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재이야기

백제의 숨결, 무령왕릉을 찾다.

범솥말 2023. 11. 30. 10:36

공주 무령왕릉을 찾아서

 

문화재 분류 : 사적 제13호

시대 및 시기 : 백제, 6세기 전반

성격 및 유형 : 능 유적

능주 : 백제 제25대왕 무령왕

능역 : 송산리 고분(백제 무령왕릉과 왕릉원)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웅진동(옛지명 송산리) 319-1 외

방문일 : 2021년10월29일

누구와 : 아들네와 함께

 

 

1971년7월8일 한국일보 조간신문에는 특종이 실렸다.

세상은 이 특종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특종이 뭐길래................

1442년이나 땅속에 묻혀있던 백제왕릉이 발견되었다는 보도였다.

많은 학자나 문화재관련 사람들은 반신반의하였다고 하는데 송산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인 가루베 지온이라고 하는 놈이 고분을 다 파헤쳐 유물들을 일본으로 모두 가져갔으므로 가루베가 파헤친 이삭줍기의 불과하다며 회의적인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1442년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던 무령왕은 우리와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가?

가루베라는 일본 놈이 6호고분을 파헤친 지 39년이 지난 1971년 7월 5일.
이날은 송산리 6호고분 배수로 공사를 하는 날이었다.

고분군에 웬 배수로 공사?

일본 놈, 카루베는 6호고분의 중요한 유물을 모두 도굴하고 벽면 사방에 사신도만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도굴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천장이 훼손돼 물이 스며들었고 여름만 되면 무덤 안과 밖의 기온 차이로 결로가 생겨 벽화인 사신도가 훼손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되었다는데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뭔가 부딪쳤는데 흔하게 바위나 큰 돌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 나타났고 조금씩 파내려가 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나타났다고 한다.
인부들은 서둘러 당시 공사 책임자인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에게 이사실을 알렸다고 하는데 김영배관장은 무령왕릉이 세상 빛을 보던 날 새벽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는데 의아한 생각을 하던 차에 보고를 받은 김관장은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고 흙을 점점 더 파내려가자 벽돌로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나타났고, 다음날까지 흙을 파헤치니 이 구조물이 6호분이 아닌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백제무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김영배관장은 여기서 공사를 중단시키고 서둘러 문화재관리국에 신고를 했고, 보고를 받은 문공부장관은 김원룡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렇고 7월 7일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원들은 벽돌로 쌓은 구조물이 또 다른 전실묘의 입구란 것을 확인했으며 이날 밤 큰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배수구 설치공사를 밤 늦게까지 하고 이튿날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발굴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인 1971년7월8일

인부가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발견하고 3일째 되는 날
어떻게 알았는지 조간신문인 한국일보가 공주에서 왕릉을 발견했다는 특종보도가 터진 것이다.
특종기사를 본 방송국, 신문사 그리고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높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반인과 구경꾼들까지 송산리로 몰려들어 발굴 현장은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는 것이다.

오전 8시쯤부터 인부를 투입해 왕릉 입구로 파내려가기 시작해 오후 3시쯤 무덤 입구가 나타났다.
발굴단은 간단히 위령제를 지낸 뒤 국립박물관장 김원용과 공주박물관장 김영배는 막아놓은 부분의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냈고 그 순간 무덤에서 하얀 수증기가 새어나왔다고 하는데 이 수증기는 1,442년 동안 밀폐상태로 갇혀 있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를 만나 흰 수증기로 변한 것이라는 것이다.

무덤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고 하는데 일본 놈들에 의해 도굴된 고분으로 생각했는데 무덤이 조성된 뒤 한번도 개봉되지 않은 처녀분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좁은 통로로 들어가던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는데 3일전 새벽 꿈에본 돼지같기도 한데 아닌것 같기도하고, 해태같기도 한데 아닌것 같기도 했던 꿈에 달려들던 짐승이 바로 이곳에서 무령왕을 지키고 있었는데 '석수'라고 불리는 돌짐승로 악귀를 막는 무령왕릉의 수호신이라는 것이다.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은 꿈에 달려들던 석수를 보고 놀라고, 김원용 국립박물관장은 지석을 보고 놀랐는데 지석은 왕릉 주인공의 신원과 조성 연도 등을 새긴 돌인데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었지만 그 무덤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유물로 알려준 것은 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발견된 묘지석은 총3개로 무령왕릉의 묘지석과 왕비의 묘지석, 그리고 묘지터를 원래 땅 주인에게 돈을 주고 샀다는 영수증을 대신하는 매지권이었다.

