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기

대룡산 산행기

범솥말 2023. 5. 22. 23:01

대룡산 산행기

춘천을 대표하는 산

산행일시: 2010년03월 29일

누구와: 집사람과 함께

산행거리: 약 8.3㎞

산행시간: 4시간 43분(12:57~17:40)

산행코스:고은리들머리(12:57)-간이쉼터(14:15)-임도(14:52)-대룡산깃대봉(14:26,899.3m)-헬기장(16:15)-거북바위(16:23)-활공장(16:48)-갑둔이고개(17:05,)-샘터(17:15)-거두리 날머리(17:40)

모처럼 집사람과 함께 산행을 한다.

일반 사람들 같으면 모처럼 집사람과 여행을 한다 던지 아니면 바람을 쐬러 시외를 벗어난다는 표현을 하겠으나 내가 산을 다니기를 즐기니 함께 여행할 시간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년이 지나도 집사람과 여행을 하는 일이 없는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행을 하는 횟수가 적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만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행을 하며 직장에서 쌓였던 피로나 스트레스를 여행을 하며 풀기도 하고 생활의 갖가지 신경 쓰이는 일이나 부부간의 좋지 않은 문제 등도 여행을 하며 대화로 풀기도하고 대화가 없다 해도 무언의 주고받는 마음의 대화나 눈으로 주고받는 대화로 모든 문제를 풀기도 한다.

20여년전에 산행을 시작한 이후 동네 산악회를 만들고 함께 1달이면 3~회 함께 산행을 하던 때도 있지만 그때는 젊어서 인지 팔 다리가 아프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니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지라 함께 산행하는 횟수가 적어지고 또 함께 산행을 할 때 주력이 서로 다르다 보니 집사람은 힘들어 하지만 나로서는 땀도 제대로 나지 않는 때도 있으니 점점 함께 산행하는 것을 서로가 기피했을 것이다.

며칠전 검봉산을 다녀 온 뒤 다음 산행지를 대룡산으로 정한 이유로는 가평쪽의 산들은 대부분 답사를 마쳤다는 측면도 있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분위기에 저렴한 비용으로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점과 대룡산이 춘천을 대표하는 산이기 때문이다.

춘천을 대표하는 산이면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건 대룡산에는 군사시설들이 자리했기 때문에 일반인들 접근이 어려웠었으나 대룡산을 찾고자 하는 시민들을 비롯한 등산인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대룡산을 일반인에게 허용하게 되었으나 지금도 정상 가까운 녹두봉에는 공군부대가 남아 있어 수리봉과 녹두봉 그리고 대룡산깃대봉 코스는 부대옆을 지나지 못하고 임도를 이용해야 한다.

대룡산 이외에도 춘천을 에워싸고 있는 산군들은 구룡산, 연엽산, 금병산 안마산, 붐의산 등이 있는데 혼자 산행계획을 세울 때는 구룡산과 대룡산 그리고 연엽산까지 한번에 답사를 하려했으나 이번산행은 집사람과 함께 하기로 하고 대룡산만 산행하기로 수정하고 코스를 고은리를 들머리로 하고 거두리를 날머리로 정하고 승용차를 이용해 고은리 소류지종점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버스종점에 있는 등산안내판을 카메라에 담고 입구로 들어서 우측 징검다리를 건너100여m를 올라 길은 다시 왼쪽으로 이어져 다시 한번 징검다리를 건너면 나무목 이정표가 나오자 (대룡산3.4km, 버스종점0.4km) 들머리에서 제대로 왔음에 안도한다.

사실 종점에 산행안내판을 보긴 했지만 들머리 표식이 전혀 없고 산꾼들의 표식리본도 없어 제대로 가는 건지 의아해 했게 때문이다.

편안한 길을 오르다 급한 오르막이 시작되더니 좌측으로 급하게 등로가 꺾이게 되는데 이 지점이 대룡산의 유일한 폭포라는 수레간 폭포로 가는 길이라는데 지도상에 표기되었을 뿐이지 폭포에 대한 안내판도 없는데 수레간골은 상수원보호구역이라 안내표지를 하지 않는다는데 그래도 외지에서 춘천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이곳 이정표가 있는데 널빤지 하나를 덛대서 폭포안내를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수레간폭포 갈림길>

사거리 푯말에서 왼쪽 소나무숲으로 들어서면 능선길이 시작되는데 이곳의 능선은 다른 산에 비해 좀 색다른면이 있는데 능선을 가운데 두고 깊게 골이 패여 있는데 처음에는 능선의 길에 오랫동안 빗물이 흘러 골이 생겼다 생각했는데 한동안을 오르며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안은 것 같고 군사용 참호로 생각도 되는데 벙커를 만들지 않고 능선을 따라 참호를 판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고은리 능선을 오르며 느끼는 또 다른 점은 능선을 중심으로 중간까지는 오른쪽은 산림을 가꾸어 가지치기나 간벌을 하였는데 왼쪽으로는 잡목이 우거져 보는 나 자신도 어지러운 듯 하였으며 중간을 오르며 좌측으로 잣나무 조림지대가 나오며 싱그러움을 더 해준다.

