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 산행기(2)
남해, 금산 산행기(2)
산행일시: 2011년09월 15일
누구와: 가고파산악회원 40여명과 함께
산행거리: 약 8㎞
산행시간: 4시간32분(12:10~16:42)
산행코스:금산주차장(12:10)-쌍홍문(13:00)-보리암(13:12)-정상(14:45,681m)-부소암(15:25)-상사암(15:40)-쌍홍문(16:06)-금산주차장(16:42)

<금산비경1경---망대>
금산비경38경 중 제1경인 망대는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만들어졌는데 첫째 목적은 아마도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경계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금산과 남해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와 날씨가 맑은 날이면 다도해 끝 지점에 있는 세존도와 멀리 제주도까지 보일정도라 한다.
그 황홀한 경치와 장엄한 남해의 일출을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찾곤 하는데 가끔 해무가 끼어 한껏 기대하고 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해무인지 가스인지 망망대해는 뚜렷하지는 않았다.
이곳의 망대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봉수대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우리나리에서 현존하는 봉수대중 가장 오래된 봉수대라고 한다.

그렇게 망대에서 사방을 조망하며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망대에서 내려와 문필봉을 어루만지고는 문필봉과 이별하고 내려서다가 좌측 기암으로 올라서니 작고 예쁜 정상석이 있다.
이곳으로 올라서길 잘했지 금산에 와서 정상을 왔다가고도 정상석을 보지 못하고 내려 설 뻔 했는데 40여명의 우리 일행 중 정상석을 본 사람은 불과 몇 명이나 될까?

<금산비경36경---세존도>
<이 사진은 사로님의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사방을 조망하기로는 망대나 조금 떨어진 정상석이 있는 곳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망대 설명에서 나왔던 세존도는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희미한 점으로 보이는 섬인데 그나마 보통 때는 보이지 않다가 가을철 날씨가 맑은 날 그것도 눈 밝은 사람이라야만 볼 수 있는 이 섬이 바로 세존도라고 한다.
전설에는 석가세존께서 금산 상봉에서 득도를 한 후, 돌로 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을 지나 세존도의 바위섬을 뚫고 지나갔다고 하는데 그 때 돌배가 지나간 흔적이 바로 금산의 쌍홍문과 세존도에 남아 있는 2개의 동굴이라고 전한다.
"세존도"라는 섬 이름도 이때 세존께서 이곳에 머무르다 가셨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섬꼭대기에는 스님 모양을 닮은 스님바위도 있고 동굴 천장에는 "미륵"이라는 글씨도 있다고 하는데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가보지 못한 곳이라서 스님바위가 있는지, 미륵이라는 마애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금산비경9경---삼불암>
이태조 기단이나 삼불암을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은 크다.
사실 일행들 보다 빨리 보리암에 올라섰으므로 갔다 와도 충분했을 시간이었는데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 알지를 못해 다녀오지 못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삼불암음 정상에서 아래쪽으로 찍은 사진에 삼불암이 잡혔다.
하지만 전체가 나온것이 아니라 아쉽기는하지만 의외의 수확이다.
삼불암은 이성계 기도처소 왼쪽 깎아지른 높은 바위 위에 마치 부처님의 좌상(座像)처럼 생긴 바위 세 개가 있는데 한 개는 누워 있고 두 개는 서있는데 세 개의 바위가 부처님의 좌상 같다고 해서 삼불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하기 전에는 이 바위들이 모두 누워있었는데 기도가 끝나자 두 개의 바위가 모두 일어났다고 한다.


<2년후에 친구들과 남해 여행 때 찍은 사진입니다.>
갔던 길을 되돌아 정상입구 3거리에서 우측으로 300여m를 내려오니 화엄봉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나중에서 안 사실이지만 화엄봉이나 제석봉은 나중에 상사바위를 갔다 오는 길에 들려도 되는데 사실을 몰라 화엄봉으로 들어섰다.