무령왕릉 묘지석 앞면에는

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年 六十二歲癸---영동대장군백제사  마왕년 62세계

卯年五月丙戌朔七  日壬辰崩到乙未年八月---묘년5월병술삭7  일임진붕도을미년8월

癸酉朔十二日甲申安  登冠大墓立志如左---계유삭12일갑신안조  등관대묘입지여좌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풀이하면 

<영동대장군 사마왕께서 계묘년(523년)5월7일 돌아가셨다

을사년8월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아래와 같이 한다.> 이다.

 

묘지석 뒷면에는

십간 십이지를 3방향에 새겼으며 서쪽은 비워두었다.

함께 발견된 왕비의 묘지석에도 신분과 왕비가 죽은  때를 기록하였는데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내용은 이러하다.

<무령왕비 지석 앞면>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還大墓立 

志如左

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비 지석 뒷면>

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不從律令

 1만 매 이상 1. 을사년 8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묘지석인 매지권에는 왕릉을 조성할 땅을 돈을 주고 샀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종의 영수증을 대식하는 돌판이다.

백제시대의 왕은 조선시대보다 왕권이 약했는지 아니면 계급은 상하가 정해져 있어도 계급과 관계없이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공정하게 지키며 행사한 것인지 왕릉 터를 돈을 주고 산 것인데 돌판에는 돈1만문을 주고 신지의 토지를 매입하여 능묘를 만드니 문서를 작성하여 증명한다.는 내용이다.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무령왕릉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왕릉 안으로 들어간지 20분 후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발굴 책임자들을 흥분 상태로 이성을 잃었으며 방송국이나 신문사들은 앞다투어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 했고 아수라장 같은 상황이 지속되자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한 언론사 당 서너컷만 찍기로 약속하고 왕릉안으로 들여보냈다고 하는데 언론사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유물은 훼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같으면 말이 안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모 언론사 취재진은 무덤 안에 함부로 들어가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뒤늦게 도착한 모 신문사 기자는 자기네 회사에 연락을 늦게 해 주었다고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뺨을 때리는 일까지 일어났는가 하면 구경꾼을 통제해야 할 경찰들마저 통제는 뒤로하고 기회를 놓칠세라 무덤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기도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고 한심했던 당시상황을 알 수 있다.

요즘에는 아파트를 짓다가도 오래된 문화재가 나오면 1~2년 아파트 사업을 중단 시키고 문화재 발굴을 우선시 하는데 하물며 1442년 동안 묻혀있던 백제의 왕릉을 발굴하는데 마구잡이로 했으니 한심했던 옛날 행정을 지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이지경이었으니 발굴단은 현장 안쪽에서 긴급 회의를 가진 끝에 사고 방지를 위해 신속하게 발굴을 끝내기로 하고발굴단은 급조된 발전기로 마련한 전등 2개를 갖고 철야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발굴 팀을 2개조로 나눠 한 팀은 왕 쪽을, 다른 팀은 왕비 쪽을 맡아 사진 촬영과 실측을 하며 속전속결로 진행한 결과 밤 10시쯤 마무리됐다고 하니 통탄한 일이 아닌가?

이런 발굴은 바다에서 인양하는 유물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텐데 눈 앞에 있는 유물을 이리도 빠른 시간에 발굴할 수 있었는지? 통이나 자루에 마구 유물을 쓸어담았다는 것인데 몇 달, 아니면 일년 이상의 시간을 가지고 발굴작업을 했어야 했는데 아쉽고 아쉬운 대목이다.
번갯불에 콩볶는것 같은 발굴은 자정쯤부터 유물을 밖으로 반출하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 9시경 바닥 청소까지 끝냈다고 하니 처음 무덤에 들어간 지 17시간만에 모든 조사와 유물 수습을 끝냈다니 중앙박물관장이나 공주박물관장은 뭐하는 사람이며, 문화재에 상식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이 아니다.

