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조계산 산행기
산행일시: 2012년08월 26일
누구와: 서울가고파산악회원과 함께
산행거리: 약 12.2㎞
산행시간: 5시간35분(11:20~16:55)
산행코스:선암사주차장(11:20)-선암사(11:45)-조계산장군봉(13:25.887.1m)-호남정맥갈림길(14:00)-연산봉사거리(14:55)-효령봉정상(15:07.851m)-송광굴목재(15:25)-비룡폭포(16:23)-송광사(16:35)-송광사주차장(16:55)

오랜만에 한국 명산 100산을 찾아 산행을 떠납니다.
시간을 정하고 100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므로 서두르지 않고 시간이 날 때 산악회의 일정이 맞아 떨어지면 나서고는 하다 보니 언제나 끝을 볼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종점이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조계산을 찾았습니다.
조계산(曺溪山)은?
각각의 산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고 갖가지 전설이나 산이 품고 있는 사찰들도 나름 다르겠지만 순천의 조계산은 다방면으로 여타의 산과 다른 점이 많은 곳입니다.

주차장에서

산행안내판 앞에선 대원들

선암사 부도탑 완쪽에 있는 화산대사사리탑으로
기단부가 다른 탑과 달리 돌사자가 네모서리를 받치고 있는데
1986년 2월 2마리의 사자석상을 도난당해 다른 석물로 대치시켰다고 합니다.
1979년 12월 2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는가 하면 말발굽의 형상으로 휘감은 조계산은 주봉인 장군봉이 호남정맥 상에 놓여 있으며 전에는 장군봉이 있는 동쪽의 산을 청량산이라 불렀고 연산봉이 있는 서쪽의 산을 송광산이라 불렀는데 고려시대부터 조계산으로 통칭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조계산에는 산세나 계곡도 유명하지만 그 이상으로 유명세를 타게 만든 것은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 기슭에는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조계종의 본산인 송광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조계산의 산행 시 들머리와 날머리는 어느 쪽을 정하나 비슷한데 우리산악회 회원들은 선암사를 들머리로 정했는데 그 이유는 단순한데 입장료가 송광사(3.000원)에 비해 선암사(1.500원)가 절반밖에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내심 선암사를 들머리로 정했으면 했는데 개인적인 이유는 시간이 된다면 쌍향수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기도 했고 송광사를 자세히 구경하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선암사에서 산행을 시작하다.
10시30분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할 예정이던 버스는 10분 빠른 11시20분에 주차장에 도착한다.
단체로 산행을 나서긴 했지만 시작점에 선암사가 있고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이어지는 등산코스가 6곳이나 있어 개별산행 또는 자유산행으로 이어질 것이며 한 가지 지켜야 하는 것은 17시 정각까지 송광사 주차장에 집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차장을 지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15분을 걸어 올라가면 유명한 승선교와 강선루가 나온다.

아치를 이룬 승선교 안으로 강선루가 보입니다.
녹음이 짙은 계절이라 강선루의 모습이 뚜렷하지않아 절경의 의미가 일부 퇴색된 느낌입니다.
승선교는 보물 400호로 지정된 절 입구의 무지개다리다.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승선교는 화강암으로 만든 아름다운 아치형 석교로 계곡의 폭이 넓어 아치 또한 유달리 큰 편인데 아래 부분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습이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물에 비친 모습과 어우러져 완벽한 하나의 원을 만들기도 한다.
승선교는 그 밑단 부분이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급류에도 휩쓸릴 염려가 없으며 가운데 부분은 용머리로 조각되어 있다.
다리 중심석 아래에 석재가 조그맣게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 다리는 1713년(숙종39년)에 호암대사가 6년에 걸쳐 완공했다고 전하는데 일설에는 선암사를 고쳐지을 때 1698년 원통전과 함께 만들어 졌다고도 전하기도 한다.
25명의 회원 중 승선교와 강선루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필자와 또 다른 한 사람 뿐이다.
승선교의 멋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이 모두 가버렸으니 꼴찌가 되어 버렸다.


