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산행기

지리산국립공원, 좌고대와 영신사지 유적을 돌아보다.

범솥말 2023. 12. 7. 23:01

지리산, 좌고대와 영신사터 유적을 돌아보다.

 

20221126

지리산 남부능선을 답사할 때 내 머릿속에 여운이 있는 명경과 유적이 나를 이끈 곳이 있었으니 조선시대 선인들이 극찬했던 좌고대와 좌고대의 베이스캠프로 이용되었던 영신사입니다.

조선시대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이 100여편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 중 좌고대와 영신사에 대해 남긴 기록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기록은 5편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15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에 남긴 기록으로 도솔산인 이영규님이 정리한 5편의 기록이 인터넷 상에 떠도는 글인데 도솔산인의 정보를 인용해 작성합니다.

좌고대, 그리고 영신사지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대간능선을 타고 제석봉, 연하봉, 촛대봉을 내려서 세석평전이 나오고 세석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신봉이 있는데 좌고대는 영신봉에서 등산로를 따라 10분여를 지나면 암봉이 길을 막고 있는 시원스러운 전망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추강암이고 좌고대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 전망대에서 아래로는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벼랑이 이어지는데 그 벼랑아래 예전에 영신사가 있던 절터가 있습니다.

이곳 암봉군은 3개로 분류되는데 맨 위 바위는 작고 이름이 없는 바위로 전망대 앞에 있으므로 포토존 배경이 되는 바위고, 2번째 바위는 덩치가 제일 큰 바위인데 추강 남효온선생이 이 암봉에서 좌고대를 보았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추강암이라고 부르며, 좌고대는 추강암 아래 있는데 전망대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이곳을 지날 때는 좌고대와 추강암이라는 명경이 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전망대에서 멋있는 풍경을 감상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다시 찾은 추강암과 좌고대, 지금 생각하면 여러 방향에서 이런 저런 풍경을 찍었어야 했는데 그때는 춥고 강풍이 불어대는 바람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곳 전망대에서는 추강암은 보이는데 좌고대는 추강암에 가려 보이지 않으므로 추강암을 보고 아래로 내려섭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추강암을 우측으로 우회하며 내려서면 추강암과 좌고대 암봉 가운데에 공간이 있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추강암과 좌고대 오를 수 있습니다.

좌고대(座高臺)~

1463년 지리산을 찾은 청파 이륙선생은 유두류산록에서 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전에도 좌고대한 기록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청파 이륙선생의 기록이 세상에 좌고대를 알리는 최초의 기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신사에서 좌고대를 본 느낌으로 표현력이 뛰어나며 좌고대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 강심장은 천에 한 두 명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길은 없었을 것이니 영신사에 들린 후 영신사에서 좌고대를 보려고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올라왔던 것 같습니다.

1472년 지리산을 찾았던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청파 이륙선생보다 9년 뒤에 이곳을 찾은 점필재 김종직선생도 영신사에서 좌고대를 올랐다는 기록인데 좌고대의 위치가 가섭전 북측이라는 내용과 3단으로 이루어진 형태와 꼭대기의 생김을 기록하고 꼭대기에 올라서 절을 하면 과거에 급제한다 기록했는데 아마도 영신사에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청파 이륙선생보다는 24, 점필재 김종직선생보다 15년 뒤에 이곳을 찾은 추강 남효온선생이 있습니다.

1487년 지리산을 찾은 추강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에서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은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가섭전 뒤, 3단형태를 3층으로 표기했는데 중층까지 성공하고 꼭대기는 오를 수가 없어 뒤에 있는 바위에서 내려다보았다는 기록인데 이로인해 뒤에 있는 바위를 사람들은 추강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489년 지리산을 찾은 탁영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에서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추강 남효온 선생보다 2년 뒤 지리산을 돌아본 탁영 김일손 선생은 영신사 앞쪽에 창불대가 있음을 기록했는데 창불대는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기록에서도 나오는데 김종직선생은 창불대를 보고 영신사로 내려섰다고 기록했습니다.