기록을 보면 발굴이후의 행동이 가관이란다.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은 이 와중에 중요 유물을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갔고,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은팔찌를 휘어보자 다들 기겁을 했다는 설도 있는데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가져와보라고 지시를 했는지, 아니면 점수 좀 따서 공주박물관장에서 국립박물관장으로 영전을 하기위한 아첨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한심한 행동은 또 있다.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은 청와대로 유물을 가지고 이동할 때 이동편이 고속버스였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당시에도 호송 차량이 있었을 것인데 무슨 이유로? 시간끄는게 아까워 박정희 대통령에게 빨리 보여주려고 그랬는지...........
암튼 김영배 관장은 유물을 갖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가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로 내려왔다고 한다.
벼락치기, 마구잡이 무령왕릉 발굴작업으로 인해 고대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수많은 정보가 영원히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며 발굴 작업에 참가했던 고고학자 조유전 씨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남겼다고 한다.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보도진들의 현장공개 독촉과 공주읍민 등 현장에 몰려든 일반인들의 이상 열기, 경비에 자신이 없었던 공주경찰서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현장의 분위기는 어떤 거대한 힘에 떠밀리듯 통제 범위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준비없이 왕릉 발굴을 하룻밤만에 해치운 일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고.............

(이 글은 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의 글을 바탕으로 편집하여 작성했습니다.)

 

무령왕릉과 고분 전시관과 능 탐방

 

주차장에서 잘 조성된 데크로드를 따라 매표소로 이동합니다.

데크로드길 주변으로는 요즘 한창인 국화로 보기 좋은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꽃길을 따라 3~4분 지나면 멀리 매표소가 보이고 넓은 길 중앙에 석수가 있는데 이 석수가 무령왕릉 무덤 안에서 1442년동안 무령왕을 보호하던 수호신으로 발굴당시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 표현했던 것 처럼 해타같기도 하고, 돼지같기도한 이상하게 생긴 석수입니다.

 

석수를 지나면 매표소가 나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전면 무료로 개방했으므로 매표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예전에는 3.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입장을 했다고 합니다.

매표소 우측으로는 잘 생긴 반송이 있고 반송 우측으로 경사진 내리막으로 내려가면 송산리 고분군 전시관이 있는데 이곳 고분군이나 무령왕릉의 무덤 출입구를 본 떠 만든 입구로 들어갑니다.

물론 이곳을 들어가지 않고 직진으로 올라가면 고분군과 고분군에 함께 있는 무령왕릉으로 직접 올라가도 되는데 무령왕릉에대해 이해도를 넓히려면 전시관으로 들어가서 모형 무덤과 유물들을 보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벽면 좌우로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안내, 설명, 현황, 중국무덤과의 비교, 고분군의 분포, 고분들의 발굴시기, 세계유산으로 등록되기까지의 과정 등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송산리 고분군의 현황에 대한 사진 속 내용을 요약해 봅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기의 대표적인 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고분군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때 도굴과 발굴조사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는데 제대로 된 기록이 없어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현재 공개되고 있는 고분은 6기와 무령왕릉 등, 7개기만 복원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자료에 의하면 30여기가 된다고 합니다.

고분군은 송산 남쪽 자락에 분포되어 있는데 위쪽으로 1~4호분이, 아랫 자락으로 5~6호분이 자리하고 있는데 1~5호분까지는 돌로 쌓아 방을 만든 돌방형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무덤 이라고 합니다.

벽면에 걸려있는 안내문과 설명문을 읽는 사이 일행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행들을 생각해서 카메라 속으로 마구잡이로 집어 넣고 조금 지나자 왕릉이 나타나자 안으로 들어갑니다.

 

1500년 전 무덤안에 현대식 전등이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밝기는 해서 보기는 좋지만 왠지 안 어울린다는 느낌이 드는데 항상 붉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 왔을 때 자동으로 불이 불어오는 시스템이나 아주 희미하게 불을 밝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구운 벽돌로 촘촘하게 벽면을 쌓았고 벽 사방에는 이상한 흙칠 같은 게 있어 의아해 했는데 무덤을 나오면 가까운 곳에 벽면사진과 반을 쪼갠 조형물이 있는데 그제서야 이 무덤이 무령왕릉이 아니고 무덤 안 벽면은 흙이 아닌 그림이라는 것을 늦게서야 알아봅니다.

 

무덤은 6호고분이며 벽면은 사신도로 아주 귀한 벽화였습니다.