삼인당은 원모양으로 만든 못입니다.
강선루를 지나 5분도 채 가지 못해 삼인당이 나온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46호인 삼인당은 긴 알 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선암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 한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세히 구경할 시간이 없어 급히 카메라에 담고 약간 비탈진 길을 올라서니 선암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선 암 사 (仙 巖 寺)는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개창하여 비로암이라고 하였다는 설과 해천사라고 부른 것이 선암사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신라 헌강왕 5년(875)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믿을 만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선암사라는 사찰의 이름에 대해서는 절 서쪽에 높이가 약 30m 되고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여 이 때문에 ‘선암(仙岩)’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서쪽에 선암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 볼 수는 없었지만 사진에서 보는 선암사는 포근하게 보였다.




풍수지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장군봉 아래 있는 선암사는 옥 같은 미녀가 잔을 올리는 옥녀헌배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일주문을 들어서니 바로 앞에 범종루가 있다.
일반적으로 범종루에는 법구사물(불전사물이라고도 함)을 갖추고 있는데 불교의식 때 쓰이는 법구사물(四物)은 법고(法鼓)와 목어(木魚), 범종과 운판을 말하는데 사물보호를 위해 문짝을 달아 그 안에 보관하는 곳이 많으므로 범종을 제외하고는 보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살펴보니 대부분 눈에 보이니 좋다.
범종루를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서니 마당에 동서로 3층석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대웅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보기에 좋다.



선암사 대웅전(仙巖寺 大雄殿)
2001년06월08일 지정된 보물 제1311호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고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선암사 삼층석탑(仙巖寺 三層石塔)
일주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는데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인데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암사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동탑 1층에서 유물 3점이 발견되었는데 사리 장엄구로 청자 항아리, 백자 항아리가 각각 1점씩 있었으며, 사리 장치는 백자 항아리에서 나왔는데 이 백자 항아리 안에 비단으로 싼 금동 사리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탑에서 나온 유물은 보물 제 39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선암사 구시

선암사 팔상전
대웅전을 둘러 본 후 뒤편에 있는 팔상전을 비롯해 여러 건물들을 살피다 보니 일행들은 거의 갔고 4명만이 후미에 남았다.
서둘러 일행을 쫒는다는 생각에 선암사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산행들머리 방향으로 가는 길에 유명한 선암사의 칙간과 밥집을 지나가는데 눈으로만 보고 지난다.

옛 대웅전 터에 있는 누운소나무

선암사 해우소
선암사 해우소의 깊이는 너무깊어서 대변을 보고 본인은 대변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다음 사람이 변을 볼려 하면 그제서 풍덩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설가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 이런글을 싣기도 했는데 ---
"선암사 화장실은 배설의 낙원이다.
전남 승주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아, 똥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좀 멀더라도 선암사 화장실에 가서 누도록 하라. 여기서 똥을 누어보면 비로소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3백 년이 넘은 건축물이다.
아마도 이 화장실은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일 것이다.
화장실 안은 사방에서 바람이 통해서 서늘하고 햇빛이 들어와서 양명(陽明)하다." ---
억지로 변을 한번 보고? 아니면 시늉이라도 내고왔으면 하는 후회를 하였습니다.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갔는데 지체를 더 한다고 해야 5분 정도인데 제대로 보지도 사진도 찍지 못하고 지나친 것을 나중에서야 후회하였다.
일행을 쫓아 대각암 입구로 들어선다.
편백나무가 울창한 경사진 포장도로를 따라 대각암 앞에 도착을 해서 먼발치에서 대각암을 본 후 산행들머리에서 이정표를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장군봉을 오르는 길
대각암을 우측에 끼고 시작한 산행은 길 양쪽으로 산죽이 울타리를 치고 있는 고즈넉한 길로 시작된다.
모든 산행이 마찬가지이나 처음부터 경사가 심하게 시작되는 길은 몸을 무겁게 만들고 컨디션을 저점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편백나무 숲

