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산행기
산행일시: 2013년12월14일
누구와: 기분 좋은 산행 팀과 집사람과 나
산행거리: 약 ㎞
산행시간: 약3시간55분(11:37~15:30)
산행코스:산성고개(11:37)-금정산성동문(11:43)-제3망루(12:20)-제4망루(12:42)-의상봉(12:47,641m)-원효봉(13:26;687m)-산성북문(13:40)-금정산정상(고당봉-14:10,801m)-고당봉에서13분체류-금샘(14:40)-산성북문(14:50)-범어사(15:13)-범어사주차장(15:30)
금정산은?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으로 주봉인 고당봉(801m)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 그리고 남으로 상계봉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그 사이 원효봉, 의상봉, 대륙봉, 파류봉 등 많은 암봉들과 나비바위, 부채바위 등 천구만별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명산이라고 한다.
금정산이라는 이름은 전설에 의하면 산마루에 우물이 있어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구만별의 풍경>
<금샘과 금정산설길 풍경>
산림청에서 지정한 명산100산을 돌아보기 시작한 지도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답인 산이 그런대로 조금 남아 있어 마음은 늘 100산에 있지만 산행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혼자 찾아보고자 몇몇의 산은 가보았지만 아직 미답인 산들은 서울에서 먼 거리에 있으므로 혼자 찾기도 만만치 않은 점도 있다.
지난여름 명산 답사를 늦게 시작한 친구가 호남의 산들과 부산의 천성산과 금정산을 다녀 온 적이 있어 더욱 더 가고픈 생각이 있던 차 『등산클럽 기분 좋은 산행』에서 부산의 금정산을 올려 연가를 내어 집사람과 동행하였다.
금정산의 금정산성은 서울의 한양성곽과 성곽의 둘레가 비슷하다.
서울성곽이 18.62km이고 부산의 금정산성은 18.84km로 아주 비슷한데 한양성은 넓은 원을 그리고 있는 반면 금정산성은 긴 타원형의 형태로 축조되었다.
산성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하다.
5시간을 달려 도착한금정산 산성고개
무척이나 지루함 끝에 도착해서인지 버스에서 내리는 회원들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하게 움직인다.
차도 우측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5분을 오르니 금정산성 동문 앞이다.
<산행을 시작하며>
금정산성의 기원은 확실치가 않은데 왜구의 침략이 심했던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문헌상의 기록은 현종 때 이며 현재의 성은 숙종 때인 1703년에 쌓았다고 하는데 숙종은 임진왜란의 아픔을 되새기며 전국 곳곳의 성을 수리하거나 축성하기도 하였는데 현존하고 있는 서울성곽도 숙종 때 수리하며 쌓은 것이기도 하다.
금정산 주능선 해발 415m지점에 세운 동문은 금정산성의 주 관문으로 동서남북 4개의 관문이 있는데 동문과 서문은 홍예문으로 지어졌고 남문과 북문은 사각 석문으로 축조된 것이 이채로운데 현재의 동문은 1972년에 재건한 건축물로 재건의 기록은 동래부사 정현덕이 재임시절인 1870년 전후로 기록이 전해지는데 재건할 때 이러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금정산성의 동문>
동래부사 정현덕은 동문과 서문을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석공은 수소문해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는데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정교하고 뛰어나 스승보다 먼저 성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스승은 제자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사람들은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이들은 기술을 합쳐 밀양의 영남루를 공사하였다고 전한다.
서울의 성문들이나 북한산성의 성문들은 현판이 달려있는데 이곳 금정산성은 동서남북 4대문 모두 현판을 달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현판이 없었는지 재건하며 고증을 거치지 못해 달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지 않은 미완성 같아 보기에 좋지는 않다.
집사람과 사진을 찍으며 동문을 카메라에 담고 동문을 들어서 산성안으로 들어서며 성곽산행이 시작된다.
<금전산성의 억새길>
서울 한양성도 그러하듯이 금정산성도 성곽을 따라 산행을 하는데 대부분 길이 좋은 편이다.
