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장릉 탐방이야기
언제 : 2026년5월3일
누구와: 우리 부부와 권태욱, 김정숙 부부

오늘은 처남네와 외식을 하기로 합니다.
전에 갔었던 서오릉 산책코스를 돌고 근처에서 식사를 하려고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처남네는 오늘 오전에 이미 서오릉을 다녀왔다고 하니 같은 곳을 또 다시 가는 것도 모양새가 안좋아 다른 곳을 생각하다가 장릉을 생각해봅니다.
장릉이라는 능은 3곳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장릉(莊陵)으로 장중할 壯(장), 언덕 陵(능)을 쓰는 능입니다.
최근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가 우리나라 영화사상 제일 많은 관객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단종과 수양대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단종은 영월로 유배된 뒤에 사약을 받게 되며 영월땅에 묻히게 됩니다.
삼촌인 세조,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주고 영월땅에 묻힌 조선 제7대왕이었던 단종의 장릉입니다.
두 번째는 장릉 (長陵)으로 긴 長, 언덕 陵(능)을 쓰는 능입니다.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의 장릉으로 일반적으로 파주장릉이라고 부릅니다.
파주 장릉은 1636년 왕후릉이 파주시 문산읍 운천2리에 조성되었습니다.
1649년 인조가죽으면서 왕후와 합장능으로 조성하였으나 풍수 관련 문제와 석물들이 벌어지고 뱀과 벌레들이 나온다는 핑계로 1731년 현재의 자리로 천릉하였습니다.
위 단종은 삼촌인 세조에게 왕위를 내주었지만 조카의 왕위를 빼았은 것이나 다를바 없었던 이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광해왕으로부터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된 사람입니다.
역사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데 필자는 인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편입니다.
세 번째는 장릉(章陵)으로 글 章(장), 언덕 陵(능)을 쓰는 능입니다.
3곳의 장릉 가운데 위 2곳의 능은 왕을 지낸 사람의 능인 반면 3번 째 소개하는 장릉은 왕을 지내지 않은 왕릉입니다.
왕을 지내지 않은 왕의 능이 있다? 궁금합니다.
바로 김포장능이 이번에 가본 능으로 소개할 능입니다.

장릉(章陵)은 제16대 왕인 인조의 부모인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입니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죽어서 남양주시 금곡동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혔습니다.
이후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광해왕 때 무력으로 궁궐을 침범해 광해왕을 하야시키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곧 인조입니다.
능양군이 왕이 되자 이미 죽은 아버지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으로, 부인 구씨는 연주부부인이 되면서 계운궁이라는 궁 칭호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묘호가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일반 묘로 불리던 것을 원으로 승격되면서 흥경원으로 불렸으며 이후 원종의 무덤은 금곡에서 현재의 자리인 김포로 옮겨지면서 장릉이 되었습니다.
죽은 후에 왕으로 주존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같으나 살아서 화병으로 40세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정원군과 능양군의 얘기는 이러합니다.
광해왕의 아버지는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이고, 정원군의 아버지도 선조입니다.
그러니까 광해왕과 정원군은 이복 형제간입니다.
광해군이 왕이 되자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죽게 됩니다.
이후 2년이 지나서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기가 서린다는 상소를 받고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궁궐을 세우게 되니 경희궁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능양군은 동생이 광해왕에게 죽고, 집터는 경희궁으로 바뀌고,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자 자기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냅니다.
정원군이 화병으로 죽고 4년이 지나 능양군은 무력으로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광해왕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됩니다.
능양군이 조선 제16대 왕으로 인조로 신분이 바뀌면서 인조의 엄마인 구씨(인헌왕후)는 아들이 왕이 되자 남편의 한을 풀듯 빼앗긴 새문동 집터(경덕궁)로 되돌아가 4년을 살다가 숨을 거둡니다.

개인택시를 하는 처남이 집앞에 차를 대니 처남네 차로 김포로 이동합니다.
전에 한 번 왔다간 적이 있는 장릉인데 당시 권상주씨가 종묘에서 이곳 장릉으로 발령을 방아 후배 경찬이와 함께 찾았던 곳입니다.
김포 장릉 안내판입니다.
주차장에서 내려 정문으로 가는 옆에 있는데 안내판에서는 사진과 같이 능침, 탐방로, 재실, 연목, 매표소 등으로 구분하었고 좌측에는 김포장릉에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고 우측에는 김포장릉을 영문으로 설명합니다.

매표소입니다.
우리나라는 문화재에대해 너무나 후합편입니다.
이곳 김포장릉은 입장료가 1000원입니다.
이곳뿐이 아니고 조선왕릉은 모두 1000원이고 종묘도 1000원이고 사직단은 무료입장이며 창경궁과 덕수궁도 1000원이고 창덕궁과 경복궁은 3000원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보면 태국왕궁에 들어갈 떼 입장료가 0000년도에 000를 냈는데 우리나라는 너무 파격적인것 같이 생각됩니다.
오래전 유홍준이라는 분이 문화재청장으로 있을 때 문화재 입장료를 올리려고 한적이 있었답니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종ㅁㅅ, 덕수궁, 창경궁은 10.000원, 경복궁, 창덕궁은 30.000원인가?
저는 찬성입니다.
이정도는 되어야 문화재를 소중히 알 수 있고 귀히 여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정문에서 도로를 따라 들어오면 Y형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길로 들어서는 곳이 능침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측으로 한동안 들어가면 능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아주 좁은 금천을 지나는데 금천 위에는 작고 좁은 금천교가 있는데 이는 모두 왕릉의 형식을 갖추기 위함입니다.
홍살문이 나타납니다.
홍살문을 기해 중요한 공간이 구분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지나온 곳은 산자들의 공간이라면 홍살문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죽은자들의 공간이 되는 셈입니다.