당연히 이곳은 모형이지만 6호고본 안에는 백제 무덤 벽화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데 일본놈 가루배가 6호고분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벽화가 있는 무덤안에 습기가 차이고 결로가 생긴다고 하니 귀한우리문화가 훼손될까 걱정입니다.

하긴 6호고분의 습기가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으니 딱히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외부 벽면에 6호고분과 전축분이라는 사진안내판이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6호고분은 1~5호고분의 돌로 쌓은 방과 달리 구운 벽돌로 쌓아서 만든 무덤으로 이양식은 오래전 부터 중국에서 사용하던 방식이라고하며 6호고분의 특징은 돌방무덤에서 벽돌무덤으로 양식이 바뀐점, 무덤 내부 벽면에 사신도 벽화가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면 벽돌 중앙에 등잔을 놓을 수 있는 등감을 양쪽으로 각각3개, 북쪽으로 1개가 설치하고 그위에 가창(가짜 창문)을 만들었으며 사방으로 벽화가 있는데 남쪽으로는 주작(붉은 공작으로 조선시대 궁궐 남문에 그리는데 경복궁 광화문에도 주작이 그려져 있습니다.)과 해와 달이 그려져 있으며 일재강점기 때 발굴하였으므로 유물은 전무하다고 하는데 무령왕릉에서 46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고 하니 이곳에서도 많은 유물이 나왔을 것인데 가루베 지온이라는 놈이 빼돌리고 처음부터 유물이 없었다고 거짓보고를 했는데 죽기전 가루베는 공주인근에서 출토된 도자기라고 팔아먹은 게 많았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분 도둑의 일인자라는 가루베 지온이라는 놈도 국보급인 사신도는 가져갈 수가 없어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다행한 일이며 일본놈들이 우리의 유물을 가져다가 자기네 나라 국보로 삼은 대부분 문화재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백제 제25대 무령왕은

이름은 사마, 융, 여륭이라고 하며 제24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과 이복형제라는 설이 있습니다.

501년 12월 동성왕이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한 후 다음달인 502년정월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의 가림성을 본거지로한 백가 일당을 토벌하였으며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521년에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으며 양 무제(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는데 1971년 무령왕릉의 무덤에서도 묘지석에도 영동대장군이 음각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무령왕으로 23년동안왕으로 군림하다가 죽은 뒤 아들 성왕에 왕위를 이어 받았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무령왕은

무령왕 즉위조는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고 평했다. 그가 즉위했던 501년 무렵 백제는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475년 한성의 함락으로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475~477년)·삼근왕(477~479년)·동성왕(479~501년)이 해구와 백가 등 귀족들의 손에 잇달아 피살된다.

무령왕은 501년 11월 사냥 중에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죽은 동성왕의 뒤를 이었다.

전대 동성왕대에는 가뭄 때문에 백성들이 상식(相食)하는 등(499년) 도탄에 빠졌으나 왕(동성왕)은 구휼을 하지 않은 채 방관했다. 무령왕은 창고를 열어 민심을 잡고(506년) 제방을 쌓아 유식(遊食)하는 자들을 모아 귀농케 했다(510년). 한편으로는 불구대천의 원수국 고구려를 압박하고 중국 양나라, 왜, 신라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무령왕은 519년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稱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즉 이전 고구려에 의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강국이 됐음을 알렸다. 지석에는 무령왕의 죽음을 천자의 죽음을 일컫는 ‘崩’으로 칭했다. 백제의 자존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2004년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무령왕릉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입구 우측으로는 무령왕릉 축조 벽돌의 사진이 있고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벽돌에는 정교하고 모양이 다른 연꽃무늬가 있으며 글씨가 새겨진 벽돌중방, 상방, 하방 등이 있다고 해서 시간을 들여 찾아 보았는데 중방 이외에는 찾을 수 없었는데 어두워서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나온 士任辰年作名(사 임진년 작명)이라고 새겨진 벽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무령왕릉 내부입니다.

6호고분과 형태가 비슷한데 무령왕릉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등잔을 얹을 수 있는 등감은 확실히 구분되며 갖가지 연꽃무늬고 구분할 수 있으며 중방이라는 그씨도 등감 아래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무덤안에 여러가지를 살피느라 시간은 보냈는데 내부 사진을 적게 찍어 조금은 아쉬움이 있네요.