동문을 들어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길은 소나무 숲을 지나며 억새가 나 있는 성곽길을 따라 이어진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길을 따라 꼬박 20분을 올라 처음으로 전망암에 서면서 금정산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전망암 앞에 펼쳐진 풍경은 답답했던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한 느낌으로 가야할 방향으로 3개의 능선이 보이는데 능선마다 암봉들이 여기저기 보였는데 보기에 좋았다.
제3망루로 가는 길
전망암에서 지체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선두는 이미 멀리 가버렸는데 집사람 때문에 빨리 갈 수도 없는 입장이지만 이러한 사정을 아는 집사람도 땀을 흘리며 열심을 다한다.
20여 년 전 산을 처음 다닐 때는 집사람과 늘 함께 산행을 했는데 이제는 집사람이 몸도 안 좋아 큰 산을 다닐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헌자서 산을 다닌 지도 10년은 되는듯한데 이번 산행은 거리도 짧고 큰 오름이 없어 몇 년 만에 함께 산행에 나선 것이다.
전망암을 내려서 억새가 있는 성곽길을 따라 가는 길은 우측으로 기암들의 집하장처럼 많은 바위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첫 전망암에서 바라 본 풍경>
약간 오르막길은 억새들이 무성했는데 억새와 바위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다.
등산로 우측으로 큰 기암이 2곳이 있는데 도면을 확인하니 나비바위인 것 같았는데 바위의 생김이 나비가 날개를 편 것 같은 형상으로 이름 붙은 이 바위는 제3망루 입구에서 망루를 지키는 수호바위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제3망루의 수호를 담당한다는 나비바위>
망루 갈림길에서 미쳐 망루를 보지 못한 채 능선을 올라보니 망루의 지붕이보이고 망루를 둘러싼 기암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다시 내려서 망루로 간다.
금정산성에는 망루가 4곳이 있는데 남문 주변에 2곳이 있으며 동문과 의상봉 사이에 2곳이 있다.
<금정산성의 제3망루>
금정산성의 제3망루는 암반이 솟아 오른 절벽위에 절묘하게 얹혀있듯 자리 잡고 있는데 망루 아래쪽으로는 회동저수지와 부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며 시가지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데 스모그로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바다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지나오던 길에 누군가 뒤로 보이는 다리가 광안대교라하여 우측을 보니 희미하게 다리가 보이고 그렇다면 다리 좌측으로 높게 보이는 건물들이 해운대의 고층아파트 밀집지역이고.... 오륙도는 아무리 보려 해도 멀게 느껴져 보이지 않는다.
<부채바위와 의상봉과 천구만별>
제3망루 좌측으로 열리는 세상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바위군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바위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천구만별이라하여 천 마리의 거북과 만 마리의 자라의 모습을 한 바위들로 표현하고 있으니 천 마리의 거북과 만 마리의 자라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 경관은 상상을 초월한다.
제3망루를 돌아보는 사이 집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한동안을 갔을 것으로 3망루를 뒤로 하고 집사람을 쫒는다.
제4망루로 가는 길
3망루를 벗어나 오르막을 오르니 구릉 너머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3망루에서 보았던 풍경과 다른 새로운 이미지의 세상이 열린다.
<제4망루로 가는 성곽>
용이 움직이는 듯한 곡선을 그리며 나있는 성곽을 따라 등산로와 목책과 한 줄기의 억새가 정비례하여 나 있으며 성곽 우측으로 펼쳐지는 동자바위의 위세와 동자바위 너머로 펼쳐지는 천 마리의 거북과 만 마리의 자라 형상의 바위들과 그 뒤로 우뚝 선 의상봉과 금정산과 어울리지 않게 덩치가 큰 무명봉이 위압적이며 자연스런 곡선위에 날렵하게 자리 잡은 제4망루의 모습이 보인다.
<부채를 펼쳐 놓은 것 같다는 부채바위>
<동자바위인데 바위위에 소나무가 이색적이다.>
집사람은 동자바위를 지나 무명바위들이 있는 곳을 지나 제4망루 오름길을 오르고 있다.
