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산행기(2)
경주 남산 산행기
금오산 권 문화재 탐방기
산행일시: 2014년 04월 26일
누구와: 나홀로
산행거리: 약 11.8㎞ 중5.5km
산행시간: 6시간 30분(08:30~16:00)
산행코스:용장3리(08:30)-천룡사지(09:15)-고위봉(10:17)-신선암(10:48)-칠불암(11:00)-393봉(11:40)-이영재(12:40)-365봉()-대연화좌대(12:58)-금오산(13:18)-상사바위(13:52)-바둑바위(14:00)-상선암(14:42)-석조여래좌상(14:53)-선각육존불(15:13)-마애관음보살상(15:22)-삼릉(15:35)-삼불사(15:55)-삼불사주차장(16:00)

◎삼화령으로 가는 길
이영재를 출발해 200m 오르면 능선 산행로와 남산 순환도로가 만나는 3거리로 이정표 아래는 여자들 5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넓은 길을 따라 밋밋하게 이어지는 경사길을 오르니 이제까지 나무그늘로 왔는데 넓은 길에 그늘은 사라지고 직사광선이 내려 쬐고 있다.
따가운 햇볕을 쐬며 한 구비를 돌고 다시 한 구비를 도니 시원스럽게 사방이 탁 트이는 곳 전망대에는「삼화령에서 보는 고위봉」이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전망대에서 고위봉을 중심으로 시야에 보이는 건너편 산을 사진으로 그대로 옮겨 봉우리와 능선 그리고 고개를 설명하는 안내판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삼화령으로 삼화령에는 도면상 들려야 할 연화대좌가 있는 곳이다.
전망대 맞은편에 길 흔적을 따라 올라가니 능선위에 대단한 대좌가 있다.


연화대좌(蓮花臺座)!!!
남산유적 답사 중 다섯 번째 만나는 유적이다.
임도 위 벼랑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바위가 능선까지 이어지고 그 큰 바위위에 커다란 바위가 얹혀 있는데 이 바위가 태고부터 얹혀져있던 바위인지 안내문에 나오는 충담사가 옮겼는지 알 수는 없지만 포개 얹힌 바위는 어디엔가 숨어 있을 부처님이 앉아 있던 대좌로 상부에는 360도 원을 그리며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연화대좌의 규모로 보아 부처의 크기도 대단했을 것 같았다.
대좌 앞 삼화령 안내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는 높은 곳을 의미하고 남산에는 세 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이곳을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선덕여왕시절 생의스님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 오라”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이 나를 파서 시원한 곳에 있게 해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곳에 가 보았더니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스님은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시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경덕왕 때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스님이 해마다 삼월 삼일과 구월구일에 남산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는데 바로 그 부처님으로 짐작된다.
지금 미륵불은 없어지고 2m의 연화대좌만이 남아 있으며 진입도로 아래쪽에 절터가 있는데 생의사터로 추정된다.
위 글을 읽고 다시 한 번 고위봉을 보게 되고 보이지는 않지만 금오봉의 방향을 살피며 삼각을 예측해본다.
이곳의 전설에 충담스님이 연계되어 있단 것도 의외였다.
향가 찬기파랑가와 안민가를 지은 충담사가 차를 드리던 미륵세존이 이곳 연화대좌의 주인공이라니.........
찬기파랑가는 화랑인 기파랑을 추모하는 노래로 향가의 유래를 보면 신라 경덕왕 24년 누추한 중이 왕 앞으로 지난다.
이때 왕은 중을 보고
“그대는 누군가?”
“제가 충담이오”
“어디서 오는가?”
“미륵세존께 차를 드리고 오는 길이오.”
“나에게도 한잔 주겠소?”
이에 중이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 맛이 이상하고 그 사발 안에서 이상항 향기가 풍겼다.
“내가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하니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
이에 스님은 왕명에 따라 향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어 바쳤다.
이렇게 지은 찬기파랑가와 안민가가 신라 향가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미륵세존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대좌의 크기로 보아 미륵세존의 크기도 대단했을 것인데 이 근처 어디엔가 묻혀 있다면 이제 중생을 위해 무거운 흙을 털고 지금도 비워 놓고 있는 연화대좌로 다시 돌아오셔야 하지 않으신지요?.........
수년전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석불을 새로이 발굴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아마도 다음에는 미륵세존이라는 부처님도 이 땅에 다시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연화대좌를 뒤로하고 능선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철쭉이 곱게 피어 있는 능선을 지나며 하늘을 솟구친 바위암봉을 지나며 금방이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대로는 한동안을 가도 나타나지 않다가 10분이 되서야 대로로 내려섰는데 내려선 지점이 금오봉으로 이어지는 3거리 안부였다.

