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량산 산행기
청량산을 품에 안다
언 제 : 2006. 10. 22
누구와 : 집시람과나 그리고 권태숙처형님, 피닉스 산악회 일행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동대문운동장에서 승차하여 양재와 성남을 거치면서 좌석을 풀로 채우니 산악회 대장은 좌석이 부족해 간이 좌석을 설치하고 통로를 확보 해야만 했다.
거침없이 달린 차는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영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중앙 고속도로를 지나 봉화를 거쳐 긴 시간이 지난 뒤 11시가 되어 청량산에 도착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태백산맥에서 들로 내려오다가 예인강 위에서 고개를 이루었다.
밖에서 바라보면 단지 수개의 꽃송이와 같은 흙산 봉우리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짜기 마을로 들어서면 사면이 돌벽으로 둘렸는데 모두 대단히 높고 험하며, 기이하고 험하여 그 모양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라고 표현했다.
청량산에는 오늘도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룬다.
생각에는 모든 산님이나 단풍을 즐기는 관광객이 지리산이나 설악산으로 갔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청량산입구부터 즐비한 버스마다 큰 입을 벌리고 수많은 산님들을 토해버리고 어느새 청량산 계곡은 많은 등산객과 관광버스 그리고 자가용들이 뒤 섞여 아수라장을 연상시켰고 우리 일행도 그 인파에 휩싸여 입석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하기에 이르렀다.
청량산의 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열두 봉우리를 주세붕 선생이 하나하나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 청량산 죄고봉인 장인봉(丈人峰)을 시작으로 선학봉(仙鶴峰), 자란봉(紫鸞峰), 연적봉(硯滴峰), 탁필봉(卓筆峰), 자소봉(紫霄峰), 경일봉(擎日峰), 탁립봉(卓立峰), 연화봉(蓮花峰), 금탑봉(金塔峰), 향로봉(香爐峰), 축융봉(祝融峰)이라고 하는데 이 중 내 청량사는 연화봉 아래에 있고 응진전이 있는 외 청량사에서 금탑봉 아래 있다고 한다.

<응진전으로 오르는 들머리의 입석>
입석에서 시작한 산행은 좁은 등산로로 많은 사람들이 오르다보니 어수선한 분위기와 정체로 인한 짜증이 주위경관의 풍광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즐거움을 반감시키고 조용해야할 산사의 주위가 왁자지껄 소란 속에 밀고 밀림으로 가파른 길을 치고 올라와 응진전에 도착한다.
청량사는 선화봉 밑에 있는 유리보전이 있는곳을 내 청량사 그리고 이곳 응진전이 있는곳을 외 청량사로 구분하는데 내청량사는 원효대사가 지었고 외 청량사는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응진전에 얽힌 이야기
동풍석의 설화
응진전은 금탑봉 중턱 천인절벽 위에 자리 잡은 외 청량사의 암자로 주변 경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암벽 위를 기어오르며 붉게 물드는 담쟁이덩굴과 주변의 단풍이 절벽과 조화를 이루며 절경을 이룹니다.
응진전에서 아래를 봐도 위를 봐도 천인절벽인데 암자 뒤 절벽 위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듯 한 작은 바위 하나가 있는데 마치 미풍에도 흔들릴 것 같이 아주 위태롭게 보입니다.
의상대사가 이 암자를 세울 당시 절벽 위에 앉아 있는 바위가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밑에 암자도 사람도 변을 당할 것 같아서 어느 날 그 바위를 아래로 내려 놓았다네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
이튼 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그 바위가 다시 제 자리에 앉아있지 않는가?
대사는 기이하게 생각하며 다시 내려놓았으나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올라가 있더라는 겁니다.
대사는 그 바위를 계속 올리고 바위는 아침이면 다시 제자리에 앉아 있기를 여러 차례반복 하던 중 하루는 대사가 해질녘에 그 바위를 내려놓고 밤새도록 지키고 있는데 자시(子時)가 되자 바위는 스스로 살금살금 절벽을 타고 올라가지 않는가?
대사는 그 다음날부터 바위 내리기를 포기하고 바위를 향해 합장을 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지금의 응진전을 짓게 되었다고 하네요.
바위를 움직이게 한 것은 응진전 암자 터는 원래 도깨비들이 살던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도깨비들이 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온갖 요술을 부렸다는 얘기가..........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 바위의 모습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보면 부처님 모습이거나 의관을 정제한 올곧은 선비 모습으로 보이고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소, 개, 닭, 코끼리, 용, 물고기 등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저 바위가,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전생에 사람이었고 저 바위가, 소나 돼지나 개 등 짐승으 보이는 사람은 전생에 짐승이었다고 믿으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린다 하며 ‘동풍석(動風石)'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답니다.

