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수서원과 선비촌 둘러보기
영주, 소수서원과 선비촌 돌아보기
방문일 : 2015.08.12
문화재 등록번호 : 사적 제55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누구와 : 태욱처남부부와 처형, 그리고 우리 내외
돌아본 곳 : 소수서원, 선비촌

영월에서 2박을 하고 오늘은 서울로 귀가를 하는 날 입니다.
어느쪽으로 노선을 잡을까? 망설이다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안내하기로 하고 짐을 정리한 후 친구의 별장을 나섰습니다.
영주로 가기위해서는 김삿갓 유적지를 지나야 하며 소백산자락을 넘어야 하는데 백두대간을 하며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기는 했지만 차량으로는 지난적이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김삿갓유적지를 지나 직진으로 넘으니 고원지대에 아주 평온한 마을이 나타납니다.
의풍리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관광지가 가까워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이미 순박함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고치령가는길과 마구령 가는길을 묻는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하고 더이상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의풍리 3거리에서 우측으로는 고치령을 넘어 좌석리로 가는 길이고 직진은 마구령을 넘어 부석면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구령을 넘으며>


<마구령 입석에서 활짝 웃는 모습의 시누이 올케입니다.>
잠시 내렸다가 마구령으로 향합니다.
소백산 능선을 오르는데 모두 상쾌한 숲 내음에 기분이 최고라고 합니다.
얼마 오르지 않아 백두대간 길에 지났던 능선 정점인 마구령에 오릅니다. 잠시 차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비탈지고 좁은 길을 따라 내려서 부석사로 향했습니다.
부석사를 돌아보고 선비촌과 소수서원을 구경했는데 편집상 소수서원을 먼저 소개합니다.
영주, 소수서원 돌아보기
선비촌을 통해 소수서원으로 들어섰으므로 소수서원 정문은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 당간지주이며 뒤로 소수서원 정문이 보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맨 처음 만나는 건 숲속에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부석사 못지않게 큰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돌로 만든 조형물로 크기나 높이로 그 위상을 말해주고는 했는데 쉽게 표현하면 국기계양대 같은 것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소수서원의 옛 정문인 지도문 옆에는 시와 면보호수 2그루가 있으며 정문 우측으로 경렴정이 있습니다.

<수종은 은행나무이며 수령은 약500년 되었는데 영주시 보호수로 지정보호하고 있습니다.>

<경렴정 우측에 있는 은행나무로 면보호수로 지정보호를 받고 있는데
한날에 지정된 같은 수종과 같은 나이인데 이 보호수는 겪이 좀 낮은 면보호수입니다.>
지도문 우측으로는 경렴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는 옛날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호연지기의 기상을 길러주기 위해 시를 짓고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라고 하며 경렴전 우측 죽계천 건너편에는 취한대와 정자바위가 있습니다.

<경(敬)자바위와 취한대입니다.>

<경자바위로 유교를 바탕으로한 서원으로 공경을 우선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백운동(白雲洞)은 퇴계 이황선생이 새긴 글씨라고 하며 경(敬)자는 선재 주세붕선생이 새긴 글씨라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밤마다 귀신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주세붕 선생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한 뒤 원혼제를 드리니 그 때부터 원혼들의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퇴계이황이 물과 산의 푸른 기운에 취해 시를 지었다는 취한대입니다.>
취한대는 퇴계이황이 죽계천 맑은 물빛과 연화산의 푸른 기운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던 곳이라고 하며 이러한 연유로 취한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지도문으로 들어서면 소수서원입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조선 중종 37년인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모체로 고려 말 유학자인 안향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된 백운동서원은 퇴계이황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던 명종5년인 1550년에 임금이 내린 사액을 받게 되면서 `소수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료관에 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旣廢之學(기폐지학)---이미 무너진 학문을
紹而修之(소이수지)---다시 이어지게 했다. 는 문장에서 소이수지의 소수를 따서 소수서원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운동 현판이 걸린 강학당입니다.>

<강학당 내부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지도문으로 들어서면 백운동 현판이 걸린 강학당이 있습니다.
강학당은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으로 사면에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려 지었는데 이곳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던 곳입니다.