<진달래가 핀 바위암봉>

<금오봉으로 이어지는 3거리 안부>
좌측으로는 직사광선을 받으며 올라오는 사람들과 내려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삼화령길에서 한 구비를 더 돌아 용장사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용장사지 3층석탑을 보러 내려갔다 온다는 계획이었는데 너무 많이 지나쳐 버렸다.
용장사지를 갔다 올까? 아니면 귀찮은데 금오봉으로 바로 갈까? 한동안을 망설이다 결국은 귀찮다는 생각에 용장사지를 포기하고 금오봉으로 왔는데 이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 금오신화의 산, 금오산 !
안부에서 금오봉을 알리는 이정표 방향으로 들어서면 안내판을 만나는데 이 안내판은 좌측의 골짜기인 비파곡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라22대 효소왕과 진신석가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경외심을 갖게 해주는 글이었다.
오늘이야 계획도 없고 시간도 안 되지만 다시 남산을 찾을 때는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비파사와 불무사가 있던 사지를 가보고 진신석가의 모습도 더듬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피골이 내려다보이는 길을 지나 수분을 가면 금오봉이 나온다.

금오산(金鰲山)!!!
앞서 적시한바, 있는 것처럼 남산에는 2개의 봉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해발 494m의 고위산과 해발 468m의 이곳 금오산이이 있는데 금오(金鰲)란? 황금빛 거북 모양의 봉우리라 해서 붙여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김시습이 소설제목에 금오라는 책이름을 이곳 금오산에서 빌려 썼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김시습이 '금오신화' 라는 역작을 금오봉 남쪽 아래 용장사에서 썼다는 것인데 그래서 용장사가 유명하고 필자 또한 용장사지를 들리려 했으나 들리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하는 것이다.
남산은 용장·천룡·백운·부처·탑골 등 골짜기는 무려 40여 곳이 되며 신라 전성기에는 사찰이 800개가 넘었다고 전해오는데 이렇게 많은 사찰과 골짜기에는 유명한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칠불암 마애석불, 천룡사지 3층석탑 등 문화재가 686점이나 된다고 하는데 이중 국보와 보물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된 것만 26점이라고 하니 노천 박물관이라는 거창한 대명사가 붙은 경주 남산지구가 유네스코가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이유일 것이다.

금오산 정상은 넓은 공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암과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숲이 있고 그늘이 있다.
공터 중간에는 한 키가 넘는 정상석이 있으며 주변으로 이정표와 탐방로 안내문과 남산과 망산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옛날 남자 신(南神)과 여자 신(女神)이 이곳을 왔다
경주땅을 보고 두 신은 “우리가 살 땅이 여기구나~”라고 외쳤는데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빨래하던 처녀가 보니 산처럼 큰 사람 둘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너무 놀라 “산 봐라!”하고 기절을 했다는데 “산처럼 큰 사람봐라 ”해야 할 것을 “산 봐라!”라고 외치자 두 신은 그만 산으로 변하고 말았다는데 남자산은 남산(南山)이 되고 여자신은 남산 서쪽에서 남산을 바라보는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한다는 것이다.

