버섯을 발견했는데 꼭 필요한 사람이 약으로 쓸 수 있도록 눈으로만 보고 위로 올라선다.

고운 흙 길을 지나고 왕마사가 있는 미끄러운 경사지를 오르다 바위에 걸터앉아 과일로 간식을 한다는 것이 10분 이상 쉼을 하게 되었다.

다시 경사가 심한 능선은 암봉이 시작되는데 등로는 암봉 우측을 따라 이어지며 전신에 땀이 흐르고 다리도 무겁게 느낄 정도로 오르다 보면 안부에 도착하게 되는데 대궐터에서 20~25분이 걸린다.

사면 길은 겨울철 위험하므로 무명봉을 넘는게 좋습니다.

안부라 해서 특별하지는 않다.

큰 참나무가 있는 쉼터 정도인데 이곳에서 무명봉은 1~2분 더 올라야하는데 좌측으로 희미한 표지기가 보이자 유심히 살피니 3개의 표지기가 달렸다.

좌측으로 우회하라는 얘기인데..... 표지기가 안내하는 대로 무명봉을 사면으로 우회했는데 겨울철 눈이 내렸을 때는 사면으로 우회하는 것보다 무명봉으로 넘는 것이 좋다.

사면에는 잔설이 있는데 사면 전체가 얼음바닥으로 미끄러워 미끄러질 위험이 크기 때문인데 초행이다 보니 표지기가 안내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면을 가로질러 다시 능선으로 복귀하면 능선을 기준으로 좌측은 성골우지계곡이고 우측은 오승폭포 위 오승폭폭포골 그러니까 오승골 좌지계곡이 되는 셈이다.

한차례 암봉을 지나자 뚜렷한 성곽이 나타나는데 대궐터 안내문에 기록했던 44.3m성곽이다.

성광 끝지점에서는 가야할 방향으로 조망이 트이는데 치마바위는 보이지만 안산은 무명봉에 가려 보이지 않고 감투봉과 무명봉 3곳과 1396봉이 보이며 이곳을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면 1061무명봉이다.

1061무명봉에서 서서히 오름이 지속되며 잡목사이로 난 등로를 10분 지나면 1070 무명봉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서 좌측 무명암봉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전면에서 보면 뾰족하고 날카롭게 보이던 암봉이 이곳 뒷면에서 보면 침엽수가 무성하고 볼품이 없고 가야할 방향으로 무명 암봉 2개가 우뚝하다.

1070무명봉을 지나면 빡쎈 오름이 지속되며 등로 사정은 위험하지 않고 좋은 편이며 10분을 오르면 거대한 무명암봉 옆을 지나게 되며 등로는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경사가 심해 기어서 오르다 보면 슬링이 걸려있는 지점에 닿게 되는데 혼자서 이곳을 오르려면 힘 좀 쓰며 애를 먹어야 하는데 일행이 있다면 조금만 받혀주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슬링을 집고 올라서면 오승폭포골과 오승골 중간을 가르는 능선에 아주 멋있는 암봉이 나타나는데 손바닥을 닮았다고 손바닥바위로 적는 사람도 있는데 무척이나 멋이 있는 무명봉이다.

이곳에서 땀을 식히며 뛰어난 경관을 보고 3~4분 더 오르면 1259봉으로 조망은 뛰어난데 아쉬운 건 조금 전에 보았던 손바닥바위 같은 경관은 잡목에 가려 볼 수가 없다.

1259봉은 전망바위가 2곳이 있고 가문비나무 고사목이 있는 정점에서 성골 내부와 지나온 능선 그리고 안산과 올라야할 감투봉까지 사방이 조망되며 천제단으로 오르며 보았던 삼각봉의 가운데 무명봉은 이곳에서 보면 뒤쪽으로 충분히 오를 수 있는 평범한 암봉으로 보인다.

1259봉에서 조망하느라 제법 많은 시간을 보내고 등로를 이어가면 경사는 있지만 위험은 전혀 없이 안전하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20분 정도 오르면 무명 암봉 위로 올라서게 되는데 정점인 감투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무명 암봉에서 지나온 능선을 대충 훑어보고 5분을 올라서면 서북릉 능선으로 이곳이 감투봉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조금 전 지나온 무명 암봉을 감투봉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잘 못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런 확신은 노산 이은상선생의 설악행각에서 보면 두문폭포에서 감투봉으로 올랐다고 썼으므로 능선 아래 있는 무명봉이 아니고 1396봉 옆에 있는 이곳이 감투봉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인데 어쩌면 1396봉과 이곳 1392봉을 몸땅 아우러 감투봉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감투봉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 많다.

감투봉은 잡목이 있는 곳, 2개의 암봉 등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작은 암봉을 지나 1396봉 가까운 곳에 있는 암봉으로 이동하며 감투봉을 접수한다.