<금산비경31경---화엄봉>
화엄봉은 대장봉과 농주암의 왼쪽에 있는데 바위 모양이 '화엄이란 두 글자 모양을 닮기도 하였고 원효대사가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 하여 화엄봉으로 불리고 있다고 전한다.화엄봉 주변에는 나무들의 가지치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멋있게 사진을 찍을 수 없었으나 화엄봉 주위에서 대장봉이나 보리암을 보는 경치는 장관이었다.

화엄봉에서 본 대장봉

화엄봉에서 본 예성당과 탑대
대장봉으로 앞서 보리암에서 보며 설명한바 있는데 이번에는 화엄봉에서 본 대장봉의 모습인데 우측 아래 작은 바위가 형리암으로 보리암에서는 앞으로 굽은 모습으로 보였는데 이곳에서 보면 굽거나 떨어질 것 같은 위험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대장봉의 모습은 보리암 방향에서 볼 때 날렵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 풍겼는데 이곳에서 볼 때는 웅장하면서 아름다움을 함께 지니고 있는 느낌이다.
화엄봉에서 보리암과 탑대 그리고 만장대를 보는 경관도 뛰어난다
수십길 낭떠러지기 위에 얺혀 있는 보리암과 푸르른 자연이 조회를 잘 이루고 있다.

<금산비경22경---제석봉에서 본 저두암>

<옆에서 본 저두암>
저두암은 돼지머리를 닮은 바위라는 뜻으로 금산 산장 바로 뒤에 있는데, 바위 모양이 마치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를 업고 있는 모양의 생겼다하여 돼지 저(豬)자를 쓴것 같다.
그러나 동물형상이 바위는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이는데 아무래도 내가 찍은 사진은 방향이 안 맞아 그런지 돼지 형상이 나타나지 않아 구름바위님의 사진(아래)을 빌려왔다.

<금산비경33경---흔들바위>
화엄봉에서 탑대일대 조망을 하고 기분좋게 왔던길을 되돌아 나가다 보면 바로 아래쪽에 흔들바위가 있다.
흔들바위 하면 설악산 계조암 앞에 있는 흔들바위가 당연 제일일 것이지만 산행을 하다보면 흔들바위는 심심치 않게 있는데 이고 금산의 흔들바위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흔들바위 중 하나이다.
일월봉 왼쪽 제석봉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바위는 바위가 거북이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거북바위라 불렸으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35톤이나 되는 바위가 흔들린다 하여 흔들바위라고도 부른다.
거북 모양의 목 부분을 위로 추켜 세우 듯 밀면 가장 잘 흔들린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여러 곳으로 방향을 잡아 밀어 보았으나 바위를 흔드는 데는 실패를 하고 아래 제석봉으로 이동을 한다.


<금산비경19경---일월봉에서 역광으로 찍은 제석봉>
제석봉은 아래쪽에서 보면 수 십길 낭떠러지기로 보여 위험한 바위라 여겨졌는데 위쪽인 흔들바위 쪽에서 오르면 완만하고 위험하지 않은 평범한 바위와 같다.
금산에 있는 방위 어느 곳에 오르던지 사방을 조망하거나 포토라인으로 잡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그래도 몇몇 군데는 멋있는 조망처가 있는데 아마도 제석봉도 이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제석봉에서
상사바위와 보리암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사방 어느 곳이라도 멋진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제석봉위에서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만들기도 하는 곳이다.
일행이 모두 지나가고 혼자서 왔던 길을 다시 올라 능선에 닿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단군성전으로 가는 도중 민가 한 채를 발견한다.

<민가>
산중 그것도 국립공원 그리고 명산 금산의 정상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지점에 왠 민가일까? 사유지라서인지 단군성전을 수호하는 사람들의 집인지? 부부인지 남자는 농약을 주고 있고 여자는 김을 매고 있는데 참깨농사와 어린배추를 가꾸고 있다.
민가를 지나 100여m 아래는 단군성전이 있다.