< 정상석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정상석에서 인증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따가운 햇볕 때문인지 근처에 아무도 없어 나무그늘을 찾아 잠시 몸을 숨긴다.
정상 여기저기 숲속 그늘에서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쉬고 있기도 하고 남녀가 자리를 펴고 저녁에 내려갈 태세로 애정을 표하며 길게 잡은 사람도 보인다.
5분여 시간을 보내고 다시 정상석으로 나오니 몇몇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어 부탁을 하여 한 장의 인증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 냉골 암봉으로 가는 길의 풍경
혼자서 산을 많이 다니므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흔치 않다.
이러한 이유는 오지 산행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주말 산행이외에 주중 산행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모처럼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곤 하는데 이곳 금오산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누구하나 정감있게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다.
따가운 정상에 노출되어 주변 풍경을 주시하다가 금오산 정상을 떠난다.
금오산을 내려서 약10분을 내려서면 나무계단을 만나게 되며 이 나무계단을 지나면 좌측으로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상선암 위 마애석가여래좌상을 거리는 멀지만 거의 정면에서 볼 수 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남산유적 답사 중 여섯 번째 만나는 유적으로 가까이에서 볼 수 없음이 아쉬웠다.
하지만 미완성이 완성보다 더 아름다울 데가 있듯이 가까이 가지 못했음이 마음으로 그려볼 때 실제보다 더 크고, 온화하고, 자상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상상으로 그려 볼 수 있을 것이고 석가여래좌상을 보기위해 남산을 다시 찾을 수도 있을 수 있다.
다시 등산로로 들어서면 경사진 내리막에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계단을 내려서 조금 더 가면 상사바위에 닫는데 이곳에서도 석가여래좌상을 볼 수는 있는데 조금 전 보다 우측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석가여래좌상은 보수를 위한 공사인데 불상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불상 주변의 바위가 풍화로 훼손이 되어 그대로 방치하면 떨어지며 석가여래좌상으로 떨어져 귀한 보물이 훼손 될 수 있으므로 사전에 방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사바위에서 석가여래좌상을 보고 지났지만 정작 상사바위를 보지 못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암이 솟은 바위 자체가 상사바위라고 알고 있지만 상사바위는 등산로 위쪽에 있으므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상사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는 상사바위가 있는 바위지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상선암에 들려 상선암에 일을 보시는 분에게 물어보니 “보이는 바위 윗쪽에 상사바위가 있으며 안내판에 전설까지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상사바위 지대를 지나면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마애석가여래좌상 주변 공사로 인해 출입을 완전히 금하고 있었다.
폐쇄된 입구 옆으로 조금 오르면 바위 틈새에 소나무가 있는 냉골 암봉에 올라설 수 있는데 이곳 아래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있으며 밑으로 상선암이 자리 잡고 있다.


냉골암봉 정상 바위 옆에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이곳이 금송정이 있던 곳으로 안내판의 내용은 이러하다.
금송정(琴松亭)
금송정은 이곳 금오산에 있던 정자였는데 경덕왕 때 옥보고가 가야금을 타며 즐기던 곳이다. 금송정이 있었다는 이곳 냉골 바위산은 그 모습이 괴상하고 거대한 바위더미로 밑에서 보면 정상은 구름에 걸린 듯 드높아 보인다.
옆에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는 상사바위라 한다.
옥보고는 이곳 금송정에서 바위들과 솔잎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흰구름을 벗 삼아 가야금을 뜯으며 세상 시름을 있었다고 한다.
냉골암봉 북쪽으로는 넓은 암반의 전망대가 있다.

<바둑판바위>

< 바둑판바위에서 보는 경주시내>
이곳은 바둑판 같이 편편하다하여 바둑판 바위라고 하는데 이곳에 서면 경주시내와 경주 서편 무열왕릉이 있는 지역과 넓은 경주의 들판이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오며 능선 아래쪽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포석정 지역과 왕릉 지역이 보인다.
◎ 상선암이 있는 삼릉계곡으로 하산을.....
바둑판 바위에서 이제는 하산을 해야 하는데 능선을 타고 내려가 삼불사로 가는 길이 있고 능선 좌측 삼릉계곡으로 내려서 상선암을 지나 삼릉계곡으로 내려가는 2가지 길이 있다.
무심코 내려선 길은 삼불사로 이어지는 길이어서400여m 알바를 하고 다시 되돌아 와 상선암 갈림길로 들어선다.
상선암에서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는데 상선암 쪽에서도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 상선암 >
상선암으로 내려서 식수 보충을 하고 갈증을 해소할 만큼 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며 조금 전 지나온 상사바위 지대를 올려다보니 암벽이 마치 설악의 일부를 보는 듯 우람해보였다.
상선암 기념품 판매점으로 가서 관계직원과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과 상사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곡으로 내려선다.
5분여를 내려서 이정표를 만났는데 우측 계곡건너 석불좌상(보물)이 표시되어 있어 그곳으로 다가선다.
안내문에 의하면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남산유적 답사 중 일곱 번째 만나는 유적이다.
삼릉계곡 작은 능선에 남서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첫인상이 뭔가 어색해 보였다.
기단부와 좌대와 뒤 병풍석에 비해 몸체가 깨끗해 보이고 목 부분에 상체와 머리 부분이 일체가 아니라 혼합체였는데 아래에 있는 안내문을 읽고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석불 아래쪽에 있는 안내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666호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불두와 불신은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이 불상의 얼굴은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2007~2008년 굴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 정비하여 빰과 코 그리고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사는 왼쪽 어깨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우견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는 발목으로 옷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화염문과 당초문을 섬세하게 새겨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연화좌는 상대에 앙련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에는 면마다 안상을 두었으나 하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도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 주름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좌상 뒤편에는 자연석굴이 있는데 석불을 섬기는 사람이 한동안 생활 했던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시 등산로로 들어서 5분을 내려서면 와폭이 있는데 물은 많지 않지만 시원한 물이 흐르고 있어 세안을 하며 기운을 차린다.
가뿐한 기분으로 1분정도 내려서니 이정표를 만났는데 180m지점에 선각여래좌상이라 표기하고 있어 오르막 경사길을 따라 올라가니 (당시에는)조금전 다녀간 석조여래좌상으로 착각하고 내려서야 했는데 이 마애불은 보물인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에서 30여m 떨어져 있으므로 입구를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같은 곳으로 들어서 2곳을 볼 수 있도록 국립공원측에서는 세심한 주의와 이정표의 수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착오로 인한 헛걸음을 하고 다시 5분여를 내려서 또 다른 마애불 안내 이정표가 있는데 마애불은 계곡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자연암반으로 생긴 그대로 다듬지 않은 상태의 자연바위에 새긴 불상이었다.