대각암
한동안 산행을 하지 않은 탓에 보름 전 속리산 구간 중 비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다가 형제봉에서 포기하고 갈령으로 탈출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나 자신을 내가 믿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렇게 힘든 코스도 아니었는데 앞서간 일행을 쫓아 가기위해 무리한데서 비롯한 것 같았다.
당시에는 일행이외는 생각이 없었지만 선암사를 구경하느라 20분 이상을 보냈는데 대부분의 일행들은 절 구경을 하지 않고 막 바로 산행으로 접어들었으니 따라 갈 수 없었으며 비 오듯 흐르는 땀은 옷을 적시고 젖은 옷은 보행을 불편하게 하니 마음만 급했지 속도를 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산행들머리
계곡에 갇혀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아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고갈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작은 돌탑이 있는 샘터에 닿았고 물을 거푸 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는데 길다고 생각했던 선암사에서 이곳까지 약50분이 걸렸다.
이곳 쉼터에서부터는 정상까지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경사도는 이제까지 올라온 것보다 무척 더 심했으나 바람을 맞으며 산행을 해서인지 힘이 든다 해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샘터
신갈나무와 굴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산행 길은 때로는 직사광선에 노출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무 터널로 이루어졌으므로 오를만 했으니 30분이 채 되지 못해 장군봉에 도착을 합니다.
직사광선이 내려쬐는 정상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간단한 기념촬영을 한다.
직사광선을 피하느라 배바위 방향으로 하산을 하던지 아니면 숲속에서 더위를 피하며 식사를 하느라 정상에는 사람들이 없다.




증명사진은 찍어야 했는데 찍어줄 사람이 없어 정상석 근처에서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다 이후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사진을 부탁하니 오늘산행에 2장의 증명사진을 남겼다.
정상석에서 조금 떨어진 그늘을 잡아 정상주로 가져온 캔맥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며 가야할 길을 모색해본다.
산악회에서 원래 계획했던 구간은 장군봉에서 송광굴목재까지 능선으로 산행을 하는 것으로 정하고 경우에 따라 사잇길로 질러가는 예외를 두었다.
산악회장이 차안에서 꽁보리밥집을 거론하며 지름길로 유도를 했으므로 대각암에서 꽁보리밥집으로 빠지거나 정상에서 배바위를 지나 꽁보리밥집으로 빠졌으므로 정상에서 말발굽능선을 타는 일행은 확실치는 않지만 필자 혼자였던 것 같다.
◎말발굽능선과 연산봉
장군봉 인근 암봉에서 주변을 관망한다.
선암사 방향으로는 활엽수가 막고 있어 조망을 할 수 없었고, 가야할 방향으로는 말발굽을 닮은 능선이 긴 타원을 이루며 군데군데 솟구치며 고봉을 만들며 힘차게 뻗어 내렸다.
어느 방향으로 하산을 할까 망설이다 일행들과 달리 말발굽 능선으로 결정을 하고 다시 한 번 장군봉 정상석을 만져 보고는 호남정맥길인 북쪽 길을 따라 한동안을 내려선다.

그늘사초가 있는 길
참으로 오랜만에 정맥길을 따라 걸어본다.
독립군 멤버인 시인마뇽선배님과 성봉현씨가 먼 길을 내려와 혼자 긴긴 구간을 외롭게 걸었을 조계산구간을 걸으며 그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했다.
고도 850m를 가르는 능선은 장군봉을 오를 때와 달리 한적했다.
길가에 있는 풀과 숲이 마음에 들기도 하였고 간간이 참취와 며느리밥풀이 꽃을 피워 오가는 산꾼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듯하다.


