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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성정각과 관물헌 일원

범솥말 2023. 6. 3. 08:47

우리의 문화재/창덕궁

2011-04-14 22: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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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각과 관물헌 일원

성정각에 대하여

성정이란 성의(誠意 : 뜻을 숭수하게 집중한다)와 정심(正心 : 마음을 바르게 한다)의 앞 글자를 따온 것입니다.

성정각은 동궁의 글 공부를 하던 건물이었으나  영조는 이곳에서 신하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고 정조는 이곳을 편전으로도 사용했으며 인재 발굴을 위하여 초계문신을 치르기도 하였고 헌종도 이곳을 편전으로 많이 이용하였으며 순조는 왕세자였을 당시 이곳에서 글 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고종임금때는 인정전 서측(지금의 궐내각사 약방)에 있던 내의원을 전의사로 개편하고 순종 때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내의원에는 "조화어약" "보호성궁"이란 2개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마당에는 돌절구가 남아있습니다.

성정각에는 정자가 하나있는데 남쪽에는 보춘정, 동쪽에는 희우루라는 2개의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제 생각으로는 원래의 정자이름이 보춘정이었고 희우루는 나중에 정조 임금이 붙인것 입니다. 

 2층 누각으로 오르는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밖에서 보이는 계단을 이용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은 1층 방안에서 다락같은 좁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보춘정의 보(報)알리다, 답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봄의기운, 다시말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것이며 매화가 봄과 함께 핀다해서 매화를 보춘화라고도 부르며 성정각 자시문 옆에는 400여년전 된 매화나무가 잇습니다.

희우루는 누각 동쪽에 달린 현판의 이름으로 정조임금이 지은것입니다.

정조임금 당시 가뭄이 심하게 들었던 때 성정각 보수를 시작하자 비가 내렸고 보수가 끝날 때 또 비가 흡족히    내리자 기뻐서 이름을 붙인것인데 홍재전서의 희우루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마음이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것이니 마음에 새겨둔다면 자기 혼자만이 기쁨을 누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니 큰 기쁨을 마음에 새겨두고 마음에 새겨둔것만으로 부족하여 사물에다 새겨두고 새겨둔것만으로 부족하여 마침내 정자에다 이름을 지었으니 이에 기쁨을 새겨두는 것이 큰것이다"

 

내의원 입니다.

내의원은 인정전 서쪽 약방 자리에 있었는데 고종때는 내의원을 전의사로 개편했고 순종때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내의원이 헐리어 현판과 도구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조화어약은 "임금님이 드시는 약을 조제한다"는 의미이고 보호성궁은 "임금님 몸을 보호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관물헌입니다.

관물이란 사물을 관찰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것으로 공부하는 장소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관물헌의 편액에는 집희(輯熙, 즙희라고 읽기도 합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현판은 고종임금께서 13세에 쓰신 어필입니다.

집희의 뜻은 "밝은 성왕의 빛을 이어 받았다"는 뜻이며 많은 임금들이 이곳에서 집무를 보기도 하였는데 임금중에도 정조는 이곳에서 정약용 등 많은 신하들과 정사를 협의하기도 했으며 그외 순조, 헌종, 고종 등이 이곳을 자주 이용하였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는 1874년 2월8일 묘시(오전7시~9시)에 이곳에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을 분만 했다는 사실과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이 고종을 모시고 이곳에서 청나라 군대와 맞서기도 했고 고종사후에 고종의 후궁인 양귀인과 그의 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한동안 살았습니다.

성정각 주변에는 영현 , 자시문, 동인문, 망춘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영현문을 제외한 문들은 원래 성정각의 문이 아니고 주변에 있던 전각의 문인데 현판을 안쪽에 달아 성정각의 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현문은 성정각의 정문으로 "어진 사람을 맞는다"라는 뜻으로 성현을 맞이해 열심히 공부에 힘쓰라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자시문은 지금은 없어지고 터의 주춧돌만 남아 있는 중희당(후원 매표소 입구)의 서쪽문으로" 만물이 힘입어 비롯된다"라는 의미입니다.

동인문은 희정당 동쪽문이며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준말로 "평등으로 후대하며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망춘문은 후원 매표소 입구를 들어서며 좌측에 있는 문으로 희정당의 후원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춘(春)은 동쪽을 나타내므로 성정각이 아닌 희정당 동쪽문이며 망춘은 "봄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관물헌 우측 중희당 자리로 창경궁과 이어지는 함양문이 있고 함양문 서편으로 후원입구의 모습입니다.

위 사진은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2006년 창덕궁 관리사무소에서 발간한 『창덕궁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의 일부입니다.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성정각은 변함이 없는 것 같으나 희정당은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넓은 마당 중앙에 솟을 대문으로 만들어진 희정당 출입문이 있었고 희정당 본채와 뒤로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으로 보이는 전각이 보이고 뒤로 또 다른 건물이 보이는데 아마도 경훈각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성정각이나 후원입구에는 지금은 활엽수가 대부분인데 당시 사진에는 활엽수는 몇 그루 안 되고 키가 큰 조선소나무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정당을 포함한 대조전 경훈각 등은 1917년 대화재로 1920년 다시 지은 전각들인데 아마도 희정당 바깥채가 없는 것으로 보아 화재 이전의 사진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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