뒤로 좌고대가 있다고 했는데 문장을 보면 좌고대를 갔다 온 것 같습니다.

1611년 지리산은 찾은 어우당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에서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다고 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어우당 유몽인선생은 아주 간단하게 영신암 북쪽에 좌고대가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불리지 않던 비로봉의 등장인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며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바위는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은 영신사 승려가 지어낸 이름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사물의 이름이 원래부터 있는 건 아니고 어떠한 상황에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니까요.

옛 선인들의 좌고대 찬가였습니다.

요즘은 좌고대를 찾는 사람들이 아주 많으며 위험한 좌고대 꼭대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거나. 청파나 점필재가 말한 방석에 올라가 절을 하는 사례도 빈번합니다.

이제는 제 이야기입니다.

추위에 떨면서 추강암과 좌고대 중간에서 위를 보니 멋있는 장면을 볼 수가 없었는데 그나마 겨울철이라 나뭇잎에 없으니 전체 모습을 볼 수 있고 여름철에는 이러한 모습을 찍을수가 없습니다.

등산로를 따라 성삼재 방향으로 가면서 좌고대를 관찰하는데 서쪽방향에서도 좌고대의 위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좌고대를 올라가기로 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안개비로 바위가 젖은 상태인데 바람은 강풍은 불어대는데 ....... 홀드를 확실하게 확보하며 오르는데 지난번 사고로 바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겁이 나고... 포기하고 내려갈까? 하다가 좌고대의 멋있는 모습을 보기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하단을 올라섭니다.

손도 시리고, 춥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바람은 사정없이 불어대고.....

1단을 올라 2단을 오르려고 했는데 바위가 젖어 만만치 않아 2단을 포기하고 사진을 찍는데 생각했던 모습이 아닙니다. 반대편 추강암에서 본다는 생각으로 추강암과 좌고대 암봉 사이로 내려섰는데 이곳이 서쪽보다 안전지대입니다.

이곳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추강암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젖은 바위와 오르기도 쉽지 않고..... 추워서 개 떨 듯.... , 이러다가 사고 날 것 같은 생각에 그냥 내려섭니다.

시린 손과 추운 몸을 옴추린 채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대충 수습하고 좌고대에서 영신사터로 향합니다.

좌고대에서 대간 길을 따라 우측으로 접어들면 길고 긴 계단을 따라 내려서며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약50m 정도 지나면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좌측으로 출입금지 표찰이 걸려 있는 곳이 영신사터 입구입니다.

입구에서 20m 들어가면 반달곰 활동지역이라는 현수막이 있고 30~40m 더 들어가면 작은 산죽이 펼쳐지며 동물관찰카메라를 나무에 고정해 놓았으므로 카메라를 피해 카메라 뒤로 돌아, 바위 밑둥을 지나고, 미역줄나무 넝쿨을 지나 10분 이상 들어가면 절터가 나타나니 이곳이 영신사가 있던 곳입니다.

선인들 산행기록에 나왔던 영신사터에 당도한 것인데 높고 험한 이곳에 영신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샘터가 있어 물은 조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쌀과 생필품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까지 어떻게 운반하며, 어렵게 조금 옮긴 양식이 있다 해도 권세있는 사대부들이 유람을 하면서 절에 묵으며 모두 축을 내고는 했으니 예전에는 이러한 일들이 중들이 떠나고 폐사되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선인들의 산행기록에 영신사(靈神寺)의 가섭전(迦葉殿)과 몽산화상족자, 좌고대(坐高臺), 창불대, 영계(靈溪), 아리왕탑, 옥천, 비로봉, 가섭대에 대한 지명이나 특정 암봉등이 등장하는데 현장에서의 살펴봅니다.