○장수대에서 감투봉까지 산행거리5.67km, 소요시간4시간40분, 해발1392m, 현재시간13시20분이다.

 

 

○감투봉에서에서 십이선녀탕계곡 복숭아탕 구간

감투봉(㔶頭峰)

감투란 머리에 쓰는 모자 같은 것의 한 종류로 탕건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감투봉이라면 봉우리의 형상이 감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감투봉이라는 이름은 곳곳에 제법 있는 편이다.

감투봉~

얼마나 정감있는 봉우리 이름인가.

나는 이런 산명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런 고전적인 산명은 오래전부터 우리 선인들이 불러왔던 산명인데 현대에 들어서는 국립공원이나 명산의 경우 대부분 불교 이름으로 붙였는데 이는 처음부터 붙여졌던 산명이 아니고 명산에 무작위로 암자나 사찰을 지으며 불교인들이 있지도 않은 산명을 붙인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설악산의 대표적인 계곡인 천불동계곡만 해도 1930년대 정식 이름은 설악골로 불렸으며 일부 신흥사 중들이 1000개의 불상 같은 바위가 널려있다고 해서 천불동계곡으로 불렸던 것이 이제는 원래의 설악골이라는 이름은 지계곡으로 밀려나고 신흥사 중들이 부르던 천불동계곡이 주계곡으로 불리고 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서북릉 감투봉~

설악산에는 감투봉이라는 이름이 이곳 말고도 서북릉 1408봉에서 분기한 능선에 또 있는데 그곳에 있는 감투봉은 큰감투봉과 작은감투봉으로 나누어 불리고 있다.

1년전만 해도 1396봉 옆에 있는 이곳이 감투봉인지 몰라 설악행각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은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곳이 감투봉이라는 사실을 알고 설악행각에서 노산 이은상선생의 발자취를 더듬는데 이해가 되었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1933년9월30일부터 10월8일까지 설악산을 돌아보고 설악행각이라는 산행기록을 남겼는데 산행 첫날 남교리 십이선녀탕계곡을 따라 이곳 감투봉에 올랐다고 기록했는데 감투봉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 애를 먹었던 적이 있다.

감투봉 위로 올라서니 바람이 몹시 강하게 불어대니 땀으로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설 정도다.

지난 1월초에 건너편 1396봉에 올랐을 때 너무 추워 이곳을 지나 지금 올라온 곳으로 하산하려다가 너무 추워 포기하고 내려섰는데 지금도 바람은 세지만 춥지가 않으므로 산행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한동안 이리저리 조망을 하긴 했는데 박무가 심해 향로봉과 금강산은 전혀 볼 수가 없고 눈 덮인 대청봉과 대간능선인 공룡능선, 건너편 가리봉과 주걱봉 등을 대충 보고 잡목이 있는 곳, 바람이 채이지 않는 곳에 저리를 잡고 점심을 해결하니 2시가 넘었다.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고 감투봉을 뒤로한다.

감투봉에서 안산방향으로 내려서는 좌측은 어마어마한 낭떠러지기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험하다.

내려서는 등로에 잔설이 두껍게 남아있어 조심하며 내려서다가 미끄러져 목숨 줄을 놓을 뻔, 하자 반 정도 혼이 나간 상태에서 스패츠와 아이젠을 착용했는데 올해는 스패츠나 아이젠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넘기나 했는데 기어이 늦은 3월에 사용해야 했다.

감투봉에서 안산으로 가는 서북릉 등로에는 아직도 눈이 많았고 아무도 지나지 않아 발자국 흔적도 없는데 지난번에 한 번 지난 적이 있어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옛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찾아야 했다.

30분이 지나 고양이바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고양이바위를 감상하고 다시 힘을 내어 10분을 더 올라 안산 안부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가파른 길을 약 10분 오르면 안산정상이고 우측으로는 십이선녀탕계곡 상부로 내려서는 길이다.

1930년 감투봉을 떠나 안산으로 이어간 노산 이은상선생은 안산을 어떻게 표현하고 기록했을까?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치마바위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 기록이 없을까?

필자의 결론은 간단하다.

1930년경에는 안산이라는 산명이 없고 무명 암봉으로 부르지는 않았을까?

안산이라는 산명도 없고 고양이바위도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안산이나 고양이바위는 해방이후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것이 맞다면 왜? 설악산 안에 별도의 산명을 붙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안산의 산명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안산 위에서 사방을 조망하는 기록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없다.

왜? 그럴까?

필자의 결론은 역시 간단하다.

지금이야 길이 안전하게 나있지만 1930년경에는 길이 없거나 위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이곳 안부에서 우측으로 우회해서 안산을 지났을 것 갔다.

안산 안부에 올라선 시간은 14시40분이다.