빨리 따라 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으나 주변의 바위들과 우측 옆 부채바위가 발길을 잡는다,
부채바위는 거대한 부채살을 펼쳐놓은 모습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나 부채가 주는 시원스러운 이미지나 선입견 보다는 수없이 이어지는 직벽과 수 십 길 넘는 암장이 주는 이미지는 부채와는 달리 준엄하고 경직된 위압 그 자체이지만 직벽이나 암장 주변의 아기자기한 바위군의 모습은 마치 조각가가 정성들여 빚어 놓은 듯한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 하겠다.
부채바위를 지나면 성곽에 붙어 있는 동자바위가 있는데 왜 동자바위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어떠한 유래나 전설을 품고 있는지 아무런 설명이나 자료를 찾을 수 없었는데 동자바위에 대한 안내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으며 동자바위 위에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소나무가 인상적이기도 했다.
<무명암---이렇게 잘 생겼는데도 이름도 얻자 못했다>
<원시 그대로의 산성 모습>
<왼쪽 의상봉과 천구만별의 풍경>
오늘날 의상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는 옛날에는 두개의 봉우리로 불렸다고 한다.
제일 높은 왼쪽이 호(虎)봉 오른쪽이 용(龍)봉으로 합쳐 용호봉(龍虎峰)이라고 불렀다고하는데 언젠가 부터 용호봉이라는 봉우리 이름은 사라지고 호봉은 의상봉으로, 용봉은 자체 이름은 없고 주변의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어루러 천마리의 거북과 만마리의 자라를 뜻하는 천구만별이라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동자바위를 지나면 등산로 우측으로 깔끔하면서 보기 좋은 2개의 무명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또한 멋을 듬뿍 담고 있었다.
무명바위를 지나 오르막길 위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데 오르막을 오르는 우측으로는 의상봉 아래 길게 늘어선 무명봉을 디테일하게 볼 수 있는 위치이므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또 다시 황홀경에 빠져 카메라에 담기가 바쁘다.
빨리 오라는 성화에 빠른 걸음으로 합류했는데 아주 오랜만에 함께하는 산행이 힘은 들어도 즐거운 모습이다.
<뒤 돌아 본 길---길게 늘어선 부채바위>
<제4망루를 배경으로>
오르막을 올라서면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데 가고자 하는 제4망루가 바로 앞에 있다.
제4 망루에서는 사방의 조망이 뛰어 나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이곳을 오면서 사방을 조망했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망루에 올라가 조망하는 것 보다 성곽 주변에서 조망을 하는 것이 시야가 넓으므로 망루에 오르는 사람들도 거의 없으며 오른다 해도 잠시 사진을 찍고 내려올 뿐이다.
의상봉이야기
제4망루에서 북쪽으로 보면 높게 솟은 암석 봉우리가 있는데 이 봉우리가 의상봉이다.
<제4망루 뒤로 의상봉과 무명봉>
<의상봉을 배경으로>
4망루에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데 몇 년 전 어느 산행기를 보면 망루와 의상봉 중간에 산불감시초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산불감시초소가 없어지고 임시 비 가림 천막에 간단한 소방장비가 있고 감시원은 밖에 나와 있었는데 마네킹처럼 사람들이 오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동의 자세로 있을 뿐이다.
보기에 아찔한 의상봉 위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는데 가까이 접근해 보니 의상봉을 오르는 구간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는데 염려스러운 것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므로 모자가 바람에 날아갈까 오래 있을 수 없었으며 발아래 펼쳐지는 무명봉은 옆부분을 볼 때와 달리 수많은 돌과 바위가 운집한 대형 돌무더기 같이 보였는데 아마도 부산의 크라이머들이 수시로 찾는 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의상봉을 오르는 입구에 안내표지판에 의하면 의상봉에 대한 전설이 나오는데 이러하다.