정교하게 설계된 무령왕릉 무덤 구조는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터널형 천정을 하고 전면의 중앙에 무덤에 들어가는 연도(羨道)가 부설되어 있는 철(凸)자형의 전축(塼築) 단실묘(單室墓)이며 원형인 분구(墳丘)의 지름은 약 20m 이며, 현실은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 묘실 규모는 남북 길이 420㎝, 동서 너비 272㎝, 높이 293㎝라고 합니다. 

 

무령왕릉 무덤을 나오면 넓은 광장에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따지고 보면 전부가 국보급입니다.

이중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차후 기록에 나오지만 발굴된 108종 4600여점에 비하면 적은 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 안내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령왕릉에서 발굴한 유물은 108종에 4600여점이 된다고 하니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무령왕의 왕권이 강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6호고분도 무령왕릉과 유사하다는 점으로 볼 때 6호고분에서도 이정도의 유물이 발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모두 일본에 있을 것이니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면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귀한 국보급 유물을 보도록 합니다.

출토유물의 국보지정

1.국보 제154호->왕 금제관장식(금관)---한 쌍으로 순금판 위에 문양을 예리한

출토유물의 국보지정

국보 제162호---무령왕릉 석수

국보 제163호---무령왕릉 묘지석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도 입구에서 동발(銅鉢)과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 지석(誌石) 2매와 오수전 한꾸러미, 석수(石獸) 등이 발견되었으며 현실의 남쪽에는 동발과 청자육이호가 쓰러져 있었으며 관대 위에는 동쪽에 있는 왕의 목관과 서쪽에 있는 왕비의 목관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유물이 겹쳐져 있었고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석수(진묘수)는 출토 당시에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석수는 중국 한대(漢代)이래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무덤내부 앞에 세우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전시관에 전시한 석수의 모형은 원형의 3배 크기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굴 당시 석수의 왼쪽 발이 부러져 있었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무덤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석수를 만들고 나서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렸다고 합니다.

 

출토유물의 국보지정

국보 제163호---무령왕릉 묘지석

 

묘지석 앞면에는

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年 六十二歲癸---영동대장군백제사  마왕년 62세계

卯年五月丙戌朔七  日壬辰崩到乙未年八月---묘년5월병술삭7  일임진붕도을미년8월

癸酉朔十二日甲申安  登冠大墓立志如左---계유삭12일갑신안조  등관대묘입지여좌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풀이하면 

<영동대장군 사마왕께서 계묘년(523년)5월7일 돌아가셨다

을사년8월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아래와 같이 한다.> 입니다.

이렇게 확실항 묘지석이 함께 발굴되면서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출토유물의 국보지정

국보 제154호---무령왕 금제관 장식

국보 제159호---무령왕 금제 뒷꽂이

국보 제156호---무령왕 금제 귀걸이

국보 제158호---무령왕비 금제 아홉마디 목걸이, 일곱마디 목걸이

출토유물의 국보지정

국보 제155호---무령왕비 금제관 장식

국보 제157호---무령왕비 금제 귀걸이

국보 제160호---무령왕비 다리작명 은제 팔찌

출토유물의 국보지정

국보 제161호---무령왕릉 청동거울

출토유물의 국보지정

국보 제164호---무령왕 나무 머리받침

 

무령왕 무덤에서 4600여정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당시에는 마구잡이식으로  1973년 문화재관리국 이름으로 나온 발굴보고서는 2000점이 넘는 유물을 외양만 정리된 단계였다고 하는데 지난 2005년과 2006년에서야 상세한 내용의 출토유물 분석 보고서가 비로소 나왔다고 합니다.

이에 따르면 중요 장신구로는 왕이 소지한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金製冠飾) 1쌍(국보 154호), 금귀걸이[金製耳飾]1쌍(국보 156호), 금제 뒤꽂이[金製釵]1점(국보 159호), 은제과대 외 요패 1벌, 금동식리 1쌍, 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와 금은제도자(金銀製刀子) 각 1점, 발받침[足座] 1점(국보 165호) 등과 왕비가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국보 155호), 금귀걸이 2쌍(국보 157호), 금목걸이[金製頸飾]2개(국보 158호), 은팔찌[銀製釧]1쌍(국보 160호), 금팔찌 1쌍, 금은장도자(金銀裝刀子) 2개, 금동식리 1쌍, 베개[頭枕]1점(국보 164호)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지석 2매(국보 163호) 청동제품으로 신수문경(神獸文鏡)·의자손명수대문경(宜子孫銘 獸帶文鏡)·수대문경(獸帶文鏡: 이상 국보 161호) 등의 각종 거울과 청동제 접시형 용기, 청동완, 청동개, 수저, 젓가락, 다리미 등이 있고, 기타 도자제품으로서 등잔이 있는데 이 가운데 1974년 7월 9일에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목 17건에 이른다고 합니다.