<영정각의 모습입니다.>

<영정각 안에는 안향선생과 주자선생의 영정 등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영정각 앞에 일영대가 있습니다.>

<사료관의 모습입니다.>

<숙수사지 출토물들입니다.>
강학당을 지나 바로 뒤에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그 좌측으로 장서각이 있으며 맨 뒤에 영정각과 사료관 등이 있으며 죽계천으로 통해 선비촌으로 나가는 쪽문 부근에는 숙수사지 출토물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영주 선비촌 돌아보기

선비촌을 먼저 관람한 후 소수서원을 관람하였으나 선비촌을 나중에 옮겼습니다.
선비촌은 조선시대의 전통가옥을 복원하고 생활상을 재현하여 유교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도록 영주시가 건설한 테마파크로서 1997년 12월 17일 첫 삽을 뜬 이후 여러 차례 공사를 나누어 하여 2004년 9월 22일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소수서원과 소수서원박물관과 함께 죽계천 주변에 조성된 영주 선비촌에는 갖가지 편의시설과 넓은 고택을 지어 옛 권세가들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숙박을 비롯해 민속놀이와 민속시설 등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영주선비촌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아래와 같은 안내판이 있으며 넓은 광장 중앙에 큰 선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선비촌 안내문입니다.>
선비촌 안내문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주는 예로부터 학문과 예를 숭상했던 선비문화의 중심지이며 선비촌이 되어있는 순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였던 안향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비촌은 오늘 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선비의 정신과 태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하고자 영주시 순흥면 영구리 일대에 조성되었다. 선비촌은 영주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복원하였으며 그들의 정신은 담은 수신제가, 입신양명, 거무구안, 우도불우빈의 4가지구역으로 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마을 공동체 형태로 구성하여 옛 영주 선비들의 생활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끼게 하였다.
또한 각 가옥별로 거주했던 사람들의 신분에 맞는 가옥 규모에 여러 가구와 생활도구를 전시하였으며
선비의 일생생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직,간접 체험공간을 제공하였다.

<선비촌 차량 출입구 쪽에 장승동산이 있습니다.>

<영주 선비상입니다.>
영주 선비상 기단석 우측에는 이러한 설명문이 있습니다.
우리 고장 영주는 예로부터 학식과 인품을 고루 갖춘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곳입니다.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뒤 퇴계(退溪)이황(李滉)선생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을 받게 되면서 350 여년간 4천여명의 유생들을 길러 낸 유학의 발상지 이며 선비의 본 고장입니다.평소 유교 이념을 바탕 삼아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학문에 힘쓰고,스스로의 인겪을 닦아,마음과 행실을 곧고 바르도록 선비 정신을 실천하여 왔습니다.윤리와 도덕이 상실되어 가는 이 시대에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이 도입한 해동추로지향(海東鄒魯之鄕)이 라는 명성에 맞게 선비사상을 진작시키고자 이곳에 선비촌을 재현하면서 선비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2004년 9월 22일
영 주 시 장

<선비촌의 대표적 루인 죽계루이며 주말 상설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표소로 가는 길 좌우로는 옛 종가집 복원이나 먹거리집들이 있습니다.>