<산불감시원과 의상봉>
전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금정산 산신령 호랑이가 나타나 승천을 저지하기 위해 한참 격렬한 몸싸움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승부가 되어 두 봉우리로 변해 위쪽에는 용을 저지하는 형상의 호봉(虎峰)이 되고, 아래쪽에는 용을 닮은 용봉(龍鳳)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봉우리를 합쳐 용호봉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1970년대 산악인들이 의상봉이라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개탄을 하였는데 전설에 의해 내려오는 용호봉을 무슨 이유로 의상봉으로 바꾸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산들을 다니다 보면 이름 있는 명산의 봉우리는 대부분 불교식이름이거나 의상이나 원효 같은 도승의 이름을 딴 봉우리로 산은 산이고 불교는 불교일 것인데 불교식 봉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싫다.
이곳 의상봉도 전설속의 용호봉으로 다시 되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상봉에서 본 무명봉과 부산시내>
의상봉에서의 조망도 매우 뛰어난데 지나온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고 제4망루와 제3망루가 가깝게 보이고 3망루 앞 부채방의 위용도 고스란히 나타나며 멀리 해운대 고층건물과 해운대 앞 바다도 희미하게 들어온다.
원효봉으로 가는 길
의상봉을 내려서면 가야할 성곽이 힘찬 용의 트림하듯 자연스럽게 휘면서 한동안을 내려섰다 다시 오름을 시작하며 주변으로 색 바랜 억새가 노랗게 수를 놓는다.
성곽을 따라 조금을 내려서 뒤돌아보니 의상봉에는 뒤따라 온 우리팀 일원이 혼자 의상봉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조금을 더 내려와 성곽을 따라 가며 우측으로 펼쳐지는 무명봉의 위용은 실로 대단하다.
<성곽길과 원효봉>
<성곽 주변의 풍경>
<지나온 성곽길과 의상봉 그리고 무명봉>
설악의 한 부분인양 만물상의 한 부분인양 갖가지 형상을 하고 오가는 산님들의 시선을 온갖 다 받으며 감탄과 찬사를 받은 아름다움의 극치인 봉우리가 무명봉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금정산의 봉우리 이름을 붙였다는 사람들은 어떠한 이유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과 이름이 필요 없다 해서 무명봉이라 이름붙인 것은 아닌지?.............
의상봉에서 원효봉은 서로 마주보고 있어 그리 멀지않은데 봉과 봉 사이 한참을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야 하는데 여타의 산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평지길이나 다름이 없다,
성곽을 따라 오르는 길에 길가 옆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오르는 길가에는 목판 안내판이 있었는데 김유신의 솔바위라고 하는데 어떠한 바위를 특정한 것이 아니어서 솔바위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나온 성곽길---솔바위는 아마도 중간 소나무가 있는 바위?>
솔바위 안내판이 있는 곳을 지나 수분을 가면 민대머리처럼 밋밋한 곳이 원효봉이다.
원효봉은 금정산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제일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는 정기가 서려있는 봉우리로 많은 사람들이 신년일출을 맞기도 하는 희망봉이기도 하다.
<원효봉에서>
<원효봉에서 보는 고당봉>
원효봉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붐비지 않아 사진을 찍기가 편했으며 원효봉 아래 부산 시가지 건너편 산 너머 바다가 보이기는 했지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바다를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바다위에는 3척의 대형 어선이 보였다.
북문에 당도하다.
원효봉에서 북문은 급히 가면 10분에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며 도로 사정도 좋으며 내리막으로 되어 있어 손쉽게 갈 수 있다.
<원효봉을 내려서면 만나는 목교>
원효봉에서 조금을 내려서면 철재난간이 세워진 목교가 60여m 설치되어 있는데 습지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인지 확실한 이유는 모르며 이 구간을 지나 북문에 도착할 때까지 특별한 지형은 없으며 길가에 무명암이 있으며 무명암 앞으로 작은 감시초소가 있다.
<북문 전 무명바위>
무명암을 지나 5분을 내려서면 북문으로 이곳은 범어사로 갈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을 오르는 천초기지인 셈으로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므로 부근에 금정산장이 있고 바로 옆에는 마음을 씻는 세심정이 있다.
