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전(修政殿)
경회루 연못 건너편에서 본 수정전입니다.
『정사를 잘 수행 한다』는 의미를 담은 수정전은 근정전 서쪽에 있는 건물로 장대석으로 4단 월대를 쌓고 장대석을 한단을 더 올린 5단위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세종 때 지은 이 수정전은 집현전으로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최근 SBS에서 종영한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에서 세종대왕으로 분한 한석규가 한글을 만들기까지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세종의 아들 세자의 목숨을 져버리면서까지 한글을 만들고 반포하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세종이 세자를 잃으면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역사의 왜곡으로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서 흥미위주로 각본을 각색한 것입니다.
아무튼 세종은 최만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창제했는데 이렇게 역사가 깊은 집현전은 세조가 집권한 이듬해에 폐지되었다 합니다.
이후 집현전이었던 수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지금의 수정전은 고종4년인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재건되었으며 고종 임금은 초기에는 왕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다가 이후에는 신료들과 정무를 의논하는 편전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고종31년인 1894년 의정부를 궁 안에 두고 내각이라 부르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때 의정부가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곳 수정전인데 그 전까지 내각으로 불리던 규장각은 내각으로의 명칭을 다시는 쓰지 못했다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집현전은 세종이 우리글을 창제한 것만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실제로 집현전에서는 각종의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역사서, 유교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관련 서적이 그것들로써 국가에 필요한 서적 편찬의 과제가 집현전에 부여되면 집현전 학자들은 과거의 법제와 학문 연구를 통해 이를 완수해 국왕인 세종에게 올려 세종 당대 또는 문종대에 완성되었다하는데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을 편찬하여 세종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정전의 현판은 재건당시의 문신인 조석원이 썼다고 합니다.
세종은 수시로 집현전을 방문하여 학자들을 격려하였는데 어느 겨울 밤 집현전에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본 세종이 이곳에서 깜빡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담비 가죽 옷을 덮어준 일화는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가 하면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당시에는 최고의 특산물이었던 귤을 하사하여 이들 학자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정창손은 22년, 최만리가 18년, 박팽년이 15년, 신숙주가 10년을 근무하는 등 집현전에 근무하는 연한은 다른 어떤 부서보다도 길어짐에 따라 승진이 늦어지자 학자들 사이에는 불만이 쌓였고 다른 부서로 옮기려는 학자들도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사가독서라하여 즉 왕이 하사하는 유급 휴가제도를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수정전의 잡상
후면좌측
후면우측
전면좌측
전면우측
수정전의 잡상은 6개로 짝수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잡상이 홀수로 올리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는데 짝수로 배치한 수정전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창덕궁의 경우에는 인정전이 9게이고 대조전과 희정당이 7개이고 그밖에 인정문이 5개인 반면 구선원전과 신선원전이 6개로 배치되어 있는데 구선원전과 신선원전은 죽은 왕들의 혼을 모시는 전이므로 짝수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의 서적 273page, 1950년경 수정전의 사진으로 위 사진을 보면 흥례문 주변에 있는 영제교를 조선총독부를 짓기위해 흥례문 일대를 철거하면서 이곳 수정전 앞에 설치했었으며 아래사진에서 보면 양옆으로 복도각이 있으며 잡상은 7개로 되어있다
분명한 것은 수정전의 잡상은 처음부터 6개가 배치된 것이 아니라는 점인데 이러한 의문을 풀기위해 2006년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의 서적을 보니 273page에 의하면 확실치는 않지만 이 사진은 1950년대 이전 수정전이 훼손되기 전으로 보이며 수정전 좌우로 복도각으로 이어진 것이 나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정전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옛 사진에 의하면 수정전의 잡상은 처음에는 7개의 홀수로 배치되었는데 어느 시기에 6개로 바뀌어 있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 예를 들어 그보다 더 이전의 문헌이나 사진에 의해 6개로 판명이 난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보수를 하면서 담당하던 인부의 무관심으로 6개로 배치한 것인지 지금이라도 옳고 그름을 가려 수정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배열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잡상을 배치 할 때 맨 앞에 배열하는 잡상이 삼장법사인데 삼장법사가 없는 곳은 경복궁의 수정전과 창경궁의 양화당으로 (창경궁의 양화당은 잡상이 한 개만 설치한 특수한 상황이며 그 하나는 3번째 나오는 저팔계입니다.) 위에서 말한 사진을 살펴보면 맨 앞에 있어야 할 삼장법사를 배치하지 않은 것 같아 위에서 말한 사진을 자세히 보니 분명히 맨 앞에 삼장법사가 있는데 현재 수정전은 삼장법사가 빠진 상태로 맨앞에 손오공이 있는데 삼장법사의 잡상은 약간 뒤로 젖혀져 있는 형상으로 육안으로 판독이 가능하다는 점으로 보수할 때 빠뜨렸을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또한 한 건물에 있는 잡상의 크기와 모양이 약간씩 차이를 두고 있으며 보는 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전혀 틀리는 잡상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므로 문화재청에서는 문제점을 확인 하고 보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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