퇴계 이황도 숨겨놓고 싶다고 평하던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청량산에서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꼽기도 하는데 응진전에서 마주보이는 청량산성이 있다는 축융봉을 조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나중에 벌어지는 산세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금탑봉 중간에 걸쳐 지은 응진전 앞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경유대(景遊臺)라는 전망대가 있는데 주세붕이 자신의 자(字)를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마주보이는 청량산성이 있다는 축융봉을 조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나중에 벌어지는 산세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응진전에서 한 모퉁이를 돌자 좌측 계곡밑으로는 꿈속에서나 봄직한 청량사가 자리하고 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청량사의 모습과 뒤로 있는 기암은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보였으며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풍대에서본 내 청량상의 전경>
또한 우측으로는 12봉중 1봉을 떠받치고 있는 기암으로 까까지는 절벽의 풍혈대가있으나 다수의 산님들이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며 몇 걸음을 더 가니 신라말 최치원선생이 이석간수를 마시며 총명함이 배가 되었다는 총명수가 있으나 이례적인 가뭄으로 물이 씨도 없이 말라 있었으며 총명수를 지나 전망대에 도착해 발아래 펼쳐진 청량사는 마치 하나의 연꽃을 보는 듯 했으며 청량사 뒤로 이어진 가을 단풍과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은 감탄사를 연발 외칠 수밖에 없었다.

<김생굴의 모습---이곳은 가지 않았습니다>
청량산에는 산이 기묘해서 그런지 설화도 많은데 김생에 관한 설화는 이러하다.
김생(金生)과 청량봉녀(淸凉縫女)의 설화
『김생이 경일봉 아래 바위굴에서 글씨공부에 전념한 지 9년 만에 명필이 되었다는 자신감을 갖고 하산하려 하였다. 그 때 한 젋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글씨 솜씨를 겨루어 보자고 제의하였다. 그 처녀는 바로 청량봉녀(淸凉縫女)였다.
김생은 처녀의 제의를 수락하여 굴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윽고 불을 켠 뒤 비교해 보니 처녀가 짠 천은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하였는데 김생의 글씨는 그만큼 고르지 못하였다. 이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김생이 1년을 더 연마하여 10년을 채운 뒤 명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다 한다.』
이 설화는 한석봉의 어머니가 한석봉을 명필로 만든 일화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굴 앞으로는 김생암 터가 남아 있으며 굴 옆으로는 천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김생폭포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는데 보통 때는 물이 없으며 장마 후에 볼만하다고 합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한구비를 돌아치니 청량사와 김생굴로 가는 갈림길이 있으나 일행들이 경일봉으로 갔으므로 김생굴을 생략하고 앞서간 일행들을 따라 잡기위해 급하게 등로를 따라 오르나 깔닥고개의 위상 또한 만만치 않다.

<어풍대에서 본 청량사와 선학봉 주변의 기암>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아직까지는 집사람이 힘든 가운데에서도 잘 가주고 있다는 것이며 처형님은 정식 산행을 처음 한다는데 매일 아침 걷기운동을 해서인지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도 잘 가주고 있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고개 오름길에 서울서부터 우리 뒷좌석에 함께 차를 타고온 민숙씨와 동료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힘내라 격려를 하면서 마치 한 식구인 것처럼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다.

힘들게 경일봉에 올라 한숨을 돌리고 주변을 조망하고는 앞으로 가야할 곳들의 기암이 마음을 사로잡고 북적이던 대부분의 사람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청량사로 내려갔는지 조금전에 비하면 한적한 편이나 황홀경으로 몰고 갈 것으로 예상했던 단풍은 가뭄 때문인지 서리를 맞아서인지 길가에 시체로 뒹굴고 그나마 약간 붙어 있는 몇몇의 잎사귀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간단한 간식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세번째 봉인 탁립봉(향로봉)으로 진행한다.
한참을 가다 좌측으로 등로가 진행되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탁립봉은 산행길에서 떨어져 있어 조망으로 대신할 뿐이다. 작은 오름과 내림의 반복으로 등산의 쾌감을 느끼고 좌우 앞뒤의 시루떡처럼 층이진 바위와 그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들과의 조화로 인한 최고의 자연경관을 갖춘 청량의 진면목을 감상하다 보니 네번째 봉인 자소봉에 닿는다.

