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산(天麻山) 관음봉과 견성암(見聖庵)이야기
산행일시: 2014년 07월 12일
누구와: 나 홀로
산행거리: 약 9.1㎞(윗독정→견성암 1.6km, 견성암→관음봉→고속도로지하도 약6km, 지하도→평내역약1.5km)
산행시간: 4시간 45분(13:50~18:35)
산행코스:윗독정리(13:30)-견성암(14:12)-관음봉(15:35,559m)-된봉(16:58,430.9m)-평내역(18:35)
들머리 가는길 :사릉역에서 9. 9-1. 91. 202번(수시운행)으로 진건고등학교앞 정류소로 이동 →6-1. 6-2번 버스로 환승(10여분마다 운행) →윗독정리하차

산행 전 이야기
지난달 속리산 산행 후 무릎이 아파 한동안 산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부어올랐던 무릎이 좋아지긴 했지만 높은 산을 오를 용기도 없었기에 한동안 산행을 하지 않았는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하는 진리처럼 산꾼들은 산을 오르며 살아야 하는 가 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높은 산을 갈 수 없어 무릎의 상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도심에서 가깝고 그리 높지 않은 산을 가기로 하고 오래전 스크랩했던 조맹의 전설이 있는 견성암과 관음봉을 답사하기로 정합니다.
인터넷에서 위치를 찾고 들머리를 호평 수진사로 정하고 관음봉을 오른 후 견성암을 날머리로 정할까? 아니면 반대로 들머리를 견성암으로 정할까? 망설이다 후자를 택하고 경춘선을 이용해 사릉역에 하차를 했습니다.
사릉역을 나와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202번으로 진건고등학교 앞에서 6-2번 버스로 환승하여 윗독정리 종점에 하차했습니다.
산행에 즐거움을 더해주는 건성암과 조맹의 전설
지금의 독정으로 불리는 마을 위 산 중턱에 이름도 성도 알 수 없는 청년이 바위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이 청년을 바우(巖)라고 불렀다.

<조맹거사가 약사여래를 친견했다는 석굴입니다.>
청년은 일찍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지금의 견성암 터에 있는 암굴(岩窟)에서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친견하고자 수년간 우직스럽게 수행을 한 결과 약사여래를 친견하여 득력(得力)했다고 한다. 발의 크기가 무려 석자나 됐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나 바우는 숯을 구워 당시 서울인 개성에 하룻길로 내다 팔아 생활하였는데 걸음이 어찌나 빨랐던지 지게를 지고 나가는 것은 보았어도 빈 지게를 지고 들어오는 그를 보지 못하여 동리 사람들은 그를 기인(奇人)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때 많은 비로 호우가 나 그가 신던 짚신이 골짜기를 따라 마른내까지 떠내려갔다. 지금도 남아 있는 마른내는 큰 비로 물이 불으면 흐르지만 평시에는 냇바닥 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마른 내라고 한단다. 그런데 폭우가 잠들고 모래 바닥이 드러날 쯤에 그의 짚신은 마른내 모래 바닥 위에 떠올랐다.
그때 마침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던 고려 태조 왕건이 이 부근에서 병사들을 쉬게 하고 패전의 시름에 잠겨 있다가 큰 짚신을 발견하고 즉시 임자를 찾게 하자 신하들은 수소문 끝에 천마산의 암굴에서 수행하고 있는 그를 찾아 왕의 명을 전했으나 기골이 장대한 그는 수행삼매에 들어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었으니 신하들은 기이하게 여기고 그대로 내려와 왕에게 보고하니 왕건이 친히 그를 찾아가 신라를 치는 데 힘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산신각으로 가는길---천마산 산신이되었다는 바우를 모실까?>
그는 장수가 되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그 후 계속 왕건을 도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후에 사람들은 그를 숯을 구워 팔았다고 하여 도끼정승이라 부르기도 한 바우는 죽은 후 천마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바우가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다