영신사 터 중앙에 가섭전이라는 불전이 있었을 것이고, 불전 정면이 아닌 서쪽으로 아리왕탑이 있다고 했고, 가섭전 뒤로 가섭대가 있다고 했고, 좌고대는 가섭대 우측으로 올랐을 것이며 절터 단 아래 동쪽에는 영계가, 서쪽에는 옥천, 옥청수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가섭전 아리왕탑, 족자 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섭전과 몽산화상이 그려진 족자에 대해서는 점필재 김종직선생은 이곳에서 잤는데 당시 중이 한사람 있다고 했으며 법당 안에 몽산화상이 그려진 족자가 걸려있었는데 안평대군의 삼절이라는 시를 적은 족자였다고 기록했는가하면 점필재 선생보다 17년 뒤 이곳을 찾은 탁영 김일손선생은 아무도 없는 빈 절에 안평대군의 삼절을 적은 몽산화상 족자를 보고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일행 백욱이 만류하여 가져오지 않았다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이면 보물의 가치가 충분했을 족자의 행방은 알 수가 없습니다.

가섭대와 가섭상에 대해서는 청파 이륙선생은 제단 동쪽에 가섭석상이 있다고 했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절 북쪽 비탈에 석가섭 석상이 있다고 했고, 추강 남효온선생은 암자 뒤에 가섭전이 있다고 했으며며, 탁영 김일손선생은 북쪽에 가섭 석상이 있다고 했고, 어우당 유몽인선생은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추강선생의 글을 보면 암자 뒤에 가섭전이 있다“.는 의미는 영신사 암자와 가섭전은 서로다른 법당이라는 추측을 갖게 하며 가섭전 뒤 바위인 가섭대 또는 가섭석상을 찾기 위해 방향을 바꿔가며 보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복습하는 과정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는데 현장에서보다 사진으로 보는 것이 잘 보입니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기록을 보면 세조대왕 때 이곳에 사람을 보내 향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 나라를 위해, 아니면 세조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탑에 대해서는 점필재 김종직선생은 영신사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이 있는데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탑을 가운데 철로 묶어 다시 쌓았는데, 두어 층은 유실되었다고 했으며, 어우당 유몽인선생은 탑의 이름이 아리왕탑이라고 적었고 서쪽에 있다고 했으니, 점필재와 어우당이 말하는 탑은 서로 다른 탑이라 할 수 있는데 두 탑 모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서방향으로 작은 돌계단이 있는데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바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는데 폭포도 아니고 그냥 계곡의 바위로 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데 선인들은 이곳을 영계(靈溪)로 적은 것 같습니다.

영계를 지나 바위 밑둥을 에돌아가면 선인들의 글에는 나오지 않는데 좌선대라는 곳이 있는데 좌선대 우측으로 샘터가 있는데 물이 말라있습니다.

영계와 샘터에 대해서는 청파 이륙선생은 뜰아래 샘이 있는데 물맛이 좋아 신천(神泉)이라고 불리는데 흘러 내려가 화개천이 된다고 했으며, 점필재 김종직선생은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다고 했으니(좌선대 옆에 있는 마른 샘터가 아닌 듯), 탁영 김일손선생은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 전했다고 했는데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말하는 샘터와 같은 샘터인 것 같은데 옥천과 옥청수라고 표현이 조금 다릅니다.

그러고 보면 영신사터 뜰아래 샘터가 있을 수도 있는데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영신사에서 볼 수 있는 비로봉에 대해서는 어우당 유몽인선생의 기록에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영신사에서 비로봉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짙은 안개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신사에서 남부능선으로 오를 때 좌측으로 무명봉 암봉을 보며 비로봉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복습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비로봉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로봉을 보고 능선으로 올라서면 5분 거리에 창불대가 있는데 창불대는 남부능선 산행이야기 본문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생각하면 미흡했건 점이 많은데 다시 갈 기회가 생긴다면 더 디테일하게 관찰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