<단군성전>

<단군성전에서 본 남해바다>
단군성전의 실내는 들어가 보지 않았고 앞마당에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 남해바다가 보이는 풍광은 노을이 질 무렵이면 아름다울 것 같은 분위기이며 단군성전 안내문에는 “이곳은 우리 시조인 단군 할아버지를 모신 성역으로서 한배검님의 가르침으로 일문 김연섬선생께서 1995년에 건립하였다.
성전에는 환웅천왕, 국조단군왕검의 영정을 봉안하고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단군성전을 보고 다시 왔던 길로 올라서 능선에서 우측으로 조금을 가면 넓은 헬리포터가 있는데 헬리포터의 우측에는 부소암으로 가는 길이 있다.

<금산비경34경---부소암>
부소암은 이곳에서 300여m 떨어져 있는 곳으로 계속 내리막으로 내려가는 길이므로 올라 올 때는 계속 오르막길로 와야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올때를 생각해서 아예 가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법왕대라고도 불리는 부소암은 중국의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기도 하고 단군의 셋째아들인 부소가 방황하다가 이곳에서 1.000일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내리막 길로 300여m를 내려서면 양아리 방향 넓은 바다가 보이고 가운데는 큰 바위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는데 이 바위가 부소암이며 부소암으로 가기 바로 전에는 바위와 바위사이 큰 벼랑이 있는데 철다리인 아치교를 만들었다.

<부소암으로 가는 협곡 철다리>
그 멋을 한층 더 내주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 유명한 상주리 석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전설에 나오는 부소가 누구이던지 부소암 남쪽으로는 작은 움막이 있고 사람이 사는듯하여 아래쪽으로 길이 있나 돌아가 보았으나 하염없이 거대한 바위를 돌아 포기하고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금산비경35경---상주리석각>
상주리 석각은
양아리 두모에서 금산으로 오르는 길로 가다 곰바위에서 왼쪽 편 바위에 있는 아주 오래된 상형문자가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생겼을 것으로 추측되는 상형문자는 지금까지도 무슨 글인지 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석각에 대해서는 2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나는 아쉽게도 이 석각을 다녀오지 못했지만 유명하곳이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중국의 진나라 시황의 아들 부소로 착각하여 동북아 정공을 주장하며 우리나라 모두 옛날에는 중국의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 사람들의 논리에 맞장구치지나 않을까 해서 전설을 올리니 읽으시고 역사에 맞지않는 시황의 아들 부소는 기억속에서 지워야 할 것 입니다.
상주리 석각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고서인 『한단고기』에 양아리 고대문자에 대한 기록이 두어 차례에 걸쳐 나오는데먼저 '신비본기 제3'에 나오는 말을 옮겨 본다.
"환웅천왕은 또 다시 신지 혁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신지 씨는 왕의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찍이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이 없었다.
신지 씨는 어느 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튀는 한 마리의 사슴을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돌아보는 사이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으나 방향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방법은 이것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이것 뿐이리라.'하며 그 날의 사냥을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되풀이하여 생각하고 사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 문자 만드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태고문자의 시작이다.
남해도 낭하리의 계곡 및 경박호 선춘령과 오소리 사이의 바위 사이에서 조각이 있음을 발견했다.
" 이렇게 문자가 환웅천황 때에 만들어진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 흔적이 남해도 낭하리의 계곡에 남아 있고, 마주 경박호 선춘령과 우수리 강 사이 바깥쪽 바위에 그 글자가 새겨져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은 '소도경전 본훈 제5'에도 나온다.
"우리 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 조각이 있다.
남해현 낭하리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은 '환웅이 사냥 갔다가 제사를 삼신께 드리다'라는 뜻이다." 남해 낭하리의 바위에 글자가 있다는 사실과 뜻까지 밝혀 적어 놓았다.
낭하리는 바로 지금의 양아리다.
이어서 신시가 만든 글자를 보여주고 있다.
신시에 산목이 있고 치우에게 투전목이 있었고 부여엔 서산이 있었다.
신시, 치우, 부여는 모두 환웅의 후손이 세운 작은 나라들이다.
양아리의 바위글자는 치우의 전목을 빼어 닮았다.
앞에서 신시가 사슴 사냥을 나갔다가 그 발자국을 보고 깨달은 바 사물을 본 떠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치우는 전목이 바로 그 글자인 듯싶기도 하다.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제가 삼신께 드리다'라고 하였으니, 이 바위글자는 바로 그 말을 적어놓은 것이다.
앞으로는 이 바위글자를 가지고 '서불과차'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환웅 임금 때 신시가 만든 고대문자라고 당장 고쳐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또다른 이야기
진시황의 두 아들이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부소와 흐리멍덩한 호해가 그 두 아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인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착한 사람을 싫어하는 법이다.
간신배 이사와 환관 조고는 장차 부소가 임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시황에게 참소를 넣었다.
"부소가 폐하를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부소를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라."
진시황은 호해를 가까이하고 부소를 멀리 변방으로 내쳤다.
올빼미의 무리 이사와 조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부소가 폐하를 원망합니다."
진시황은 부소에게 칼을 내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라는 말이다.
부소는 그것이 간신배가 꾸민 간괴인 줄 알고 불로초를 찾아 삼신산으로 떠나는 서불의 배를 타고 도망을 쳤다.
서불이 동으로 동으로 배를 몰다가 남해 금산에 도착하였다.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가' 서불은 양아리 골짜기의 바위에 왔다는 흔적만 남기고 다시 떠났다.
그러나 부소는 떠나지 않았다.
신령스런 바위 아래에 움막을 짓고 살다가 주어진 수명을 누리고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부소암이라 불렀다.
역사에서 부소는 진시황이 보낸 사약을 받고 변방에서 죽고, 둘째 아들 호해가 임금 자리를 계승하였다. 호해가 임금이 된 지 3년 만에 진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부소암을 돌아보고 다시 헬리포터로 오르는 길은 쉽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들리지 않는 곳을 혼자라도 갔다 왔다는 자부심으로 위안을 삼으며 능선으로 올라서 상사바위로 향한다.

