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정전(勤政殿)---국보 제223호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임금이 국사를 보는 곳이나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업무가 아닌 국가의식을 거행하거나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일 그리고 임금이 신하들에게 새해인사를 받는 등의 장소로 썼던 곳입니다.
근정(勤政)이란 『정치를 부지런히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글로『천하의 일은 부지런 하면 다스려 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며 중국의 순임금의 예를 들며 정도전이 지은것이라고 합니다.
1395년(태조4년)에 지은 근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으로 2층의 목조건물로 후면을 제외한 3면을 2단 월대(月臺)로 만들고 월대 주위의 돌난간에는 12지상(十二支像)의 석상을 세워 정전 수호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월대의 주위를 둘러싼 회랑은 흥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 근정문(勤政門)과 사정문(思政門)의 좌우에도 이어져 직사각형의 회랑은 모두 3개의 영역으로 구분는데. 근정전의 좌우 회랑에는 동쪽에 융문루(隆文樓)와 서쪽에 융무루(隆武樓)두고 그 북쪽에 동서행각문인 계인문(啓仁門)과 협의문(協義門)을 두었습니다.
융문루
근정전 서행각과 융무루
경복궁은 조선왕조가 수립되자 390여 칸으로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선조를 비롯하여 여러 왕이 경복궁을 중건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공사가 방대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소실된 지 약 270년 후인 1867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총 7,225칸의 대규모 궁전으로 중건되었으며 무리한 세금과 노역으로 백성들의 원성 가운데 1867년 마침내 경복궁은 완공되고 1868년에는 고종이 경복궁으로 옮겨와 정궁으로 사용하기 시작 했습니다.
여러 차례 화재 등의 수난을 당항 가운데 그래도 감사하고 고마운 것은 일제 강점기 때 많은 전각이 헐리고 한국전쟁으로 불타기도 했지만 근정전이 무사했다는 것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근정전의 현판
근정전을 중건 할 때 이흥민 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이 사람은 철종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고종 때도 도승지를 지낸 인물입니다.
근정전의 잡상
조선의 이궁이었던 창덕궁 인정전의 잡상이 9개로 배치되어 있는데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의 잡상은 9개가 아닌 7개로 설치되어 있는데 행여 수리 할 때 7개를 잘 못 설치한 것은 아닐까?
궁궐 정전의 제일 높은 9개를 설치해야 맞는 것으로 여겨왔는데 근정전의 잡상은 7개를 설치하였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점입니다. 잡상의 배치 순서서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화상, 이귀박, 이구룡, 마화상, 삼살보살 ,천갑산 등이며 그 외 나토두가 있는데 이는 유몽인지은 어우야담에서 나오기 시작했으며 대부분 중국 명나라 때 오승은이 지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며 땅의 신으로 살(煞)을 막아주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에서는 기봉선인, 용, 봉, 사자, 해마, 천마, 산예, 압어, 해치, 두우, 행십 등11개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근정전의 내부
경복궁 근정전은 창덕궁 인정전과 함께 밖에서 볼 때는 2층으로 지어졌으나 실내에서 보면 2층이 아닌 통층구조도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건축 기술을 철상영조기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기술은 목재의 부식을 방지하기위해 구조를 노출시키는 기법입니다.
바닥은 마루가 아닌 전돌이며 2층은 통층 구조로 천장위에는 아름다운 단청과 황룡2마리가 나는 모습을 두었으며 용상 위는 보개천장을 사용했고 용상 뒤에는 나무로 된 삼곡병이 있고 그 뒤에 일월오악도를 설치했는데 일월은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을 말하는 것이니 자세히 말하면 임금과 왕비를 상징하며 오악은 우리나라의 동서남북 중앙의 5산을 뜻하며 이는 국토를 의미하는데 동악⇨금강산, 서악⇨묘향산, 남악⇨지리산, 북악⇨백두산, 그리고 중악은 북한산을 의미합니다.
근정전의 월대입니다.
건물의 기단부는 2중 월대(月臺)로 되어 있는데 아래 월대와 윗 월대 주위에는 긴 댓돌을 둘리고 근정전 전체를 돌며 월대의 문로주에는 석상들이 있는데 위층에는 주작, 청룡, 현무, 백호의 사신상이 있고 아래층에는 방향에 맞게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 12지신 석상 중 개와 돼지 그리고 뱀이 빠진 9개의 석상이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세웠는데 이것은 근정전의 외호(外護)를 위한 것으로 근정전은 경복궁 중 가장 공력을 들여 만든 건물로 근엄함과 우아함이 조화된 품격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남쪽의 방위를 수호하는 해치의 석상입니다.
동쪽의 방위를 수호하는 청룡의 석상입니다.