안부에서 잠시 쉬며 계획대로 안산을 지나 1376봉에서 길도 없는 큰함지박골로 내려설 것인가? 아니면 안산을 넘어 성골로 원전회귀를 할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여기서 계획을 수정하고 십이선녀탕계곡 상부로 내려설 것인가?

햇살을 받고 있는 1376봉 일대를 보며 갈등을 느낀다.

그리고 이곳에서 산행계획을 수정하여 십이선녀탕계곡 상부로 하산을 결정한다.

눈이 있어 등로 사정이 안 좋은 안산을 넘는 것도 위험하고, 안산을 넘어 1376봉까지는 그런대로 간다고 해도 큰함지박골은 응달지역으로 눈이 엄청 많이 쌓였을 것이므로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이고 그러면 하산 후 귀가도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안산 안부에서 십이선녀탕계곡 상부로는 몇 년 전 내려간 적이 있으므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산을 시작하니 많은 적설에 등로가 묻혀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아 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길이 지나가는 방향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므로 등로를 무시하고 나름대로 개척하며 내려서니 깊은 산이나 오지에서 자주 보는 주황색표지기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런 표지기가 없었는데 그 사이 서울마운틴클럽에서 이곳을 지났나보다.

양지가 나오며 잠시 눈이 적다했는데 계곡으로 내려서며 눈이 많아 무릎이상 푹푹 빠진다.

이럴줄 알았다면 감투봉과 안산 중간에서 개척하며 내려왔다면 아주 가까운 거리였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필요없는 곳에는 표지기가 몇 개씩 보이고 막상 길이 불분명한 곳에는 표지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계곡이 길지 않고 예전에 내려섰으므로 생각대로 내려서니 안산 안부를 떠난 지 30여분이 되어 십이선녀탕계곡 상부 정규 탐방로와 만난다.

십이선녀탕계곡 상부.

전에는 이 계곡의 이름을 몰랐었는데 이 계곡도 이름이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의 설악행각을 보면 두문폭포에서 위 계곡을 두문곡이라고 했으니 설악산국립공원에서도 이정표에 두문곡이라는 표기해야할 것 같다.

이곳 십이선녀탕계곡에는 오래전에 이름이 있었는데 지금은 잊혀져 가는 지명이 많은데 정감이 가는 지명을 설악행각에서 배울 수 있다.

두문곡에서 정규등산로를 따라 하산을 한다.

오래전 지난 발자국의 형태는 어렴풋하게 나타나는 듯한데 3월초 큰 눈이 내린 이후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없는 듯하다.

어떤 곳에는 눈이 많이 쌓였고, 눈이 적은 곳도 있고 조용한 계곡, 눈길을 걷는 기분이 좋다.

가다말고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발자국을 보기도 하며 걷다보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이 도도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며 가다보면 작은 지류를 지나는 곳에 놓인 작은 목교가 정감이 간다.

두문곡 시발점에서 15분을 내려서니 복숭아탕1.8km, 십이선녀탕입구 6.0km가 표기된 이정표가 있다.

아직도 내려갈 길이 까마득하기만 한데 온전히 귀경할지도 알 수가 없는 입장으로 발걸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라지고..... 두문곡 시발점에서 30분을 내려서 큰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도착하는데 이 다리가 두문교다.

두문교 위에서 위와 아래 풍경을 담고 잠시 숨을 돌리고 10분을 더 내려서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목교가 지난해 홍수에 부러져 흉물이 되어 한 쪽에 방치된 채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 5분을 더 내려서고야 두문폭포에 닿는다.

두문폭포!

십이선녀탕계곡으로 통칭되는 이곳은 오래전부터 초입은 지리곡, 중간은 탕수동계곡, 이곳 두문폭포 위로는 두문곡으로 이름 붙여졌다.

그러므로 이제 두문곡을 벗어나 탕수동계곡이 시작되는 것인데 두문폭포가 기점이 되며 두문폭포는 통칭 십이선녀탕계곡의 제일 위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큰 폭포이기도 하다.

두문폭포 아래 탕(또는 담, 못)도 무척 큰 편이며 두문폭포 담 서쪽으로 있는 사태골이 큰함지박골로 산행계획을 세울 때는 얼어붙은 큰함지박골로 내려선다고 정했다가 생각보다 눈이 많아 큰함지박골을 포기하고 두문곡으로 내려선 것이다.

두문폭포 위 데크계단에서는 잡목이 가려 두문폭포를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사진도 찍을 수가 없어 늘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그냥 지나치고는 했었다.

오늘 같은 날은 아무도 없으므로 두문폭포 아래로 내려설 수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세라 계단을 넘어 두문폭포 아래로 내려선다.

폭포는 힘차게 움직이고 있다.

단 1초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물을 내리고 물을 받는다.