<금산비경27경---상사바위>
또 다시 되풀이 되는 말로 금산 어느 봉이나 어느 바위위에 서던지 사방이 모두 아름답고 경관이 뛰어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중 하나는 상사바위에서 보는 경관을 빼놓을 수 없다.
금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평면 바위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금산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동쪽으로는 금산의 기암괴석들이 산맥처럼 정상을 향해 뻗어 오르고 남으로는 해안과 섬들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또한 서쪽으로는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였던 노도와 남면 해안을 배경으로 마치 금강산의 만불상을 축소해 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금산 정상과 보리암 일대로 흩어져 있는 만물상을 보면 아주 대단한데, 맨 앞 향로봉을 시작으로 좌선대 제석봉, 일월봉, 화엄봉, 보리암일대, 향리암, 대장봉, 자두암과 사자암, 멀리 정상부근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금산비경28경---구정암>
또한 상사바위 위 넓은 방위 위에는 군데군데 작은 홈이 패여 있는 곳이 있는데 이 또한 비경에 포함되어있는 구정암이다.
구정암 중 하나인 홈
금산비경28경인 구정암은 상사바위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아홉 개의 홈을 말하는데 작은 홈까지 치면 아홉 개가 더 되어 보이는데 큰것만 추려 아홉 개로 인정한 것 같은데 숙종 때 남해로 귀양왔던 약천 남구만 선생은 이 구정암을 보고 “몇 해 동안 이 아홉 개 샘을 팠으랴"하고 감탄했다고 전해지며 구정암의 물은 바로 상사풀이 할 때 썼던 물이라고 하며 이 물로 세수를 하면 그 날 재수가 좋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는 하나 아무리 재수가 좋다 해도 탁한 물로 세수를 할 수 없었다.
이 상사바위에는 바위 이름에서 나타나듯 주인 딸을 사랑하다 죽은 슬픈 사랑이야기, 과수댁이 총각의 상사를 풀어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전설로 내려 곳이다.
주인을 사랑한 머슴의 사랑이야기
조선시대 숙종 임금 때 전라남도 돌산에 사는 청년이 남해로 머슴을 살러왔는데 주인은 자태가 빼어난 과수댁으로 머슴은 주인마님의 빼어난 자태에 반하여 애간장을 태우다가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약도 없는 병이 상사병인지라 청년은 시들시들 죽어가는 모습을 보다 못한 과수댁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금산으로 머슴을 불러내어 금산의 벼랑에서 머슴의 소원대로 상사를 풀게 해 주었고 그로 인해 머슴은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불렀으며 지금도 상사풀이 할 때 썼던 샘이 벼랑에 남아 있는데 이것이 구정암이다.
죽어서까지 주인의 딸을 사랑했던 머슴의 사랑이야기
곱게 자란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가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하인들 중에 돌쇠라는 하인은 해서는 안 될 사랑, '이룰 수 없는 짝 사랑'을 하기 시작했으니 자유스러운 지금이야 그리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엄격한 신분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던 옛날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없는 일로 돌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혼자 짝사랑을 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다가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상사병에 걸려 죽은 돌쇠의 혼백은 죽어서도 여인을 잊지 못하고 뱀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몸을 칭칭 감고 풀어주지 않으며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한을 풀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 부모는 딸을 살리고자 굿을 하는 등 별 수단을 다 써 보았으나 돌쇠의 혼백은 여인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염을 길게 한 노인이 홀연히 부잣집에 나타나 "금산에 있는 높은 벼랑에서 굿을 해보시오" 말하고는 역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여인의 부모는 뱀을 감고 있는 딸을 데리고 금산에서 제일 높은 벼랑 위에서 굿을 시작했고 굿을 마치자 여인을 감고 있던 뱀은 서서히 몸을 풀고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금산비경26경---팔선대>
한동안을 상사바위에서 배회하며 주변의 풍광을 음미하다 내려서기 전 서쪽의 바위군을 보면 금산비경 중 어디 내 놓아도 뒤떨어지지 않는 바위가 있으니 금산비경26경인 팔선대이다.
팔선대는 여덟 개의 바위 모습이 신선이 춤을 추는 모습과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설명이 없어서 어떤 바위가 여덟 신선을 닮았는지 알 수가 없고 이렇듯 멋진 바위를 멀리서 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 어쩌면 잘 된 일이겠지만 안내하는 길이 없어 갈 수가 없다.