<왕건에게 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풍양조씨 시조가되었다는 조맹의 동상입니다.>
왕건의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그는 개국공신 문하시중 조 맹(趙孟)으로서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는데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고려왕건이 고려를 위해 큰 공을 세웠으므로 맹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성에 대해서는 아는바 없다.
본관이 풍양이라는 것은 옛날 양주 지역은 고구려 때에는 매성군, 창화군, 신라 때 내소, 고려 초기에 풍덕(豊德)이라 했다가 다시 풍양현(豊壤縣)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도 매년 음력 9월이면 날을 택하여 후손들은 이곳에 모여 조맹의 뜻을 기리며 제사를 올린다는 것이다.
견성암의 창건설화
견성암은 천마산 지맥인 독정산(현 관음봉)자락에 자리 잡은 비구니 사찰로 고려 개국공신이자 풍양조씨 시조인 조맹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가 없고 고려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견성암의 현판은 약사전에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성인(聖人)을 친견하였다 하여 사찰 이름을 견성암(見聖庵)이라 명명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2가지의 설이 있는데 갑설은 바우라는 청년이 약사여래불을 친견했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설과 을설은 바우가 왕건을 만난데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설이 맞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조맹거사 혼자 마셨다하여 사찰 약수를 독정(獨井)이라 하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그로인해 동네 사람들은 예로부터 견성암을 독정사 또는 독정이절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사찰 아래 마을 이름도 독정리(獨井里)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견성암으로 가는 길
윗독정리 종점에서 견성암까지는 1.6km이다.
처음에는 공장지대가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양갈래길이 나오는 곳에서 견성암 안내석이 있는 우측 길로 들어서 계속 올라가야 한다.

<윗독정 종점입니다.>

<종점에서 조금을 올라가면 견성암입구가 나옵니다.>
갈림길 초입 좌측의 건물도 견성암 부속 건물로 보이며 이곳에서 약3분 정도를 오르면 넓은 잔디 광장에 독정산을 배경으로 풍양조씨 비석을 세웠으며 이곳을 지나 견성암으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는데 경사도 만만치 않아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숲속을 지나며 많은 깔따구들이 눈과 코 주변을 어찌 맴도는지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견성암 일주문입니다.
견성암에는 불이문이나 천왕문은 없습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10여분 오르니 견성암 일주문이 나오며 일주문 좌측으로는 비포장인 외부인 주차장이 있어 외래객은 이곳까지 차량을 가지고 올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 한 구비를 돌면 견성암 관계인 주차장이 있으며 우측으로는 견성암 연혁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옆으로는 진건둘레길 표식이 있으며 견성암 야채밭이 있다.
견성암 안내판 말미에는 경기 북부지역의 35개 전통사찰 중 유일하게 어느 종파에도 가입하지 않은 사찰이라고 적시하고 있는데 이점이 맘에 든다.
필자도 종교를 가지고 있으나 기독교나 불교를 보면 무슨 종파가 그리 많은지 하나의 신을 섬기며 종파를 만든다는 것은 신을 섬김보다 부를 축적하기 위함이나 하수를 거느려 힘을 과시하거나 위를 섬겨 보호받기위한 인간의 생각이 앞선다는 생각이었다.


<모사단 군인들이 만들었다는 솟대는 받침은 견성암 고추 지주대로 사용했습니다.>
견성암 주차장에는 견성암 승합차량 한 대가 주차되어 있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모퉁이를 돌면 넓은 터에 안정감있는 견성암이 눈앞에 펼쳐지며 모퉁이 좌측으로는 나뭇가지로 만든 솟대가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솟대를 지나 견성암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 주변으로는 갖가지 원예종과 야생화가 수없이 많이 꽃을 피워 마치 천상을 오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견성암에서
앞에서 견성암의 창건에 대해서는 기술한 바 있다.
견성암 경내 건축물은 약사전, 대웅전, 산신각, 요사체이다.
견성암 넓은 경내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ㄱ“자 형태를 띠고 있는 약사전이 있는데 약사전이라는 편액은 없으며 건물의 편액은 견성암이라고 되어 있다.

<견성암 약사전의 모습입니다.>
견성암 편액 밑으로 2개의 검은색 편액이 달려 있는데 하나는 불기2510년 가을에 쓴 풍양조씨 시조 조맹의 사적에 관한 글인 것 같았고 또 다른 하나는 불기2489년 가을에 쓴 산령각 중수기인데 산령각 중수기는 1945년가을에 쓴 것으로 해방하던해 가을에 중수하고 단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약사전 마루에는 정감이 가는 동종이 있다.

