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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영화당 권역

범솥말 2023. 6. 3. 19:24

창덕궁 후원 영화당권역

우리의 문화재/창덕궁  2011-05-28 13: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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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후원

창덕궁 후원은 중국의 이화원, 일본의 계리궁과 더불어 아시아 3대 정원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름도 시대에 따라 달리 불리어 후원, 비원, 북원, 금원 ,그리고 상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원은 태종 때 만들기 시작을 하였고 세조 때 연못 등을 만들며 확장했으며 전란으로 불 탄 것을 광해임금이 다시 복원을 하였으며 이후 인조임금과 숙종임금 시절 많은 정자를 설치하였고 정조임금 시절 학자양성에 힘쓰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였습니다. 

 

영화당 권역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오른쪽 담장 너머는 창경궁이고 좌측은 대조전과 가정당이 있으며 이 길로 가며 작은 오르막을 지나 우측으로 휘면서 내리막으로 내려서면 영화당, 주합루, 서향각, 부용지, 사정기비각, 희우정, 천석정이 있는데 이곳이 영화당 권역입니다.  

영화당(暎花堂)

영화당은 부용지 동쪽에 있는 건물로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한 근거를 알 수가 없으나 광해군임금 시절의 기록에 영화당을 짓는 일을 논의한 것으로 보아 광해임금 시절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당건물에 걸려있는 현판은 영조임금이 1754년에 쓴 어필입니다.

지금 영화당 앞에는 창경궁과 경계를 담으로 쌓았지만 옛날에는 담이 없었고 춘당대라 하는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임금이 친림하여 과거에 준하는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를 춘당대시라고 하였고 춘당대시에서 급제를 하면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과 같은 대우를 받아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이 대시에 참여하느라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대시에 참석하여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아름다워 상림10경에 넣었으니 영화시사(映花試士)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바로 이곳 춘당대에서 치른 춘당대시에 합격한 것이었고 이때 시제가 “춘당춘색고금동”이라 해서 "춘당의 색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다“ 였다고 합니다.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

부용(芙蓉)이란 활짝 핀 연꽃을 말하는 것으로 부용지는 장방형의 연못으로 가운데 섬 모양으로 가꿔놓은 천원지방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옛날 사람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4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대해

옛날에는 하늘은 둥글고(天道曰圓), 땅은 네모졌다(地道曰方), 회남자(淮南) 천문훈(天文訓)하고............둥근 것은 밝음을 주관하여 기운을 토해내고 모난 것은 어둠을 주관하여 기운을 삼킨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이를 모방하여 연못을 파는 양태를 사각으로 팠던 것이라고 합니다.

정조 임금은 매년 봄이면 신하들을 주합루에 모아 어진봉심을 하고 나서 부용지에서 여러 학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꽃구경과 고기를 잡으며 시를 지으며 군신간의 화합하기도 하였습니다.

부용지 남쪽편에 있는 정자인 부용정은 “丁”자와 “亞”자가 묘하게 결합된 건물로 기둥 2개는 물에 담그고 있어 멀리서 보면 연못가에 피어 있는 한송이의 연꽃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하며 운치를 더해줍니다.

부용지 동남쪽 모퉁이에 연못 호안을 쌓아 올린 장대석이 땅위에 있는데 그 장대석에 돋음으로 물고기를 새겨 넣었습니다.

이는 선비들의 학문 연구기관인 규장각이 있고 춘당대가 옆에 있으므로 선비들이 노력해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등용문설화에서 잉어가 용으로 탈바꿈하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연못 서쪽에 작은 정자각이 있는데 이것이 사정기, 즉 4개의 우물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 있는 사정기비각입니다.

상정기 비각은 근접할 수는 있으나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사정기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은 내용입니다.

사정기비각의 본래 이름은 술성각이라 합니다.

사정기비각은 4개의 우물(샘)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으로 세조임금 때 왕자들에게 샘을 찾도록 명을 하였는데 4개의 샘을 찾았고 공사 후 임금이 가장 좋은 우물을 마니(摩尼) 2번째 우물을 파려(파 다음은 유리(琉璃) 다음을 옥정(玉井)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후 병란을 겪으면서 우물2개는 없어지고 나머지2개의 우물은 못 쓰게 되어 숙종임금께서 2개의 우물을 수리하고 그 이유를 비각에 새겨 세우게 하였으니 이것이 사정기비각 입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큰 우물 하나만 존재하였으며 나머지 3개의 우물은 땅속에 묻혀 기록에는 나오지만 그 실체를 보거나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예전부터 있어던 우물은 지름164cm, 깊이175cm

2010년 7월 경

2개월전에 채용 입사한 기간제 근로자들이 기존 우물을 수리하러 작업을 하러 나갔다가 곡괭이로 땅을 찍는데 돌에 튀었고, 그 돌은 일반돌이 아니라 다듬어진 돌리었습니다.