홍살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돌로 만든 4각형의 단이 있는데 이를 배위또는 판위라고 부릅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배위는 이곳을 찾는 왕이 이곳에 올라가 절을 4번 하고 능침으로 가게되는데 일종의 선왕에 대한 신고를 하는 곳이라고 보면 맞겠습니다.
배위에서 신고를 마친 왕은 참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입니다.
일반적으로 궁궐에 가면 참도는 3도로 되어 있어 중앙 높은 곳으로 가게되는데 능에서 왕은 죽은 자 아래사람으로 우측 낮은 길로 가야합니다.
좌측 높은 길은 누가 가나?
제향 때 축문을 가지고 가는 길입니다.
대부분의 능을 가면 경사가 있어도 밋밋하거나 평지를 이루는데 이곳 장릉은 홍살문과 정자각의 경사가 심해 오르막으로 이어지며 다른 능에는 없는 계단도 있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원래 정원군은 왕이 아니었고 아들이 왕이 되면서 육경원이라고 하여 원으로 조성했던 곳입니다.

정자각으로 이동합니다.
능에서 제를 올리는 건물을 정자각이라고 부르는데 한문으로 고무래 丁자 형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여 정자각이라고 하는데 영어문자로 따지면 T형태입니다.
검눌은 하니지면 부르는 건 2가지로 불리는데 앞쪽 지붕은 있지만 벽이 없는 부분과 뒤쪽 횡으로 있으면서 벽면이 있는 부분이 있는데 하나의 건물이지만 각각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습니다.
앞에 벽면이 없는 곳을 배위청이라고 부르며 배위청은 왕에게 제를 지내는 준비를 하고, 비가 올 때는 제관들이 비를 피하는 곳입니다.
뒤쪽 벽면이 있는 곳은 정전이라고 부르며 왕에게 제를 올리는 공간으로 정전 뒷문을 열면 정전에서 능침이 정면으로 보이게 지어진 집입니다.


정자각에서 오른쪽을 보면 작은 건물이 보입니다.
이곳은 비각이라고 하며 비각 안에는 능 표석이 있는데 능 표석에는 이곳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새긴 비가 있는 곳입니다.
비각 앞에는 비문의 글과 글을 쓴 사람등을 기록한 안내판이 있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릉 비각 안에 있는 표석의 비문의 전면과 후면을 우리말로 기록하고 해석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각 옆에는 육경원 비각 받침돌이라는 안내문이 있고 비석을 받치고 있던 기단석이 있습니다.
이곳은 왕으로 추존되기 이전 육경원이라는 원으로 있다가 추존으로 왕릉이 된 곳으로 육경원이었을 때 세웠던 비석을 땅에 묻고 새로운 돌로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육경원이었을 때 비석과 비석을 받쳤던 토대를 땅에 묻었던 것을 2007년9월18일 받침 토대를 발견해 비각 옆에 전시한 것이며 비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일반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이곳까지 입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능침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었는데 이제는 올라갈 수가 없고 아래서 능침을 봅니다.
작년엔가 이곳 장릉이 한동안 메스컴을 탄 적이 있었습니다.
장릉 앞쪽에 아파트를 지어 문화재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인데 일정한 높이까지 지어야 하는데 제한된 이상으로 아파트 층 수를 높게 지어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상층부를 잘라내야한다고 하고 김포시에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문화재청이나 김포시나 참으로 한심한 놈들이지, 건축허가를 내줄 때 문화재청과 제대로 상의 하지 않고 건축허가를 내준 꼴인가 봅니다.
그래서 정자각 근처에서 앞쪽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아파트는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데 무슨 소란을 떨었냐고 물으니 능침으로 올라가야 아파트가 보인다고 하네요.


능침을 멀리서 보고 정자각에서 홍살문을 통해 밖으로 나옵니다.
홍살문 우측으로 탐방로가 보입니다.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 호젓하게 숲속을 걸으며 돌아서 내려온 곳이 큰 연못이 있는 아래쪽입니다.
아직 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꽃잎들만 연못위 수면에 널려 있는데 아름답게 보이는데 집사람은 지저분 하다고 하니 서로 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나 봅니다.
연못을 배경으로 남매가 추억의 사진은 만들어 봅니다.


연못을 한바퀴 돌아 숲속길을 걸어 올라가니 좌측으로 제각이 나타납니다.


제각은 제향 때 제수용품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 장릉은 사무실을 따로 짓지 않고 이곳을 사무실로 써왔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재실을 관리사무소로 쓰고 있는지?. 아니면 사무실을 따로 지어 재실은 제향 준비의 공간으로 쓰고 있는지?
매표소를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니 꽉 찼던 주차장은 모두들 갔는지 텅빈채입니다.
이제 어디로 가서 식사를 하는지.................

아래 사진은 2013년10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육경원에서 왕릉으로 변경되었지만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은 쌍릉이며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을 설치했습니다.

2계와 3계에는 문·무인석을 한 쌍씩 세웠으며 석호는 앉아 있지만 석마, 석양은 일반 석물과는 달리 배 부분이 막혀 있지 않아 배가 보입니다.

팔각 장명등에는 꽃무늬를 화려하게 새겼습니다.

봉분은 자연과 맞닿은 부분에 아무런 조각이나 무늬도 새기지 않은 초석을 둘렀습니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장릉 앞을 가로막게 아파트를 지었다는 뉴스를 여러번 접했는데 예전에 지은 아파트로 일부 보이고 있는데 문화재청이나 김포시청에서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주석이라고 합니다.
이곳 혼백이 나들이 갔다가 능으로 올 때 이 망주석을 보고 찾아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문패같은 것 입니다.



장명등에서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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