장박골 몬당입니다.
이좁은 길로 가면 호남정맥이 이어지며 아래는 접치입니다.
가볍고 산책하는 마음으로 밟던 호남정맥의 마루금은 불과 1km정도에서 끝나버리고 장박골 몬당에서 정맥은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접치로 이어진다.
접치란? 두 곳이 이어지는 고개라는 뜻으로 지금은 하나의 산인 조계산으로 불리지만 옛날에는 선암사를 품고 있는 청량산과 송광사를 품고 있는 송광산의 경계의 접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송광사에서는 이 지점을 장박골 몬당 또는 장박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높은 산임에 틀림이 없지만 능선길은 부드럽고 한적해 선암사에서 장군봉으로 올라 설 때의 피로는 모두 사라지고 마음이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볐다.

789봉으로 가며 만나는 제2헬기장
능선길에는 작은 헬기장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 멀지 않은 곳에 다시 큰 헬기장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수시로 안내방송이 나오는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는데 윗부분 태양광 집결판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무인 자동안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태양광 집결판이 설치된 헬기장을 지나 내리막으로 내려서면 장박골3거리가 나오는데 왠지 모르게 이곳은 편안한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 좌측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여름에도 한동안 발을 담글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물이 흐르는 장박골이며 아래쪽에는 굴목재 보리밥집으로 연결된다.
이정표에 배낭을 걸고 증명사진을 찍은 후 다시 약간 오르막으로 올라 이정표나 삼각점도 없는 851봉에 오른다.
굳이 851봉을 강조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봉이기 때문이다.

요산님이 주장하는 연산봉 정상,
정상에는 삼각점도 없고 정상석도 없고 아루런 표식이 없었습니다.
산행기 자료를 찾다가 조계산 연구소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요산 점수생인오라는 분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분의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요산님의 주장에 의하면 851봉은 옛날 송광산의 주봉이란다.
송광산이 조계산으로 바뀐 이후 이곳을 연산봉이라 불렀으며 이곳에서 약1.5km 떨어져 있는 연산봉이라 불리는 봉우리는 호령봉 또는 효령봉이라는 주장이다.
요산님의 이러한 주장에는 이곳 일대 마을의 연세 드신 분이나 보리밥집을 아주 오래전에 운영했다는 분들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현 연산봉이라 부르는 봉우리의 존재가 호령봉이라는 증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산님의 이러한 주장에 동조할 수 있는 작은 증거는 집에 가지고 있는 산행개념도가 2장이 있는데 400산 안내책자의 개념도에는 연산봉의 표기가 요산님이 주장하는 곳에 표기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된다.
요산님의 글은 아주 길게 썼으므로 내용을 하나하나 기록할 수는 없지만 논리적으로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잘못된 지명이라면 하루 빨리 고쳐 불러야 할 것이다.

연산봉4거리

연산봉으로 오르는 길 암봉
연산봉을 지나 능선길은 내리막으로 접어들면 아주 양호하고 호젓한 길이다.
한동안을 내려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도착한 곳은 피아골로 내려설 수 있는 연산사거리다.
연산사거리에는 지방에서 온 산악회원 30여명이 잠시 쉬고 있었으며 일부는 피아골을 통해 송광사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안내판에는 출입금지로 되어 있다.
◎효령봉(曉嶺峰)에 오르다
갈 길이 바쁘므로 사진 한 장만 남기고 문제의 효령봉으로 오른다.
산행을 하면서 마땅한 전망대가 없어 장군봉을 먼발치에서 찍으려 했으나 숲이 가려 제대로 찍을 수 없다.
효령봉 조금 못 미친 곳 우측에 큰 전망바위가 있어 장군봉과 말발굽능선을 찍으려고 전망바위에 올라섰는데 바위 위에는 쇠살모사가 태양욕을 즐기고 있었다가 바위틈으로 몸을 숨긴다.
산행 전 산악회장은 산행 시 주의사항으로 뱀 조심할 것을 당부하며 태양욕을 하기위해 등산로나 바위 위로 뱀이 나오므로 특히 바위 위를 조심하라 했는데 꼭 나를 위해 한말처럼 현실이 되었다.
전망암에서 사진을 찍고 가까이에 있는 문제의 효령봉(연산봉 정상석이 있는 봉을 효령봉으로 표기함)에 올랐다.
넓은 헬기장으로 조망이 아주 뛰어나다.