<금산비경24경---향로봉>

<향로봉과 사랑바위>
향로봉은 사자암 밑에쪽에 있으며 상사바위에서 금산 만물상을 볼 때 맨 앞에 보이는 바위로 하단에 큰 바위위에 또 다른 큰 바위가 놓여 있는데 향로봉 주위에는 보지 못하고 온 비경 중 왼편에 금산비경21경인 삼사기단과 아래쪽에 금산비경27경인 촉대봉이 있는데 삼사기단은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가 기단을 쌓고 기도를 올렸다고 해서 삼사기단이라하며 삼사(三師)가 앉았던 자리가 바위 위에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하며 촉대봉은 촛대 모양의 작은 바위로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세 대사가 기도를 올릴 때 촛대로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향로봉은 바위 모양이 마치 향로와 같다고 해서 향로봉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곳에는 기단을 쌓고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금산비경20경---좌선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산중이 고요하기만 한 것이 일행 대부분이 하산을 하고 있는듯하여 서둘러 상사바위를 내려서 향로봉 위를 지나 바위와 바위 협곡으로 접어드니 이곳이 좌선대이다.
향로봉위에 위치하고 있는 좌선대는 신라시대의 명사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 3명의 명사가 수도좌선 하였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위에는 삼사가 앉았던 자리가 뚜렷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좌선대를 올라가 확인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믿을 수밖에 없다.
사전에 알지 못한 일이지만 좌선대 밑에 있는 바위를 보면 중간에 나와 있는 모양이 마치 곰과 거의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금산비경32경---사자암>
좌선대를 내려서면 길가 좌측으로 큰 바위가 있으며 바위 밑에는 석간수가 있는데 물이 깨끗하게 보존을 하지 못해 먹을 수가 없었다.
아래쪽에는 무속인들로 부터 수난을 당해서인지 꺼먹게 끄름이 묻은것 같아 식상했는데 이 바위가 바로 사자를 닮았다 해서 사자암이라는 이름을 얻고 있는 바위이다.