겨우내 얼어서 활동하지 못했던 답답함을 폭포는 마음껏 발산하고 있는데 우리네는 1년이 넘도록 코로나에 묻혀 답답함을 달랠 길도 발산할 길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두문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10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다시 등로로 복귀한다.

두문폭포에서 데크계단을 내려서면 용탕으로 폭포도 거느리고 있는데 용탕은 얼음을 깨고 모습을 나타냈는데 폭포가 되는 바위면은 아직도 얼음을 깨뜨리지 못했는데 곧 제 모습을 나타낼 것 같다.

이번 글을 쓰면서 탕의 숫자가 헷갈려 1시간 이상을 허비했다.

언제부턴가 십이선녀탕이라 부르며 12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한 곳이라며 이곳 토박이들은 12개의 폭포와 12개의 탕이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탕의 숫자는 12탕이 못되는데 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은 8폭, 8탕이라고 적었는데 노산 이은상보다 100여년전에 쓴 권용정의 설악내기에서는 5폭포10탕으로 기록하기도 했는데 폭포와 탕의 숫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적을 수 있는데 필자가 볼 때 5폭으로 보아야 맞을 듯하다.

언젠가 이곳을 찾았을 때 12개가 안 되는 탕을 12개를 맞춘다며 용탕 좌측 바위사면에 있는 생기다가 만 작은 곳까지 센 적이 있는데 생기다가 만 작은 홈은 설악행각에 의하면 이곳 토박이들의 말에 의하면 용혈로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고는 했던 곳이라 적었다.

문제는 탕의 숫자다.

아무리 세어도 9개가 전부인데 10개를 채우려면 용혈까지 숫자에 넣어야한다.

노산선생이 8탕이라고 센 것은 별도의 이름이 있는 두문폭포를 제외하고 용탕부터 독탕까지로 폭포와 탕을 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권용정의 설악내기에서는 두문폭포까지 포함했으므로 폭포를5, 탕을 10로 기록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10탕을 억지로 맞춘다면 용혈까지 넣어야 한다.

두문폭포를 지나 내려서면, 십이선녙ㅏㅇ계곡에서 폭포로는 최고라는 찬사를 받는  1폭포 1탕을 거느리고 있는 용탕폭포(설악내기로 치면 2폭2탕)가 나오고 용탕을 지나면 완만한 경사 바위사면 폭포를 지닌 2폭포 2탕(설악내기-3폭3탕)인데 아직 얼음을 깨고 나오지 못해 볼 수가 없고, 이어서 3탕(설악내기-4탕)으로 내려서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3탕은 권용정의 설악내기에서 이곳에서 으뜸가는 못이라고 적었다. 3탕에는 탕만 있고 폭포는 없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급격한 바위사면을 거치며 떨어지는데 폭포의 높이도 제법 되는데 이곳이 3폭포4탕(설악내기-4폭포 5탕)이 되는데 4탕은 바위사면의 얼음을 모두 깨버렸는데 아래 담은 이제 막 깨며 제 모습을 찾는 중으로 물 반 얼음반이 되어 있다.

4탕을 지나면 4폭포5탕 밋밋한 유속으로 흐른 물이 잠시 머물며 지나는 곳으로 담의 깊이도 다른 탕에 비해 깊지 않은데 그나마 얼음이 덮고 있어 모습은 볼 수 없다.

5탕을 지나면 6탕, 7탕, 8탕은 전망대에서 한 번에 볼 수 있는 탕으로 우리들이 복숭아탕으로 부르는 6탕, 안내문에는 용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두문폭포 아래 있는 1탕이 용탕인지 이곳 무지개탕, 그러니까 복숭아탕이 용탕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공단에서 설치한 안내문이 잘못된 것 같다.

전망대에 서면 3개탕을 한 번에 볼 수 있는데 설악행각에서는 맨 위가 무지개 탕,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무지개 虹(홍)자를 써서 홍탕이라 부르며, 가운데 그러니까 전망대 아래 있는 탕은 북(재봉틀 밑 실 틀)을 닮았다고 해서 북탕,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북 梭(사)자를 써서 사탕이라고 부르며, 그리고 맨 아래 있는 탕은 독, 즉 항아리 같이 생겼다고 독탕, 한문표기로는 옹기 甕(옹)자를 써서 옹탕이라고 하는데 막상 복숭아탕 전망대에 올라섰는데 찾고자 하는 복숭아탕이 없다.

○장수대에서 복숭아탕까지 산행거리9.85km, 소요시간7시간42분, 해발744m, 현재시간16시22분이다.

 

○복숭아탕에서 십이선녀탕계곡 입구 구간

복숭아탕~

전망대에 있는 안내판을 보면 아래쪽 3탕 중 위에 있는 무지개탕(虹盪)의 모양이 복숭이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 무지개탕은 몰라도 복숭아탕은 알고 있는 실정으로 무지개탕과 복숭아탕을 병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전망대에서 홍탕을 보니 수량이 적었고 움푹 패인 돌확 안에는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을 막 털어버리고 수량을 늘리고 있었는데 이름에 걸 맞는 무지개는 보이지 않는다.