장군봉 방향으로 연산봉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이 정상석으로 인해 이곳을 올랐던 사람들은 이곳이 연산봉으로 알고 또 그렇게 표기하므로 원 지명이 효령봉이라 하더라도 정상석을 바꾸지 않은 한 요산님의 주장이 맞는다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효령봉으로 각인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요산님은 송광사에서 60대부터 있는 현봉스님을 만나 연산봉으로 표기하는 효령봉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현봉스님은 현 연산봉으로 표기하는 봉우리는 효령봉으로 한자로 曉嶺峰이라며 새벽에 깨달음으로 어어지는 봉우리라는 뜻이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연산봉으로 표기되고 있는 효령봉이 현봉스님이나 요산님의 안타까운 바람처럼 제대로 표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효령봉에서는 장군봉과 장군봉 좌측으로 이어지는 장박등과 연산봉이 한눈에 들어어 온다.
이곳을 지나 천자봉까지 능선을 따라 움직이는 산세가 힘차 보인다.

연산봉에서 본 장군봉
건너편 장군봉을 지나 배바위에서 잠시 멈추고 다시 능선을 타고 내려서 선암굴목재에서 숨을 죽인 능선은 다시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고동산으로 이어지고 고동산을 지나 사자산 무등산으로 계솟 달려갈 것이다.
살짝 숨죽인 선암굴목재 뒤로는 도월이 상사호의 모습이 들어오고 산과 어우러진 호수의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움 그 자체다.

연산봉에서 본 도월리 상사호
한동안을 휴식을 취하며 상사호와 주암호를 감상하고 효령봉을 내려선다.
정상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 등산로에서 새끼 쇠살모사를 또 만났는데 새끼라서인지 낙엽색보다는 회색빛이었는데 중요한건 효령봉에는 살모사가 많다는 점이다.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산행 시에 주변을 잘 살펴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쇠살모사를 보고 내려선 곳은 송광굴목재다.
이곳은 도로로 치면 교통의 요지인 곳으로 사거리다.
북으로 효령봉, 연산봉, 장군봉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천자암봉을 지나 쌍향수가 있는 천자암을 지나 송광사로 이어지고 동으로는 보리밥집을 지나 선암굴목재, 선암사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홍골, 피아골로 이어져 비룡폭포를 지나 송광사로 이어지는 요지다.
◎송광굴목재에서 계곡을 따라 하산하며
송광굴목재에서 잠시 쉬면서 고민을 한다.
당초 산행계획은 이곳에서 천자암봉을 지나 쌍향수를 보고 송광사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송광굴목재 풍경과 이정표
그러나 천자암봉과 쌍향수 대신 홍골,피아골 방향으로 내려가 비룡폭포를 본다면 시간상으로 30분정도 단축할 수 있으므로 그 시간에 송광사를 구경한다고 마음을 바꾼다.
송광굴목재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거칠었으며 길가에는 피나물이 즐비했는데 제철이 지났음에도 늦게 노란꽃을 피우고 있다.

우리꽃 야생화 피나물
거칠은 하산 길은 대피소를 지나며 부드럽게 바뀌긴 했으나 너덜에 가깝기는 여전하다.
하산하는 길 곳곳에는 조계산 연구소 카페지기인 요산님께서 지명에 대한 안내문을 곳곳에 세웠는데 피아골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피아골이란 계곡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많은 곳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아골하면 지리산을 떠올리며 단풍이 핏밭으로 이룬 모양이나 6.25 때 빨치산 토벌 전투에서 시체가 골짜기를 메우고 피가 내를 이룬데서 기인한다고 잘못알고 있는데 피아골의 원뜻은 액을 피했던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곳 피아골 중간에는 일년 365일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는데 이곳에서 빨치산이 은신처로 삼고 있었던 곳으로 빨치산이 액을 피해 운신했었는데 나중에 빨치산 토벌전투를 벌여 평정을 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안내문이 있는 곳을 지나 계곡은 아래로 내려설수록 거친 외침을 토하며 폭포를 연상시키는 계곡으로 변하고 암반에서 암반으로 낙차하는 물줄기를 보면 금방이라도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내려선다.