<약사전 마루에 있는 동종, 범종과 운판이 없으니 2가지 역할을 다할 것 같습니다.>
큰 사찰에서는 범종각을 두어 범종각에 불전사물을 안치하는데 이곳에는 그러한 규칙과는 거리가 멀다. 약사전 마루에 있는 범종 중앙에는 부처님이 있으며 그 아래로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송능리 견성암이라고 굵은 글씨로 쓰여 있으며 사방으로 작은 글씨로 수많은 신도들의 이름이 우리말로 새겨 넣었는데 이 동종은 불기 2997년 경술 4월8일이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계산이 안맞는다, 불기는 서기에 544년을 더하면 된다는데 이 계산법이라면 이 동종은 미래인 2453년? 이 되어야 하는데...............
동종 옆 좌측으로는 작은 문이 있는데 문 입구에는 추산정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으며 약사전의 문은 닫혀 있다.
약사전의 익공은 궁궐 익공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고 추녀마루 4곳에는 풍경이 매달려 있어 부는 바람에 풍경소리가 은은하기보다는 조용한 절간에 손님을 맞는 의식이 시끄러운 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약사전 추녀마루에 달린 풍경입니다. 주변의 전기선이 고풍스러움을 해칩니다.>
아~ 갑자기 교보생명 현관 위에 써서 단 글판이 생각난다.
거기에는 이러한 글이 있다
「먼데서 바람 불 때마다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정호승 시인의 <풍경달다>의 일부분이라고 하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보고 싶은 님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것으로 표현을 했고 부는 바람의 정도를 풍경의 은은한 소리로 나타냈음인가 본데 약사암의 풍경은 견성암을 찾는 모든 이를 사랑으로 아낌없이 맞아 주는 견성암의 진심을 이 풍경으로 표현하는 것 같은 생각이다.
견성암 대웅전
약사전을 따라 좌측으로 돌면 약사전 지붕과 맞붙을 정도로 가깝게 지은 또 다른 건축물이 있는데 이곳은 대웅전이다.

<견성암 대웅전입니다.>
전면3칸, 측면2칸의 아담한 대웅전은 약사전에 비해 작은 규모인데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찰에는 약사전보다 석가여래를 모시는 대웅전이 큰데 이곳 견성암은 예외인데 이렇게 약사전이 대웅전보다 큰 것은 아마도 조맹선생이 약사여래불을 친견했으므로 약사전을 더 크게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웅전의 문은 열려있으나 안은 자세히 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 벽면에는 불교의 의미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단청도 어느 정도 퇴색된 것이 중후한 맛이 풍기는 것 같았다.
대웅전의 처마에도 약사전과 같이 풍경이 달려 있는데 바람이 불때마다 약사전과 대웅전의 풍경이 서로 뒤질세라 소리를 내며 마음을 전한다.
견성암의 석굴과 독정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로 들어서 약사전 뒤편으로 가면 절벽을 이룬 바위 중간에 석굴이 있다.
석굴입구에 있는 안내석에 의하면 풍양조씨 시조인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이곳에서 수양하다가 약사여래를 친견하였다는 것이며 이곳에 안치한 조맹 선생의 동상은 1975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조맹처사는 호랑이를 애완용으로 길렀나 봅니다.>
석굴이라고 해서 동굴처럼 깊은 굴이 아니며 3~4m정도의 깊지 않은 굴인데 이곳에는 안치한 풍양조씨 시조인 조맹의 동상은 특이하게 정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약간 옆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인자하게 미소를 띤 모습이며 왼손에는 부채를 들고 뒤에는 호랑이로 보이는 동물이 있는데 전설에는 발의크기가 석자나 된다고 했는데 발은 크기는 하나 석자는 많이 과장된 표현이었다.
석굴을 나서 대웅전 앞으로 나온다.
견성암 독정
대웅전과 약사전 앞에는 작은 못이 있는데 못의 대부분을 야생 부래옥잠이 덮고 있었는데 깊이는 깊지 않았고 자연그대로가 아닌 사람의 손이 너무 많이 간 것이 흠이었다.

