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를 찾아서
영주, 부석사를 찾아서
문화재 종목 : 사찰
보유뮨화재 : 국보5점, 보물3점 외 지방문화재 다수
지정일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답사일 : 2015년08월12일

영월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날 소백산 능선인 마구령을 넘어 부석사로 들어섰습니다.
부석사를 처음 방문했던 적은 아주 오래전으로 정확한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30여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후 3~4회는 더 찾아 왔었지만 전에는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나 상식이 없어 주마간산식의 답사로 눈으로 그냥 한 번 보고 지나치는 정도였습니다.
이러던 것이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진도 찍고 눈여겨보는가 하면 블로그에 저장하여 다른 블친에게도 알려주며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문화재에는 많은 종목이 있지만 크게 보면 궁릉에 관한 문화재나 불교문화인 사찰이나 사찰관련 건축, 미술, 조각, 불상, 석탑 등이 대부분입니다.
사찰을 가면 문화재로서의 관심과 관찰이며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므로 법당안의 부처나 탱화 등은 거의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필자는 사찰에 가서 제일 관심을 갖는 것은 불전사물인데 오래되고 유서가 깊은 사찰은 불전사물을 갖추고 있지만 작은 사찰이나 최근 새로 지은 절은 대부분 없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불전사물이란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말하는데 각각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석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분수가 있는 못을 지나 부석사로 향합니다.>
자동차가 좀점으로 들어서는 순간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길을 막고 주차비를 받습니다. 5.000원 이라고 하는데 사찰에서 받는 돈이 아니고 영주시에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기분을 잡쳤습니다.
5.000원도 큰 돈이지만 사유지도 아니고 사찰에서 받는 돈도 아닌 영주시에서 주차비를 받는 것이 이해가 안됐는데 많은 관광객을 유치해야할 영주시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차요금을 받고 있었는데 이웃하고 있는 선비촌이나 소수서원에서는 주차비를 받지않고 있었으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주차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주시에서 주차비를 징수하면 영주시 직원이 일을 해야지 소속이 다른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주차관리를 하고 있으니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공중에 떠 있다고 하는 부석입니다.>
길가 좌우로 있는 노점상을 지나 부석사로 들어섭니다.
몇 해 전만해도 이런 시골 관광지에서 농산물이나 임산물을 사면 그 지방 토속 물품으로 국산이었는데 다수의 말에 의하면 관광지 노인들이 파는 물건은 대부분 중국산이라고 합니다.
부석사 입구에 도착해 입장료를 끊고 입장을 했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는 무량수전이 우리나라에서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이었지요.>
부석사는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석사라는 사명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바위가 아래 있는 바위에 붙어 있지 않고 떠있다고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경내에는 국보17호 무량수전앞 석등, 국보18호 무량수전, 국보19호 조사당, 국보45호 소조여래좌상, 국보46호 조사당벽화와 보물220호 석조여래좌상, 보물249호 삼층석탑, 보물255호 당간지주, 보물735호 고려각판과 그밖에 여러 문화재가 있습니다.

<부석사 안내도와 안내문을 지납니다.>

<부석사의 정문이 일주문으로 들어섭니다.>
일주문을 들어서 비탈진 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좌측에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무심코 접근했는데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찰의 당간은 신성한 곳의 경계점이며 불보살의 위신을 상징하는 번(幡)을 달아두는 장대인데 때로는 당을 걸 수 있는 장치가 없는 당간도 있는데 이러한 당간은 번을 다는 목적보다 풍수비보를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땅의 나쁜 기운을 눌러서 압승하려면 무겁고 강한 석당간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당을 세우기 위하여 사찰 앞에 설치되었던 건조물로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처럼 거대한 규모의 당간이나 지주가 조성되지는 않았는데 때로는 원래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지주에 당간만을 근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도 있으며 조선시대는 대개 작고 낮으며 목조의 당간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부석사의 당간지주입니다.>
국가보물 제255호인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년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턱에 우뚝서 있으며, 그 키가 4.8m 입니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바로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이 있어 계단으로 올라 천왕문으로 들어섭니다.

<부석사 천왕문입니다.>

<큰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천왕의 모습입니다.>

<부석사의 사천왕의 발 밑에는 악귀가 사천왕에게 제압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부석사 삼층석탑
천왕문을 지나면 눈앞에 좌우로 3층 석탑이 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30호로 지정되어 있는 3층 석탑은 동탑과 서탑으로 길을 중심으로 동서로 하나씩 세워져 있는데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건실하고도 장쾌한 느낌이 드는데 이 탑은 원래 부석사 동쪽 일명사 터에 있던 것을 1966년 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동탑입니다.>

<서탑이며 불사리탑이전비에 의하면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석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범종루