홍골계곡

홍골계곡의 아주 특이한 사장교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내려오다 보면 나무로 만든 사장교가 나오는데 이곳이 토다리로 이 다리를 건너면 토다리3거리다.
송광사에서 올라오면서 이곳에서 좌측 피아골로 접어들어 장군봉을 거쳐 선암사로 가면 약7km에 3시간, 우측 송광굴목재를 거쳐 선암사를 가면 약5.5km에 2시간이라고 알리고 있는데 선암사방향에서 송광사로는 1km라고 안내 이정표가 있다.

토다리 이정표

얼마나 더우면 체면도 예의도 품위도 남의 시선도............
토다리 아래지점 계곡에는 쉬기 좋은 소가 여러 곳이 있다.
연산봉4거리에서 만났던 산행팀 10여명이 남자여자 섞여 옷을 입은 채로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이곳을 조금 내려선 지점에는 요산님의 안내판이 나오는데 홍골과 보소의 전설에 대한 안내판이 있는데 요약을 하면 이러하다.


홍골계곡의 무명폭포
홍골은 조계산 송광사 측의 대표적인 골짜기 이름으로 건너편 삼각홍을 이루고 있는 계곡인데 송광사에서 굴목재로 오르다보면 피아골과 합류하는 토 다리 삼거리를 약 120m 정도 못 미친 지점의 좌측계곡으로 입구에 무명폭포와 보소가 있습니다.
홍골은 효령봉(연산봉)과 시루봉 중간의 장박골 말발굽 능선 시루봉 삼거리에서 길게 뻗어 내린 골짜기의 모습이 골이 가파르게 깊어 흡사 홈 대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홈 대골”이라 부르던 것을 홍골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홍골의 홍을 붉을 홍으로 추정하여 골짜기의 붉은 단풍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단풍이 별로 많은 골짜기가 아니어서 송광사에서 운구재를 지나 천자암으로 가는 봉우리에서 골짜기를 건너다보면 “홈 대골”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보소로 예상되는 못인데 홍골입구 무명폭포 아래있습니다.
보소의 전설을 요약해 보면
“보소”는 이곳 절별 아래(토다리 삼거리 약 70m 못 쳐)있는 깊은 소의 이름으로 보소의 한자어 뜻은 “대들보 보 늪소인데 조선 연산 때부터 불교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명종, 영조, 정조 때에 이르러 극에 달했단 할 수 있다. 이 때 승려들은 노예나 다름없이 공역을 해야 했었다. 특히 송광사 승려들도 매일 노역에 동원되었고 지칠대로 지친 스님들이 그 날도 관아를 짓는데 사용할 대들보용 나무를 힘들게 운반하여 이곳에서 쉬고 있을 때 한 스님이 눈짓을 하였다. 뜻을 알아차린 스님들은 감독이 없는 틈을 타 낭떠러지 ”소“를 향해 대들보(나무)를 힘껏 밀었더니 소로 빨려 들어간 대들보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나무가 없어진걸 알게 된 감독이 시치미를 떼고 돌아와 있는 스님들을 상대로 아무리 조사를 해도 증거를 찾지 못하니 스님들을 괴롭히며 찾아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견디기가 힘든 스님들이 기원을 했더니 며칠이 지났을 때 10리 밖 동강 ”곡천“ 다리 밑에 ”삼밧소“로 대들보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들을 괴롭히던 감독은 두려운 마음에 어디론지 떠나버렸으며 이 때 부터 대들보가 빠진 소라 하여 ”보소“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한동안 안내문을 읽고 안내문이 있는 사잇길로 들어서면 홍골 입구가 시작되는 절벽은 얼마 전 비로인해 폭포로 변해있었고 폭포아래 보소를 볼 수 있다.
보소를 보고 다시 등산로로 들어서 울창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길을 걸다보면 나무 사장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3~4분 아래에는 비룡폭포가 있다.