<금정산성 북문>
<북문 인근 세심정>
북문은 금정산성의 4대문 중 가장 투박하고 거칠고 단조롭고 작게 지었는데 북문을 지을 때 기둥과 대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을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내어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일만의 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 만에 북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북문 밖으로는 범어사이며 북문 안으로는 넓은 광장이 있는데 이곳 북문광장과 우측 세심정 일대는 원효대사가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라 하여 화엄벌이라 하였다는데 난이 있을 때마다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들을 훈련시켜 승병을 키우던 곳이었다고 한다.
깃발이 펄럭이는 광장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세심정으로 다가서 물 한 바가지를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는 고당봉으로 향한다.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에 서다.
고당봉은 북문에서 약1km정도이다.
북문에 도착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행을 하게 되었는데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 있고 길도 넓어 불편은 없었다.
북문에서 300여m 오르니 금샘 가는 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는데 정상을 오른 후 내려오는 길에 또 다른 입구로 들어서 이곳으로 나온다는 생각이었으므로 그냥 지나쳤다.
모처럼 산행에 나선 집사람은 몹시 힘이든 모습이어서 안타까웠는데 그래도 묵묵히 잘 가주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는데 한동안을 혼자만 산을 다닌 미안함이 들어 향후 어렵지 않은 산은 함께 산행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정상으로 가는 길>
첫 번째 금샘 입구에서 400m쯤 오르니 또 다른 금샘 입구 이정표가 있다.
내려오는 길에 이곳으로 들어서 조금 전 지나쳤던 곳으로 나온다는 생각을 하며 오른다,
어느 정도 오르니 난간을 세운 계단길이 계속 이어지고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며 북문에 점점 멀게 보인다.
<고모당>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정상이 가까워지는데 작은 당집이 보인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당집은 고모당으로 이러한 전설을 가지고 있단다.
고모당(姑母堂)의 전설
고모당은 금정산 정상아래 있는 당집인 고모당은 고모영신인 고당할미와 산왕대신인 금정산 호랑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고모당에는 이와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400년 전 밀양 사람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하여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신명을 바쳤는데 이 보살은 큰 스님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모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돕겠습니다.”라는 유연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큰 스님은 그 유언대로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해마다 제를 지냈더니 과연 범어사가 번창한 사찰이 되었다.
한때 젊은 스님들이 당제를 지내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여 당집을 훼손했는데 그 뒤로 좋지 않은 일이 계속 일어나 다시 고모당을 고쳐지었다고 하며 지금도 단오가 되면 범어사에서 당제를 드린다고 한다.
고모당을 잠시 둘러보고 정상으로 올라선다,
정상인 고당봉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는데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기 위한 쟁탈전으로 시끄러웠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줄을 서니 얼마 지나지 않아 20~30여명이 길게 늘어선다.
<정상석을 안고>
함께한 우리 팀 한사람이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자청하여 손쉽게 정상석에서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몇 장을 더 찍고 싶었으나 많은 사람이 밀려 2장으로 만족해야 했고 정상석 후면을 보니 노산 이은상이 쓴 시를 영주가 쓰고 금정구청장이 세웠다는 정상석 후면에 새긴 시와 정상인 고당봉의 유래는 이러하다.
<정상석 후면의 노산이은상 시가 새겨져 있다>
돌우물 금빛고기 옛전설따라
금정산 산머리로 올라왔더니
눈앞이 아득하다 태평양물결
큰포부 가슴속에 꿈틀거린다
금정산 고당봉의 유래
금정산의 주봉으로 정상에 올라서면 부산 시내와 부산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며 큰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어진 이 봉우리는 하늘에서 고모할머니가 내려와 삼신이 되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우리의 고유 민속신앙에서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도 정상아래 고모당이라는 당집이 있다.
금정산의 주봉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하는데 1994년 본 이름 찾기 위원회를 만들어 여러 고증을 거쳐 할미고(姑), 집당(堂)을 써 고당봉(姑堂峰)이라 확정 지었다고 한다.