<부석사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부석사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범종루입니다.>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루입니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루는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 범종각루는 다른 건축물과 달리 건물의 지붕이 앞쪽 방향으로는 팔작지붕이고 뒷쪽은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있는데 범종루 무량수전 방향으로 팔작지붕으로 지으면 답답하기도 하고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 보일 것을 감안해 앞면과 뒷면의 지붕을 서로 다르게 지었다니 당시 그 지혜를 엿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무량수전으로 가며 본 범종루의 지붕은 앞 쪽은 팔작지붕이고 뒤 쪽은 맞배지붕으로 지어졌습니다.>
범종루 2층에는 제가 사찰에 가면 제일 눈여겨보는 불전사물이 안치되어 있는데 복고와 운판 그리고 목어는 이곳에 있고 범종은 서편 범종각에 별도로 안치되어 있으며 안쪽으로 범종루 대들보에 걸쳐있는 걸침목은 용머리 형상으로 조각했습니다.
그러면 부석사의 불전사물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석사의 불전사물
1.법고(法鼓)
땅의 모든 생물을 제도하다.


법고란 불법을 전하는 북을 말합니다.
장고나 진고 그리고 농악에서 쓰이는 북 등 일반의 북과는 달리 절에서 쓰는 불교의식용 북을 달리 '법고(法鼓)'라 부르는데 즉 부처님 불법의 진리 싣고 울려 퍼지는 북을 의미합니다.
음양 화합의 소리를 싣고 막막한 대지에 가득 울리는 법고의 저음을 듣고 땅위에 사는 네발 달린 짐승들은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데 그 북소리는 우리의 귀에 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까이 다가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입니다.
법고를 칠 때는 마음 심(心)자를 그리면서 2개의 북채로 두드리는데 법고를 치는 승려의 타법에 따라 또한 북소리를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들리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여명의 고요 속에 흩어지는 북소리는 장엄하기 그지없다 할 것입니다.
2.운판(雲板)
하늘의 소리로 날개를 펴다.
운판이란 원래 선종 사원에서 공양하는 장소 내지 공양 준비하는 곳에 매달아 대중들에게 아침 및 점심의 공양시간을 알리기 위한 기구로 사용 되었습니다.


운판(雲板)의 외형은 대개 뭉게구름 모양으로 조형되며 표면에 보살상이나 범자(옴마니반메훔)· 구름,· 달 등을 부조하기도 하고 가장자리에는 승천하는 용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운판이 구름 모양으로 조형된 까닭을 화재예방의 염원적 상징조형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구름은 곧 물이 되기 때문에 불을 다루는 부엌에서 화재예방의 염원으로 운판의 형상을 조형하였다고 합니다.
운판은 다른 의식법구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일반적인 기능성에 더하여 교리적 상징성이 한결 중요한 목적으로 부가 되었는데 즉 운판은 아침 · 저녁 예불 시에 중생교화를 상징하는 의식법구로 소리를 통해 허공을 헤매는 고독한 영혼을 천도하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조류계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목어(木魚)
잠들지 않는 수행의 길로 인도하다.
목어는 목어고(木魚鼓).어고(魚鼓).어판(魚版) 등으로 불립니다.


나무로 물고기의 형상을 만들어 배 부분을 파내고 그 사이를 막대기로 두드리면 몸통 사이에서 생겨나는 공명(共鳴)의 울림은 그윽이 주변에 퍼지나니 그 소리 듣고 살고 있는 수중(水中)중생들은 한없는 해탈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백장청규]에 의하면 목어를 식당 혹은 행랑 등에 매달아 길게 두 번 두드려 공양 시간을 알렸고, 한 번 길게 두드려 대중에게 모일 것을 알렸다 하나, 후에는 독경을 한다든가 예불시간을 알리는 등의 사용으로 그 용도가 변경 되었으며 물고기는 밤낮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졸지 말고 늘 깨어서 꾸준히 수도에 정진하라는 뜻에서 그 형상으로 목어를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목어의 애초 물고기 형상은 후대에 이르러 용의 머리에 물고기의 몸을 한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에로 발전되기도 하였고 물고기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은 여의주를 얻어 용이 된다는 속설에 따라 중생이 오랜 수행을 통해 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대자재를 얻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대들보 걸침목 끝의 용머리가 특이합니다.>
4.범종(梵鐘)
만물을 깨워 세상을 밝히다.