비룡폭포
비룡폭포는 안내판이 없는 것이 옥의티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안타깝다.
비룡폭포는 말 그대로 용이 나는 듯한 힘찬 물줄기를 쏫는 폭포로 수량이 많아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이었으며 폭포 아래 소는 푸른빛이 감돌고 있어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으며 혼자서 보는 폭포는 무서움이 들 정도다.
비룡폭포를 뒤로하고 넓은 길을 따르면 이내 쌍향수가 있는 천자암에서 오는 길과 합류하고 이곳은 유명한 송광사의 뒤편이기도 하다.

특이한 사장교를 또 건너고.....

이정표


송광사를 감싸고 있는 대나무 숲
대나무 숲이 송광사의 경계를 표시하는 듯 대나무 숲으로 들어서면 송광사의 암자와 경내 건물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는데 송광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원의 홍예교 위에 세운 전각을 지나야 한다.
전각으로 들어서면 송광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측면에서 보느 홍예교

대웅전으로 가는 전각

해강 김규진이 쓴 송광사 현판
청색바탕에 흰 글씨 한문으로 가운데 송광사라고 쓰였고 우측에는 난초와 좌측에는 대나무의 사군지를 그렸고 좌측 아래 해강 김규진이라는 낙관을 보고 편액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았다.
해강(海岡)은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운사람이다.
대한제국 때는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는데 창덕궁 희정당에는 김규진 선생의 벽화가 좌측에는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우측에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있다.
고종황제는 금강산을 그리라고 명하자 김규진 선생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금강산을 3번이나 다녀왔다는 일화가 있다.
특히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등이 김규진 선생이 남긴 작품인데 송광사의 작은 편액이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글씨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전각을 지나자 범종루가 눈에 들어왔는데 범종루에는 불전사물이 보관되어 있다.
범종루를 지나면 넓은 마당 뒤로 웅장한 대웅전이다.
◎송광사(松廣寺)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절이다.
합천 해인사(법보사찰), 양산 통도사(불보사찰)와 더불어 한국 삼보사찰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 대표사찰 송광사는 조계종의 본산이며 참고로 선암사는 태고종의 본산이며 강진 백련사는 천태종의 본산이다.

송광사는 승평속지<昇平續誌>에 의하면 신라말에 혜린선사가 창건하여 길상사라 하였다.
건물이나 승려수도 많지 않은 평범한 절로 명맥을 유지했고 고려 인종 때 집이 기울고 단청도 퇴락한 길상사를 석조대사는 대찰의 원을 세우고 사람을 소집하고 목재를 준비하였으나 대역사를 완공하지 못하고 입멸하였는데 이러한 길상사가 새로운 규모의 대찰로 발전하게 된 것은 보조국사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년)은 당시 속세의 명예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불교계를 떠나 남쪽인 이곳에 정착하여 새로운 혁신의 바람인 정혜결사를 일으켰다고 알려졌다.
특히 지눌은 고려 희종(1205∼1211년)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는데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후원을 입고 있었다.
희종은 그가 즉위하자마자 길상사란 절 이름을 수선사<修禪寺>로 고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을 내리므로 수선사로 바뀐 것으로(당시에도 송광사라고 불렀다고 함) 그 뒤 송광사는 고려말까지 약 200여 년에 걸쳐 16국사를 배출함으로써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僧寶寺刹>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말부터 전해 내려오는 구산선문의 총칭으로 대각국사 의천이 일으킨 천태종과 구별하기 위해 조계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송광사는 조선조에 들어와 정유재란의 전란 그리고 다시 헌종 8년(1842) 대화재로 거의 불탄 것을 기봉,·용운 등 두 대사의 주관으로 14년에 걸쳐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송광사 대웅전입니다.
이 대웅전은 백팔번뇌를 소멸시키려고 108평으로 하고
또 불법이 두루 퍼져나가기를 기원하며 평면을 열십자(十) 형의 독특한 법당이라고 합니다.
송광사의 대웅전은 규모가 웅장하고 형태도 다른 사찰의 대웅전과 달리 측면 지붕이나 처마가 겹으로 지어졌다.
대웅전 우측으로는 지옥전이 있으며 좌측으로는 승보전이 있다.