홍탕 아래 있는 북탕과 북탕 아래 있는 독탕은 아직 얼음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노산 이은상선생이 이곳을 찾아 “아래쪽 3개의 탕을 위로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위로 5개의 탕이 더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름이 없고 맨 위 탕만 용탕이라고 부릅니다.”라고 기록했는데 노산선생의 8탕이라고 적은 것은 두문폭포가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복숭아탕 전망대에는 십이선녀탕계곡 안내판이 있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잘못 표기한 곳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안내판을 새것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 역시 잘못된 표기가 있다.

용탕을 복숭아탕으로 표기했지만 설악행각에서는 두문폭포 아래 있는 제일 큰 탕을 용탕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어떤 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노산 이은상 선생은 설악산 산행을 시작할 때 사진사 1명과 이 지역 사람들로 구성된 심마니2명, 포수2명, 짐꾼, 안내인 등등 15명의 일행을 거느렸으니 이 지역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했으므로 필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의 지명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므로 용탕은 맨 위 탕이 맞을 것 같다고 본다.

노산선생이 탕수동을 방문하기 전 많은 사람들의 유산기에서도 이곳 폭포와 탕에 대한 소개되고 있는데 한국산서회에 기재된 일부 내용으로 권용정의 설악내기(雪嶽內記)를 옮겨본다.

「지역 사람이 말하길, “탕수폭포[盪水瀑]입니다. 폭포는 모두 5개인데, 어떤 것은 누워있고, 어떤 것은 곧으며, 어떤 것은 꺾어지면서 기울어져 있습니다. 못은 모두 10개인데, 항아리·병·가마솥·술잔을 꿰어 놓은 것 같습니다. 폭포는 네 번째가 가장 뛰어나고, 연못은 여섯 번째가 가장 뛰어납니다. 여섯 번째 위는 네 번째보다 못합니다. 돌벼랑은 반쯤 이지러진 달 같은데, 흐르는 물을 막아, 급히 흐르며 부서지고 수많은 실이 어지러이 모입니다. 연못은 받아들이지만 담아둘 수 없고, 아무리 해도 펼 수 없어 울부짖습니다. 맹렬한 나머지 물결은 사방으로 나가 허공에서 밝은 꽃이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탕수동(盪水洞)입니다. 첫 번째 폭포 옆에 용혈(龍穴)이 있는데, 지역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냅니다.”라고 한다. 」

권용정의 설악내기는 노산선생보다 약100년 앞선 1829년에 기록한 것으로 당시에는 탕의 이름이 없으며 두문폭포까지 통 털어 설명하는 것 같으며 폭포로 제일은 네 번째라 했으니 두문폭포 아래 있는 용탕폭포를 말함이며, 탕으로 제일은 여섯 번째라 했으니 내려서면서 무명4탕(위에서부터 두문폭포1탕, 2폭포용탕, 3폭포3탕, 무명4탕, 4폭포5탕, 무명6탕, 5폭포복숭아탕 또는 7탕-홍탕. 8탕-사탕, -탕독탕),

설악내기에서는 오르며 설명하는 것이므로 폭포는 용탕폭포, 탕은 폭포가 없는 무명4탕이 된다.

그리고 안내판 위 거리표기를 보면 이곳에서 응봉폭포를 1.9km로 표기했는데 실제로 응봉폭포는 0.64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1.9km의 표기는 무엇일까?

우리가 늘 응봉폭포로 여기고 있던 폭포로 이 폭포는 응봉폭포가 아니고 승폭(僧瀑)으로 필자도 이곳을 여러 차례 지나며 승폭을 응봉폭포로 알고 있었는데 설악행각을 보고 잘못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실제로 응봉폭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승폭(僧瀑)?

중 僧(승), 폭포 瀑(폭)으로 쉽게 이야기하자면 중폭포다.

응봉폭포와 승폭에 대해서는 폭포에서 다시 설명하도록 한다.

십이선녀탕계곡의 8탕을 보고 다시 하산을 시작해 5분을 내려서면 데크전망대가 있고 맞은편 폭포가 있는 계곡이 보이는데 이계곡이 작은함지박골이다.

작은 함지박골을 내려서며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는데 이 다리가 큰함지박교인데 작은함지박교로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멀리 떨어진 큰함지박골을 차용했다.

큰함지박교를 건너서 3분 정도 내려서면 우측 계곡 방향으로 제법 큰 폭포가 잡목 뒤로 나타나는데 여름철이나 가을철에는 잡목으로 보기가 쉽지 않은데 필자의 경우는 마음먹고 이 폭포를 보기위해 코스를 십이선녀탕계곡으로 잡은 것이다.