정상 부근에서 사진을 찍으며 조망을 즐기는 사이 우리 팀 후미까지 모두 정상으로 올라왔다.
<정상의 풍경>
장군봉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후미대장과 함께 정상을 내려선다.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내려오다 금샘 입구를 지나쳐 아래쪽 입구에서 가기로 했는데 후미 팀은 올라올 때 금샘을 거쳐 올라갔다고 하며 집사람은 가지 않겠다고 하여 혼자서 금샘을 가기로 하고 금샘까지 계속 뜀박질을 한다.
말을 듣고 안내판의 사진도 보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번을 들으면 무슨 소용인가 한 번 보는 것이 우선이며 최고라는 생각을 하며 뛰었다.
가까이 다가서 로프를 잡고 올라서 아래쪽을 보니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작은 우물이 있으니 바로 금샘이라는데 이 금샘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으니 이러하다.
<금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설화에 의하면 금정산 산정에 3길 정도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는 둘레가 3m 깊이기 21cm 되는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에는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으며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금빛 나는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금빛 우물이란 금정(金井)이라는 산 이름을 붙이니 곧 금정산이며 범어(梵漁)라는 절 이름을 붙여 범어사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한 현세에서는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학술적으로 평하는데 금샘은 솟아난 바위 위 평탄한 면이 움푹패여 물이 고여 있는 모습으로 마치 소박한 석공의 솜씨와 같은 이것은 지형학적으로 풍화혈 중의 하나인 나마라고 한다는데 풍와혈은 석면의 작은 틈이나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비가 오면 물이 고이거나 그늘이 지면서 그 부분이 주변보다 약해져서 부스러지거나 그 틈으로 풍화작용이 일어나 점차 크기가 커져서 생성되기도 한다고 한다.
나마는 호주 원주민의 언어로 구멍이라는 뜻인데 지금은 세계적으로 지형학용어로 쓰이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풍화혈로 탑처럼 솟은 토르와 섬처럼 불쑥 올라온 인셀베르그 바위가 있다고 한다.
금샘을 보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누군가 금샘으로 오르고 있기에 바위를 내려서며 방향마다 사진을 남기고 금샘을 내려선다.
범어사로 가는 길
금샘을 내려서 금샘입구를 지나 북문까지 단숨에 내달린다.
세심정에서 다시 물을 들이키고는 북문을 빠져나와 범어사로 가는 길로 계속 뜀박질로 내달린다.
<화엄벌---승병을 훈련시키는 도장이기도 했다>
<북문을 나서며>
곧 따라 갈 것으로 생각했던 집사람과 후미대장은 금샘을 왕복하는(1km) 사이 멀리도 갔다.
한동안을 내려와 범어사 대성암을 거의 다 왔을 때 후미 대장을 사라지고 혼자 내려가는 집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리 빠르지도 않은 걸음인데 금샘을 갔다 오는 사이 이렇게 멀리 왔다는 것이다.
대성암 앞 원효암 가는 다리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주변에 있는 안내판을 눈여겨보니 암괴류에 대한 안내였다.
<원효암입구 다리에서>
범어사 암괴류는 범어사 주차장에서부터 위쪽으로 등나무 군락을 지나 금강암을 지나고 산성북문에 이르기까지 폭이 70m나 되는 돌바다가 2.5km 이어졌는데 이 돌바다 위에 세워진 대성암 각해선림 구들장 밑으로 흘러 졸졸 소리를 낸다는데 이를 대성은수(大聖隱水)라 하여 선의 경지의 불심을 듣는다 해서 금정8경의 하나로 꼽힌다.
<돌바다로 불리는 암괴류>
<범어사의 대웅전과 특이한 일주문>
암괴류를 다시 보고 범어사 경내로 들어선다.
경상남도의 3대 사찰의 하나인 범어사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합류하고 내려 올 때와 같이 5시간의 긴 시간을 올라가야 하는 부담으로 지그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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