<옛 주막을 복원하고 정말로 술을 팔고 있습니다.>

<현대식 카페도 있습니다.>

<매표소입니다. 이곳에서 매표를 하면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선비촌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매표소를 막 지나 좌측으로 열부각과 충복각이 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조선 말기 이곳에 사는 반남박씨가문의 규수가 여흥민씨 가문으로 출가를 했지만 남편이 병으로 일찍 죽어 홀로 시집살이를 할 때 이웃 천석꾼 김모가 집요하게 연정을 품고 모함과 뜬 소문을 퍼뜨리니 참다못해 관청에 호소를 하였지만 받아주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결백을 드러내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집안 하인 고만석이라는 자가 주인마님의 누명을 벗겨드리고자 상경하여 우여곡절 끝에 임금에게 알려 신원을 회복하였다.
그후 소수서원이 주체가되어 전국 유림들의 발의를 얻어 두 사람의 가상한 뜻을 기리고자 나라에 상소하여 순조22년인 1822년에 열부박씨에게 열녀를 내렸고 고만석은 철종대에 정려를 내려 열부각과 충복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충복각 입니다.>

<충복각내의 편액입니다.>

<충복각내의 편액입니다.>

<열부각입니다.>

<열부각내의 편액입니다.>

<열부각과 충복각의 모습입니다.>

<선비촌 안에는 서예체험관이 있습니다.>

<서예에 이어 달구지를 타는 체험관도 있는데 모두 유료입니다.>
사진에는 없지만 우측으로 새끼꼬기 체험관이 있는데 원시적인 손으로 꼬는 새끼가 이닌 기계새끼로 새끼기계 틀이 보였습니다. 제법 큰 마을이었던 범솥마을에는 새끼틀이 있는 집이 몇 집 안 되었는데 저희집에는 저희 부친께서 예전에 새끼틀을 사 놓으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새끼를 꼬려고 볏집을 가지고 오면 기계품으로 한 마끼씩 주고 갔던 옛생각이 났습니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새끼체험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골목으로 올라갑니다.
죽계루의 뒤편이되는 곳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골목이 복잡하고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무슨일인가했더니 드라마 촬영현장이었는데 눈에 뛰는 배우는 보이지 않았고 양반댁 도령이 보이고 상복을 입고있는 신을 찍고 있었는데 극중 상을 당한 것 같습니다.





<아직은 시작도 하지 않은
sbs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를 촬영 중으로 양반댁에서 상을 당한 것 같은 장면을 찍고있습니다.>



<집사람이 촬영했던 영화,드라마 포스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비포장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고택을 들어서 옛날 권세가의 생활상을 돌아보았습니다.
이곳에는 12채인가 고택이 있는데 영주지방의 현존하는 권세가 고택을 똑같이 지은 것과 문헌을 바탕으로 복원한 고택들입니다.
집이 크기는 하지만 어려서 초가나 기와집 등을 보고 자라서인지 크게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고택의 장독대에서 처남댁이 기념촬영을 합니다.>

<어려서 보아왔던 디딜방아인데 좀 작다는 느낌이 듭니다.>

<소수박물관 앞 입석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선비촌을 대충 돌아보고 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박물관은 처음 입장했던 곳 충복각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고택을 함 바퀴 돌아 원점으로 온 것입니다.
입구에 있는 박물관 입석에서 사진을 찍고 박물관으로 들어섰습니다.
3관으로 되어 있는 박물관은 옛날 사료 및 이 지방의 역사관련 자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혼자가 아닌 여러명이 함께 관람하는 것이라 제대로 머리에 들어 오지도 않았고 이런 곳에 있어야할 문화해설사도 없었으므로 정해진 관람동선을 따라 주마간산식의 관람을 하고 소수서원 방향으로 나왔습니다.

<이곳으로 입장하며 박물관은 지하1층으로 내려갑니다.>



<죽계천 변에 있는 관풍정입니다.>
퇴계이황선생께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정자 부근에 관풍대가 있어 관풍정이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앞에는 주계천이 뒤로는 연화산이 감싸고 있는 관풍정은 2002년 다시 복원했다고 하며 대와 정장의 관풍은 제월광풍에서 딴 것이라고 합니다.

<백운교를 건너다 한 가운데서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백운교를 통해 주계천을 건너면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어리연과 수연이 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