잡목 뒤로 보이는 폭포를 보고 이곳이 응봉폭포라는 것을 느끼고 등로를 벗어나 계곡으로 내려서서 온전한 폭포를 사진으로 담는다.

응봉폭포~~

응봉폭포는 잡목이 가려 제대로 볼 수 없기도 하지만 수량이 적어 가물 때는 마른 폭포로 바뀌므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 폭포 아래 담이 없으므로 외면을 당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설악행각에서 「구선대에서 15분 올라온 때에, 계곡의 본류에서는 조금 떨어진 저편 왼쪽벽 위에 또 한 번 상쾌한 응봉폭(鷹峰瀑)이 내려질리는 그것이외다.

이 탕수동으로 몇 번 다닌 이곳의 산중 사람들도 이 응봉폭은 못 보았노라 한다는 그만큼 경치치고는 불우한 경치이거니와, 세상에도 매양 불우한 자가 실로 그 잘나지 않은 자 없는 격으로, 여기 이 불우한 경치 응봉폭도 결코 남 뒤질 어른이 아니십니다.

폭포의 이름은 그것이 응봉 아래 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요 길이도 실로 몇 백 척을 헤아림직한 승경입니다.」고 기록했다.

응봉 아래 있는 폭포라고 해서 응봉폭포라~~~

십이선녀탕계곡에는 정식 폭포이름을 가진 폭포는 맨 위 두문폭포, 이곳 응봉폭포 그리고 잠시 후에 보게 될 승폭 3곳이 있다.

규모로 치면 두문폭포가 으뜸이고, 높이로 치면 응봉폭포가 으뜸이고, 가깝게 접할 수 있고 이야기를 담기로는 승폭이 으뜸으로 3곳의 폭포가 나름 으뜸이라고 볼 수 있다.

응봉폭포를 보고 등로로 복귀하여 약5분여를 내려서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큰 육교가 있는데 육교 위와 아래로는 넓은 암반과 계곡이 좌우로 꺾이며 흐르는데 이곳이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구선대(九仙臺)다.

구선대는 하나의 큰 암반이 아홉 번이나 굽이치며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잊혀져가는 지명, 구선대를 지나 현대식으로 만든 사장교를 지나면 작은 폭포 같은 곳부터 긴 구간은 넓은 암반으로 덮여있는데 이곳이 칠음대(七音臺)라고 하는데 칠음대 역시도 오래전부터 불리던 지명으로 잊혀져가는 지명 중 하나이다.

칠음대는 넓은 암반위로 7번 굽이치며 도,레,미,파,솔,라,시 또는 궁,상,각,치,반치,우,중한 이렇게 7가지의 음을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날 때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이름이 없다는 것에 대해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했었는데 지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칠음대라는 지명을 알지 못하고 지났던 것이다.

칠음대에서 조금 내려서면 십이선녀탕입구 3km가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그리고 이정표에서 약7분 정도 내려서면 폭포가 있는데 이 폭포가 바로 승폭(僧瀑), 그리고 아래 소(沼)는 승소(僧沼)로 우리는 이제까지 이 폭포를 응봉폭포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라도 폭포의 이름을 승폭(僧瀑), 중폭포라고 제대로 알아야 한다.

노산 이은상선생의 설악행각 본문을 보면 「석문을 떠나, 약30분 쯤 지난 때에 어디로 선지 찬 기운이 코밑을 찌르고 스치면서, 귓전을 뚫어 터질듯이 내려찢는 물소리가 한가슴 밀어 닥칩니다.

이것은 물을 것 없이 폭포이지만, 폭포라고 왜 무시무시한 위협부터 먼저 주는고 하였더니, 들으니 불길한 내력이 있는 폭포라 그러한가봅니다.

백여 척이나 되는 거무스름한 석벽으로 떨어지는 수량조차 무섭게도 많은 폭포인데 옛날에 이 산에 있던 한 늙은 중이, 어느 가을날 달 밝은 밤에 오히려 세상 근심을 울다 못해서 시비 고락을 다 잊어버리려고 이 폭포에 떨어져 그 몸을 부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폭포 이름도 승폭(僧瀑)이라 했다 합니다. 」라고 기록했다.

우리가 응봉폭포로 알던 승폭에는 이렇게 늙은 중의 서러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승폭에서 다시 5분여를 내려서면 목교를 지나는데 목교 이름이 흑백교다.

다리 아래 경관은 매우 뛰어난데 희한하게 계곡 바닥 암반이 흑, 백으로 이루어졌는데 눈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계곡으로 내려가서 가까이서 보면 가운데 제법 큰 폭포도 있는데 여름철 물결도 거친 노도처럼 시원스럽고 대단하다.