<이 작은 우물이 독정입니다.>

<독정위에 독정샘이 있는데 가뭄으로 수량이 적었습니다.>
이 못이 조맹처사께서 혼자 마셨다는 독정으로 독정위에는 작은 샘이 있는데 수량이 적기는 했으나 샘물은 계속 나고 있었는데 가뭄이 심해 대부분의 샘들이 고갈된 상태에서도 끈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나중에 지주스님과 이곳을 지날 때 지주스님께서는 가뭄이 심해 물이 적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이 우물이 독정으로 진건에는 이곳의 독정에서 연유된 윗독정 아랫독정이라는 지명이 생기기도 했다.
견성암 산신각과 요사채
대웅전 서편에는 넓은 마당과 제법 큰 건축물이 있다.

<견성암 종무소가 있는 요사체입니다.>
마당을 지나가다 보니 위쪽 산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고 계단 위 높은 곳에는 작은 건축물이 보이는데 안내판에는 산신각이라 표시하고 있었으나 직접 가보지는 않았다.
큰 건축물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었는데 건물에는 독정정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고 한쪽에는 견성암종무소라는 현판도 걸려 있었는데 이곳을 요사체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견성암 주지스님을 만나고
오래전에 찾아보고 싶었던 곳을 와서 생각했던 것 보다 흥미있고 관심을 가지고 사찰을 둘러보았다.
이제 관음봉 산행을 해야 하는데 절간은 조용하고 아무런 기척이나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산신각 뒤로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산신각으로 올라가려는데 요사체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린다.
실례를 무릅쓰고 5번을 부른 끝에 비구니 스님한분이 모습을 보인다.

<이 분이 주지스님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에 헤어지며 뒷모습을 찍었습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등산로를 물어보니 말로해서는 찾기 힘들다며 손 수 안내를 하신다고 나오신다.
독정산의 존재에 대해 물으니 독정산은 없다며 단호하게 말한다.
조심스럽게 풍양조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니 석굴안에 세운 동상이 시조이며 이 일대 견성암을 둘러쌓고 있는 임야가 모두 풍양조씨 종친회 소유이며 사찰도 풍양조씨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다.
넓은 마당 곳곳에 핀 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꽃을 좋아하여 야생화를 옮겨 심었다고 하며 매발톱과 금낭화 등을 직접 가꾸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야생화를 좋아해 산을 갈 때면 야생화를 찍는다고 답하자 야생화를 이야기하다 마음이 동했는지 시집을 선물하겠다며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김지원 다섯 번째 시집 『솔바람 향기』라는 시집을 건넨다.
누가 지은 시집이냐?고 물으니 빙그레 웃으며 대답이 없어 스님께서 쓰셨냐?고 물으니 웃으며 그렇다는 것이다.
감사한 마음에 크지 않은 금액을 시주하겠다고 하니 부담을 줄 생각이 없다며 극구 사양하여 어쩔 수 없이 마음만 고맙게 가지고 왔다.
나중에 집에 와서 시집을 보니 길을 안내해준 비구니 스님이 속명으로 김지원이었다.

<천마산 등산로 이정표가 잡풀에 묻혔습니다.>
견성암 주차장으로 나오며 솟대가 세워져 있는 곳에 와서 자연을 이용한 정겨운 솟대를 직접 만들었는지? 물으니 사단 군인들이 만들어 세웠다고 하는데 솟대신앙은 물을 상징하는 물새들을 장대 위에 세움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보장하는 마을신의 하나로 삼았던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마을 입구에 세우는데 사찰 입구에 세우므로 사찰의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잡풀이 나있는 채소밭으로 들어서 잡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등산로 안내판 앞에서 길을 알려주고 견성암 주지스님과 이별을 한다.
관음봉으로 가는 길
채소밭에서 비탈진 위로 올라서면 뚜렷한 등산로가 나오며 등산로는 우측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계속 오르다가 위쪽으로 이어지고 주변의 임야는 보기 드물게 관리가 잘되어 있어 산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이끈다.
약15분을 오르니 T자로 길에서 2명의 산객을 만났는데 이들은 좌측 아파트. 골프장에서 올라오는 중이라고 한다.