경일봉에서 본 자소봉

자소봉으로 가며 보는 단풍

자소봉으로 오르는 계단

자소봉 정상석

자소봉 전망대
청량산의 암봉은 어떤봉을 가릴것없이 모두 일품이겠으나 그중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은 3형제처럼 인접하여 있으면서 위용이 있고 그중에 자소봉이 으뜸일 것이다.
자소봉은 오르기 위해서는 길고 긴 철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힘든 상태에서 계단을 오르기도 짜증스럽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다보니 쌓이는 불쾌지수를 안고 철계단을 거쳐 자소봉 전망대에 올라 주위를 조망하건만 넓지 않은 전망대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입장이어서 뒤따라 올라선 민숙씨 에게 기념사진을 부탁하여 사진을 찍고 복잡한 자소봉을 내려선다.

탁필봉
다섯째 봉인 탁필봉으로 접근하니 탁필봉은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봉우리가 이니고 눈으로만 감상하는 곳이며 정상석은 길가 우측 바위아래 세워져 있다.
하나의 우뚝 솟은 탁필봉은 금강산의 귀면암처럼 우뚝 솟아 청량산의 모든 재앙을 막아주고 청량산에 깃든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파수꾼인양 듬직하게 서있을 뿐이다.
여섯째봉인 연적봉은 탁필봉을 돌아 머지않은 곳에 있으며 철계단을 이용하여 봉우리 정상을 오를 수 있는데 집사람과 처형은 힘에 부친 듯 연적봉 정상을 포기한다기에 혼자 올랐는데 자소봉에서 탁필봉과 연적봉을 보며 느꼈던 아름다운 모습이 이곳 연적봉에서 탁필봉뒤로 보이는 자소봉의 모습도 어떠한 풍경에 뒤지지 않은 정도로 일품이다.

연적봉에서 본 자소봉

연적봉 정상석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의 주위 이곳저곳에서는 단체산행을 하는 산님들의 점심시간이 되니 곳곳에서 성찬이 열리니 우리 일행도 알맞은 장소를 잡아 약소하게 준비한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민숙와 친구는 약간의 간식을 준비했을 뿐이어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으나 미안해서인지 마지못해 식사 흉내를 낼뿐이다.
집을 떠나 밖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기분 좋고 때론 가슴 설레는 일로 어릴 적 소풍날이 잡히면 며칠을 설레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치다 집에서 싸준 도시락을 가지고 산에서 식사를 하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대부분의 당일 산행을 할 때 점심식사를 산악회에서 제공하는데 피닉스는 어느 산을 갈 때는 제공을 하는가 하면 오늘 같은 경우 제공을 하지 않아 다수의 산님들이 착각을 하기도 한다.
점심을 끝내고 일곱째 봉인 자란봉으로 발걸음을 옮길 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웅성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집사람은 청량사로 피신하자고 제의를 했지만 이곳에서 그냥 하산하기가 너무 아까워 집사람과 처형을 설득하여 정상인 의상봉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하여 비를 맞으며 진행을 한다.

<뒤실고개 부근에서 본 자란봉과 선학봉 그리고 장인봉---전에 보이지 않던 하늘다리가 보인다>
뒤실고개에 이르니 청량사로 탈출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내려서기도 하지만 비를 맞으며 선학봉과 의상봉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얼굴에 와 닿는 방울방울이 점점 세차게 날리자 뒤실고개로 탈출할 걸 괜시리 욕심을 냈다는 후회속에 어디가 자란봉의 정상인지도 모른채 자란봉을 지나 여덟째 봉우리인 선학봉을 향한다.

<의상봉을 가기위한 여정--- 협곡을 거쳐야 한다>
한참을 가다 내리막으로 접어든 일행은 긴 한숨과 악~하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한없이 내려서는 계곡과 계단으로 이어지는 형상이 마치 청량산을 두쪽으로 쪼개놓은 것처럼 한없이 한없이 내려선다.
흙먼지가 날리던 계곡에는 쏟아지는 비로 진흙탕이 되기 전 수제비를 빗기 위해 반죽하다 버린 밀가루 덩어리 같은 흙은 등산화를 잡아끌어 바쁜 길을 방해한다.
좁은 계곡을 한 사람만 지날 수 있어 올라오는 사람과 내려서는 사람과의 교차로 밀리고 밀리면서 한동안을 기다렸다가 내려서며 집사람의 푸념섞인 말로 “나는 산능선에서 내려가는 게 제일 싫어 왜냐하면 내려간 만큼 다시 올라야 하니까.”라는 말을 오늘도 되풀이 한다.
한동안 출락한 등로는 내림의 역순으로 내림만큼 오름이 시작되니 설악의 공룡능선을 산행하는 느낌이 들고 주변의 산세와 험악한 등산로에 여기저기 나뒹구는 잔돌의 움직임이 머리위로 날아들지나 않을까하는 불안감으로 편치 못하다.
쩔쩔매는 집사람과 처형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어렵사리 능선에 올라서서 또 한 번을 놀란다.
협곡에서 능선을 올라서면 의상봉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뿐 현실은 정반대의 머피의 법칙이 적용될 줄이야 지나온 협곡의 내림 길은 아니지만 한동안을 내려서야 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뒤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였다.