흑백교에서 5분을 내려서서 응봉출렁다리를 건너 다시 5분을 내려서면 등로 좌측으로 폭포도 아닌데 폭포같은 곳, 좁은 바위 암반을 휘돌며 내려가는 계곡물은 깊은 담을 만들었는데 이곳이 설악행각에서 설악문이라고 했는데 물론 추정으로 승폭과 같이 사진을 곁들였다면 확실하지만 사진이 없이 글을 보고 글과 같은 거리, 위치, 지리의 형태를 보고 추정한 것이다.

설악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십이선녀탕입구 2km 이정표가 있다.

거의 다 내려왔나 싶었는데 2km로가 남았다면 30분 이상 걸리는데 차시간도 촉박하지만 국공초소가 가까워지면서 어떤 방법으로 국공초소를 지나가야 하는지 걱정이 앞선다.

설악문을 지나 10분을 내려서면 좌측 지계곡이 있는 작은 목교를 지나는데 곧은교라는 교명이 붙어있다.

이곳이 설악행곡에서 지리실 또는 지리곡으로 불리는 계곡이라고 기록했는데 최근에는 이곳을 곧은지티실이라 부르고 곧은지티실 능선 우측 계곡을 작은지티실로 부르는데 필자의 경우 곧은지티실~서북릉~작은지티실을 답사한다고 스터디를 해놓고 1년을 보내고 있다.

곧은교를 지나면 몇 발자국 가지 않아 십이탕출렁교가 나오는데 곧은교와 십이탕출렁교 아래는 모두 계곡이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설악행각에서는 구융소라고 기록했는데 소 여물을 주는 구융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십이선녀탕입구 1km가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면서 국공초소를 지나야 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고 하산 등로 주변으로는 며칠 전 강풍으로 아까운 소나무가 몇 십그루 통째로 쓰러져있는 현장을 지나는데 공단에서는 임시로 일부 정리했지만 대부분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통행하기가 아주 힘들고 불편하다.

불안한 마음으로 내려서는데 아래쪽에서 누군가 올라오는데 국공직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점점 가까워지니 50대후반정도로 보였는데 어딜 갔다 오냐?고 당당히 묻자 국공직원인줄 알고 바짝 쫄아 폭포구경을 하고 온다고 대답하며 교행을 했는데 국공직원이 아닌 듯해서 국공직원이냐?고 물어보니 아니란다.

궁금증을 풀어야 하기에 국공초소에 직원이 있는가? 물으니 없단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기쁜 마음으로 빠르게 국공초소를 벗어나니 17시56분으로 옥녀탕휴게소를 떠난 지 8시간52분이 지나 정규산행이 끝난다.

-십이선녀탕 입구에서 윗남교 정류장으로 이동하니 18시03분 10분을기다여 18시13분에 원통행 군내버스를 타고원통으로 이동하여 무사히 귀경했습니다.

○장수대에서 십이선녀탕계곡 입구까지 산행거리14.39km, 윗남교 정류장까지15.02km, 소요시간9시간23분, 해발322m, 현재시간18시03분이다.

 