<관음봉약수터 가는길에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동자꽃을 만났습니다.>

<가뭄으로 샘이 말라 약수터의 기능을 잃었습니다.>
길가 물이 마른 계곡에는 잡초가 무성한데 곳곳에 동자꽃이 피었다.
아기 동자의 슬픈 전설이 서려있는 동자꽃을 보면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곤 한다.
먼저 올라간 2명이 앞에서 쉬고 있다.
스님이 말씀하신 약수터였는데 물은 이미 말랐고 약수터의 기능은 잃은 채 쉼터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며 견성암을 떠난지 약15분이 지난 시간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혼자 위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오르니 그동안 불지 않던 바람이 불어주니 시원스러웠고 능선을 지나며 좌측 철마산과 가는 방향으로 천마산이 보이며 좌측에 자작나무 조림지가 분포되어 있다.
능선에 올라서 5분여를 지나 무명봉인 467봉에 오르고 467봉을 내려서면 정겨운 쉼터가 있는데 이곳에는 긴 나무를 걸쳐 만든 의자가 놓여 있는데 이곳에서는 천마산은 보이지 않지만 좌측 철마산은 가까이 보이는데 주금산은 철마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467봉 쉼터에서 본 철마산입니다.>


<서어나무에 긴 나무를 걸쳐 훌륭한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조망은 좋지 않지만 나무를 늘어뜨린 통나무의자가 쉬어가라 발길을 잡으니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간단히 준비한 간식을 먹으며 주변에 핀 하늘말나리도 구경을 하며 한동안을 쉬었는데 시원스럽게 불어주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만 같았다.
긴 시간 휴식을 끝내고 능선을 따라 걷는다.
이곳 능선 길은 넓게 잘 나있다.
천마산을 갔다가 천마의집 능선에서 관음봉방향으로 가다가 수진사로 내려선 적이 있는데 그곳도 길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천마산에서 능선을 타고 관음봉을 지나 오남리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잘 나있는 것이다.

<관음봉 오름길은 안전 로프 기초공사가 한창입니다.>
능선을 따라 10여분을 오르니 관음봉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안전을 위해 로프를 설치하기 위해 기초공사가 한창이다.
공사 자재도 한쪽에 쌓아두었고 하다만 공사도 있는데 오늘은 공사를 하지 않는지 인부는 보이지 않는다. 가물어 메말라 먼지가 날리는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서니 조망이 훤하게 열리는 관음봉으로 견성암을 떠난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고 거리는 견성암으로 부터 약1.7km다.
천마산 관음봉에 오르다
누군가는 독정산이라고 부르는 천마산 관음봉이다.

<관음봉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었습니다.>
3~4년전 산행기에는 관음봉 정상에는 스텐레스 스틸로 세운 관음봉 정상표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정상에는 미완성 돌탑이 있고 그 옆으로 삼각정이 있으며 천마산 방향 나뭇가지에 현재의 위치를 알리는 관음봉 입간판이 있는데 입간판에는 관음봉에대해서 ‘이곳은 전망이 좋은 곳으로 가장 멀리 볼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다하여 관음봉이라 불러 온다’라고 써 있으며 현재의 위치를 나타내는 개념도에는 관음봉의 높이를 566m를 기록했지만 휴대폰 GPS는 559m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관음봉에서는 사방 조망이 열린다.

<관음봉에서 본 천마산 정상부입니다.>

<관음봉에서 본 호평시내와 건너편 백봉산입니다.>

<관음봉에서 본 윗독정입구입니다.>

<관음봉에서 본 마치고개입니다.>

<한 낮 관음봉의 풍경입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복동쪽으로 잡목이 자라 철마산과 천마산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며 천마산 우측으로 마치고개와 우측으로 이어지는 백봉산의 능선이 길게 이어지고 그 앞으로 호평 신도시의 아파트가 빼곡이 들어서 있으며 지금은 휴업 중인 스키장이 흉물처럼 보인다.
남쪽 방향으로는 멀리서 보면 관음봉을 나타내는 소나무가 있고 소나무 뒤로는 능선이 이어지며 사릉으로 이어지며 능선 우측으로는 이제껏 지나온 윗독정과 견성암이 있는 계곡이 있으며 멀리 퇴계원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된봉으로 가는 길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며 삼각대를 설치하고 인증사진도 찍으며 제법 긴 시간인 35분을 보낸다.
처음의 계획은 관음봉에서 천마산 방향으로 가다가 수진사로 내려설 계획이었는데 된봉 능선을 따라 길게 걷고 싶은 생각에 진로를 바꾸고 된봉으로 향한다.