중간쉼터를 전후해서 참나무를 베어 여기저기에 쌓아 놓은 것으로 보아 참나무 잎마름병이 대룡산에 확산되어 대대적인 토벌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 산행을 하며 만난 산님들은 모두 8명5팀으로 모두 우리가 산을 오를 때 그들은 내려오며 만났는데 길이 질어 내려오며 애를 먹었다는 말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친 남자 한명은 다리에 진흙이 크게 묻은 것으로 보아 넘어진 것 같았다.

과연 그들의 말은 과언이 아닌 것이 경사진 등로가 완전한 진흙탕이 되어 등로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로 옆 숲으로 이동한 흔적이 역역하기도 하다.

<정상 가기전 임도>

진흙탕을 피해가며 임도에 도착한다.

목책이 양쪽으로 둘러쳐 있고 목책에 붙여 의자도 만들어져 있다.

늦게 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3시가 되어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점심을 굶어가며 산행할 수 없어 이곳에서 점심을 하기로 하고 집사람이 간단하게 준비한 잡채밥이 산중에서 먹으니 수랏상에 뒤지지 않는다.

식사하며 주위를 살피니 정상은 보이지 않고 통신안테나만 보이고 우측의 녹두봉은 군 시설물과 시설물을 지키는 군인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이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두 코스가 있는데 왼쪽 임도를 따라가다 정상 밑에서 정상부로 오르는 힘 안들이고 오르는 코스와 맞은편 나무계단을 이용해 능선까지 간 뒤 능선을 따라 정상을 오르는 코스가 있는데 우리는 능선 길로 정하고 식사를 마치고 계단으로 올라서니 등로가 질기는 아래 오름길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나무계단을 올라 10분정도 오르니 능선에 닿는데 이 능선이 춘천지맥이라고 하며 우측 녹두봉 방향으로는 군부대에서 세운 경고판이 접근을 막고 있어 갈 수는 없지만 멀리서 보는 녹두봉의 왼쪽은 마법의 성처럼 절벽을 이루고 있는 암릉위에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가고 싶은 충동이 이나 집사람과 함께한 관계로 미련을 남긴채 뒤 돌아 능선을 따라 내리막을 지난 뒤 잠시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정상에 닿게 되는데 미끄러운 진흙으로 오르는 시간도 더 소요되지만 자칫 잘못하면 온몸에 진흙으로 도배할까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대룡산 정상인 깃대봉>

고은리 소류지를 출발한지 2시간30분이 되어 어렵게 올라선 정상은 고요와 평안 그 자체였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면 깃대에 걸려있는 태극기가 펄럭이다가 바람이 사라지면 태극기는 주저앉기를 반복하고 아무도 없는 정상은 우리 둘만으로 한동안 머무르며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연신 카메라에 담는다.

이웃하고 있는 통신중계탑은 기계음을 내 뿜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정상석 바로 밑 테그로 조성한 전망대는 일품이다.

춘천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기는 하나 가스로 가려진 시내는 정확한 판독은 불가능하며 좌에서 우로 금병산, 안마삼과 삼악산, 그 뒤로 멀리 계관산 북배산 멀리 화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며 춘천댐 오른쪽으로 용화산과 오봉산 그리고 부용산이 실루엣처럼 희미하게 보이며 호반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붐의산의 모습이 돋보인다.

한동안 정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춘천지맥을 따라 중계탑으로 이동하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표현하기조차 힘든 진흙탕 등로를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등로로 내려서서 능선을 타고 조금 내려오니 고은리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있지만 우리가 계획한 길이 아니어서 지나쳐 능선으로 지나며825봉을 지나 급사면을 내려서니 헬기장에 도착한다.

<정상과 갑둔이 고개 중간 지점인 헬기장>

헬기장에 도착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녹두봉과 깃대봉이 멀리 보인다.