송광사 승보전

승보전 옆 벽면에 비사리구시
승보전 옆 벽면에 기대어 놓인 느티나무로 만들었다는 비사리구시가 있다.
이 구시는 큰 일이 있을 때 밥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이던 것으로 쌀7가마니의 밥, 약 4.000명분의 들어 간다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고 아래 설명에는 송광사 3대 명물로 이 구시를 포함해 쌍향수와 능견난사가 있다고 한다.
능견난사란 송광사에서 음식을 담는데 사용하던 그릇인데 송광사 제6대 원감국사가 중국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며, 만든 기법이 특이하여 위로 포개도 맞고 아래로 맞춰도 그 크기가 딱 들어맞는다고 하는데 조선 숙종이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보도록 명했지만 도저히 똑같이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들기는 어렵다.”란 뜻에서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이름까지 생겨나게 되었는데 현재 송광사 박물관에 29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승보전 좌측으로 성보박물관이 있다.
몸에서는 땀 냄새가 진동을 하고 또 등산화 끈을 풀었다 다시 매는 번거로움과 산악회에서 정한 집결 시간이 있어 박물관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능견난사를 보고 왔으면 좋을 뻔 했다.

사방을 기웃거리다 대웅전을 뒤로하고 일주문을 나서다 또 하나 이상스러운 모습을 발견했는데 일주문 계단 소맷돌 아래 조각이 돌 원숭이 같아 보였는데 일반적으로 밋밋하거나 궁궐에는 해치를 조각했는데 원숭이는 처음 보는 것이며 어떠한 의미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송광사를 떠나며...........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가다 작은 하마비가 눈에 들어왔다.
하마비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고 걸어서 지나라는 비석이다.

송과사 일주문

일주문 계단의 원숭이 석상
조선시대에 종묘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이후 궁궐에도 하마비가 설치되었는데 사찰에 하마비가 있다고는 생각을 못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유생들에 의해 사찰이 훼손되는 일이 있어 명종 당시 실세였던 보우가 문정왕후에게 의뢰하여 왕명에 의해 사찰에 하마비를 세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마비가 설치되어 있는 사찰은 순천의 송광사와 선암사, 양산의 통도사, 부산의 범어사, 대구의 파계사 등이라고 한다.

문정왕후의 명으로 세우게 되었다는 사찰 하마비
하마비를 지나 400여m를 내려와 주차장 조금 못 미친 곳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는데 청량각과 극락교가 있다.
토다리3거리 안내판에 요산님이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이러하다.
송광사의 탐방은 본 절의 400m 전인 청량각(극락교)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곳의 지명을 항(목)이라 하여 산줄기가 송광사를 감싸는 안쪽 대문의 자리로서 지형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로 매표소를 지나면 높다란 전통 석조 구름다리인 극락교를 만나는데 그 다리 위에 누각이 있으니 청량각이라 합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극락교를 행기다리라고 부르는데 이는 석조 구름다리인 홍교를 지방 사투리로 행기로 불리는 것으로 운치와 아름다움이 뛰어나고 계곡물과 솔바람이 어울리는 이 다리 청량각에는 다리의 좌우 칸칸마다 기둥 사이로 등받이 난간 의자를 만들어 놓아 절을 찾는 사람들이 땀을 식히고 지친 다리를 쉬어가게 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청량각
극락교를 지나 청량각 아래 있는 난간의자는 텅 빈 채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다리를 건너며 청량각 현판을 보며 기다리고 있을 산악회원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주차장에는 정해진 집결시간보다 10분의 여유가 있게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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