<불전사물중 범종을 안치한 범종각입니다.>
범(梵)이란 우주만물이며 진리란 뜻으로 바로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이 범종입니다.
따라서 범종은 그것의 장엄하고 청명한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주며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고 참회토록 하는 신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범종은 원래 절에서 대중을 모으고 때를 알리기 위하여 쳤으나 점차 절에서 조석예불이나 의식을 치를 때 치게 되었는데 하지만 범종을 치는 본뜻은 지옥의 중생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동시에 불법의 장엄한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범종에는 봉황산 부석사라고 새겨져있습니다.>
안양루
범종루에서 불전사물을 보고 기분 좋게 무량수전으로 오르다 보면 지나온 범종루와 비슷한 2층 누각건물을 만나는데 전면 아랫층에는 안양문, 윗층에는 부석사라는 현판이 후면 2층에는 안양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건물이 안양루입니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건물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했으며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는 것으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안양루는 범종루와 함께 부석사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조선 후기의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전에는 누각 안에 부석사의 현판기문과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등 을 모아 두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현판 등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공실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엎에서 본 안양루입니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같은 느낌으로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는데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고 하는데 미천한 필자는 바닥만 보고 공실이라고 판단했으며 벽면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안양루 뒤로 소백산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했는데 소백산은 너무 희미합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안양루의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서면 무량수전이 눈앞에 보입니다.
넓은 무량수전 마당 한 복판에 석등이 있는데 이 석등이 국보 제17호인 '부석사 무량수전 엎 석등'입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석등으로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 사면에는 돋음으로 새긴 보살상이나 연꽃무늬 등은 우수한 조각으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국보 제17호인 석등은 무량수전 앞 마당 중앙에 세워져 있으므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안양루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으며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배례석이 있습니다.

이 석등과 배례석은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한 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법등(法燈)이 계속되고 사찰이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화엄종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화사벽에 장식된 보살들은 모두 원형의 두 광이 있고 삼면관을 머리에 쓰고 연화대에 서 있는데 목에는 三道가 분명하며 수인은 양 손을 모으거나, 늘어뜨린 천의를 잡기도 하고 연꽃과 보주를 어깨와 가슴에 들고 서 있습니다.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입니다.
사찰의 주불전은 대부분 대웅전, 극락보전 등으로 정하고 있는데 부석사는 무량수전이라고 합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신 법당이라고 하고, 극락보전은 를 모신 법당이라고하며, 적멸보궁은 부처님진신사리를 모시는 법당이라고 하며, 부석사의 경우처럼 무량수전이라는 법당은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무량수전은 기성세대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배웠는데 이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이므로 무량수전의 역사적, 건축적 가치는 최고이며 한 번 머릿속에 기억된 최고의 건물은 바꿔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하며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으며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습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 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무량수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현판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는데 그 가운데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기법입니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고 합니다.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무량수전 법당안을 살펴보면 서쪽으로 좌상의 부처가 있는데 불단과 화려한 닫집에 있는 부처가 국보 제45호인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입니다.
대웅전의 석가모니상에는 좌우로 다른 부처가 있는데 반해 부석사의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 동향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한데 이는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고 합니다.

<서편에 앉아 동편을 보고 있는 소조 아미타여래좌상입니다.>
원래 법당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고 하는데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라고 하는데 미천하여 마루 바닥만 보고 녹유전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부 석
부석사 무량수전 뒤 좌측에 있는 바위로 한문의 뜻이 '뜨다', 음은'부' 인 부(浮)를 쓰고 돌석(石)를 쓰는 부석으로 떠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숙종 때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아래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연유로 부석사라는 사찰의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채만큼 큰 돌이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은 불가한 일로 과학적 근거없이 전설로 전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한문으로 浮石(부석)이라고 음각을 했는데 부석은 선묘용이 돌로변했다고 전합니다.>
《삼국유사》에 부석사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부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건설화는 의상대사와 선묘라는 여인과 석룡이 등장하는데 설화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이 등주(登州)에 도착하여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간 후였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으며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어 어려움을 겪을 때 용이된 선묘가 나타나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부석바위에서 인증합니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다고 하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인1919년 조사당과 무량수전을 개수할 때 허리부분이 잘린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하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의상대사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선묘각이며 안에는 선묘낭자의 영정이 있습니다.>
선묘와 의상대사 그리고 부석이 사찰의 창건설화에 나오며 부석사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느며 전설의 선묘낭자를 모신 각이 선묘각이며 무량수전 동쪽에 있다는 선묘정은 확실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장전 옆과 앞에 있는 2개의 우물 중 하나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부석사 삼층석탑
무량수전 우측 약간 안덕진 곳에 있는 탑으로 보물 제249호인 이 탑이 부석사 삼층석탑입니다.


<부석사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무량수전 일대의 풍경이 아주 멋있습니다.>
본래 탑은 법당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동쪽에 서 있어 궁금증을 이끄는데 아마도 동쪽을 향해 안치된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방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삼층석탑은 부석사 창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5.26m, 기단폭이 3.56m 입니다.
대석단(석축)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쌓은 것 이라고 합니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 하는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큰돌과 작은 돌, 그리고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돌을 각각의 돌 생김에 맞춰 아름다운 석축을 완성시켰습니다.>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 맞추어 쌓은 것으로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일주문을 나서며
참으로 오랜만에 부석사를 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정에 없이 돌아 본 것이라 아쉬움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쉽다거니 미련이 남는 것은 다음에 더 자세히 관찰하고 공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쾌청한 가운데 기분 좋은 맘으로 부석사 일주문을 나섭니다,
오전 영주시에서 주차비를 받아 찹쳤던 기분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지만 영주시는 좀 반성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