용은 모든 실제의 동물과 상상속의 동물들의 능력과 장점을 취합하여 만들어 낸 신비한 동물로 「본초강목」에 의하면 용의 마리는 뱀, 뿔은 사슴, 눈은 귀신, 귀는 소, 목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용이 구름속에서 학과 사랑을 나눠서 낳은 것이 봉황이며 땅에서 암말과 사랑을 나눠서 낳은 것이 기린이라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용은 봉황, 기린, 교룡, 현무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교룡이란 사신으로 동쪽을 수호하는 청룡으로 81개의 비늘이 있어 99개의 양수를 가지고 하는데 이는 존엄과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서쪽의 방위를 수호하는 호랑이의 석상 입니다.
북쪽의 방위를 수호하는 현무의 석상 입니다.
거북은 사방신의 하나인 현무로서 북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신앙되기도 했는가 하면 달의 화신과 수성의 천지음양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거북에 관한 이야기로 옛 문헌에 나타나는 하도낙서 전설이 유명한데 중국 하나라의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라는 강가에서 거북이 나왔는데 45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9개의 무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무늬가 나중에 팔쾌와 정치도덕의 9가지 홍범구주의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십이지 중 자로 쥐의 석상입니다.
십이지 중 축으로 소의 석상입니다.
십이지 중 인으로 호랑이의 석상입니다.
십이지 중 묘로 토끼의 석상입니다.
십이지 중 진으로 용의 석상입니다.
십이지 중 오로 말의 석상입니다.
십이지 중 미로 양의 석상입니다.
십이지 중 신으로 원숭이의 석상입니다.
십이지 중 유로 닭의 석상입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12지상 중 빠진 개, 돼지, 뱀이 왜 없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지 이유가 불분명합니다.
근정전의 답도입니다.
근정전을 오르는 계단 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석상은 답도라고 합니다.
2단으로 설치되어 있는 답도에는 봉황 새겨져 있고 주위로는 당초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봉황이란 한 마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하며 한쌍을 봉황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봉황은 용(龍)과 학(鶴)이 사랑을 나누어 태어났다는 상상의 새이며 외형적인 특징은 뱀의 목과 제비의 턱과 거북의 등과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단혈산에 산다고 하는데 단혈산은 태양을 마주하는 길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봉황은 5종류로 나누기도 하는데 붉은색은 봉(鳳), 자주색은 악작(鸑鷟), 푸른색은 난(鸞), 노란색은 원추, 흰색은 홍곡(鴻鵠)이라고 합니다.
또한 5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푸른 머리 인(仁), 흰목 의(義), 붉은 등 예(禮), 검은 가슴 지(智), 누른 다리 신(信)을 상징하며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어 왕과 왕비에 비유되기도 하며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성서로운 새로 여겨집니다.
근정전 넓은 마당입니다.
조정이라 부르는데 조정은 조회가 있던 뜰이란 뜻이며 조정의 가운데 삼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품계석이 있는데 이 품계석은 태조가 근정전을 지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며 품계석은 정조임금 때 위계질서가 문란하여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삼도를 중앙에 두고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서 월대가 아닌 중앙을 보고서며 임금님께 절하라는 “배(拜)”~ 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임금을 보는 게 아니고 서로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보고 절을 하는데 이를 곡배(曲拜)라고 합니다.
1920년경의 사진에서는 조정에는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박석이 조금씩 보이고 품계석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옛 사진에서 보면 현재의 근정전 잡상이 7개로 되어 있는것에 대한 의문이 풀립니다.
우측의 잡상은 위아래 모두 훼손이 되어 있고 좌측의 위쪽도 훼손이 되어 있는데 아래 잡상은 자세히 보면 9개임을 육안으로 가늠할 수가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법궁인 근정전의 잡상은 현재의 7개가 아니고 9개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근정전의 향로
근정전의 전면 좌우 모서리 기둥 바로 앞에는 세발달린 향로모양의 청동제 유물이 있는데 이것의 이름은 향로가 아니고 정이라고 하는데 이 정은 왕권을 상징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합니다.
두꺼운 청동으로 만든 것이어서 1920년대나 거의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건 정의 뚜껑이 없는데 언젠가 신문기사에서 본적이 있었는데 분실되었다고 한동안 떠들어 대더니 이후 분실이 아니라 찾았다고 하던데 훼손이 된건지 왜 덮지않았을까요?
근정전의 드므
근정전 월대위에 놓여 있는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두는 쇠 그릇으로 옛날 사람들은 화재는 불귀신이 놓고 달아난다고 여겨왔으며 이렇게 드므에 물을 채워두면 불귀신이 불을 내려고 왔다거 드므에 비친 자기얼굴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고 불귀신이 놀라 달아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근정문과 행각--- 보물 제812호
안쪽에서 본 근정문입니다.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 문은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입니다.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원래는 한 칸 복도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2칸 복도로 만들었으며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고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과 월화문이 있고 북행각 가운데에 사정문(思政門)이 있으며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가 있습니다.