<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
안내판에 의하면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이었데 육존불의 주인은 석가삼존불과 아미타삼존불 이라는 것이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남산유적 답사 중 여덟 번째 만나는 유적이다.
이 불상은 남산에서 보기 드물게 여섯 분의 불상들이 2개의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쪽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대좌에 앉아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 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 삼존불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 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 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 삼존이라 한다.
이곳에서 조금을 내려서면 길가 우측에 깨진 석상이 있는데 좌대도 없이 맨 바위에 올려 져 있고 목에서 머리 부분이 없다.
좌측 안내문에 의하면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30m아래 땅속에서 머리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비록 손과 머리가 파손되기는 하였지만 사가나 옷 그리고 매듭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남산유적 답사 중 아홉 번째 만나는 유적이다.
석조여래좌상 안내문과 함께 또 다른 안내문이 있는데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으로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경사진 바위를 따라 수십m를 오르면 능선 가까운 바위에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은 관음보살상으로 일반적으로 음각을 하는 마애불과 달리 돋음 조각을 하였으며 훼손 상태도 심해 전문가들이나 세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왼손에는 안내문에는 정병을 쥐고 있다고 했지만 정병이 무엇에 쓰이는지는 알 수가 없으며 마애불 아래 안내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인 이불상은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 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에는 붉은 색이 아직 남아 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아래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손은 정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올려 손가락을 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삼릉계 마애관음보살상을 내려서 안내문 밑에는 돌탑에 둘러싸인 샘터가 있는데 샘은 말라 물이 없는 샘터가 되었다.
마애관음보살상을 끝으로 하산하며 더 이상 마애불이나 그 외 석불을 만날 수 없었다. 10여분을 내려서니 데크로드가 나오고 길은 삼릉과 삼불사 길로 나누어지는데 삼릉으로 내려선다.
◎ 산행하다 모델로 변신을 하고........
사진작가로 보이는 사람이 혼자 골돌히 사진을 찍고 있다가 멀리서 필자를 보고는 동작을 멈추기에 중요한 작품을 만드는데 방해를 한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미안함을 갖고 지나치려하니 이분이 가까이 와서 부탁을 한다.
모델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소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모습............
그러나 소나무 작가인 배병우씨는 아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어서 그분이 원하는 곳으로 2번을 시도했다.
오케이 사인을 낸 뒤 삼릉 앞으로 가서 삼릉 안내판을 주시하며 거대한 삼릉에 묻힌다.

