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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악사(2)

범솥말 2024. 1. 31. 23:49

종로4가 횡단보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사 

작년과 금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의 악사(樂士).

전주에 갔을 때, 아코디언을 켜고 북을 치면서 약 광고를 하고 다니는 풍경에 마음이 끌렸고,

작년 가을 대구에 갔을 때, 잡화를 가득 실은 수레 위에 구식 축음기(蓄音機)를 올려놓고 묵은 유행가 판을 돌리며 길모퉁이로 지나가는 행상의 모습이 하도 시적(詩的)이어서 작품에서 써먹은 일이 있다.

작년 여름, 진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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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안개는 다 걷혀지고 가매못 너머 넓은 수전 지대(水田地帶)와 남강(南江) 너머 댓숲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아침 햇볕이 뿌옇게, 마치 비눗물처럼 번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혼자 앉아서 허겁지겁 달려 온 자기 자신의 변덕을 웃으며, 그러면서도 작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을 그러고 앉았다가 뒤통수를 치는 듯한 고독감에 나는 쫓기듯 산에서 내려오고 논둑길을 걸어오는데 

장판 사려어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장판지를 말아서 짊어진 할머니가 다시 장판 사려 하고 외친다.

나는 그의 뒤로 바싹 붙어서 따라가다가, “할머니?”하고 불렀다.

할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

이러고 다니면 장판지가 더러 팔려요?”

사는 사람이 있으니께, 팔리니께 댕기지.”

많이 남아요?” 

물밥 사 묵고 댕기믄 남는 것 없지, 친척집에서 잠은 자고……

노파는 다시 외친다.

집이래야 눈에 띄는 농가(農家), 박덩굴 올라간 초가지붕이 몇 채도 안 되는데,

뒤따라 가는 내 생각으론 한 장도 팔릴 것 같지가 않는데 그래도 노파는 유유히 목청을 돋우어 장판 사라고 외치다가, 그것도 그만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연못 속의 금붕어가 어쨌다는 그런 노래였는데 너무 구슬프게 들려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다가, 여기도 또한 거리의 악사가 있구나 하고,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진짜로 예술가(藝術家)인지 모르겠다는 묘한 생각을 하다가, 그 노파는 윗마을로 가고 나는 가매못 곁에 와서 우두커니 낚시질을 하고 있는 아이들 옆에 서서 구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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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부탁해 놓은 택시가 왔기에 소녀와 작별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가매못 옆을 지나가면서 나는 어릴 때 상두가(喪頭歌)를 구슬피 불러서 길켠에 선 사람들을 울리던 그 넉살 좋은 사나이와 농악(農樂)꾼에 유달리도 꽹과리를 잘 치고 춤 잘 추던 사람을 생각하며, 그들이야말로 예술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리의 악사(樂士)멀리 맑은 공기를 흔들며 노파(老婆)가 부르던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수필 거리의 악사의 일부입니다.

작가 박경리는 우리 일상에서의 작은 외침 하나하나가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흰 종이 위에 글을 남겼습니다.

하나도 팔릴 것 같지 않은 장판지를 파는 노파의 장판사려어~~~

어릴 때 상여 앞에서 구슬픈 소리로 외치던 상두꾼의 이제가면 언제오나~~~~

남사당 패거리 같은 농악꾼들의 꽹가리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춤꾼들,

작가 박경리는 장판지를 파는 노파, 상여꾼을 이끄는 상두꾼의 외침, 농악의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농악대의 외침이나 노래는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우러나는 예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종로4가 건널목에서 추운 겨울날씨에서도 대형 반주기에 맞추어 바이올린을 켜는 악사를 작가 박경리님이 보았다면 어떻게 기록했을까? 궁금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는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부류의 거리의 악사가 아닌 처절한 삶의 몸부림이지만 박경리님의 시각에서는 생생한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예술로 기록했을 지도 모릅니다.

돈을 넣는 투명 플라스틱 돈 통은 큰데 돈은 천원짜리 몇 장이 전부였습니다.

가까이 접근해 잠시 악사의 음악을 감상해봅니다.

그런데 대형반주기에서 나오는 음악과 악사가 연주하는 바이올린과는 서로 엇박자를 이루는 것을 보니 이 악사는 바이올린 연주를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겨울 반바지에 추워보이는 모습에도 최선을 다하는 악사에게 3000원을 기부합니다.

작은 돈이지만 저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릴레이 기부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컸으며 한동안 정류장에서 지켜보니 몇몇의 행인들이 기부를 하는 풍경을 보고 날씨는 추워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진정한 악사가 되어 정상적인 음악가와 협연을 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