825봉전부터 능선 우측으로는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이 하얗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과장된 표현으로 천길 낭떠러지기 같은 절벽이 공룡의 날 등처럼 이어져 있고 낭떠러지기와 절벽의 틈바구니에는 오래된 진달래가 굳세게 풍랑을 견디며 살아왔음을 보여주고 아래쪽에 우뚝 솟은 722봉을 내려서 거북바위에 올라서니 가리산의 암봉이 확실히 조망되고 거북바위 등위에 진달래나무는 꽃망울을 키우며 봄을 맞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집사람의 성화에 소양호 주변을 조망하다 급하게 임도 옆 정자쉼터에 도착하고 잠시 쉬면서 바라보는 깃대봉과 녹두봉은 조망이 일품이다.

<활공장에서.....>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활공장이 있는 648봉을 올라 활공의 자세를 취하며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고 다시 임도를 통해 잣나무가 무성한 쉼터를 지나 내려선 곳이 갑둔이고개다.

고개안부에는 나무를 걸쳐 이용하는 긴 의자와 명봉 오름길 입구의 이정표에는 거두리2.5km, 명봉1.4km를 나타내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명봉을 잠시 다녀오고 싶었지만 집사람이 힘들어하니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오르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하산길로 내려서는데 가파르더라도 능선을 바로 내려갔으면 좋을 텐데 고은리와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옆 능선으로 계속 이동하더니 갑둔이고개와 날머리 중간 지점인 샘터에 닿는다.

거의 다 내려왔나 싶었던 하산 길은 샘터로부터 이어지는 계곡은 깊고도 험하였으며 계곡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겨울의 얼음이 계곡을 꽉 메우고 있다.

샘터에서 내려서는 길 왼편에 누군가가 돌탑을 세우다 말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던진 돌무더기 같기도 한데 돌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마음속의 소원을 비었을 텐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슨 소원을 빌었으며 빌은 소원은 모드 이루어 졌는지?

돌을 던지며 소원을 빈다고 소원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오래전부터 우리 선대들은 소원을 빌면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소박함이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내려 전해지는 우리만의 문화가 아닐까?

갑둔이고개에서 샘터를 내려서는 것처럼 지그재그 길을 한동안 내려서더니 감시초소가 있는 날머리에 도착한다.

 <거두리 날머리>

대룡상 정상에서 길게 늘어뜨린 능선을 지나 날머리인 이곳 거두리에는 효성이 지극한 어느 청년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니 전설은 이러하다.

대룡산과 거두리에 얽힌 전설

옛날 효자 총각이 지금의 효자동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충각은 근심과 한숨과 눈물로 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대룡산엘 가면 시체 세 구가있을 것이다. 그중 맨 가운데 시체 목을 잘라 고아서 다려 드리면 쾌차할것 이 니 라.』

이튿날 충각은 목욕 재개하고 산신령님이 일러 주신대로 대룡산을 찾아갔다.

아무리 대룡산 골짜기를 뒤져도 시체는 보이질 않았다. 지친 층각은 고목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산신령님이 거짓말은 안 하시겠지만 이 넓은 산속 어디에서 찾는다지.아니야 내 정성이 부족해서 눈에 보이질 않는 거아 』혼자 자문자답하면서 옷깃을 여미고는 다시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려 할 때 골짜기 중턱 양지바른 곳에 과연 시체 세구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감히 시체의 목을 벨 용기가 나질않았다.

『사람의 도리로서 어떻게 감히 죽은 시체의 목을 벤담. 산신령님도 너무하시 지.』

총각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신령님의 말씀이니 저 시체의 목을 베어도 죄는 되지 않겠지.』하고는용기를 내어 시체의 목을 잘랐다. 시체의 목을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총각은 어찌나 무섭고 죄스러운지 몸둘바를 몰랐다.

이튿날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하늘에 빌었다.

『신령님. 신령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든지 저의어머님 병환만 낫게 하여주소서. 어머님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성들여 빌고는 정화수를 떠다가 시체의 목을 고았다. 몇시간을고았는지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총각은 정성껏 다린 시체의 물을 어머니께 들였다. 어머니는 단숨에 마셔 버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머니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언제 앓았느냐는 듯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시체의 머리가 아니라 천년 묵은 산삼이었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충각의 효성에 감동한 산신령이 산삼 영약을 시체로 화해서 내려 준 것이다.

그리하여 시체의 목을 들고 지나온 곳을 거수리라 불렀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두리로 바뀌어졌으며 그 충각 효자가 살던 것을 효자리라 불러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대룡산을 거처 이곳 거두리까지 오면서 유심히 보았지만 삼삼은 보이지 않았고 마을 종점 못미친 곳 밭에서 냉이를 캐다 거두리 마을로 내려온다.

거두리 마을에 도착했으나 차량이 있는 고은리로 가는 것이 큰 문제였다.

힘들어하는 집사람과 계속 같이 걸을 수도 없는 것이 이곳 거두리에서 고은리까지 길이 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룡산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