 

유물전시관을 보고 미로같은 내부를 이리 저리 빠지면 출구가 나옵니다.

전시관 안에 있으면서 집중해서 감상하다가 1500년 전 백제시대에서 현제로 되돌아 온 기분입니다.

전시관 밖으로 나오면 바닥에 석수문양을 한 동판이 박혀있는데 진묘수가 국보162호로 등록되어 있다고..... 반가운 일입니다.

진묘수 역할을 한다는 석수문양은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길에도 있었는데 이렇습니다.

 

고분군 전시관을 나오면 약간 오르막에 계단이 나오는데 이런게 장애인에게는 치명적이지요.

오늘 일행 중 며느리가 일정기간 장애인이 되어 있어 아들이 휠체어를 밀고 매표소 옆으로 크게 한바퀴를 돌아서 계단 위에서 만나야 했으니 건강한 사람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장애인을 불편하네요.

가족 중에 장애인이 없어 무심코 그냥 지나치던 계단길을 오늘 이런 번거로움을 치르다 보니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고 건강이 새삼 큰 재산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웁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본 것은 무덤속이 아니고 무덤 안을 원래와 같이 조성한 가상 무덤있습니다.

밖으로 나왔으니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의 실체를 봐야지요.

이곳 안내판 뒤가 바로 고분군이며 무령왕릉 능입니다.

 

무령왕릉은 5호고분과 6호고분과 아주 인접한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일본놈들이 10여년동안 이곳을 이 잡듯 뒤졌는데 5~6호 고분 바로 옆에 있는 무령왕릉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

따지고 보면 이상할것이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다른 고분군들은 피장자가 눈군지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무령왕릉보다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볼 때 보이지 않은 강한 힘이 일본놈들의 눈을 재대로 볼 수 없게 억제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를 위한 수호신이 발동했는가 하면 무령왕릉안에 있던 진묘수라는 석수가 쪽바리들에게 무령왕의 실체를 밝혀주지 않았을 겁니다.

또한 지금은 무령왕릉의 봉분(능상)이 젖가슴처럼 볼록하게 솟아 있지만 당시에는 70~80된 할머니 젖가슴처럼 있는 둥 없는 둥 밋밋했으므로 어떤 곳이 무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음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기록에는 무령왕릉을 제외한 6기의 고분을 도굴했다고 했지만 일본놈들이 이곳 송산리 고분을 파헤친 건 약30기에 해당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각각의 나라 마다 가치 있는 문화재를 국보라고 이름을 붙이거나 아니면 보물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보나 보물의 관리는 아무래도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일본과 흡사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놈들은 우리나라에서 훔쳐간 문화재를 마치 즈덜 나라에서 만든 것처럼 우겨대고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일제 강점기나 임진왜란을 통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왕릉이나 고분, 그리고 사찰의 복장이나 탑 등에 있는 많은 문화재를 약탈 또는 훔쳐갔으면서 우리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들 것이라고 우겨대고 있잖아요.

아주 최근의 일로 서산 부석사 복장유물이었던 금동관세음보살상은 소재가 분명히 서산 부석사라고 확인되었는데도 자꾸만 돌려달라고 우기고 있는데 아마도 세계에서 말도 안되 게 우기는 나라를 꼽는다면 일본이 1등을 할것 같습니다.

독도의 사례를 비춰보면 금방 답이 나오잖아요.

암튼 불행중 다행으로 무령왕께서는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많은 학자들에게 백제문화의 실상을 전해주시고 밝혀지지 않은 백제역사의 개선장군 같은 존재로 다시 우리곁에 오셨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무령왕릉에서 포잔된 길을 따라가는 곳에는 길 바닥에 국보제162호로 지정된 무령왕릉을 지키던 진묘수라는 석수가 길 안내를 맡고 있습니다.

석수의 길안내를 따라 약100m오르면 1~4호 고분이 나오는데 이곳이 송산의 거의 정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난 길로가면 정지산 유적지가 나온다고 하는데 오늘은 정지산 유적지는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습니다.