덩시 담당 주무관 정영백 주임에게 보고가 되었고 이어서 안정열 당시 소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2개월 이상을 공사가 중단되고 문화재위원들이 나와 현장을 점검하고, 내린 결론은 기록에 나오는 우물 4개 중하나로 기존 하나와 새로 찾은 하나, 그러니까 4개의 우물 중 2개를 발견하였는데 큰 우물은 세조임금 당시 만들어진 것이고 작은 우물은 숙종임금 시절 보수하여 사용하던 것으로 2010년 10월 28일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중에 추가로 찾은 우물은 지름85cm, 깊이244cm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그냥 묻어버린 나머지 2개의 우물이 근처에 묻혀 있을 것 같은 생각인데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듭니다.

 

주합루(宙合樓)와 규장각(奎章閣)

주합루와 규장각은 정조임금 원년인 1776년 2층 누각으로 지어 1층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2층은 주합루라하여 열람실과 협의를 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 주합이란 "동서고금의 장서를 통하여 향기로운 만남을 이룬다"라는 의미입니다.

정조임금은 규장각을 세우며 많은 인재를 등용시키고 당시 당파싸움을 타파하기위한 일환으로 탕평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기관으로도 활용했습니다.

정조임금은 1776년 경덕궁(지금의 덕수궁)에서 즉위한지 3개월 후 규장각을 짓도록 명하였고 3개월 뒤인 9월 규장각을 완성하였으며 지금은 없어졌으나 문헌에 의하면 규장각에는 이러한 현판이 있었다 합니다.

비선생물입(非先生勿入), 견래객불기(見來客不起)

선생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고, 손님이 오는것을 보더라도 일어서지 말라

규장각에 보관된 서책은 청나라에서 구입한 1만여권의 고금동서집성을 포함하여 약 8만여권에 달했는데 현재 약3만여권의 서울대규장각 서책은 왕실 규장각의 서책을 옮겨 함께 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합루입구에는 어수문이 있습니다.

어원은 수어지교(水漁之交)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물없이 살수 없는 물고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어수문은 가운데 큰 문 하나와 양쪽으로 작은 문 2개로 되어있는데 큰문으로는 임금이 출입을 하였고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을 하였습니다.

또한 어수문 앞 부용지에서 뱃놀이하는것을 상림10경에 넣었으니 어수범주(魚水泛舟)입니다.

 

서향각(書香閣)

주합루 서쪽에 동향으로 지어진 건물로 서향이란 "책의 향기가 있는 집"이란 뜻입니다.

주합루에 봉안된 임금의 초상화나 글 그리고 많은 책들을 매년 정월, 4월, 7월. 10월 보름날에 한 번씩 햇볕에 말리고 서적들의 사고유무를 검사하였다고 합니다.

서향각 입구에는 “친잠권민”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 편액은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는 궁궐에서 왕비가 누에를 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며 “친잠권민”은 친히 누에를 쳐서 백성에게 권장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건물 오른쪽 기둥에는 “어친잠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현대에 와서 걸어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왕실이 친히 누에를 치는 방”이라는 뜻입니다.

서향각 안에는 보물에 준할 정도로 귀한 현판이 있습니다.

조선22대 정조임금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창덕궁 건물마다 '만천명원주인옹자서'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전란을 겪고, 외세에 지배를 당하다보니 그, 많았던 현판이 없어지고 지금은 존덕정과 서향각 2곳에만 걸려 있습니다.

한문으로 음각된 현판은 글씨가 너무 많아 그 내용을 다 알수는 없지만 전조임금의 취지는 알 수 있는데 현판의 내용을 짧게 정의한다면  각처에 있는 개천에 비친달이 만개일지라도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오직 하나이니, 하늘에 떠 있는 달, 즉 왕의 명을 어기는 자는 무사치 못하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는데 내용에서와 같이 이는 정조임금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라고 합니다. 

 

희우정(喜雨亭)

서향각 북측에 있는 이 정자는 인조임금 시절 세운정자였으며 당시 취향정이라 했으며 초가지붕으로 만들어 졌었습니다.

이후 숙종임금 시절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바로 비가 내리자 숙종임금이 이를 기뻐하여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이름도 희우정이라 고쳤습니다.

서향각을 짓기전에는 희우정에서 부용지의 연꽃을 감상하는 재미가 무척이나 좋았는지 상림10경 중 하나인 희우상련(喜雨相蓮)이 바로 그것입니다.

 

천석정 (제월광풍관)

주합루 동북쪽에 있는 정자로 천석정이라 하며 현판은 제월광풍관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곳은 학자들이 독서를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순조임금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제월광풍이란 “비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도량이 넓고 시원스런 인품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