설악산, 성골릿지능선~감투봉~십이선녀탕계곡 산행가이드북

 
○동서울터미널(06:30)-> 장수대(08:45)
-장수대에서 하차하여 원통방향으로 약2.2km 정도 지나 옥녀탕 계곡으로 진입한다.
◎올 때
○날머리는 남교리로 귀경은 원통을 경유하는 방법과 용대리에서 직접 동서울행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으며 용대리에서 동서울행은 16:10,16:20,17:00,18:00,18:10,19:00이다.
○남교리버스정류장에서 용대리방향은 16:30,17:30,19:00이고, 원통방향은 16:00, 17:20,18:15이다.
---코로나로 감차가 있으므로 알아보아야한다.(백담사정류소 033-462-5817)---
◎산행포인트
▶옥녀탕으로 들어서 성골계곡으로 약30분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은 성골계곡을 통해 한계산성으로 이어지며 우측은 계곡을 건너서 사면을 따라 20분을 지나면 성곽에 도착한다.
▶성곽에서 우측으로 3분을 지나면 성곽이 끝나고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때로는 로프가 있고, 때로는 전망바위가 있는 곳을 힘겹게 20분을 오르며 가파른 등로가 끝나며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암릉구간에서는 대부분 가리봉 방향, 몽유도원도 릿지구간 상부 적암, 안산과 양옆으로 고양이바위, 치마바위 등 주변 조망이 뛰어나다.
▶암릉구간을 10분(한계산성에서 30분)을 지나면 로프가 있는 하강지점이 나오며 하강지점을 내려서서 2분정도가면 통천문(석문)이 나오며 통천문에서 5분을 지나면 우주선 모형같은 전망바위에서 안산방향의 조망과 전망바위 옆 노송이 있는 쉼터 전망대에서는 적암 직벽을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다.
▶전망바위에서 암릉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10분을 지나면 구멍바위가 나오고 구멍바위에서 약5분을 지나면 해산굴을 빠져나가는데 이곳에서 구멍으로 빠지거나 위로 통과할 수도 있으며 해산굴을 빠져나가면 노송이 곁들인 쉼터 전망대가 있다.
▶쉼터전망대에서 로프로 이어지는 구간을 올라서면 능선은 약30여m 함몰된 릿지구간이 나오는데 이곳이 한계산성릿지구간 중 제일 위험한 곳으로 로프를 잡고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다시 로프가 있는 오름이 이어지는데 로프를 릴레이로 갈아가며 5분여를 오르면 천제단에 도착하는데 한계산성을 떠난지 약1시간20분이 지나서이다.
▶천제단에서 30여 m 지나면 안산이 조망되며 잠시 후 성곽이 이어지다가 끊어지며 내리막으로 이어지며 대궐터추정지로 내려선다.
▶대궐터 추정지를 지나면 암릉길은 아니지만 아주 가파른 오름이 20분 정도 이어지며 무명봉 정상을 앞에두고 등로는 좌측 사면을 질러가는데 겨울철에는 음지로 얼음이 남아 미끄러우므로 무명봉을 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사면을 질러 능선으로 오르면 잠시 후 짧은 구간 성곽이 다시 나타나는데 이곳 무명봉(1061m)에서도 조망이 좋으며 우측은 오승폭포골이 된다.
▶무명봉(1061m)에서 내려섰다가 능선(좌측은 성골 우지계곡, 우측은 오승폭포골)을 다시 1070m무명봉을 지나 지루한 능선과 거대한 암봉을 옆에 두고 능선을 지나면 가파른 능선은 좌측으로 이어지며 오래전 매놓은 슬링을 잡고 어렵게 올라서면 이곳에서 우측 오승폭포골 암릉의 뛰어난 풍경을 보고 오르면 1259봉에 올라선다.
▶1259봉에서는 좌측으로 안산과 치마바위, 우측으로는 오승폭포골 건너편으로 예술품같은 암봉이, 가야할 방향으로는 무명 암봉과 감투봉이, 감투봉 우측으로 대한민국 입석이 있는 1396봉이 조망된다.
▶1259봉을 지나면 위험한 곳은 없지만 가파르게 치고 오르는 등로가 이어지면 20분정도 오르면 눈주목이 덮인 무명 암봉에 올라 지나온 방향을 조망하고 5분정도 오르면 서북릉 감투봉에 닿는다.
▶올라선 곳은 키작은 참나무가 있는 곳이며 이곳에서 대승령 방향으로 2개의 암봉이 있는데 3개봉을 아우러 감투봉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맨 우측 제일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감투봉의 고도는 1392m로 나타나고, 건너편에는 대한민국 입석이 있는 1396봉이 있고 1396봉 뒤로 귀때기청봉과 대청봉 공룡능선 등이 눈이 덮인 상태로 보이며 사방의 조망이 트이지만 짙은 박무로 조망의 즐거움은 크지 않다.
▶감투봉에서 안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지난번 한번 지난 적이 있어 초행길이 아니라 걱정거리가 없다, 감투봉을 내려서는 길에는 지난번 내린 눈이 많아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안산 아래 안부로 이동한다.
▶안부에서 시간을 확인하고 안전을 위해 산행코스를 큰함지박골에서 십이선녀탕계곡 상부로 바꾸고 안산을 생략하고 하산길로 접어든다.
▶안산안부에서 십이선녀탕계곡 상부로 내려서는 곳곳에는 눈이 많아 등로를 이탈하거나 찾을 수 없는 곳이 수시로 이어지는데 한 번 내려선 적이 있어 등로를 잃었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안산안부를 떠난 지 35분이 지나 무사히 십이선녀탕계곡상부 정규 등산로로 올라선다.
▶십이선녀탕계곡 상부에서 눈 쌓인 등로를 따라 두문폭포까지 40분->봉숭아탕까지 12분->응봉폭포까지 13분->승폭까지 30분->설악문까지 18분->남교리탐방안내소까지 27분이 걸려 하산을 완료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 윗남교리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해야하는데 남교리탐방안내소 6~7분이 걸리며 버스시간을 사전에 체크해야한다.

◎산행코스
산행코스:장수대(08:40)-옥녀탕감시초소(09:04)-한계산성(09:46)-통천문(10:25)-천제단(11:06)-왕궁터추정지(11:20)-1061봉(12:09)-1070봉(12:22)-1259봉(12:54)-전망바위(13:15)-감투봉(13:20)-안산밑안부(14:40)-12선녀탕계곡상부,정상등로(15:16)-두문폭포(16:00)-복숭아탕(16:22)-응봉폭포(16:40)-승폭(17:13)-12선녀탕탐방안내소(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