<집사람과 힘들게 협곡을 내려갔다 올라온 곳이 하늘다리가 아닐까?---나중에 리모델링했습니다>

<내 친구 지한이가 제공한 사진으로 리모델링 했지요, 당시에는 디지탈이 없어서.....>
여덟 번째의 선학봉은 이곳 능선에서 좌우로 봉우리가 있으나 대부분 산님이 정상을 가지 않을 뿐 아니라 비가 와서 더욱더 정상을 포기하는 것 같다.
한숨을 돌린 뒤 갑자기 배낭에 있는 집에서 얼려온 캔맥주가 생각나 아직도 찬 기운이 남아있는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며 짧은 망중한을 달래며 맥주와 빗물과 땀으로 한시름 달래며 앞서간 일행을 따라 또 걷는다.
청량산 최고봉인 의상봉은 쉽사리 우리에게 정복의 기회를 주지 않고 마지막 300여 미터를 급경사 철계단의 오름의 시련을 겪게 하고야 정상을 내주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의상봉에는 선답한 사람들이 10여명이 있었으며 만장절벽의 단애를 이룬 암벽이 버텨주는 의상봉 정상은 어렵사리 올라서며 기대했던 기암과 암봉은 보이지 않고 기대밖의 평평한 육봉으로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정상이 암봉이거나 육봉이거나 우리에겐 아무 상관이 없고 다만 우리 일행은 목표했던 의상봉을 정복했고 의상봉은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 주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3시간 이상을 힘써 올라선 정상!!!!!


나를 반긴다 !!!!
나 또한 환희속에 만남을 갖는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니 태고적부터 2006년 11월 22일 내가 올 것을 알고 기다렸을 것이었으므로 50여㎝의 대리석 정상석을 덥석 껴안고 입마춤을 한다.

내 친구 지한이 정상석으로 리모델링---예전에는 의상봉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장인봉으로 바뀌고.
빗물이 촉촉이 묻어 있는 정상석은 수줍은 처녀의 입마춤인양 수줍어하는 느낌이었고 뒤이어 온 일행들도 정상석을 안는다.
비로인해 오래 머물 수 없어 증명사진을 찍고 내림길로 접어든다.
의상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와 잔돌의 너덜로 위험할 뿐 아니라 비로인해 길이 무척이나 미끄러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의상봉에서 조금을 내려서면 그리 넓지 않은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멀리 산촌의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낙동강의 상류도 들어오는데 비가 오는 중이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에서 보는 낙동강 상류>
점점 세차게 때리는 빗방울이 시야를 흐리게 하고 아직도 내려 가야할 길은 먼데 먼저 하산한 일행들이 후미대장을 통해 빨리 내려올 것을 종용하니 전망을 하며 풍류를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의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내리는 비와 암릉의 협곡으로 순탄치 않았으나 의상봉 오를 때보다 조금은 낳겠으나 집사람이나 처형은 내리막길에 무릎이 아파 속도를 내지 못하며 힘들어한다.
조심과 조심을 반복하며 내려오다 보니 협곡을 지나 산속에 민가 두 채가 있다.
놀랄만한 일이다. 이런 산속 민가에는 어떠한 사람이 살까?
우주가 잠든 듯 조용한 저녁이면 이런 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느끼며 살아 갈까?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과욕을 물리치고 있으면 있는 대로 가진 그대로 무욕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도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자식자랑을 하며 권의를 나타낼까? 갖가지 상념속에 청량폭포 쪽으로 내려선다.
폭포는 메말랐고 물은 한 방울도 없다.
포장길에 도착하니 일행은 날 듯 가벼워진 것 같으나 마눌님과 처형님은 오히려 등로에서 보다 보행이 불편하다며 속도를 내지 못한다.
힘든 내리막을 한동안 내려와 오후 4시 30분까지가 제한된 시간이었으나 30분이 빠른 4시에 도착했다.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며 우린 무엇을 얻었나?
그래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른 뒤 우리는 이름모를 산님들과 일행이 되어 힘들어하고, 웃고, 비를 맞던 그 때를 기억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귀하고 귀한 추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