<된봉으로 가는 길가 전망대에서 본 호평과 백봉산입니다.>

<백봉으로 가는길은 부드럽고 여유가 있는 길입니다.>

<된봉 전 큰 암봉이 있습니다.>
관음봉에서 된봉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곳도 있지만 좋은 편이며 중간에는 암릉 전망대도 있으며 좌측으로는 호평동이 우측으로는 견성암으로 들어서던 계곡이 계속 이어지며 된봉 직전 멋진 암봉이 있는데 숲에 가려 암봉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암봉을 지나 조금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면 된봉이다.
된봉에 올라
된봉은 주변의 잡목으로 조망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조금 전 머물렀던 관음봉이 보이며 견성암은 숲속에 묻혀 찾을 수가 없다.

<된봉 정상의 풍경입니다.>

<된봉에서 본 관음봉의 모습입니다.>


<된봉에서 인증 사진을 찍었습니다.>
된봉 정상에는 중앙에 삼각점이 있으며 스텐레스 스틸로 세운 정상표시판이 있으며 뒤로 사능길 이정표와 된봉 안내판이 있는데 안내판에 된봉에 대해서는 ‘이곳은 사방 어떤 방면에서 오른다고 해도 되고 힘들게 고개를 넘어야 오를 수 있다하여 옛부터 된봉으로 불리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안내판과 정상표시판에 된봉의 표고를 475m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 측정된 것이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 GPS 측정으로는 436m가 나왔지만 삼각점 안내문에 의하면 430.9m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표시한 표고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관음봉에서 된봉까지는 1.3km이다.
된봉은 딱히 앉아 휴식을 취할만 한 곳도 없어 선채로 사방을 둘러보며 휴식을 취하고 하산을 아느쪽으로 할까 망설인다. 송능리 방면으로 진행하면 사릉역으로 갈 수 있고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면 사릉이라고 하여 사릉방향으로 내려섰다.
가파른 경사지대를 2번이나 내려서 능선을 타고 내려섰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내려서게 되었다.
능선을 내려서니 임도가 나오고 임도를 지나니 잘 다듬어진 묘지가 나오며 호평동이 눈앞에 보인다.
다시 임도로 되돌아가 서쪽 방향으로 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위로 오르니 개화선원인지 하는 사찰이 있었고 사릉으로 가는 길은 없어 졌다.
하는 수없이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고속도로 지하로 나와 하염없이 걸어 호평역으로 왔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사릉역으로 가는 길을 택했는데 아마도 무명봉을 지나 왼쪽으로 급강하 하는 지점에서 직진으로 진행을 했어야 했던 것 같았는데 그 방향으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없었는데 이정표가 없음을 아쉬워하며 잘 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처럼 용두사미 산행을 하게 되었다.
산행기를 마치며 『솔바람 향기』 중 시 한 편을 옮깁니다.

두견새 슬피우는 초여름 날에
두견새 슬피 우는
그윽한 산사에
향내음 가득히
울려 퍼지네
밝은 보름달이
두견이 울음따라
산사의 달빛을
쓸어내리고
동그란
하얀 달이
연못속에
연꽃으로 피었네
두견새가
밤이 으슥하도록
보름달 바라보며
슬피 울고 있네
이 시를 읽으며 주지스님이 초여름 잠못 이루며 연못가에서 외로운 자신을 두견에 비유하며 지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솔바람 향기』시집에는 91편의 시와 37점의 삽화가 들어 있는데 삽화도 주지스님의 그림으로 아주 잘 그렸습니다.

<다음지도로 올립니다.>


<윗독정 종점에서 지난 길을 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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