삼릉!!!
남산유적 답사 중 엽 번째 만나는 유적이다.
삼릉 주변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왕릉 주변에는 왜? 소나무가 무성할까? 왕릉에 소나무를 심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의 글에서는 죽은 자의 안식을 위해서 소나무를 심는다고 하며, 문화재청의 답변은 조선시대에 가장 품격 있는 나무를 소나무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고 충남문화관광해설사의 글에서는 중국인들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 자의 뇌를 좋아한다는 망상이라는 귀신이 있다는데 이 귀신이 제일 싫어하는 게 소나무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4월 중순경 KBS1 무슨 스페셜인가에서 간단하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나무로 죽은 자의 신분을 표시했다고 하는데 황제의 능에는 소나무를, 황족의 무덤에는 측백나무를 , 고급 관리의 무덤에는 회화나무를, 학자의 무덤에는 모감주나무를, 그리고 일반 서민들은 사시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신라의 능이나 부근에는 소나무 숲이 무성한 것 같다.
삼릉도 위에서 서술한 모든 이유에서 소나무 숲을 무성하게 가꾸었는가보다.
경주 배동 삼릉
사적 제129호인 이곳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과 제 53대 신덕왕 그리고 제54대 겸명왕의 무덤으로 한곳에 모여 있어 삼릉이라고 부른다.
아달라왕은 재위 당시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가자 백제가 포로를 석방하며 화친을 요청하였으며 왜국에서는 사신을 보내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덕왕은 헌강와의 사위로 효공왕이 자손 없이 죽자 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중에는 견휀과 궁예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신덕왕의 무덤은 가운데로 두 차례에 걸쳐 내부 조사를 하였는데 굴식돌방 무덤으로 돌방 벽면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이러한 것은 신라의 무덤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정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재위기간에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과 손잡고 견휀의 대야성 공격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삼릉을 보고 삼불사로 가기위해 왔던 방향으로 향하니 작가되는 분이 다시 부탁을 한다.
다른 방향에서 숲을 지나는 행객이 되는 셈이다.
두 차례 모델이 되어주고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지며 “프로작가인가?“ 물으니 ”맞다“고 하는데 존함을 물어보니 웃으며 이름난 사람도 아니라며 밝히기를 거부하기에 그냥 올 수 밖에 없었는데 장사가 잘되면 모델료 달라고 할까봐 안 가르쳐 주나???..............
작은 공동묘지를 지나고 망월사를 지나 삼불사에 도착을 했다.
삼불사 안에는 삼불이 모셔져 있다고 하여 일부러 삼불을 보러 삼불사를 들린 것으로 삼불사는 주차장에서 불과 수십m로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삼불사로 들어서 등산로를 따라 들어서면 작은 건물 안에 석불 3기가 있는데 이러한 석불은 안내문에 의하면 각기 널려져 있는 것을 한곳에 모았다고 한다.
경주 배동 석조여래 삼존입상!!!
남산유적 답사 중 열한 번째 만나는 유적이다.
그런데 석조여래 삼존입상은 가치가 없어도 엄청 없어 보이는데 보물이라?
이건 우리나라의 보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크게 실망을 했다는 얘기............

경주 배동 석조여래 삼존입상
보물 제63호인 본 문화재 세 개의 돌부처는 삼불사에 인접해 있다.
이곳 선벙사터 부근에 흩어져 누워있던 것을 1923년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
중알 본존불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인데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과 다문 입 그리고 톹옽한 뺨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나타내고 있다.
왼편은 자비의 화신 관은보살상으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띠고 있다.
오른쪽은 연꽃 위에 선 대세지보살상으로 어깨부터 발등까지 구슬과 꽃송이로 엮은 목걸이를 드리우고 있다.
이 삼존불은 웃음 짓는 얼굴 표정과 뺨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는 작품인데 전체적인 조각양식으로 보아 삼국말기인 7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 글을 읽고 실망이 조금 가시기는 했으나 작품의 상태, 문화재 보관 상태 등을 보더라도 마음속으로 보물임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차라리 삼불사를 들리지 않았더라면 본 보물을 아끼는 마음은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허탈한 맘으로 삼불사를 나선다.
◎ 에필로그---작은 애국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이 유적들을 감상하며 통일 신라에 대한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어린 시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큰 업적으로 배우고 화랑의 정신과 김유신장군의 위대함을 배우며 자랐는데 성인되어서는 이러한 신라가 위대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화랑의 정신은 높이 사지만 화랑도를 마음으로 위대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강국들의 틈바구니에 낀 우리 조국이 너무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이다.
만약 이 당시 신라가 망하고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우리 조국은 현재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탕진하는 정치인들은 그들이 행하는 하나하나의 행동들이 매국행위는 아닌가 생각해야할 때다.
입으로는 일본을 욕하고 매국노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생각이나 행동이 변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자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