<금산비경25경---일월봉>
절벽위에 있는 암자를 지나면 이미 왔다 간 흔들바위와 제석봉이 있는 곳으로 제석봉 밑을 지나 일월봉 앞에 다다른다.
일월봉은 제석봉과 화엄봉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 두 개의 바위가 층암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제석봉 가는 길에서 가깝게 보면 맨 위의 바위가 보이지 않아 일(日)자형이고 전체를 멀리서 보면 월(月)자형으로 보여 일월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거대한 일월봉 밑을 지나치다 말고 다시 일월봉 중간으로 올라가 제석봉과 제석봉 뒤로 모습을 숨긴 바위를 보며 기쁨을 만끽해 본다.
일월봉을 내려서 위길로 내려서니 보리암과 음성굴 중간에 다시 닿고 아까는 햇빛의 반사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음성굴과 용굴을 주시해 보지만 나뭇가지로 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

<금산비경37경---노인성>
힘없이 쌍홍문으로 들어서 하늘로 난 구멍을 통해서 하늘을 본다.
노인성은 춘분, 추분절의 전후 3일, 7일 동안 남해에서 가장 잘 보이는 별로 이 별은 사람의 목숨을 맡고 있는 별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이 별을 자주 보면 장수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일년 중 춘분, 추분절만 되면 노인성을 보기 위해 금산을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살며시 눈을 감고 구멍으로 하늘을 보니 금성처럼 맑고 밝게 비치는 노인성이 보인다.
37경에 들어 있다는 노인성은 간절한 소원을 담아 마음속에 떠 있는 별로 마음으로 보는 상상의 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노인성을 생각하며 쌍홍문을 나와 장군바위의 위용을 다시 느끼고 좌측으로는 서쪽으로 기우는 해의 빛을 받은 만장대의 우람한 모습에 다시 한번 감탄을 하며 서서히 쌍홍문의 계단을 내려선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답사해야하건만 짧은 시간에 아름답고 멋진 금산을 보고 간다는 아쉬움에 마지막 돌계단을 내려서며 뒤돌아 본 쌍홍문의 모습은 더 없이 경이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38경중 가보지못한 비경은
제7경.이태조기단---극락전 좌측에 삼불암 아래쪽이 있는데 안내문이 없는지 보지못했는지 아쉽게 가보지못했는데 이성계가 100일기도를 올렸다는 처소다.

조선태조기단으로 당시에는 못 보고 2년 뒤에 찍은 사진
제8경.가사굴---탑대 동쪽에 있는 바위굴.
옛날 낙서대사 때 천동천녀(天童天女)가 가사를 입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물을 길어 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어 가사굴이라고 한다.
길이 약간 험하기 때문에 대개 못보고 가는 사람이 많다.
이 가사굴에는 많은 샘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수양이나 기도를 하는 분들이 토굴을 짓고 몇 달씩 지내는 일도 있다.
가사굴은 백명굴, 삼사기단과 함께 금산 38경 중 가장 조용한 선경(仙境)으로 이름이 높다.
제11경.천마암---망대 아래 동쪽에 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 이성계가 기도하고 있을 무렵에는 회두암(回頭岩) 이라 불렀다고 한다.
제17경.백명굴---사선대 북쪽에는 입구는 그다지 넓지 않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져 100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굴이 있다.
정유재란 때 100명 내외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피난한 곳이라 백명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안에 방을 놓았던 아궁이 흔적이 남아있고 굴의 드나드는 문은 적으나 들어가면 놀랄만큼 넓은 굴이다.
이 굴은 찾기가 어려워 사람의 발길이 끊인지 오래되었다.
제21경.삼사기단---산행기에서 설명
제27경.촉대봉---산행기에서 설명
제29경.감로수---상사암에서 조금 남쪽에 있는데 바위 밑에서 실오라기처럼 새어 나와 고이는 물을 말한다.
조선 숙종 대왕이 병중에 이 물을 마시고 나았다고 하여 구군천(求君泉)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이후 사람들은 임금을 구한 이 물을 만병통치의 감로수라 한 것이다.
제35경.상주리 석각---산행기에서 설명
제36경.세존도---산행기에서 설명