 

무령왕릉과 같이 송산리 1~4호 고분군도 도로에서 입구만 볼 수 있고 내부는 영원히 비공개입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우리 백제 문화재는 지금도 일본놈들에 의해 일본 이름표를 달고 일본 국립박물관에서 억울함을 곱씹으며 있을 것입니다.

오래전 손기정 선생님과 신윤복 선생님께서 일본의 이름으로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손기정 선생님과 신윤복선생님께서는 입이 있어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할수 있었지만 문화재는 입이 없으니 우리가 백제의 혼이 숨쉬고 있는 우리 문화재라는 것을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무령왕릉과 고분군을 돌아보고 길을 따라 내려서면 송산리 고분군 발굴조사 이야기라는입간판이 나오고 세계유산 입석이 연이어 나오는데 송산리 고분군 발굴조사 이야기 내용을 보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송산리고분군 발굴조사 이야기

송산리고분 발자취

백제 웅진기---왕실묘역으로 조성

1927년---일본놈, 가루베지온 이라는 놈에 의해 일본 총독부에서 1호.2호.5호분 조사(조사가 아니라 도둑질이 맞은 듯)

1932~33년---참과로 개설 중 5호~8호분 발견, 가루베에 의해 5호,7호,8호분 조사, 조선총독부에 의해 6호,29호분 조사

1963년---사적등재

1971년---무령왕릉 발굴 조사, 5,6호분 배수로 공사중 발견, 무령왕릉 조사단이 4치례에 걸쳐조사

1988년---방단형 적석 유구 발견, 지하 물리탐사 결과를 근거로 시굴조사 실시, A, D지구에서 방단형 적석유구 발견

2015년---유네스코 셰계유산 등재, 백제역사 유적지구로 세계유산 등재

2018년---A, D지구 재발굴 조사, 조사전 현황 파악을 위한 지하투시 레이더탐사, 전자기파로 지하의 구조물 파악

               A,D지구 유구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재조사->제의 또는 무덤으로 추정

2019~2020년---송산리 고분군 정밀탐사 *고지형 분석, 라이다측정 (라이다 측정, 항공레이져측정, 레이져를 주사하여 3                              차원현황파악, *전기비저항탐사 실시(지하 구성물질의 전기 전도치를 측정하여 지하 구조물 파악)

                       *현장(지표)조사 실시 *고분 약60여기가 추가로 존재할 가능성 확인

아~

아직까지 희망이 큽니다.

일본놈들이 다 도굴했는지 알았는데 레이져 주사로 지하탐사를 하니 약60여개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있다고하니 반가운 일입니다.

우리는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의 흥분과 감격을 다시 맛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고분이 발견된다면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정밀 발굴하면 많은 문화재의 훼손이 최소화한 상태로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을 같습니다.

 

안내판을 지나면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백제역사 유적지구 입석이 나옵니다.

입석 조금 전 3거리에서 나갈 방향을 정하는데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가던지 아니면 입석이 있는 길로 나가던지......

어느 방향으로 가던지 주차장으로 가는데 거리는 비슷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로 들어섭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나 지나가는 길이 어쩌면 고분을 밟고 지나 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1930년대에 오늘날 처럼 전자기파를 통해 지하 물질을 탐사하는 기술이 있었다면 일본놈들은 이곳을 마구 쑤셨을 턴데 과학의 발달이 늦는 것에도 도움이 되고 고마운 부분이 있습니다.

입석을 지나 3~4분 내려가면 우측으로 건축물이 나옵니다.

이건 모야~

이곳이 덕숭전이라고 하여 사당과 비슷한 것인데 왕실 능이니 사당보다는 격이 높겠지요,

그러니까 조선시대 태묘, 그러니까 종묘의 정전이나 영녕전과 같은 의미로 웅진기 때 백제를 통치했던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그리고 무령왕과 성왕의 위패를 모신곳으로 숭덕전은 백제 왕실의 유일한 공식적인 추모공간입니다.

이곳 숭덕전은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2015년 착공하여 3년동안 공사 끝에 2주년이 되는 2017년에 건립된 곳으로 매년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첫날 이곳에서 웅진백제대왕 추모제가 열리고 있는 곳입니다.

덕숭전를 담장 너머로 보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주차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