근정문의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 할 때 주요관직을 두루 거친 신석희가 썼다고 합니다.
근정문의 잡상은 7개를 배치했습니다.
근정문의 답도이며 근정전은 2단 답도인 반면 근정문은 1단으로 되어 있으며 답도의 내용은 근정전 답도와 동일합니다.
월화문(月華門)과일화문(日華門)
근정문의 서쪽에 난 작은 문으로 1395(태조 4) 년에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탔었으며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무반은 월화문으로 문반은 일화문으로 출입했다고 합니다.
영제교(永濟橋)
영제교는 금천위에 세운 돌다리로 왜 세운 것일까요?
이 금천은 경복궁의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곳으러 근정전에 행사가 치러질 때면 신하들과 문무백관을 형식을 갖추고 외부공간인 금천밖에서 대기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다시말해서 금천교를 건너면 왕의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물론 신하들이나 누구든 이다리를 건너며 금천에 흐르는 물로 마음을 깨끗히 씻어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앞 해치뒤로 뒤에 작은 천록이 보입니다.
영제교 동서로 천록이 각각2마리씩이 금천을 지키고 있는데 이 천록은 사악한 무리를 다리나 물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고자 하는 것으로 백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옛날 영, 정조때 유득공의 아들이 기록한 요즘말로 경복궁 답사기를 보면 동으로 2마리의 천록이 있고 서로 한 마리의 천록이 있다고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문헌과는 달리 동서로 각각 2마리씩 천록이 금천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천록은 동쪽에 있는 천록으로 아랫쪽을 무섭게 주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을 타고 들어 올지 모르는 사악한 잡귀를 물리쳐 궁궐의 법전을 신성한 공간으로 유지하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천록과 달리 서쪽에 배치되어 있는 천록(위사진 좌측)은 혀를 내밀고 장난기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조상의 해악을 엿볼수 있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에 의해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영제교를 지금의 수정전 앞으로 이전 설치했었는데 그나마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후 중앙청으로 쓰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고 원래 있던 자리로 복원한 것입니다.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으로 들어설 때 금천이 있으며 금천위에 세워진 돌로 만들어진 다리입니다.
태종의 분부에 따라 공조판서 박자청이 북악산 골짜기의 물을 끌어들이고 이 물길을 영추문 안으로 흐르게 하여 경회루 연못에서 빠져 나온 개울과 합친 뒤 근정문 앞을 지나 흥례문 동쪽 행각 밑으로 빠져나가 청계천으로 흐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영제교는 방어를 위한 개념보다 배산인수의 풍수지리적인 입장을 고려하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로 명당수가 흐르게 되어있으나 지금은 대리석으로 새로 축조하였고 생활 오수로 인하여 물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다.
이 다리는 궁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경계역할을 하며 영제교를 건너지 않고는 근정문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영제교는 2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반원형의 홍예가 있으며 난간은 짧은 기둥으로 세워진 위에 팔각 돌난대가 올려져 있고 난간 양쪽 엄지기둥에는 상서로운 상상의 돌짐승 4마리를 배치하여 잡귀나 부정한 무리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며 영제교 옆 석축 위에는 상상의 동물인 천록이 있어 금천 물결을 타고 몰래 들어올지도 모르는 사악한 기운을 경계하여 지키고 앉아 있는데 천록의 얼굴을 보면 능글맞아 보이면서 친근감이 가는 미소 띤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데 우리 선조들의 해악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을 보내며 전각들은 불에 탔다가 중건하고 다시 불에 타는 수난을 겪지만 돌은 불에 타지 않아 수난을 격는 일이 없는데 영제교는 예외로 수난을 겪은 다리입니다.
유화문(維和門)
유화문은 흥례문에 딸린 행각의 문으로 서쪽의 궐내각사로 들어서는 문으로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 할 때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판은 2001년 설치하였으며 흥례문과 같이 정도준이 쓰고 오옥진이 새겼습니다.
기별청(奇別廳)
기별청은 흥례문 안 서쪽 행각 유화문 옆에 있으며 기별이란 소식을 알린다는 뜻이며 기별청은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반포하는 기별을 작성하던 곳입니다.
기별청의 현판은 2001년에 설치하였고 정상옥이 쓰고 오옥진이 새겼는데 예서체로 정자와 모양과 획수가 약간 다릅니다.
덕양문(德陽門 )
“덕이 밝다“ 라는 뜻을 가진 덕양문은 흥례문과 근정문을 잇는 동쪽 행각에 있으며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현판은 옛 사진을 고증하여 2001년에 제작하였는데 덕(德)자 중 아래 마음 심(心) 위에 일(一)획이 생략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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